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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엉뚱하고 과격하게 들린다. 위대한 종교지도자를 ‘혁명가’라니 하는 생각 때문이다. 붓다의 행동과 가르침에서 붓다가 살았던 그 시대로 돌아가 본다해도 혁명가라 부르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기에 그렇게 부른다고 이 책의 저자인 법륜 스님은 말하지만, 붓다는 결코 혁명가처럼 선동하고 날뛰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조금 의외다. 법륜 스님은 지금도 ‘즉문즉답’을 통해 많은 불자들을 이끌고 있으므로 여기서 따로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성차별과 계급차별이 없었다고 할 수 없는 고대 인도에서 ‘평등’이란 가치와 가르침은 기존의 사회질서와 믿음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붓다는 위대한 스승 그 이상의 혁명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법륜스님의 설명이다.
법륜스님은 1960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내보다 한해 뒤다. 그러면서 그때 한국의 1인당 GDP가 100불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보다 360배 많아진 3만 6,000불이 넘는다고 하면서 물질적으로 360배 늘었다는 것이지만, 과연 우리가 360배 더 행복해졌는를 묻고는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비단 스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붓다에 대해, 불교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붓다가 살았던 당시의 인도 사회와 붓다의 집념을 알아야 한다. 인도에는 기원전 1000년경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살던 아리안족들이 힌두쿠시산맥과 파미르고원을 넘어 인도 대륙 북쪽 지금의 파키스탄 펀자브 지역으로 남하했다. 이들 중 일부는 서쪽 유럽으로 가 유럽인이 되었고, 나머지는 인도 문명을 이루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인도의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이 이룬 인더스 문명은 사라지고 아리안인에 의해 오늘날 인도 문명이 시원되었다. 오늘날의 인도 문명을 ‘아리안 문명’이라고 하는 이유다.
기원전 1000년 부터 기원전 800년까지를 브라만 시대 또는 종교시대라고 하고,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600년까지를 철학시대 또는 우파니샤드 시대라고 한다. 이때 인간이 자신의 본성인 아트만(我)를 발견하면 인간도 신과 다를 바 없다는 철학이 생겼고, 우주의 근본인 브라만(梵)과 개인의 진정한 자아인 아트만이 궁극적으로 동일하다는 ‘梵我一如’사상이 생겼으며, 이 상태를 모든 고뇌에서 벗어난 解脫이라고 하는데, 범아일여로 청정하고 고귀하며 영원한 아트만을 발견하게 되면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으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데, 여기서 불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붓다, 즉 부처가 출현한 기원전 6세기 인도는 오랜 평화가 깨지고 여러 나라가 각축을 벌였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300여 개 나라가 전쟁을 통해 통합하게 되는데, 이때 등장한 나라가 마가다국, 코살라국 등으로 16개의 나라가 남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철기 문명이 발달하면서 농업생산성이 크게 늘자 상업도 번창하였으며 거부인 壯者가 등장하고 전쟁에서 진 피정복민은 언제나 노예가 되었다.
이 무렵에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는 어릴 때부터 브라만의 가르침을 받아 쾌락주의를 받아들였으나, 출가하면서 沙門의 무리에 합류해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오늘날 불교는 인도의 전통 사상을 종교적으로 받아들여 전생에 의해 현생의 운명이 정해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붓다는 그런 운명론을 부정했다. 관상이나 사주, 손금이나 족상을 보는 것으로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붓다는 죄가 많아서 여자로 태어났다든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 노예로 태어났다든가 하는 주장을 단호히 부정했다.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고 성차별을 반대하면서 노예도, 여성도 출가하여 수행 정진하면 누구나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붓다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걷고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상징이나 비유로 봐야 한다. 일곱 발자국은 육도윤회(六道輪廻-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여섯 발자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것으로, 육도윤회를 벗어나 해탈에 이른 것을 말한다. 또 천상천하유아독존은 하늘 위, 하늘 아래,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통털어서 가장 위대한 존재라는 의미다.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이 세상이 다 괴로움에 빠져 있으니 마땅히 이를 구제하겠다’는 의미로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것은 붓다가 그런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 아니라 붓다의 삶 전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상과 인간의 생노병사를 고뇌하다 깨달은 붓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괴로움을 버리고 즐거움만 얻고자 하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욕망이 채워져 즐거움을 얻는다 해도 욕망은 멈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은 더 커지고 커진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또다시 괴로움이 생긴다. 부처는 정진하면서 이미 즐거움과 괴로움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괴로움의 뿌리에 욕망에 있으니, 욕망이 자유로워져야 괴로움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욕망에서 자유로워져 괴로움이 없어지면 즐거움도 같이 없어진다.
어리석은 사람은 즐거움을 구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괴로움이 따르고,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괴로움을 영원히 없애기 위해 즐거움마저 없애 버린다. 수행자에게 행복이란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 없는 상태, 즉 편안한 마음, 고요하고 적정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이 열반이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공간적으로 연관된 존재라서 개별적이지 않고, 시간적으로 서로 원인과 결과가 연결된 존재라서 항상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연기법을 알면 인도의 계급 사회도 브라만과 왕족이 따로 있거나 평민과 노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천하고 귀한 존재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 인식하고 있는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은 엄청나게 혁명적이었는데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만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으로 우리가 가진 많은 의문점은 이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지우침이 없는 中道와 우주의 실상인 연기법은 불교만 갖는 유일한 사상이 아니다. 과학에도 있고,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도 그것을 말했다. 그러나 싯다르타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설한 사물을 보는 관점인 것은 분명하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뒤에 맨 처음 한 일은 무엇일까? 그는 같이 구도하던 다섯 명의 친구들을 찾아가는 길에 한 브라만(사제)을 만났다. 브라만은 고귀함이 어떤 것이냐?고 붓다에게 물었다. 붓다가 대답했다.
“고귀함이라는 것은 태어남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귀함은 그 사람의 행위로 이루어집니다.”라고 대답했다. 브라만은 콧방귀를 뀌고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는 상인 두 명을 만났는데 그들은 붓다에게 공양을 올리기는 했지만, 법을 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서 갠지스강을 건너는데 뱃사공이 붓다가 배삯을 주지 않는다고 태워주지 않으려 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더 급했던 것이다.
가만히 보면 현대인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 사람은 신분이나 지위 명예와 복에 집착하고 아니면 일상생활에 쪼들려 살기에 급급하다. 또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에 집착하기도 한다. 더구나 종교적 사상도 그렇지만 정치사상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더한 것 같기도 하고….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법을 보고도 들을 수 있는 눈과 귀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비록 붓다의 일생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수나 공자 등 다른 성인의 교화 사례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애기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태어났는지 모를 일이다.
갠지스강을 건너 사르나트에서 수행하던 다섯 친구를 찾아가자 친구들은 멀리서 오는 싯다르타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싯다르타가 수행을 포기하고 떠났던 것을 기억하고는 그를 보자마자 “고타마 신수가 좋구려”하고 놀렸다. 그러자 붓다는 “나를 더 이상 고타마라고 부르지 마시오.”했다. “그러면 무어라 부르랴?”하였고 “여래라고 부르시오”했다. 여래는 ‘여여히 가다, 여여히 오다’라는 말로 진리로부터 오고 진리로 나아간다는 의미다. 친구들이 “당신이 깨달음을 얻은 겁니까?”하면서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이에 부처는 “여러분, 지난 6년간 우리가 같이 있을 때 내가 한 번이라도 거짓말을 했습니까?”하고 “나는 출가 전에는 욕망을 따라가는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출가해 6년간 수행할 때는 욕망을 억제하는 고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극단에 치우친 것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욕망을 따라가지도 않고 욕망을 억제하지도 않고, 다만 욕망을 욕망인 줄 알아차리는 중도의 길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여러분도 극단을 버려야 합니다.”하고 苦集滅道로 지칭되는 사성제(四聖諦)를 설하고, 그 방편으로 8가지 바른 가르침을 닦아야 한다는 것을 설하였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들 중 한 명인 콘단냐가 먼저 지혜의 눈을 열었고, 1주일 만에 다섯 명 모두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들은 붓다의 첫 번째 제가가 되었으며, 이들을 五比丘라고 한다.
이후 1000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자 그들과 같이 여러 곳을 거쳐서 마가다국 수도인 라자그리히에 도착했다. 그들은 성의 서문 15㎞ 밖 제타안에 머물렀는데, 그들의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가 마가다왕의 스승인 우루벨라 카사파가 젊은 사문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문도 그 중의 하나였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소문이었다. 붓다를 마중을 나간 빔비사라왕은 카사파와 같이 부처를 만난 자리에서 왕이 말했다. “카사파가 사문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그러자 카사파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합창하고 말했다.
“이분은 나의 스승이고 나는 이분의 제자입니다. 내가 이분을 만나기 전에는 윤회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하지만 이분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윤회의 씨앗을 버렸습니다.”자식보다 어린 붓다에게 이분이라 하고, 그의 제자를 자임하는 스승을 본 왕의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히 간다. 여기서 왕이 부처님께 법을 청했다. 부처의 법을 듣자 왕도 마음의 문이 열렸다. 왕은 너무 기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왕자일 때 5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1) 왕이 되는 것, 2) 내 나라에 부처님이 출현하는 것, 3)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 4) 부처님 설법을 듣는 것, 5) 내가 그 설법을 이해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모든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붓다여 왕궁에 와서 저의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그러나 부처님은 빔비사라왕의 공양을 거절했다. 수행자는 왕궁 같은 화려한 곳에서 대접받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자 왕은 왕궁밖 대나무 숲에 머물면서 제자들과 수행할 장소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이곳이 최초의 절 竹林精舍다. 이것은 매우 큰 사건이다. 제사장인 왕을 교화하고 인도에서 가장 큰 나라의 제왕으로부터 수행 처소를 제공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처가 죽림정사에 머무는 동안 소문을 듣고는 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다. 지혜제일 사리풋타, 신통제일 목갈라나, 두타제일 마하카사파가 부처의 설법을 듣고 모두 부처께 귀의한 제자다.
마하다국 다음으로 큰 나라가 코살라국인데, 그 나라의 파세나디왕이 부처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왔다. 그는 기원정사에서 부처를 보자 “나는 훌륭한 왕이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일반적으로 군대가 많아야 한다. 백성이 풍족하고 근심이 없어야 한다. 법과 질서가 바로서야 한다라고 말하지만, 부처님의 답을 달랐다.
백성을 사랑하기를 외아들 사랑하듯 하십시오.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십시오.
그러면 굳이 고행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지 마십시오.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지 마십시오.’이 유명한 설법을 통해 파사나디왕은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행복은 대부분 타인의 불행을 딛고 얻어진다. 내가 시험에 합격하면 다른 사람이 떨어지고, 내가 선거에 당선되면 다른 사람이 떨어진다. 이것은 부처님이 출가하게 된 동기, 즉 “왜 하나가 살기 위해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하는가? 왜 하나가 행복하기 위해 다른 하나가 불행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과 상통한다.
한때 불교계는 신통력을 많이 가질수록 수행력이 높다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인도와 중국에서는 밀교가 성행하기도 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부처님은 타인의 운명을 점치는 행위를 못하게 했고, 관상이나 손금을 보거나, 사주를 보고 길일을 잡는 등은 모두 타인의 운명을 점치는 행위로 수행자는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이 없어야 하므로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미래를 점치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현실 사이에는 이런 괴리가 있다.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을 먼저 이해 해야 한다’고 이 책의 저자 법륜 스님은 말한다.
세상의 절반인 여자에 대해 불교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지금이야 청도 운문사나 수덕사 도성암 같은 비구니 사찰들이 많이 있고, 일엽스님처럼 유명한 스님도 있지만, 비구에 비해 그렇게 많다고는 할 수 없다. 불교도 처음에는 여인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붓다의 사촌 아난다가 붓다의 양어머니 마하파자파티와 붓다의 부인 야소다라가 혼자 살면서 출가하기를 원하자 부처에게 물었다.
“왜 여인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으십니까?”그러면서 “마하파자파티와 야소다라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공덕이 매우 크니 여인들도 출가해 계율과 가르침을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했다. 이에 부처는 여성의 출가를 허락했는데, 전법을 시작한 지 20년이 지난 후다. 21세기 지금도 가톨릭에서 수녀는 사제가 될 수 없고, 특히 인도는 지금도 계급차별 보다 성차별이 더 심하다고 한다. 2600년 전 여성의 출가를 허용했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파격적인 혁명이 아닐 수 없다. 참 얼마 전에 영국에서 여성 사제를 임명했다는 소식이 있었던 것 같은데,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불교는 여성 출가를 허락한 후 500년이 지나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부활하면서 성차별이 심해지자 굽타왕조 시기에 여성의 출가를 폐지했다. 지금도 소승불교-남방불교 국가인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등 소승불교 국가에서는 여성은 출가수행은 하지만 흰옷을 입고 수행만 할 뿐 가사를 입을 권한은 없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 하나 더
코살라국 파세나디왕은 세속적인 질문을 많이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왕이 어느 날 부인과 이야기하던 중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재물, 왕위 같은 것보다 자기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면 부인은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서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 부인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부인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당시 인도에서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여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남편이고 백성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왕이었으므로 부인은 ‘당신’혹은 ‘왕’이라고 해서야 하는데도 부인도 자기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두 사람은 생각이 맞는지 부처님을 찾아가 물어보기로 했다. 부처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재물, 명예, 권력, 쾌락으로 인해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을 괴롭히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여러 번 공부하지만, 아직 의아한 것이 인도의 계급제도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카스트 제도가 그것인데, 최상층에 브라만이라는 사제가 있고, 그 아래 무사 계급인 크샤트리아, 다음은 사업자 바이샤, 가장 하층에는 노예인 수드라다. 그리고도 모자라 아예 접촉을 금한다는 불가촉천민이 있는데, 이들은 장례나 도살, 똥 치우는 일을 해야 한다. 지금도 여전히 인도는 계급 사회지만, 상위 카스트, 중위 카스트, 하위 카스트로 구분한다고 하는데,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바이샤는 상위 카스트로 약 15%가 해당하고, 위로부터 3,5,7%씩 해당한다고 한다. 중위 카스트에는 노예 계급이 여기에 해당하고 이들은 전체 인구의 65%를 차지한다. 하위 카스트는 달라트 계층으로 불가촉천민으로 약 20%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을 폐지하기 위한 해방운동이 펼쳐지고 있으나 오랜 관습이라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천민 계급 중에도 빨래하고 옷 짓고 밥 짓는 사람처럼 상위 계급과 접촉할 수 있는 천민이 있는가 하면, 그들끼리만 따로 모여 살며 바깥에서만 일하는 천민도 있다.
다시 부처로 돌아가 득도한 후 고향인 카필라성에 가서 샤카족을 위해 설법을 하자 많은 젊은이들이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했다. 이발사인 ‘우팔리’가 출가한 것도 이때다. 교화를 시작한 지 6년이 지난 후로 이때는 부처님을 대신해 사리풋타가 교단 체계를 만들어서 출가한 사람들을 교육하고 계를 받게 한 시기였다. 왕자들이 출가했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들의 머리를 깎아주던 우팔리에게 머리가 숙여지지 않았다. 머뭇거리자 부처님이 주의 주면서 ‘내법 안에는 차별이 없다. 우팔리에게 경배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샤카족이 세운 카필라국은 부처님이 출가함으로써 수도다나왕이 다음 왕위는 조카 마하나마가 계승했다. 인도의 2대 강국이던 코살라국 파세나다왕은 이미 부처의 법을 듣고 부처님께 귀의한 제자였지만, 후궁이 여러 명 있었으나 샤카족 공주와 혼인하기를 원했다. 샤카족은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자존심이 강한 나라였다. 카필라국은 공주를 후궁으로 보내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해 하녀 한 명을 공주로 꾸며 시집보냈다. 얼마 뒤 가짜 공주가 비루다라는 왕자를 낳았다. 왕자는 어머니를 따라 외가집에 가고 싶었으나 어머니가 하녀 출신이어서 고향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왕자는 다른 아이들처럼 외갓집에 가고 싶다고 졸라 결국 일곱 살 때 카필라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오는데 머물렀던 방에 소금을 뿌리는 것을 보고 왕자가 이유를 물었고, 어머니인 가짜 공주는 사실을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루다는 카필라국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되었고, 성인이 된 후 왕이 된 비루다는 원한을 갚기 위해 카필라국을 공격했다. 이에 부처님은 길목의 뙤약볕에 앉아 명상에 들었고, 비루다가 보고 반얀나무 그늘이 좋은 데 왜 뙤약볕에서 명상을 하십니까?하고 물었다. 부처님은 비루다가 카필라국을 침공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부처님에게 카필라는 모국이고, 코살라국은 모친의 나라였으니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친족의 그늘보다 더 좋은 곳은 없습니다’라고 말해 비루다왕이 세 번이나 전쟁을 멈추도록 하였으나 결국 카발라국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다.
“육신이 멀쩡한 사람이 왜 일해서 먹고살지 않고 남에게 빌어먹느냐?”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같지 않은가. 부처님께서 어느 브라만의 집에 밥을 얻으러 갔다. 브라만이 욕을 하며 한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가 으리으리한 집을 보고나서 “당신 집에 가끔 손님이 옵니까?”그렇다고 대답하자 “올 때 선물을 가져오기도 합니까?”하고 다시 물었다. “선물을 가져오지”라고 대답하자 “그 선물을 받으면 누구의 것이 됩니까?”하고 웃으면서 묻자, 브라만은 “내 하라고 준 것이니 당연히 내 것이지”라고 답했으나 부처님이 “만약에 당신이 그 선물을 받지 않으면 그것은 누구 것이 됩니까?”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거야 당연히 가져온 사람의 것이지”라고 했다. 이에 부처님은 빙그레 웃으며 “당신이 지금 내게 욕을 선물했는데, 내가 웃으면서 욕을 받지 않으면 욕은 누구겁니까?”이 말에 브라만은 큰 깨우침을 얻고, 공손하게 “부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들어오십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부처님의 일생 이야기와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는 이상으로 대략 끝을 내고자 한다. 이야기들이 더 많지만 부처님의 열반 이후의 세계로 들어가 보려고 한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교단에서는 작은 혼란이 있었다. 생전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 서로 의견과 주장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에 아라한 500명이 산 위에 모여서 경을 편집하기로 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25년간 시봉한 아난다가 초안을 내어 ‘제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같이 있을 때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라고 부처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면 아라한들이 동의하면서 그것을 노래로, 시로 암송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경으로 經은 진리에 대한 부처님의 설법이다. 또한 실천행위에 대한 부처님의 지침은 게율이었는데, 이것은 천민 출신이 우팔리가 초안을 내었다고 하고 같은 방식으로 결집 때까지 논의하고 토론해 경과 율이 정리되고 결집되었다.
인도의 아소카 왕 시대에 번창하던 불교는 이제 대승과 소승으로 나누어져 중국으로 전해졌다.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캄보디아, 베트남 등으로는 소승이 전해지고, 중국에는 소승과 대승이 전해졌으나, 중국에서는 대승이 성행하고 소승은 점차 소멸되어 갔다. 한국과 일본, 베트남은 대승불교권이 되었는데, 대승불교는 원래의 부처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진리는 과거로부터 전승된 윤리나 도덕, 관습과 습관, 계율이나 경전에 의해 검증될 수 없다.”는 것으로 ‘이것이 진리다’라고 정형화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고정불변한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법은 空하다’이런 관점에서 공사상이 대승불교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양·수·당나라를 거치면서 국가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시대인 372년 불교가 처음 들어은 것으로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지만,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48년 무렵에 장유화상에 의해 이미 가야에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통일신라 시대 五敎와 구산선문이 성립되며 발전했고 고려시대에는 천태종과 선종 등 11개 종파가 발전해 불교 국가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상대를 인정해 주는 것에서 종교를 봐야 한다. 믿음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판단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입맛이 다른 것을 그대로 인정해 주면서 서로 존중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인 인류 공동체의 붕괴, 자아 상실과 지구환경 파괴 같은 것들을 극복해 갈 수 있을 것이다. - 11.16 오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