<딸아이 관점>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호기심 어린 질문공세가 쏟아진다. 오늘 무슨 일 없었니, 숙제는 다했니, 여기까지는 그나마 부드러운 톤이다. 그러나 엄마에게 조잘대는 나이는 지난 사춘기 아닌가. 별일 없었어 하고 퉁명스럽게 내가 그녀의 기준에 못 미치는 대답을 했을라치면 예의 그 막무가내식 설교가 또 시작된다. 방은 또 이 모양이니로 시작하여, 누구는 그만큼 안하니 라는 비교급과 너 같은 애 처음 봤다 라는 비난조의 말투가 같은 비율로 세 번 정도 반복되고서야 에구 말해 뭐하냐는 탄식을 거쳐 잦아든다. 이제 거기에도 익숙해져 방문을 쾅 닫는 것으로 엄마와의 대화를 마무리한다.
엄마는 왜 나에게만 닦달하는지 모르겠다. 나라고 엄마에게 할 말이 없겠는가. 다른 점이라면 자식이라는 이유로 일일이 잔소리를 늘어놓지 못할 뿐이다. 아침 잠이 많은 그녀에게서 제대로 밥과 반찬이 따로 나오는 아침상을 받아본지 오래다. 계란에 비벼 김으로 둘둘 말아놓은 엄마표 아침밥은 이제 쳐다보기도 싫다. 늘 이불을 둘둘 말고 책을 보거나 잠을 자는 그녀의 일상 또한 그리 부지런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아빠는 하구 많은 지구상의 여자 중 왜 엄마랑 결혼했을까. 외적으론 아빠는 키가 작고 뚱뚱하며 못생긴 편이지만 엄마는 예쁘장한 (이것도 사실 집안에서의 본모습을 본다면 그리 장담할 수 없지만) 편이다. 하지만 속이 아름다운 건 아빠라고 생각한다. 아빠는 한 번도 화내는 일이 없고 늘 나를 위로해주지만 엄마는 언제나 도끼눈을 뜨고 나를 비난한다.
내 친구 엄마는 선생님이고 다연이에게 늘 친구같이 웃으며 얘기한다. 그러나 우리 엄마와는 맘을 터놓고 얘기해본지도 오래다. 엄마가 요즘에 와서 얘기해보려고 시도하지만 이미 늦었다. 사춘기가 되기 전에 미리 나에게 공을 들였어야지 엄마는 ‘자녀의 마음 읽어주기’ 라는 교양강좌를 내가 아는 것만 해도 너댓 번 들어놓고는 내 마음을 한 번도 읽어준 적이 없다. 얄미운 남동생이 나를 무시하며 공격해도 엄마는 늘 수수방관이다. 동생이나 나나 똑같다는 욕만 두 배로 얻어먹을 뿐이다.
중학생이 되어 아침 일찍 가느라 피곤에 절은 내 얼굴을 보더니 그녀는 한밤중에 닭 껍질을 벗기고 마늘을 까고 있다. 낼 아침은 계란밥이 아니라 따뜻한 삼계탕을 끓여주려나 보다. 엄마가 나보다 일찍 일어날지 걱정스럽지만 말이다.
<내 관점>
글을 쓰려는 생각을 하다가 낼 아침 준비를 위해 마늘을 깠습니다.
책을 읽으려고 거실에 앉았다가 못 본 드라마가 생각나 티비 리모콘에 손이 갔어요.
컴퓨터에 앉아 한글 프로그램을 열려던 순간 쇼핑목록 인터넷 검색에 빠져듭니다.
이러기를 일주일... 나태한 스스로에 대한 불만은 죄 없는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분출되어 매력 없는 아내, 교양 없는 엄마가 되어가네요.
100사이즈 빛바랜 속옷, 와이어가 돌아가 가슴과 겉도는 브라, 짝짝이로 신고 있는 양말은 또 어떻구요. 거울을 보다가 그 기괴함에 제가 놀랄 지경입니다.
내적으로 고상하게 소화시키고 싶은 책들은 켜켜히 쌓여 가는데 소화불량 걸린 마음은 그 책들을 며칠째 바라만 보고 맙니다. 며칠 전 속 좁은 다툼 끝에 저에게 그렇게 좋은 책을 읽어도 인품이 나아지지 않으면 뭐하냐는 남편의 핀잔은 뼈아픈 상처를 주네요. 맞아요. 그게 문제예요. 그냥 책은 하나의 도피처였나봐요. 생산적이지 못한 내 생활에 책이라도 읽으면 위로가 되는....남들은 안 읽어봤을 좋은 책을 발견하면 기쁘지만 그걸 누구와 나누나요. 그 책들이 마음의 양식으로 소화되어 저두 그만한 기막힌 표현의 문장들을 내보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생산적이겠냐만 그런 날은 멀기만 합니다. 남편의 말은 괘씸하지만 하나도 틀린 게 없네요.
사춘기인 딸에게도 툭하면 ‘엄마보단 내가 나아’ 라는 말을 듣는 걸 시작으로 꼬박꼬박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말대답 하는 아이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항변도 못하고 끓는 분을 삭이고 맙니다. 마지막에는 예전에 제가 친정엄마에게 자주 들었던 ‘너 같은 딸 낳아 길러봐라’라는 악담까지 내뱉으며 교양 없는 엄마 노릇만 하고 말았네요.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한다> 라는 공지영씨의 책을 읽고 이렇게 멋진 엄마가 있는 공지영씨의 딸은 정말 복 받았다고 생가했습니다. 그 딸 또한 공지영씨와 순탄치 않는 관계의 악화를 겪었다지만 종내 책으로 모녀가 화해하는 그리고 엄마의 작가로서의 위치를 존경하는 딸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는 우리 딸과 무엇으로 화해하고 무엇으로 인정받을까요. 똑부러지게 교육을 잘 시키는 교육맘도 아니고, 아기자기하게 살림을 가꾸는 인테리어맘도 아니고, 손맛이 끝내주는 요리맘도 아닌 고집불통에 소통불능의 나약한 엄마가 되는 건 아닌지 문득 두려워지네요. 조금 슬퍼지기도 하는 밤입니다. 이젠 까던 마늘을 마저 까야겠어요. 내일은 꼭 한 시간 먼저 일어나 삼계탕을 끓어주렵니다.
첫댓글 사춘기,그게 뭐라고 이 세상 엄마들을 다 힘들게 한다죠. 그래도 ‘다 지나가리니’ . 다 잘할 순 없으니 하고 싶고 행복하고 즐거운 일에 집중하세요.
아리영님도 글쓰기에 분투하는 한 해 되시길...
저도 아이들에게 윽박지르고 다정한 엄마가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부터는 어제보다는 좀 더 다정한 엄마가 되어감을 느껴요~
아이들도 엄마가 예전보다 많이 웃고 잔소리를 덜 한다고 하네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책 덕분이 아닌가 싶어요.
좋은 책을 읽어도 인품이 나아지지 않으면 뭐하냐고 남편분이 말씀하셨다지요?
아니예요. 좋은 책을 읽다보면 하나하나 내공이 쌓이고 그러다 보면 인품도 나아지리라 확신해요.
책조차 읽지 않는 사람보다 책을 좋아하고 책을 많이 읽는 아리영님은 이미 인품이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제 보다는 다른 다정한 엄마가 되어가고 있으니 힘을 내시고 화이팅~^^
저두 남편이 책읽기 금지령을 한적이 있어요. 웃기죠. 무슨 군대도 아니고. 남편왈 내가 현실에 하기 싫고 듣기 싫은걸 책을 통해 자꾸 피하려구 한데요. 일종의 도피처죠. 제마음을 어쩜 아리영님은 이렇게 잘 표현하셨는지.. 꼭 내속에 들어왔다 간것 같아요.
하하~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이 사랑스럽네요^^ 이제 한 6년 버티시면 큰애와 친구 될 날이 옵니다! 그리고 그때는 거울에 비친 자기모습 보고 한숨짓기 시작하지요 ㅋㅋ
지금 책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셔서 내공을 쌓아놓으세요. 어느새 멋진 엄마가 되어있을거예요^^
책만 읽고 있는 아내는 남편들이 좋아하지 않나봐요.*ㅗ* ~맛있는 삼계탕으로 액땜 하셔요. 우리도 응원 할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