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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간화선 대중화의선구자 안국선원 수불스님을 만나다
서울 종로의 도심지에 위치한 안국선원은 매일 800여분의 수행자들이 모여 수행하는 수행처입니다. 특히 선원장이신 수불스님께서 화두 들어 깨치는 과정을 쉽게 경험할 수 있도록 지도편달 해주셔서, 서울은 물론 부산 안국선원과 2010년 미황사와 2011년 백담사 등에서의 외국인들을 위한 수행지도도 의미 깊고 성공적으로 회향하였기에 2012년을 맞이하여 미주현대불교에서 스님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의미로 친견하여 소중한 가르침을 받아 함께 나누는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기자: 짧은 기간에 수행자들이 간화선 체험을 얻게 하는 스님의 특별한 방법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스님: 제가 특별한 방법이라고 얘기하기는 뭐하고 남들이 봤을 때는 특별한 방법일 수는 있는데 제가 특별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좀 그렇지요. 제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공부하면 되는데 그 방법을 제가 뭔가 확인 했다 할까 제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한 것이기 때문에 뭐 다시 찾았다, 확인했다 하기에는 조금 넘치는 것 같고 과거에 부처님도 쉽게 깨닫게 해줄 수 있는 길을 먼저 열어 가신 분이니까. 그분은 만나자마자 바로 깨닫게 하신 것이 수도 없이 많으셨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래도 수행방법을 통해서 이렇게 하라는 준비된 입장을 얘기해서 변화시키지만 부처님은 준비도 없이 만나자마자 그 사람의 근기를 보시고 그때그때 필요한 말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셨는데 간화선 수행이라 하는 독특한 어떤 입장을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말하기가 어려워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10년, 20년 아니면 평생 화두를 들고 있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끔 말하고 있는 입장이니까 조금 그게 차이가 있을 수 있지요.
▶기자: 스님, 그 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스님: 그 차이는 오해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화두를 들기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도 아니고 화두를 왜 들어야 하느냐? 화두가 뭐냐? 화두에 대한 정체성을 바르게 인지하고 화두를 제시해서 화두라는 것이 의심을 해서, 그 화두를 타파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거든요. 화두 의심을 통해서 의심이 아닌 근원에 도달할 수 있게끔 방편을 제시한 것이 화두인데, 방편에 메달려 5년, 10년씩 세월을 보낸다 하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전에 공부한 분들이 이말 들으면 어떤 오해를 할는지 모르겠지만.
▶기자: 스님, 저도 오해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저의 경우도 그동안 화두를 들어오면서 화두를 위한 화두를 들은 적은 없었습니다.
▷스님: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래 걸리고 안 될까요? 그런 입장이 밋밋하게 물을 100도로 끓어 넘치게 하는 수단을 제시해서 끓고 난 이후의 변화를 느끼는 것하고 끓지 못하고 늘 50, 60, 70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세월만 보내는 입장하고 다를 수밖에 없겠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기자: 스님의 화두타파의 첫 단계를 어떤 의미로 파악해야 하며 그 다음 수행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즉 스님께서 수행자들에게 인정해 주신 수행의 결과는 무엇이며 그 이후의 길은 어떻게 유지 내지 닦아 나아가야 하는지요?
▷스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법이 다양하게 있고 또 그것이 변해서 지금까지 전해져 온 것이 사실이고 그런 수행방법을 통해서 뭔가 변화가 오고 변한 뒤에 어떤 수행을 해야지 되는 것이냐, 완벽한 깨달음은 수행조차를 용납하지 않지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뭔가 앙금이 남아 있다 할까 그러면서도 이해는 다 되고 소화도 하는데 자기가 돌아다 봤을 때 아직까지 뭔가 미진하다 하는 뭔가 부족함이 느껴진다는 어떤 입장이 있을 수 있지요.불교적 소양이 부족하거나 깨달음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들어오지 못했다든지 처음부터 발심해서 수행하는 입장과 발심하지 않은 사람에게 화두를 제시해서 가르치는 차이가 아닐까 하는데 이는 원인과 결과에 따라 차이가 벌어 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하더라도 그 뒤에 완벽하다는 입장은 따로 말할 것이 없지만 그렇게 못한 경우에는 전심법요(傳心法要) 테이프를 만들었는데 그 강의를 자주 들으라 하지요.
▶기자: 스님 그 전심법요의 요지를 한마디로 말씀해 주신다면 무엇입니까?
▷스님: 전심법요를 저술했던 배휴거사는 황벽스님을 만나 깨달았어요. 그 깨달음의 입장은 다 기록에 있어요. 그 이후에 배휴가 황벽스님을 찾아다니면서 늘 의구심을 일으켰던, 공부는 했는데 뭔가 미진했던 부분들을 묻고 그런 입장을 통해서 황벽스님이 대답하여 배휴거사가 점점 더 성태장약 한다할까, 공부에 더 깊이 멀리 내다 볼 수 있는 힘이 생겼으니까 그런 내용들이 전반적으로 전심법요나 완등록에 잘 제시되고 있지 않나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근기 따라 얘기 해주기도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그냥 흐름 따라 가라 하던지 생각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 두라 던지 위빠사나 수행하듯이 관찰하라 하던지 합니다.
▶기자: 그러니까 일률적인 지침이 아니군요.
▷스님: 네, 사람의 근기가 다 다른데 정해놓고 판때기처럼 하는 게 아니죠. 부처님의 십대제자들도 깨닫고 난 뒤의 각자 수행하는 모습이 근본 마음을 본 입장은 대동소이 했을지는 몰라도 유마경에 보면 가섭이든 사리불이든 유마거사에게 다 한방씩 맞거든요. 그게 왜 그러냐 말이냐면, 우리보다 월등히 수승한 공부를 한 십대제자들도 나름 헤맸으니까 그걸 보면 유마경에서라 해도 그 경이 다 증명되어 내려온 경이니까 한 대씩 얻어맞고 병문안 가는 것 보면 다 일리가 있는 입장들이 있지요.
공부하고 난 뒤 천편일률적으로 이렇게 수행해야한다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해요. 동쪽에서 깨달은 사람보고 서쪽에서 오는 길을 얘기하면서 그렇게 오라 얘기하면 좀 문제가 있지요 중앙으로 모이라 할 경우에 각각 동서남북이 다른데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도 있고 들판을 가로 질러 오는 사람도 있고 처해진 입장이 다른 것인데, 깨달음의 경지는 어떤지 몰라도 깨달음 자체에 무슨 경지가 있겠어요. 공부 실상자리에. 그러나 사람의 근기에는 우열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또 공부하고 난 후에 뒤집어지는 경우도 있고 편히 잘해가는 사람도 있겠지요.
▶기자: 스님 활구 참선에서 전통적인 간화선 조사선 묵조선 등과 스님의 가르침과 차이와 같은 점은 무엇입니까? 또한 화두 깨치면 견성성불 한다는데 그 뒤 따로 닦을 것이 무엇인지요? 또한 테라와다의 경우에는 아라한은 번뇌를 소멸한 성인이라 하는데 깨달은 분들이 무엇을 닦으셨다는 것인지 설명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스님: 이치적으로 얘기할 때 소멸해야 될 번뇌가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모습하고 번뇌가 본래 없는데 따로 번뇌를 없애야 된다고 하는 허망한 소리를 하는 입장하고 차이가 있어요. 번뇌를 없애야한다는 입장은 닦아야 된다는 입장이고 번뇌가 본래 없다고 하는 입장을 얘기할 때는 닦음조차도 수용 안합니다. 그런데 그 어디 머물고 집착하는 모습이 있으니까 이게 깨지는 어떤 입장일 수도 있다 이거예요. 이치만 하더라도 그것이 실재화 되는가의 문제는 양심적인 것이 아니라 선지식 간의 견해인데 그러니까 안목 있는 선지식 만나면 여지없이 깨지는 거고 제대로 된 인연을 만나면 더욱 큰 이익을 얻는 것이고 공부를 탁마한다는 것은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게 아니거든요. 이익을 주고자 하는 입장에서 서로 비롯하는 건데, 상 높이면 뭐하고 쳐박히고 깍이면 어떻겠어요. 그런 것들이 다 공부인데 공부를 통해서 자기 변화를 꾀하던지 남을 이익 되게 한다 던지 이런 모습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 뭐 이름나면 어떻고 안 나면 어떻겠어요. 진정한 공부를 올바르게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원만하게 잘 진행해서 완성된 모습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기자: 그렇다면 십대제자조차도 유마거사께 한방 얻어맞은 일은 어떤 연유입니까?
▷스님: 지견, 견해차이가 있었으니까요.
▶기자: 견성성불했고 번뇌를 소멸한 경지에서 무슨 견해차이가 있습니까? 그때의 견해 차이는 무슨 뜻입니까?
▷스님: 그래도 아직까지 인간이니까요.
▶기자: 인간으로서의 견해차이인가요 깨달음의 차이인가요?
▷스님: 깨달음의 우열이 있겠지요.
▶기자: 번뇌를 완전히 소멸한 아라한조차도요?
▷스님: 그래서 유여열반 무여열반 대반열반 등 열반의 모습도 각각 다르게 표현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교학적으로 있고요, 깨달음의 입장에서 완벽하게 확철대오 했느냐 아니면 뭔가 반짝거리는 경계를 보고 거기에 머물고 착각하고 있느냐 이런 입장이 달라 질 수도 있고 완벽하게 본 것조차도 본인이 확철한 입장을 못 가졌으니까 한번 더 해보고 싶은 심정도 있는 것이지요. 과거 선지식 중에도 깨닫고 난 뒤에 뭔가 불편하다 이 말이에요.
▶기자: 스님 그렇다면 그 상태를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까요?
▷스님: 다시 한 번 깨닫고 보니까 그때 본 것이 분명히 성품은 봤는데 성품을 본 그 입장은 둘이 아닌데 뭔가 번뇌가 앞을 가린 것이 있어 가지고 다시 한 번 공부해서 재차 확인하니까 아! 그 입장과 새로운 입장의 차이점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사실이겠지요.
▶기자: 한국의 선지식들께서 확철대오하셨다는 가정 하에 1년, 10년 아니면 평생이 걸렸던 확철대오한 것과 성품을 봤다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스님: 성품은 누구나 보고 있지요 세상에 태어난 개, 돼지도 자신의 성품을 보고 있지요. 성품을 보지 않고 보여지는 것은 없으니까.
▶기자: 그것을 알아차렸느냐 못하였느냐의 차이는 있지 않습니까?
▷스님: 그것을 분명히 다시는 속지 않는 그런 입장의 눈을 떴느냐 눈을 떴는데도 헤매고 있느냐의 차이는 있지요
▶기자: 스님의 수행 지도 과정에서 인정받는 것은 성품을 알아차렸다는 과정이라 하여도 되겠습니까?
▷스님: 다른 사람들은 성품을 요달하려고 몇 십 년을 공부했는데도 안 되는데, 마을에 사는 사람이 때 잔뜩 묻혀 갖고 있다가 일주일 아니면 한 달 만에 성품 봤다고 하면 내 입장에서는 봤다해도 그만이고 안 봤다해도 그만인데, 저쪽 입장에서는 그걸 봤다고 하면은 또 그 분들과 대담을 하면 성품 봤다는 사람이 헤맬 것이거든요. 그 스님들께서 오히려 침착히 대응하고 30-40년 앉아서 정진하여 힘을 얻었는데 성품은 못 봤어도 그분들 입장에서는 성품을 어떤 입장으로 생각하고 공부 하는지는 몰라도 그래서 이치를 먼저 배우고 지견을 열면 훨씬 더 공부가 쉬울 수 있는데 이치는 생각 안하고 바로 그냥 화두 들고 의심해 들어가는 것부터 먼저 하셨는지 그것은 내가 대담을 안 해봐서 그분들 입장이 어떤지를 잘 모르겠어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했으면 어떤 변화를 손쉽게 읽어내겠지요.
▶기자: 스님께서 미국에 여러 번 다녀오신 것으로 압니다. 또 간화선을 세계화 하는데 많은 관심을 가지신 것으로 압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간화선을 수행방법으로 한 일본 사찰을 보면 미국인들에게 별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판단하시는지요?
▷스님: 질문은 받았지만 대답하기 곤란하네요, 옹색한 게 아니고 자칫 잘못하면 그쪽 폄하하게 되니까요. 같은 수행자로써 직접 만나보지 않고 상대방 하는 모습을 보지도 않고 말하는 것은 내가 경솔해지는 것이고 직접 보고 느끼고 난 뒤에 얘기 하는 것도 어려운데 더욱이 한 다리 건너고 얘기 하라는 것은 힘들고 제가 간화선 수행을 하고 있으니까 간화선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다 내가 남을 변화 시켜 주어서 그런 게 아니고 내 스스로도 그런 변화를 느끼게 해줄 수 있도록 나도 했고 또 그것을 수 없는 탁마를 거쳐서 물론 남들과도 했지만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 비추어 가지고 어떻게 해야 저 사람들의 입장을 변화 시켜 줄 수 있을까 이런 것을 나도 고심 안했겠어요? 나도 100여일 이상 문 닫아 놓고 혼자서 그 허물이 어디 있나? 분명히 내가 했으면 저 사람들도 해야 될 것이 데 근기가 대동소이 할지라고 나나 일반인들을 봤을 때 머리가 더 좋은 사람도 찾아오고 성품이 오만한 사람도 오고 다양한 사람들이 오는데, 나는 눈 떴다고 하더라도 저 사람들이 눈 감았으면 뭔가 인연 따라 온 사람들을 소홀히 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결과를 좋게 못 만드는 이유가 뭘까? 이런 고민을 내가 진정으로 하였지요. 하여 고민 끝에 첫째는 화두 제시하는데 문제가 있고 그 다음엔 공부하는데 부딪히는 경계를 본인 스스로가 해결 못할 때 옆에서 안목 있는 선지식이 활구(活句)를 들고 의심을 했어도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실패한다 했으니 실패하지 않도록 경계에 부딪힌 입장을 겁먹지 말고 물러서지 않고 공부할 수 있도록 잘 인도를 해가지고 원만하게 자신이 목적한 것에 도달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안목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런 입장을 다하고 있나 없나, 다했다 하면 어떤 식으로 다한 것인지 한번 공개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서 이익을 나눠 주는 것도 좋겠다. 혼자만 간직하고 있으면 뭐 하냐 생각했으며, 또한 자기 공부 인연을 그렇다고 내 공부 한 것은 한 거고 그 공부는 그 공부인데 나보다 빼어난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출연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준다면 바람직한 것 아니냐 어찌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볼 때는 거기서 거긴데 그런 이들이 많이 출현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준다면 좋은 거라고 생각했지요.
▶기자: 스님께서 앞으로 젊은 불자나 청소년들에게 수행을 지도 하실 계획이 있으신지요?
▷스님: 계획은 있지요. 있는데 어떤 식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구체적으로는 생각 안하고 있어요. 이 공부는 일찍부터 하는 게 좋지요. 최근 동국대학교 국제선센터 선원장이 되었는데 수행 교양과목으로 학점화되니 젊은이들을 가르치게 되고 내년엔 하버드대학에 갈 예정인데, 장이 마련되면 어디든 갈 것입니다.
▶기자: 일반적으로 간화선은 어렵다고 하는 것이 특히 점검과정에서 지도 받기가 어렵고 또 지도하실 스승도 많지 않는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는데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가르칠 방법을 갖고 계시는지요?
▷스님: 나는 설계를 잘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예요. 미래에 어떤 계획으로 살 것인가ㄹ고 계획 하지는 않는데, 부딪힐 때 마다 답이 나옵니다.
▶기자: 국내의 위빠사나 수행자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스님: 나쁘게 보진 않지요. 왜냐면 시대가 변화를 수용하게끔 요구되고 있으니 위빠사나만이 아니라 모든 수행이 들어와서 함께하는 것은 좋지요 그 대신에 어떤 수행에도 머물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통해서 간화선도 마찬가지로 큰 입장으로 거듭나서 어떤 방편을 사용하던지 세우던지 많은 사람을 깨달음으로 이끌어서 공부할 수 있게 그런 힘을 가지면 좋고 위빠사나도 간화선으로 전환할 계기가 되면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위빠사나 한다고 해서 자성을 요달하고 완성도를 높이는 이런 입장은 아닌 것 같고, 그쪽 어느 단계에서 머물 수 있으니까 오히려 위빠사나가 더 위험합니다.
스승 없이 체험하는데 까지는 쉽게 쉽게 갔다 하더라도 높은 단계로 올라 갈수록 점점 더 큰 스승, 그런 경험을 필요로 하는 입장들이 요구 되는데 과연 그런 것들이 충족 되냐 그 입장을 그 쪽에서 해결하냐 위빠사나에서 조그만 이익보고 위빠사나했다 이럴 것 같으면 그건 좀 그럴 것 같고 간화선은 그런 입장하고 다른 거죠.
일주일 만에 변화가 온다고 하니까 특히 100명오면 반 정도는 해내니까 큰 체험은 말고라도 수행에 대한 확신이라던지 부처님께 대한 믿음이 커진다던지 공부를 못하고 가더라도 아 이런 수행이 있구나, 이런 수행을 통해서 뭔가 변화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것으로도 대단한 보급적 효과라 할 수 있지요.
그 중에서 또 진정한 수행자가 나와서 출가의 길을 걷는다던지 남을 깨닫게 해줄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활동을 하면 그것은 말할 수 없이 좋은 것이구요.
▶기자: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지혜와 자비의 실천으로 함축한다면 스님께서는 사회의 소외 계층을 위한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요? 특히 수행정진 하시는 안국 선원의 신도님 들께서 함께하신다면 더 큰 결과를 이루실 것이라 기대 됩니다만.
▷스님: 복지 활동을 좋아하는데 특히 부산 쪽에서 최초로 활동을 하였고 지금도 연결선상에서 크게 이루려 하고 있지만 기본이 수행자로써의 입장을 견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수행자는 복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키워서 맡기고 국가나 사회단체, 여유 있는 사람들이 하고 수행자는 오직 수행만 전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절 신도님들을 다 수행자라고만 할 수 없지만 각자 자기 영역에서 봉사를 할 것입니다.
▶기자: 미주 현대불교 독자들을 위하여 면담에 흔쾌히 응해주시고 솔직한 답에 감사드립니다. 안국선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법의 소중한 인연을 만나 행복을 이루기를 기원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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