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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精進林菩薩의 讚歎
(1) 諸法能知
爾時에 精進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諸法無差別을 無有能知者요
唯佛與佛知시니 智慧究竟故로다
그때 정진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모든 법 차별이 없고
능히 알 사람도 없으나
부처님들만이 아시나니
지혜가 끝까지 이른 까닭이라
*
정진림보살(精進林菩薩)의 찬탄(讚歎): 정진림(精進林)보살의 찬탄
*
제법능지(諸法能知): 법과 법을 아는 사람
*
이시(爾時)에
정진림보살(精進林菩薩)이 :정진림, 이름도 참 좋다.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
제법무차별(諸法無差別)을 : 모든 법에는 차별이 없는 것을, ‘제법’이라고 하니까 또 특별히 무슨 다른 법이 있는 걸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해온 일체 존재의 근원자리, 무위진인, 차별없는 참사람, 근원자리를 말한다. 이것을
무유능지자(無有能知者)요: 능히 아는 사람이 없다.
유불여불지(唯佛與佛知)시니: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아나니
지혜구경고(智慧究竟故)로다 : 지혜로만이 아는 경지다. 구경은 마지막이다, 최상이다 라는 말이다.
(2) 譬喩釋法
如金與金色이 其性無差別인달하야
法非法亦然하야 體性無有異로다
衆生非衆生이 二俱無眞實하니
如是諸法性이 實義俱非有로라
譬如未來世에 無有過去相인달하야
諸法亦如是하야 無有一切相이로다
譬如生滅相이 種種皆非實인달하야
諸法亦復然하야 自性無所有로다
涅槃不可取나 說時有二種하니
諸法亦復然하야 分別有殊異로다
마치 금과 금빛이
그 성품 차별 없나니
법과 법 아닌 것도 그러해
성품이 다르지 않네
중생과 중생 아닌 것
둘이 다 진실치 않아
이와 같이 모든 법의 성품
진실한 뜻이 모두 있지 않네
마치 오는 세상에는
지나간 세상의 모양이 없듯이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온갖 모양이 있지 않네
마치 나고 멸하는 모양
가지가지가 진실치 못해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제 성품 없는 것이니
열반을 취할 수 없지만
말하는 데 두 가지 있는 것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분별하느라 다른 것이니라
*
비유석법(譬喩釋法):비유로써 법을 해석하다
*
여금여금색(如金與金色)이: 금과 금색의
기성무차별(其性無差別)인달하야 : 그 성품이 차별이 없듯이.
금과 금색을 어떻게 나눌 수 있겠는가?
법비역무연(法非法亦然)하야 : 법과 법 아닌 것도 또한
체성무유이(體性無有異)로다: 체성이 같다. 법이니 비법이니 나눌 것도 없지만 몽매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온갖 방편의 말, 있지도 아니한 가설이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법이니 비법이니 하는 말들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다.
*
중생비중생(衆生非衆生)이 : 중생과 중생 아닌 것이, 그 중생이다 라고 하든지 중생이 아니다 라고 하든지
이구무진실(二俱無眞實)하니: 둘 다 함께 진실이 없다.
여시제법성(如是諸法性)이: 이와 같은 모든 법성이
실의구비유(實義俱非有)로라 : 실다운 뜻, 진실한 뜻이 함께 있지 않도다.
금강경에서 우리가 일찍이 알고 있듯이 중생 중생하지만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이 이름이 중생이다. 편의상 이름을 중생이라고 붙였을 뿐이다. 그 근본은 하나다. 그래서 화엄경에 와서는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 마음이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것이 차별이 없는 하나다 ’라고 표현을 한다.
금강경은 부정하는 것으로써 종(宗)을 삼기 때문에 중생이 중생이 아니고 이 이름이 중생이다라고 표현을 했다.
*
비여미래세(譬如未來世)에 : 비유하자면 미래 세상에
무유과거상(無有過去相)인달하야 : 과거상이 없다. 내일도 아직 없는데 그 내일의 어제가 있을 리가 없다. 이런 설명도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면 지어내지도 못할 표현이다.
제법역여시(諸法亦如是)하야 :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무유일체상(無有一切相)이로다: 일체상이 없다. 없는 입장, 절대계, 본질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다.
*
비여생멸상(譬如生滅相)이 : 또 비유하자면 생멸하는 모습이
종종개비실(種種皆非實)인달하야: 가지가지가 다 진실이 아니듯이. 우리 사람도 계속하여 생멸한다. 호흡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우리 몸을 형성하고 있는 60조 세포도 끊임없이 생멸한다.
우주 공간에 떠있는 모든 별들도 끊임없이 생멸한다. 형상은 생멸변화하기 때문에 진실이 없다. 오직 생멸변화한다고 하는 그 사실만이 진실이다.
우리가 밤하늘에서 보고 있는 별들을 과학자들은 유령의 별이라고 한다. 별에 유령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보는 별들은 몇 억년 전에 벌써 소멸해 버린 별의 잔상이기 때문에 유령이라고 하는 것이다.
태양 역시 8분 전에 이미 떠올라 온 것을 보고 우리는 ‘지금 막 저 태양 떴다’고 한다.
달맞이를 하지만, 달도 역시 그렇다. 물론 달은 8분까지는 안 걸릴 것이다.
최소한 그렇게 변화하는 생멸상에는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고 실상이 없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 육신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거기에 붙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소멸하는 우리 생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제법역부연(諸法亦復然)하야 : 모든 법이 또한 이와 같아서 그 무엇도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로다 :고정불변하는 자성은 있는 바가 없다.
*
열반불가취(涅槃不可取)나 : 열반은 가히 취할 수 없으나
설시유이종(說時有二種)하니 : 열반을 이야기 할 때는 유여열반과 무여열반 두 가지를 이야기 한다. 남음이 있는 열반은 유여열반이고 남음이 없는 열반은 무여열반이다.
열반은 소승 불교의 개념이고 대승불교에서는 그렇게 높이 사지 않는다. 아라한들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 초기 불교, 소승 불교는 열반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번뇌가 사라진 것을 유여열반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번뇌는 사라졌지만 아직 육신이 있기 때문에 몸은 먹어야 되고 마셔야 되고 옷을 입어야 되고 목욕도 해야 하고 몸을 위해 해줘야 할 일거리가 잔뜩이다. 그런데 육신이 없는 열반은 무여열반이라고 한다. 남음이 없는 열반이라는 뜻이다. 소승불교는 그것을 최고 열반이라고 하는데 무슨 그런 불교가 있는가? 죽은 뒤에 무여열반의 경지가 최고의 경지라는 것을 이야기 해주려고 부처님이 우리에게 오셨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지극히 소승적인 사람들, 세상이 귀찮고 인생이 귀찮은 사람들, 언제 자살할지 모를 소극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 필요했던 용어일 뿐이다. 거기서 유여열반 무여열반이라고 하고, 죽어야 최고 열반인 무여열반이라고 하는 소리까지 나왔을 뿐이다.
최상승의 불교인 대승불교, 이 화엄경을 공부하는 사람은 그런 용어들도 분별할 줄 알아야 된다.
제법역부연(諸法亦復然)하야:제법역부연하야
분별유수이(分別有殊異)로다 : 분별해서 다른 것이 있음을 분별한다.
(3) 譬喩能知者
如依所數物하야 而有於能數라
彼性無所有니 如是了知法이로다
譬如算數法이 增一至無量이라
數法無體性이로대 智慧故差別이로다
譬如諸世間이 劫燒有終盡이나
虛空無損敗인달하야 佛智亦如是로다
如十方衆生이 各取虛空相인달하야
諸佛亦如是하야 世間妄分別이로다
마치 셀 바 물건 있으므로
능히 셈하는 것 있거니와
그 성품 모두 없는 것이니
이렇게 법을 알아야 하네
저 셈하는 법이
하나씩 더하여 한량이 없나니
산수의 법이 제 성품 없거늘
지혜로 차별을 내느니라
말하자면 모든 세간들이
겁의 불이 탈 때는 끝나거니와
허공은 무너지지 않나니
부처님 지혜도 그러니라
마치 시방의 중생들이
제각기 허공의 모양을 말하듯이
모든 부처님도 그와 같거늘
세상에서 허망하게 분별하도다
*
비유능지자(譬喩能知者):비유로써 법을 아는 사람을 해석하다
*
여의소수물(如依所數物)하야 : 헤아릴 바의 물건을 의지해서
이유어능수(而有於能數)라: 능히 헤아림이 있다. 여기 150명의 사람이 있다 그러면 150명이 있기 때문에 또 150 명이라고 헤아린다.그러나
피성무소유(彼性無所有)니 : 그 본성 고정불변하는 성품은 있는 바가 아니니
여시료지법(如是了知法)이로다 : 이와 같이 법을 안다.
예를 들어서 대중을 150명쯤 앉혀놓고 또 헤아려봐서 ‘150명이다’라고 하는 것은 정말 불필요한 가설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쩌다가 잠깐 그렇게 대중의 숫자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무슨 고정된 법이라고 할 것이 있는가? 그 성품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
비여산수법(譬如算數法)이: 비유하자면 헤아리는 법에
증일지무량(增一至無量)이라: 하나를 더하고 또 하나를 더하고 하나둘 셋 넷 이렇게 해서 무량에 이르는데
수법무체성(數法無體性)이로대 : 숫자의 법이 체성이 없다. 고정된 것이 없다.
하나라고도 하고 둘이라고도 하고 헤아리면 헤아리는 대로 셀 수가 있지만
지혜고차별(智慧故差別)이로다: 지혜가 있기 때문에 차별을 두고 헤아린다. 하나에서 무량으로 불가설 불가설 불찰미진수 아승지 무량아승지 이런 식으로 지혜 있는 경우는 차별을 두고 헤아린다.
*
비여제세간(譬如諸世間)이 : 비유하자면 세간, 이 지구는
겁소유종진(劫燒有終盡)이나: 겁이 불탈 때 다함이 있듯이. 지금 지구가 생긴지 45억년 내지 50억년이라고 하는데 앞으로 또 몇 억년 뒤에 이 지구가 소멸할지 모른다.
현대 과학자들은 지구를 포함한 모든 별들은 불로써 생기고 불로써 소멸한다고 본다.
지구 역시 아직도 그 속에는 불이 끓고 있어서 불이 올라오는 화산지대도 많다. 지구가 파괴될 때 역시 불이 나서 파괴될 것이다. 겁소라는 말이 그 말이다.
허공무손패(虛空無損敗)인달하야 : 허공은 본래 텅비었기 때문에 깨지거나 할 것이 없다.
불지역여시(佛智亦如是)로다 : 부처의 지혜, 깨달음의 지혜도 또한 그와 같다.
우리의 번뇌는 변화가 많지만 깨닫고 나면 변화가 없다.
세상은 번뇌에 비유할 수 있고 깨달음의 지혜는 허공에 비유할 수가 있다. 허공안에 수많은 별들이 끊임없이 생성소멸하고 성주괴공 하지만, 허공은 여여하다.
우리 인간의 짤막한 지식이나 상식은 번뇌처럼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지만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지혜는 허공처럼 여여하다.
*
여시방중생(如十方衆生)이 : 시방중생들이
각취허공상(各取虛空相)인달하야: 각각 허공의 모습을 취하듯이
제불역여시(諸佛亦如是)하야 : 모든 부처님도 또한 이와 같아서
세간망분별(世間妄分別)이로다: 세간이 망령되이 분별한다.
중생들이 공연히 분별할 뿐이다. 부처님의 지혜와 경계는 취해 갈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할 바가 없이 여여히 그대로 있는 경지다.
7, 力林菩薩의 讚歎
(1) 世間普明
爾時에 力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一切衆生界가 皆在三世中하고
三世諸衆生이 悉住五蘊中이로다
諸蘊業爲本이요 諸業心爲本이라
心法猶如幻하니 世間亦如是로다
世間非自作이며 亦復非他作이로대
而其得有成이며 亦復得有壞로다
世間雖有成이며 世間雖有壞나
了達世間者는 此二不應說이로다
그때 역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모든 중생 세계는
다 삼세 가운데 있고
삼세의 중생들은
모두 오온(五蘊) 중에 있나니
모든 온(蘊)은 업(業)이 근본이요
모든 업은 마음이 근본이니
마음이란 법 요술 같으매
세간도 그러하리라
세간은 스스로 지음도 아니요
다른 이가 지음도 아니지마는
이루어짐이 있으매
역시 파괴함도 있는 것
세간이 이루기도 하고
세간이 파괴도 하거니와
세간을 분명히 통달한 이는
이 둘을 말하지 않느니라
*
역림보살(力林菩薩)의 찬탄(讚歎): 역림(力林)보살의 찬탄
*
세간보명(世間普明): 세간을 두루 밝히다
*
이시(爾時)에 : 그 때에
역림보살(力林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
일체중생계(一切衆生界)가 : 일체중생계가
개재삼세중(皆在三世中)하고: 모두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 가운데 있고
삼세제중생(三世諸衆生)이 :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중생들은 우리 모두 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또
실주오온중(悉住五蘊中)이로다: 모두 오온 가운데 머물고 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이다. 색은 교리상 내사대 외사대로 구분한다. 육신은 내사대이고 육신 밖의 모든 물건은 외사대다. 예를 들어서 나의 몸은 내사대지만 여기 앞자리에 앉아 있는 입승스님은 나에게는 외사대다. 나에게는 입승스님이 책상이나 모두 똑같이 외사대다.
모든 중생은 사대육신과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마음작용에 머문다. 크게 둘로 줄이면 몸과 마음 뿐이다. 그것을 떠나 있는 중생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
제온업위본(諸蘊業爲本)이요 : 제온은 업이 본이다. 모든 온, 오온, 색수상행식은 전부 업으로 근본을 삼고 있다. 업 때문에 각각 얼굴이 다르고 음성이 다르고 말하는 것도 다르고 능력도 다르다. 차별된 것으로 보자면 그 업 때문에 각각 다른 것이다. 그러면 그 업은 무엇인가?
제업심위본(諸業心爲本)이라:모든 업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감나무에서 자란 가지는 전부 감나무일 뿐이지 다른 것은 없다.그와 같이 제업은 마음이 근본이다. 내 마음이라고 하는 가지 밖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마음 영역 밖에 있는 것을 부정하진 않지만 그것은 나와는 관계가 없다. 내 마음의 영역안에 있는 것만이 나와 관계한다. 그래서 마음이 만들었다고 하는 표현을 한다. 만든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 영역 안에 있는 것이다.
심법유여환(心法猶如幻)하니 : 마음의 법은 환영과 같으니
세간역여시(世間亦如是)로다 :세상사는 또한 그와 같다.
마음도 그렇게 되어 있고, 세간법도 또한 그렇다.
*
세간비자작(世間非自作)이며 : 세간은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고
역부비타작(亦復非他作)이로대: 누가 만든 것도 아니다. 저절로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누구 때문이다, 누구 때문이다’라고 잘 말하지만 누구 때문은 뭐 누구 때문인가? 전부 자기 때문이다. 저절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이기득유성(而其得有成)이며 : 그 이루어짐이 있음을 얻으며
역부득유괴(亦復得有壞)로다: 또한 무너짐이 있음도 얻는다.
이루어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그것을 글자 맞춰서 게송으로 만들다 보니까 이렇게 표현했다. 누구 없이 생노병사 안하는 사람이 없다.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은 성주괴공 생주이멸 춘하추동 한다.
계절은 전부 춘하추동하고 하루를 두고 말하더라도 새벽이 있으면 아침이 있고 낮이 있고 오후가 있고 초저녁이 있고 한밤중이 있고 또 자정을 지나면 또 새벽이 온다.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
세간수유성(世間雖有成)이며 : 세간이 비록 이루어짐이 있으며
세간수유괴(世間雖有壞)나 : 세간이 또 무너짐이 있으나. 성주괴공이 늘 있지만
요달세간자(了達世間者)는 : 세간의 실상을 꿰뚫어 아는 사람은
차이불응설(此二不應說)이로다: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여기는 성괴만을 이야기했지만 성주괴공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왜 말하지 않는가 하면 말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저절로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2) 諸法
云何爲世間이며 云何非世間고
世間非世間이 但是名差別이로다
三世五蘊法은 說名爲世間이요
彼滅非世間이니 如是但假名이로다
云何說諸蘊이며 諸蘊有何性고
蘊性不可滅일새 是故說無生이로다
分別此諸蘊인댄 其性本空寂이라
空故不可滅이니 此是無生義로다
衆生旣如是인댄 諸佛亦復然이니
佛及諸佛法이 自性無所有로다
어떤 것을 세간이라 하고
어떤 것을 세간 아니라 하는가
세간과 세간 아닌 것
이름만이 다를 뿐
삼세(三世)와 오온법(五蘊法)을
말하여 세간이라 하고
저가 멸한 것을 세간 아니라 하니
이와 같이 이름만 빌렸을 뿐
무엇을 여러 가지 온(蘊)이라 하며
온은 무슨 성품이 있는가
온의 성품 멸할 수 없으며
그래서 남이 없다[無生] 하느니
이 온(蘊)을 분별하여 보면
그 성품 본래부터 공적하여
공적하므로 멸할 수 없어
이것이 남이 없다는 이치니라
중생이 이미 이러하면
부처님도 역시 그러함이니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이
그 성품 있는 것 아니네
*
제법(諸法): 모든 법을 널리 가리다
*
운하위세간(云何爲世間)이며: 어떤 것이 세간이 되며
운하비세간(云何非世間)고 : 어떤 것이 세간 아닌 것이냐. 무엇은 세간이고 무엇은 세간이 아니냐.
세간비세간(世間非世間)이 : 세간과 비세간이
단시명차별(但是名差別)이로다: 다만 이름이 차별할 뿐이다. 세간이다 세간이 아니다 괜히 이름을 붙여서 그렇게 나누었을 뿐이다.
‘성인이 나와서 오히려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고 하는 표현을 조사스님들이 한다. 어느 단계에 오르면 또 그렇게 들리기도 한다. ‘괜히 부처님 나오셔서 갈등하게 만들고 양심지키라고 하고, 제 멋대로 살게 놔두지. 그 기준을 세워놓으니까 골치 아프게 했다’고도 하지만 그것은 공연히 어긋장을 놓으려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
삼세오온법(三世五蘊法)은 : 과거 현재 미래와 오온의 법은
설명위세간(說名爲世間)이요: 이름을 말하자면 세간이 되고
피멸비세간(彼滅非世間)이니: 그 삼세 오온법이 멸하면 세간이 아니니, 세간이 있을 때는 세간이라 하고 세간이 사라지면 세간이 아니라 하므로
여시단가명(如是但假名)이로다: 임시로 지어붙인 이름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으면 100년이 됐든 120년이 됐든 80이 됐든 그동안 이렇쿵 저렇궁 이름도 붙이고 시시비비를 붙이지만 돌아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죽고 나면 되돌릴 수가 없다. 무슨 능력을 동원하고 어떤 빽을 동원하더라도 단 1분, 1초도 되돌릴 수가 없이 끝이다. 거짓 이름만 있을 뿐이다.
*
운하설제온(云何說諸蘊)이며 : 무엇을 여러 가지 온이라고 말하며,
제온유하성(諸蘊有何性)고: 모든 온, 색수상행식 몸과 마음의 작용 이것들은 어떤 고정불변하는 성품이 있느냐?
온성불가멸(蘊性不可滅)일새: 그 오온의 성품은 가히 멸할 수 없을새
시고설무생(是故說無生)이로다 : 시고로 무생이라고 이야기 한다.
현상으로써는 생멸이 있지만, 공한 입장에서는 여여하게 본래 생멸이 없는 이치, 공한 이치가 있다.
*
분별차제온(分別此諸蘊)인댄 : 이 여러 가지 오온을 분별할진댄
기성본공적(其性本空寂)이라: 그 성품은 본래 공적한 것이다. 여기 공적이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보다 몇 억년을 더 오래 살고 있는 지구도 마찬가지다. 지구보다 몇 억년을 덜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하루살이도 마찬가지다. 그 본성은 본래 공적한 것이다.
어떤 인연에 의해서 이러고 저러고 삶을 펼치다가 결국 공적한 데로 돌아가는 것이다.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이다. 모든 법은 본래로부터 항상 스스로 적멸한 모습이다. 적멸한 것이 본고향이다.
공고불가멸(空故不可滅)이니 : 그 공한 입장에서는 가히 멸할 것도 없으니
차시무생의(此是無生義)로다 :이것은 생긴 것도 없는 도리다. 본래 공의 입장에서는 생멸이 없다. 우리는 이렇게 전부 생멸변화하는 속에서 보고 인식하고 삶을 엮어가는 것이 과제이기는 하지만, 그 본질, 절대적인 입장에 있어서는 전부 공이고 적멸이다. 생도 없고 멸도 없다.
그래서 생사와 열반이 상공화라고 한다. 하나다.
*
중생기여시(衆生旣如是)인댄 : 중생이 이미 이와 같다면
제불역부연(諸佛亦復然)이니: 제불도 역시 같다. 중생만 그러라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다. 제불도 역부연이다.
불급제불법(佛及諸佛法)이: 부처님과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법이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로다: 자성이 있는 바가 없다.
좀 아깝기는 하지만 눈 뜬 사람의 입장에서는 우리 인생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 하찮아서가 아니라, 위대한 부처님의 삶도 역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불(佛)과 불법(佛法)도 그 자성은 있는 바가 없다. 그러니 하루살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사실 하루살이나 부처님이나 그 원리는 똑같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그 원리 속에 해당된다.
물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금방 없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예를 들어서 무슨 소임을 살아서 4년만 있다가 내놓을 자리인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 자리에 아등바등한다. 스님들 까지도 종회의원을 4년간 잘 뽑았느니 못 뽑았느니 해서 ‘지지한다 못한다 어쩐다’ 신문에 대문짝만한 광고를 낸다.
화엄경을 공부한 입장에서, 화엄경을 펼쳐놓고 그런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다 여기에 갖다 놓고 보면 우습기 그지없고 하찮기 그지없다.
종회의원을 누가하면 어떤가. 시켜도 안해야 할 판에 그것을 하려고 아등바등한다.
세상사람들이야 그렇다손 치고 불법의 프로들이 그렇게 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이런 소리가 듣기 싫어도 자꾸 들어놓아서 마음속에 주입이 되고 세뇌가 되어서 거기에서 문득문득 깨어나야 한다. 그래야 ‘그러면 안되지, 화엄경 공부할 때 배웠지 않는냐, 소소한 것을 가지고 시비하면 안된다’하고 양심의 소리가 울려나온다.
‘이득이라고 할 것도 없다. 결국 손해를 보는 헛것을 가지고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라고 하는 이런 소리들을 자꾸 듣다보면 깊은 마음에서 그런 작용을 한다.
(3) 利益
能知此諸法이 如實不顚倒하면
一切知見人이 常現在其前이로다
이런 모든 법이
진실하여 뒤바뀌지 않는 줄 알면
온갖 것을 알고 보는 이
그의 앞에 항상 나타나리라
*
이익(利益): 이익을 말하다
*
능지차제법(能知此諸法)이 : 능히 이 모든 법들이
여실부전도(如實不顚倒)하면: 사실과 같아서 전도되지 아니함을 알면 뒤바뀌지 않는다. 원리전도 몽상한다. 전도몽상을 멀리 떠나버린다.
일체지견인(一切知見人)이 : 일체지견인은 모든 것을 잘 아는 사람,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내 앞에 있는 것을
상현재기전(常現在其前)이로다: 항상 보게 될 것이다. 부처님이 그 앞에 있다는 것을 항상 보게 될 것이다. 100퍼센트 부처를 보는 사람은 자기가 100퍼센트 부처다. 라는 말이다.
부처라야 부처를 본다. 내가 부처를 보면 이미 나는 부처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를 본다고 해서 100퍼센트 부처의 경지에서 부처를 보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아는 만치만 부처를 본다. 그러니까 불상을 보고 부처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역사적인 과거 부처님을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마음을 부처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 모든 것을 합해서 부처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아는 만치, 자기 상상만치만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8, 行林菩薩의 讚歎
(1) 地의 種性과 佛身
爾時에 行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譬如十方界에 一切諸地種이
自性無所有로대 無處不周遍인달하야
佛身亦如是하야 普遍諸世界하사대
種種諸色相이 無住無來處로다
그때 행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비유하면 시방의 세계가
모든 지대(地大)의 종성이라
제 성품 있는 것 아니지만
두루 하지 않은 곳 없듯이
부처님 몸도 그와 같아서
모든 세계에 두루 했으나
가지가지 빛과 모양이
머문 곳도 온 곳도 없네
*
행림보살(行林菩薩)의 찬탄(讚歎): 행림(行林)보살의 찬탄
*
지(地)의 종성(種性)과 불신(佛身): 땅의 종성(種性)으로써 부처님의 몸을 밝히다
*
땅의 종성, 종성하면 여기는 성품이다. 본성. 지수화풍이라고 해도 좋다.
*
이시(爾時)에
행림보살(行林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
비여시방계(譬如十方界)에 : 비유하자면 시방세계의
일체제지종(一切諸地種)이: 일체 모든 땅의 종자, 지수화풍이. 그 중에 땅만 말해도 좋다.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로대 : 자성이 있는 바가 없되,
무처부주변(無處不周遍)인달하야: 곳마다 두루하지 않는 데가 없다. 자성은 없지만, 세계 곳곳에 그 땅이 없는 데가 없다. 실체가 없으면서도 그렇게 펼쳐져 있다.
*
불신역여시(佛身亦如是)하야 : 부처님의 몸도 또한 그와 같아서
보변제세계(普遍諸世界)하사대: 온 세계에 꽉 차 있어서
종종제색상(種種諸色相)이 : 일체 모든 색상들이
무주무래처(無住無來處)로다 :주함도 없고, 온 곳도 없다. 일체 존재가 역시 불신(佛身)이다. 불신이 땅과 같이 세계에 펼쳐져 있다.
거기까지 안목이 열리면 그것을 불신으로 보는 것이다.
소동파 같은 이들도 냇물소리 폭포소리를 듣고 깨닫고는 ‘계성변시장광설(溪聲便是長廣舌)인데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가’ 라는 게송을 지었다. 내가 늘 화엄경을 푸는 열쇠라고 말하는 이 게송은 냇물소리 폭포소리를 듣고 지은 게송이다.
(2) 業의 無依支와 佛身
但以諸業故로 說名爲衆生이나
亦不離衆生하고 而有業可得이로다
業性本空寂이나 衆生所依止요
普作衆色相이나 亦復無來處로다
如是諸色相과 業力難思議니
了達其根本이면 於中無所見이로다
佛身亦如是하야 不可得思議니
種種諸色相으로 普現十方刹이로다
身亦非是佛이며 佛亦非是身이니
但以法爲身하면 通達一切法이로다
다만 모든 업인 연고로
중생이라 말하거니와
역시 중생을 떠나서는
업을 찾아볼 수 없네
업의 성품 본래 공적하나
중생들이 의지한 바며
여러 가지 모양 두루 짓지만
온 곳은 역시 없어라
이러한 모든 빛깔과
업의 힘 헤아릴 수 없어
근본을 분명히 알면
그 가운데는 볼 것도 없네
부처님 몸도 그와 같아서
헤아릴 수 없거니와
가지가지 모든 빛과 모양
시방세계에 두루 나타나
몸도 부처 아니고
부처도 몸 아니지만
다만 법으로 몸을 삼아
온갖 법을 통달하도다
*
업(業)의 무의지(無依支)와 불신(佛身): 의지함이 없는 업(業)으로써 부처님의 몸을 밝히다
*
단이제업고(但以諸業故)로: 다만 모든 업을 쓴 고로, 모든 업 때문에
설명위중생(說名爲衆生)이나: 그 업을 가지고 우리가 중생이다 뭐다 하는 것이다. 중생업을 지었으니까 중생이다. 중생중에서도 사람중생 짐승중생 축생중생 날것중생 곤충중생 온갖 중생들이 많다. 그런 것이 다 업 때문이다. 업력난사의라고 했는데 우리가 사는 현상에서는 업같이 중요한 것도 또 없다. 업은 전부 인연소치로 지어지는 것이다.
역불리중생(亦不離衆生)하고: 또한 중생을 떠나서
이유업가득(而有業可得)이로다 :업 가이 얻을 것이 있지 않다.
업 때문에 중생이 있다. 또 중생 떠나서 업이 없다. 중생과 업이 같다. 불가불리의 관계다. 그런데 뭐가 업이냐?
*
업성본공적(業性本空寂)이나 :업의 성품은 본래 공적이다. 업의 알맹이를 한 번 찾아내어서 보이라고 한다면 찾을 길이 없다.
중생도 못 찾지만 부처도 못찾는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데 식구들도 끊으라고 하고 자기도 끊으려고 하지만 끊지 못한다. 뭐가 들어서 그렇게 담배를 못 끊는가 하고 그 근본을 찾아보면 어디에도 찾을 길이 없다. 업의 성품은 본래 공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 업력이 보통 센 것이 아니다.
‘담배를 안끊으면 이혼한다’고 해도 ‘이혼해도 좋다’고 하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다.
그 정도로 업력이 세다. 어떤 사람은 노름을 좋아한다고 자기 스스로 손목을 끊었는데 나중에는 발로 노름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센 업력이지만, 그 업을 찾으려고 하면 찾아도 찾을 길이 없다. 업의 본성은 공적하기 때문이다. 업은 안 보이는 가운데서 그렇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경전에서는 업을 크게 대수롭지 않게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현실을 살면서 업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다. 불교는 이런 업력에 대해서 소상히 파악하고 잘 밝히고 있다.
중생소의지(衆生所依止)요 : 본래 공적하지만 중생이 그 업을 의지하고 있다.
보작중색상(普作衆色相)이나 : 널리 여러 가지 색상을 지으나
역부무래처(亦復無來處)로다: 여러 가지 형상을 짓고 모양을 내고 하지만 그것이 어디서 온 곳이 없다.
*
여시제색상(如是諸色相)과 : 이와 같은 모든 색상과
업력난사의(業力難思議)니 : 업력이 또한 가히 생각하기 어려우니
요달기근본(了達其根本)이면: 그 근본을 요달하면 그 본성은 공하다.
모든 현상도 공하고 업도 공하다.
너무나 센 그 업의 힘도 찾아보면 공하다. 그것이 근본인데 그것을 알 것 같으면
어중무소견(於中無所見)이로다: 그 가운데 볼 것이 없더라.
*
불신역여시(佛身亦如是)하야 : 부처님의 몸도 또한 그와 같아서
불가득사의(不可得思議)니: 사의 할 수가 없음이니
종종제색상(種種諸色相)으로 : 가지가지 여러 가지 색상으로써
보현시방찰(普現十方刹)이로다 : 시방찰에 널리 나타났더라.
*
신역비시불(身亦非是佛)이며 : 몸이 또한 부처가 아니다. 부처도 또한 몸이 아니다. 몸을 가지고 부처라고 하지 않는다.
불역비시신(佛亦非是身)이니: 부처는 그러니까 몸이 아니다.
단이법위신(但以法爲身)하면: 다만 법으로써 몸을 삼는다. 그러므로 화엄경이 바로 불신이고 법신이다. 법으로써 몸을 삼는 것이다.
우리가 부처님 살아생전에, 부처님을 모시고 살았다면 눈에 보이니까 그것을 부정하고 따로 법으로써 부처님의 몸으로 삼기가 어렵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상당한 수준의 제자다. 바로 눈 앞에 부처님이 있으니까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실재하는 몸이 없는 지금은 법으로써 부처님의 몸을 삼기가 더 쉽다.
화엄경으로써 부처님의 몸이라고 여기기가 훨씬 더 쉬운 것이다.
통달일체법(通達一切法)이로다:그렇게 알면 일체법을 통달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까지 확연하게 이야기 했다. 더 이상 어떻게 화반탁출하겠는가.
(3) 見佛身得益
若能見佛身이 淸淨如法性하면
此人於佛法에 一切無疑惑이로다
若見一切法이 本性如涅槃하면
是則見如來가 究竟無所住로다
若修習正念하야 明了見正覺이
無相無分別하면 是名法王子로다
만일 부처님 몸이
청정하여 법의 성품 같음을 보면
이 사람 부처와 법에
조금도 의혹 없으리
만일 온갖 법들의
본 성품 열반 같음을 알면
이런 이는 여래가
끝까지 머문 데 없음을 보리
만일 바른 생각을 닦아
분명하게 정각(正覺)을 보면
모양도 없고 분별도 없어
이름을 법왕자(法王子)라 하리라
*
견불신득익(見佛身得益): 부처님 몸의 진실을 보면 이익을 얻는다
*
약능견불신(若能見佛身)이: 만약 능히 부처님 몸이
청정여법성(淸淨如法性)하면: 텅 비어서 법성과 같은 줄을 보면
차인어불법(此人於佛法)에 : 이 사람은 불법에 있어서
일체무의혹(一切無疑惑)이로다: 일체 의혹이 없다. 아무 의혹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
*
약견일체법(若見一切法)이 : 그 모든 법이
본성여열반(本性如涅槃)하면 : 본성이 열반과 같은 줄을 알면, 사라져서 없는 것으로 보면.
열반은 사라진 것을 말한다. 유여열반은 번뇌가 사라진 것이고 무여열반은 몸뚱이마저 사라진 것이다.
시즉견여래(是則見如來)가: 여래가
구경무소주(究竟無所住)로다 : 구경에 끝내 머무는 바가 없음을 보는 도다.
*
약수습정념(若修習正念)하야: 만약에 바른 생각인 정념을 수습해서. 정념은 초기 불교에서부터 많이 써온 말이다. 팔정도에도 있는 말이다. 고대로 사실대로 본다, 마음챙김이라고 해서 요즘 위파사나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낱말이기도 하다.
명료견정각(明了見正覺)이: 명료하게 정각이
무상무분별(無相無分別)하면: 형상도 없고 분별도 없는 줄을 본다면.
바른 생각을 닦으면 정각이라는 자체도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분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시명법왕자(是名法王子)로다 :이 사람이야 말로 법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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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부처님의 지혜는
허공같아 여여...
시즉견여래
구경무소주...!!!
심심미묘법
즉심시불
이심전심
현현세불
고귀한 법문 법희열
아름다운 환희심
고요한 적적영영
섬광 찬란합니다.
감동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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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業心爲本..
業性本空寂이나 衆生所依止요
普作衆色相이나 亦復無來處로다..
혜명화 님!! 수고 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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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화님 고맙습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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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