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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양읍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古鏡 서교장
지리산둘레길 금계~~인월 19.4㎞… 둘레길 대표 풍경 다랭이논과 등구재(마천) 지나쳐 | |
이 구간은 2010년 9월 현재 개통된 5개 구간 중에 가장 길다. 길이가 긴만큼 지리산의 다양한 풍광과 길을 만날 수 있다. 경남과 전북의 도 경계인 등구재를 중심으로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하고, 마을과 산과 계곡을 지나면서 넓게 펼쳐진 다랭이논과 제방길․농로․차도․임도․숲길 등을 전 구간에서 골고루 섞여 두루 즐길 수 있다. 금계마을에서 출발한 둘레길은 창원마을~등구재~상황~서진암삼거리~장항교~장항~배너미재~수성대~중군마을을 거쳐 지리산길 안내센터가 있는 인월까지 총 19.4㎞에 이른다. 중간중간에 정상 천왕봉을 포함한 여러 봉우리들의 조망도 가능하다.
창원마을의 다랭이논길을 걷고 있다. 지리산둘레길의 대표적 풍경이다.
경남의 경계마을인 창원마을과 전북의 경계마을인 상황마을은 다랭이논으로 대표되는 지역이다. 등구재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펼쳐진 산자락을 개간해서 논으로 만든 우리 선조들의 대표적인 고생과 애환의 흔적이기도 하다. 애환의 결과는 넉넉한 인심으로 나타난다. 창원마을이 그렇다. 창원마을은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이 곳간마을로 불릴 정도였다. 조선시대 마천면 내에 관에서 거둔 물품들을 보관한 창고가 있다고 해서 ‘창말(창고마을)’이었다가 이웃한 원정마을과 합쳐져 창원마을이 되었다 한다. 창고마을이었던 유래처럼 지금도 경제적 자립도가 높은 농산촌마을이다. 다랑이논과 장작담, 마을골목, 집집마다 호두나무와 감나무가 줄지어 있고, 아직도 닥종이 뜨는 집이 있다.
창원마을의 당산나무. 매년 마을제사를 올릴 때 제주는 부부관계를 며칠간 금한다고 한다.
함양으로 가는 오도재 길목마을 어귀엔 300여년 수령의 느티나무 너덧 그루와 참나무가 둥그렇고 널찍한 당산터를 이루어 재 넘어가는 길손들의 안녕을 빌고 쉼터를 제공하는 풍요롭고 넉넉한 인심을 보여준다. 당산나무 쉼터에서는 지리산 주능선이 길게 늘어서 있고, 특히 천왕봉과 반야봉이 저 멀리 보인다. 둘레길을 걷는 맛이다. 잠시 조망감상의 시간을 가져도 좋을 장소다. 간간이 무인매점도 있다. 음료수와 간식 등 간단한 물품에 가격을 붙여놓고 돈만 두고 가라는 무인매점이다. 둘레길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시골의 훈훈한 인심이 느껴지는 풍경이기도 하지만 일손이 바빠 자리를 지킬 수 없는 시골의 형편을 대변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조그만 웅덩이 같은 연못에 탐방객들이 잠시 쉬어가기도 한다.
소나무 우거진 오솔길 사이로 우물보다는 조금 크고 저수지라 하기엔 조금 작은 저수지가 나왔다. (사)숲길에서는 “애초 둘레길을 조성할 때 이 저수지를 어떻게 활용할 지 많은 고민과 토의가 있었으며, 지금 각종 동물과 새들의 오아시스로 활용되고 있으니 그대로 두자고 결론내렸다”고 전했다. 정말 옛 모습 그대로다. 마치 거대한 원시 밀림을 아기자기하게 축소한 것 같은 모습이다. 저수지를 지나 조금 가파른 길을 올라서면 낙엽송 군락지가 시원스레 나온다. 쭉쭉 뻗은 낙엽송들은 쳐다만 봐도 시원하다. 군락지 끝 지점이 바로 경남과 전북의 경계인 등구재이다. 등구재는 고개 모양이 거북등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노을과 초저녁 달빛이 어우러지는 고갯길이라고도 한다. 이 길로 함양 사람들이 남원 인월장을 보러 넘나들었다. 새 색시가 꽃가마 타고 넘던 길이기도 했다. 지리산의 3대 시장이 인월장, 화개장, 덕산장이다. 그 인월장에 가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봇짐을 이고지고 가면서 발자국을 남긴 길이다.
등구재를 지나면 죽죽 뻗은 낙엽송 군락지가 나온다. 등구재를 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마을의 다랭이논들이 층층이 펼쳐져 있다. 지리산둘레길의 다랭이논의 아름다운 사진들은 상황마을에서 찍은 장면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다랭이논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인다. 농민들에게는 한없는 고생을 안기지만. 실제로 상황마을 할머니들은 “처녀시절 등구재를 넘으면 양지바른 곳에 부농이 많은 것 같아 이곳으로 시집왔으나 층층이 쌓인 다랭이논이 웬 놈의 일손이 그렇게 많이 가는 지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고 푸념했다. 그러면서 정감어린 표정으로 한바탕 웃어넘겼다.
조그만 웅덩이에서 탐방객들이 세수를 하기도 한다.
상황마을은 꿩의 꼬리 형국으로 해발 400m의 고지대로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마을이다. 양지바르고 토질이 좋아 이 주변에서는 가장 질 좋은 쌀이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평 윤씨 집성촌이기도 한 상황마을은 한때 권문세도가였던 파평 윤씨가 이 산중마을에서 세도를 지키려는 듯 독산재(獨山齋)란 재각이 서 있었다.
리기다소나무 군락도 곳곳에 눈에 띈다.
지금은 민박이라는 푯말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간이매점에 앉아 막걸리 한잔 걸치는 둘레길 탐방객들도 제법 있다. 길이 생기면서 지역경제에 미치는 긍정적인 부분이다. 주민들도 수입에 보탬이 된다고 좋아 하신다. 등고재황토방, 노고지리산방, 중황마을쉼터 등 걷는 사람들은 잠 잘 곳 걱정은 안 해도 될 정도로 많다.
장항마을의 당산 소나무에서 쉬고 있다.
어느 덧 중황마을이다. 마을 뒤쪽 백운산 기슭에 황강사(黃岡寺)란 절이 있었고, 그 북쪽으로 500m쯤 되는 곳에 풍수지리적으로 꿩이 엎드려 있는 복치혈(伏雉穴)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은 황강사의 황자와 복치혈의 치자를 따서 황치라 불렀으나, 마을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세 곳으로 나뉘어 그 중 가운데 위치해서 중황(中黃)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인근 매동마을은 2009년 지리산둘레길이 생기고 난 뒤 녹색농촌체험관에서 연 10억원의 수입을 올린 것으로 전한다. 수익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둘레길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부분이다. 마을 형국이 매화꽃을 닮은 명당이라서 이름 붙은 매동마을에서 장항마을 넘어가는 중간쯤에 약 900m 떨어진 곳에 둘레길의 유일한 갤러리가 자리 잡고 있다. 5년 전 서울 직장생활을 훌훌 털고 지리산 사진작가로 눌러앉은 강병규씨가 세운 지리산 전문 사진전시관이다. 지난해 개방이후 약 2만 여명이 둘렀다고 한다. 둘레길의 새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이젠 장항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앞이 탁 트여 지리산 천왕봉이 멀리 올려다 보이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 몇 년 전에 천왕봉이 보이는 방향에 콘도가 들어섰다. 그 뒤부터 마을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아프다고 한다. 믿거나말거나 얘기지만 실제로 아픈 사람이 늘어난 건 사실이란다. 장항마을은 일명 노루목이라고 한다. 노루 장(獐)자에 목 항(項)자를 써서 노루목이다. 마을산세의 지형이 노루의 목과 같은 형국이라 해서 붙여졌다. 마을 뒤쪽엔 당산 소나무가 수백 년째 똑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도 새끼줄이 쳐져 보호하고 있다. 매년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돌아가면서 지내는 제주(祭主)는 수일 전부터 부부관계를 일체 금지하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고 전했다.
등구재를 경계로 양쪽 마을에서는 다랭이논을 쉽게 볼 수 있다.
당산나무 조금 아래는 당산나무를 바라보며 쉴 수 있도록 자리도 마련돼 있다. 시원하게 펼쳐진 지리산을 볼 수 있다. 이제 잣나무숲길로 접어들었다. 편백나무, 소나무와 함께 피톤치드가 가장 많이 나오는 침엽수림이다. 여름에도 시원한 느낌을 준다. 이 숲길은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인월장으로 장보러 가던 그 숲길이다. 다른 장에서 가장 보기 힘들었던 물품이 바로 잣이었다. 지리산에서 잣 생산은 중군마을이 단연 으뜸이었다. 중군마을엔 아직 잣나무공장이 있다. 본업인 논농사 보다는 잣이나 송이버섯으로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중군마을은 임진왜란 때 전군, 중군, 후군 중에 중군이 머물렀던 마을이라고 해서 중군리 또는 중군동이라 붙여졌다.
지리산둘레길을 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정표.
다시 숲길로 올라섰다가 엄천강의 모습을 채 갖추지 않은 람천 둑방길로 걷는다. 월평마을이 저만치 보인다. 월평은 ‘달이 뜨면 보이는 언덕’이란 뜻에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월평마을은 지금은 달오름마을로 바꿔 부르고 있다. 이제 이 구간 마지막 지점이자 출발지점도 되는 구인월에 들어섰다. 마을 유래는 고려 말로 올라간다. 우왕 6년(1380년) 삼도 순찰사 이성계가 이끄는 토벌군이 인월에 본거지를 둔 왜장 아지발도와 황산 대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적의 행동을 탐지하기 위해 이성계 장군이 하늘에 달이 뜨기를 기원하니, 동쪽 하늘에서 밝은 달이 떠올라 활로서 아지발도의 목을 명중시켜 대승을 거뒀다고 전한다. 이 황산대첩에서 달을 끌어 앞당겨 뜨게 했다는 유래가 전하여 마을이름을 끌 인(引)자와 달 월(月)자를 써서 인월이라 부르게 됐다. 또한 인월역이 위치하여 역(驛)말로 불리다가, 그 후 마을을 분리함에 따라 구인월로 부른다. 구인월엔 지리산길 안내센터가 있다. 방문객 쉼터와 안내책자를 나눠주면 길 안내를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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