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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공원묘지에 있는 이간원의 무덤(오른편). 이간원은 일제 강점기 울산 최초의 여의사로 많은 환자들을 돌보았지만 일찍 타계했는데 현재 그의 무덤이 그의 딸 경옥을 고이 길러 주었던 삼산댁 성맹순(成孟順)의 무덤 옆에 있다. | ||
일본 이름 쿠니마사미로 우리들에게는 더욱 잘 알려진 박영인(朴永仁)은 울산 출신으로 부산중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마쭈에(松廣) 고등학교와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세계적인 무용가가 되었고 베를린 올림픽이 열릴 무렵에는 교토 통신 베를린 특파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동강병원 이사장을 지냈던 박영철의 형으로 그에 대한 얘기는 박영철이 쓴 자서전 형식의 책 <철아 철아 우리철아>에 언급되고 있어 이번에 연재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해외에서 공부한 후 울산으로 와 활동한 사람들 중에는 울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대학을 중퇴한 김천해(金天海)와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게이오대학을 중퇴한 신학업(申學業), 그리고 역시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대학을 중퇴한 신고송(申辛頌)이 있다.
김천해는 일제강점기 ‘일본지역노동운동의 대부’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노동운동에 투신한 후 일본에서 고생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힘썼던 인물이다.
신학업은 일제강점기 언양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소작료 할인과 지세 지주 부담 등 농민복지를 위한 운동을 펼쳤지만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신고송도 언양 출신으로 언양초등학교와 대구사범을 거쳐 일본으로 가 일본 대학을 중퇴한 후 언양에서 소인극 운동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농민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켰으나 6·25 때 북으로 갔다.
이번에 연재된 인물 중 여자는 이간원(李簡媛) 한명 뿐이었다. 그러나 여자들 중에도 이순금(李順今), 이효정(李孝貞), 이호경(李護卿), 구와바라 다끼 등 선각자들이 많았다.
범서읍 출신의 이순금은 이관술의 동생으로 일제강점기 혼신을 다해 독립운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서울 동덕여고를 졸업했던 그는 영등포 근로자들을 상대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여러번 구속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박헌영과 함께 좌익 운동을 하다가 6·25때 월북하는 바람에 이번 연재에서 제외되었다.
이효정은 일제강점기 동구 일산동 보성중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반일·독립운동을 펼치다 교직에서 쫓겨났다. 울산초등학교 교사로도 봉직했던 그는 남편이 월북하는 바람에 해방 후 남한에 살면서 많은 고통을 겪다가 2008년 부천에서 돌아갔다.
이호경은 일제 강점기 때 추전 김홍조의 소실로, <봉선화>라는 한시집을 남겼다.
구와바라 다끼는 일본 여성으로 일제강점기 남편이 울산경찰서장에 취임하자 일본에서 울산으로 와 함께 살다가 해방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언양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해방을 전후 해 언양에서 잠사로 많은 돈을 벌었는데 이 돈을 언양중학교가 건립될 때 내어놓기도 했다.
이외에도 일제강점기 울산의 젊은이들에게 애국 사상을 심어 주었던 배철수와 동아일보 지국장 박병호(朴炳浩), 시대일보 지국장 강철(姜澈), 조선일보 지국장 김기오(金琪午)는 언론을 통해 이 나라 독립과 사회 발전에 기여했던 인물이지만 이들의 행적은 나중에 ‘울산언론사’를 정리할 때 다룰 계획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으로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던 송태관의 이야기는 아직 계속된다. 지난 달 충남 태안군 해미면 사무소 직원이 필자에게 송태관의 친일행적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는 전화를 했다.
그는 필자가 쓴 기사를 보았지만 그 글을 통해서는 송태관이 친일파인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면서 이런 요청을 한 것이다.
실제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는 송태관이 190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제로부터 3등 훈장을 받았다면서 그를 친일파로 분류해 놓고 있다.
해미면에서 송태관의 친일이 문제가 된 것은 그의 송덕비 때문이다. 현재 해미면 기지리에는 조선조 말 이 마을 주민들이 세운 송태관 송덕비가 있다. 이 비가 세워진 것은 당시 송태관이 이 지역에서 간척 사업으로 생긴 논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준 송태관의 은덕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웠다. 그런데 해미면사무소는 최근 들어 이 비가 쓰러져 있어 환경정비 차원에서 이 비를 다시 바로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마을 젊은이들이 송태관이 친일파라면서 반대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송태관의 행적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고 했지만 나 역시 그가 친일파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답변을 할 수 없었다.
이번 연재에서 독자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인물은 이간원이었다. 그에게 쏟아진 관심은 그가 강정택 부인으로 울산 최초의 여의사였지만 기구한 삶을 살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그는 강정택이 자신의 아들을 외삼촌 이종하에게 양자로 준 후 우울한 삶을 살다가 서른 중반에 돌아갔다.
이간원은 취재가 쉽지 않았다. 딸 경옥은 지금도 대구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5~6년 전 그의 부친 강정택 일대기를 쓸 때는 울산까지 와 아버지의 삶을 자세히 알려주었지만 이번에 어머니 이간원에 대해 쓰겠다고 하니 “내가 너무 어릴 때 돌아갔기 때문에 아는 것이 없다”면서 취재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어머니에 대한 얘기는 서울에 사는 이종사촌 언니 김윤옥(82)이 잘 알고 있으니 그를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김씨는 서울 자양동 실버타운에서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간원이 아직도 집안에서는 득원으로 부르고 있고 그가 일어는 물론이고 영어와 중국어, 러시아어까지 잘했던 수재였다는 것을 안 것은 김씨를 통해서였다. 내가 그를 만나려고 했던 것은 이간원과 관련된 사진을 구했으면 하는 욕심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갖고 있었던 이간원 사진을 2~3년 전에 모두 대구에 있는 동생 경옥에게 보내었다고 말해 사진을 구할 수 없었다.
연재 후 들려 온 서원출에 대한 얘기도 있다. 고아로 통도사에 들어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보성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던 서원출의 장모가 60년대까지만 해도 병영에서 살았던 것이 밝혀졌다.
그는 당시 병영시장 맞은편 현 평화슈퍼 자리에서 주점을 경영했는데 성격이 활달해 마을 사람들이 ‘여 부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서원출은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처가가 있는 병영으로 가족 모두를 데리고 와 최현배 선생의 사촌 동생 최현태 집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안효식 기사와 관련, ‘병영거지 부자’도 관심꺼리였다. 안효식은 첫 부인이 사망한 후 병영거지 부자집으로 새 장가를 들었는데 이 기사를 읽은 사람들 중 병영거지 부자에 대한 내력을 알고 싶다고 전화를 한 사람이 많았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충 취재를 해 놓았는데 그 내용을 앞으로 밝힐 계획이다.
신문에 실리지 않았던 김재호 박사의 얘기도 있다. 60~70년대 엄혹한 군사정권 아래서 울산 야당을 이끌어 ‘울산 야당의 대부’로 불리는 김 박사가 돌아간 지가 이미 40여년이 지났다. 따라서 가족들 외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런데 울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김 박사의 둘째 아들 두성이 이번에 연재된 신문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아버지의 활동을 담은 책을 발간할 계획이라고 알려와 멀지 않아 울산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시민들이 보다 구체적인 그의 활동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더욱이 김 박사가 살았을 때 적극 지원했던 울산의 한 사회단체에서 그의 흉상도 세울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니 멀지 않아 김 박사에 대한 얘기가 다시 한 번 화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17일부터 연재되는 ‘파란 만장 그 시절’은 ‘김종신 서장 피살’과 ‘고등계 형사 노덕술과 울산경찰서’ 등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전후해 울산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과 또 사건 관련 사람들의 얘기를 담게 된다. 따라서 그동안 ‘울산의 부자들’과 ‘울산의 인텔리’에서 빠진 사람들을 ‘파란 만장 그 시절’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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