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본 세상이야기 Ⅵ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의 오페라 이야기
정 두 환(문화유목집단동행 예술감독)
오페라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작곡가, 오페라를 떠나서 다른 음악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은 작곡가라면 아마도 우리는 베르디라는 인물을 이야기한다. 그는 26편의 오페라를 작곡할 정도로 오페라에 방점이 있는 작곡가이다. <나부코, Nabucco. 1842>, <맥베스, Macbeth. 1847>, <리골레토, Rigoletto. 1851>, <일 트로바토레, Il Trovatore. 1853>, <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 1853>, <가면무도회, Un ballo in maschera. 1859>, <돈 카를로스, Don Carlos. 1867>, <아이다, Aida.1871>, <오텔로, Otello.1887> 등 그의 많은 작품 중 절반 이상이 아직도 공연되며, 오페라 애호가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베르디의 오페라 아리아가 흘러나오면 한번쯤 듣고, 보았을 것이다. 오페라를 이토록 사랑한 작곡가 그가 우리에게 오페라를 통해서 이야기하고픈 것은 무엇이었을까?
베르디는 1813년 10월 10일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주 파르마(Parma)의 작은 여인숙집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여인숙이란 곳은 과거나 지금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잠시 머물고 가는 곳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릴 적에 이미 음악의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다는 다른 음악가들과 달리, 베르디는 그냥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가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열 살 무렵 부세토라는 이웃 마을로 옮겨 학교를 다니면서 부터이다. 하지만, 1832년 열여덟살의 베르디는 밀라노로 가서 밀라노 음악원에 시험을 쳤으나 낙방한다. 베르디는 음악원 입학자격 연령을 네 살이나 초과한 것과 음악적 능력이 서투르다는 이유로 낙방한 것이다. 어쩔수 없이 베르디는 학교 입학보다는 개인 교습을 통하여 작곡 공부를 하게된다.
행운은 늘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온다. 그는 작곡가 이전에 지휘자로 먼저 알려진다. 밀라노의 악우협회(樂友協會)의 하이든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Die Schöpfung>를 대리 지휘하면서 그의 역량을 인정 받게되고, 이를 계기로 오페라 작품을 의뢰받게 된다. 이 작품이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 Oberto, Conte di San Bonifacio>로 베르디 최초의 오페라다. 이 작품으로 출판업자 조반니 리코르디가 출판 의뢰 하였으며, 3편의 작품 요청을 스칼라 극장으로 부터 받게된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좋은 일만 연속적으로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이 삶의 이치다. 당시 베르디는 아버지 친구의 딸과 20대에 결혼하게 된다. 결혼 후 두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20대 후반에 두 자녀에 이어 사랑하는 아내까지 잃게 된다. 베르디의 시련은 계속된다. 이후 스칼라 극장으로부터 의뢰 받은 오페라 <하루만의 임금님. Un Giorno di Regno>마저 실패를 거듭하게 되면서 더욱 심한 좌절을 겪게 된다.
베르디는 그를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의 응원에 힘입어 연속으로 오페라 작곡에 몰두한다. 그는 모든 열정을 오페라 작품에 쏟게 된다. 이로서 베르디는 오페라 작곡가로 튼튼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그의 나이 37살에 단숨에 작곡한 오페라가 지금 우리가 너무도 사랑하는 <리골레토. Rigoletto>이다. 이 오페라를 작곡한 시간이 겨우 40일이라는 짧은 시간을 보면 그의 음악적 역량과 천재성을 확인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그는 음악적 능력은 부족하였던 것이 아니라,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이었음이 시간이 흐를수록 증명된 것이다. 단순히 오페라 분야만 아니라 기악곡과 특히, <진혼미사곡, Requiem>등은 전세계에서 연주되고 있으며 많은 관객들로 부터 사랑받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베르디는 통일 이탈리아의 국회의원이 되어 국정을 의논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음악인이다. 이를 그가 우리에게 오페라를 통하여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베르디가 속해있던 이탈리아의 시대적 상황을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 이전이라 단일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지배지역은 독일어, 나폴리와 피에몬테는 프랑스어, 교황령 지역은 라틴어 등 각자 처해진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였다. 이는 지역 국민들의 사고체계를 흔드는 일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각 지방은 지방의 방언을 사용하였기에 베르디가 젊은 시절에 일하였던 부세토와 나중에 정착한 밀라노는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각자의 방언을 사용하였다. 이는 베르디가 흩어져 있는 국가를 음악으로 ‘하나의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가짐이였을 것이다. 이는 베르디가 14살때 발표된 소설 <약혼자, promessi>는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가 토스카나어로 발표하였다. 현대의 이탈리아어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며, 이 언어가 지금의 이탈리아어로 자리매김한 것에 베르디의 <약혼자>도 그 역할을 하였다. 예술가의 역할이 어디에 있는지 베르디가 직접 보여준 셈이다. 민족을 한곳으로 모으는 힘. 그 힘이 예술에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술가들의 숙명인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베르디에게 이러한 숙명 같은 일은 어쩌면 어릴 적 학교 공부를 비롯하여, 다양한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언어의 장벽이 새로운 사고로 변화하는 노둣돌이 되었을 것이다. 어려운 환경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힘. 그 힘든 일을 이겨내었기에 사람들은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베르디 오페라는 곳곳에 자유를 향한 열망이 녹아있다. 1842년 발표된 오페라 <나부코, Nabucco>는 바벨로니아 왕 나부코를 주인공으로 만든 작품으로,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의 환경과 심정을 묘사하였다. 여기서 유명한 노예들의 합창이 울려 퍼진다.
‘가라, 내 마음이여 황금빛 날개를 타고 언덕 위로 날아가라.
훈훈하고 다정하던 바람과 향기롭던 나의 고향,
요단강의 푸른 언덕과 시온 성이 우리를 반겨주네,
오, 빼앗긴 위대한 나의 조국이여.
오, 절망으로 가득 찬 소중한 추억이여.
선지자의 금빛 하프여.
그대는 침묵을 지키고 있네
우리 기억에 다시 불을 붙이고,
지나간 시절을 이야기 해 다오
예루살렘의 잔인한 운명처럼
쓰라린 비탄의 시를 노래 부르자
이 고통을 참을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리라.’
그가 부른 자유의 노래는 오스트리아의 압정에 시달리던 밀라노 사람들에겐 희망의 불씨를 남기는 결과를 만들었다. 오페라 <나부코>가 발표된 이듬해인 1843년에 베르디는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 I Lombardi alla prima crociata>를 발표하였으며, 이후 빅토르 위고의 원작을 각색한 <에르나니, Ernani. 1844>, <잔 다르크, Giovanna d’Arco. 1845> 등을 발표하며 이탈리아의 독립을 갈망하는 국민들의 염원을 오페라를 통하여 음악으로 이야기하였다. 베르디는 명실상부한 독립애국지사이며, 독립군의 역할을 하였다. 통일 이후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이탈리아 왕국의 국회의원직을 지냈으며, 1874년에는 상원의원으로 지명되기도 하였다.
베르디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음 오페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페라 <리골레토, Rigoletto. 1851>, <트로바토레, Il trovatore. 1863>, <트라비아타, La Traviata. 1853>의 주인공들은 모두 사회를 움직이는 주도자들이 아닌 소외된 사람들이다. 광대인 늙은 아버지와 진실한 사랑을 이용한 귀족으로 인하여 사랑에 배신당한 딸의 죽음을 그린 <리골레토>, 집시 노인의 한과 형제의 다툼을 그린 <트로바토레>,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창녀의 비극을 그린 <트라비아타> 하지만, 이 비극의 내면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베르디는 조국의 재통일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자기희생적인 영웅주의와 자유주의를 노래하고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환경과 처지를 어떻게 해서든지 벗어나길 원했을 것이다. 이러한 심리를 조국이라는 큰 틀에 녹여내는 그림을 베르디는 끊임없이 그려나갔다. 이것이 베르디의 정체성이며 이후의 역할이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현재도 베르디 오페라를 일반 관객이 사랑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국의 재통일을 희망하며 국민들에게 불러 일으킨 애국심. 사회에서 소외된 시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시민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모습 등. 실제적으로 일어났던 스웨덴 왕의 암살을 소재로 한 <가면무도회>를 비롯하여, <운명의 힘. La forza del destino. 1862>, <돈 카를로>, <아이다> 등 정치적 상황을 노래한다. 이러한 것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삶의 모습이며 모두가 직접적으로 격게되는 생활의 이야기인 것이다. 예술이 삶을 떠나지 않는 실제의 위로와 위안, 꿈과 희망을 노래하고 있기에 베르디 오페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베르디의 음악과 사회적 과정을 살펴보면 ‘과정은 결과를 부인할 수 없으며, 결과 역시 과정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베르디 오페라를 살펴보면서 느낀 필자의 생각은 예술가의 삶과 일반 사회인의 삶을 구분해서 살 수는 없다. 표현 방법이 다른 도구를 사용할 뿐이다. 각자가 가진 능력으로 상황에 맞게 사용하면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진심을 담을 것인지와 사회와 본인 중 어떤 것을 중요하게 바라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방법으로 사회를 그려갈 때 보다 풍요롭고 풍부한 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세상은 이런 다양한 삶을 담는 그릇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몫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사회를 살찌우는 방법이다.
우선 만나게 되면,
그는 약간의 고통속에서
부르겠지,
“귀여운 아내여,
베르베나의 향기여”
그 이름은 그가 나에게 와서 사용했던 것,
이 모든 일이 발생할 것이며,
너에게 약속하마
억제하라 너의 두려움을,
나는 확신을 가지고 그를 기다린다.’
위의 노래는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초초상이 부르는 ‘어느 개인 날 (Un bel di vedremo)’이다. 이 노래가 희망의 메세지로 들리는 것은 다음의 시간을 알 수 없는 인간의 노래로 필자가 글을 쓰는 내내 흥얼거리게 되는 희망가이다. 미래는 다음의 것이며 인간은 시간을 내다보거나 예단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
(사)부산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artpusa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