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엿보기
저녁이 슬그머니(북인)
나석중
전북 김제 출생. 2005년 시집 『숨소리』로 작품 활동. 시집 『목마른 돌』, 『외로움에게 미안하다』, 『풀꽃독경』, 『물의 혀』, 『촉감』, 『나는 그대를 쓰네』 등.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풀과 나무의 구분으로부터 풀이나 나무의 종류로 세분해 들어갈수록 말이 많아지는 게 사실이다. 복잡한 방법론이나 해설 등을 동원하는 것보다 단순명료한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말년에 제주도로 귀향 간 추사는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화면에 자신의 심정을 담았다. 복잡하지도 않고 구구절절 설명하지도 않으면서 하고자 하는 말과 심정을 다 드러내고 있다. 말이 많아지면 자연에서 멀어지고, 단순해질수록 자연으로 돌아간다.
나석중 시인이 추구하는 시정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언젠가 딱 한번 써먹었을”(이하 「막도장만큼이라도」) 막도장처럼 화려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형상을 하고 있다. “무엇인가를 간직”하거나 채우기보다 버리거나 비우는 일이 더 많아졌다. “허망한 문장”(이하 「캠프」)은 태워버리고 사변을 멀리하면서 다시 “백지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시인은 “동심을 잃지 않“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시인정신“임을 숨기지 않는다.
주춤거리던 사과
살짝 칼등으로 사과를 노크한다
단박에 사과 칼날 들이밀면 놀라서
아픈 사과가 되겠지
근육주사를 놓듯 기억을 환기하는 게 좋겠지
묵은 사과가 육향이 짙은 것은
수치와 민망과 미안과 무안이 섞여
한 몸으로 푹, 숙성된 때문일까
사과는 좀 더듬더듬 서툴다
사과는 시야가 뚫린 고속도로처럼 탄탄대로로
사과를 받아주지 않겠다는 듯
사과껍질이 과속방지턱을 넘으며
툭 끓기곤 한다
-「묵은 사과」 전문
산수傘壽를 지나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시인은 욕심을 내려놓고 주변의 삶에 좀 더 너그러워지려 한다. 스스로를 내세워 말하기보다 말을 들어줌으로써 상대를 배려한다. 남을 배척하지 않고 품으려는 심경이 나석중 시의 가장 빛나는 지점이다. 시인은 마음을 내려놓음으로써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며, 새로 그려낸 풍경은 담담하면서도 매혹적이다. 시인은 사물의 관찰에서 시詩가 될 만 한 것들을 기가 막히게 포착하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 그런 안목으로 창조한 세계는 대부분 숙성의 시간을 거친다. 숙성의 방법과 기간에 따라 ‘시의 맛’이 결정되는데, 시인이 선택한 방법은 ‘기척’이다. 사물이 숙성되는 시간을 기다려 조심스럽게 기척을 한다. 이를 잘 표현 한 시가 「묵은 사과」이다.
시인은 혹시 누군가 사과 속에 있지 않을까, 사과가 놀랄까봐 “칼등으로 사과”를 살짝 두드린다. 마치 풀밭을 지날 때 뱀이 놀랄까봐 막대기로 툭툭 치는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 인삼은 인기척으로 자란다는 말이 있듯이, 시인은 기척으로 시의 숙성으로 감별한다. “주춤거리던 사과”는 사과라는 사물의 주춤거림이 아니라 사과를 대하는 시인의 시선이나 태도의 주춤거림이다. 사과를 깎으려는 찰나 시인은 기척도 없이 단박에 “칼날을 들이밀면” 놀란 사과가 아플 것을 염려한다. “주사기를 놓”을 때 그 자리를 툭툭 치듯 칼등으로 “기억을 환기”한다. 시인은 사과라는 사물을 통해 “묵은”과 “아픈” 감정을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개인적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건을 통해 표현하는 객관적 상관물客觀的 相關物이라는 창작기법을 활용한다.
-김정수, 시집해설 「희언자연, 소요하고 소유하고 사유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