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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령성 청동기문화, 하가점하층문화 |
작금 우리 사회에서는 고조선사와 단군에 대한 논란이 재연되고 있고, 북한에서도 '단군릉' 발굴 이후 종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고조선사 체계를 제기하고 있다. 고조선사와 단군을 둘러싸고 되풀이되고 있는 이러한 논란을 한 단계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조선사 자체에 대한 객관적 연구의 심화가 필요하다. 이 과제를 수행키 위해서는 중국 동북지방, 즉 만주 일대에서 출토되는 고대의 유적과 유물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 기초적인 작업 없이 중국학계가 발표한 논문과 보고서 등의 2차 자료에 의거하여 연구할 경우, 그들이 설정한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학계에서는 요령성 지역의 다양한 청동기문화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유물인 비파형(요령식)동검에 주목하고 있다. 과연 이 동검을 사용한 집단이 누구인지에 대해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고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포함해 대개 고조선 사람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필자는 그 동안 몇 차례 중국 동북지방을 답사하면서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많은 유적·유물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 최초의 국가 고조선 사회와 요령지역 청동기문화의 관련성 여부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구 논문 작성시 제일 먼저 유념하는 것은 비파형 동검의 분포 지역이 그대로 고조선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연구는 먼저 고조선 사회가 그렇게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사회발전 단계에 도달하였는지에 대해 실증이 된 뒤 그에 합당한 영토 범위가 논의되어야 한다.
요서 지역 하가점상층문화의 담당자
종래 만주지방 고고학 자료에 대한 논의는 이른바 '비파형(요령식)동검문화'에 대한 해석여부를 둘러싼 것이었다. 논의과정에서 고조선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관건이 되는 부분은 비파형동검이 집중 출토하는 요서(遼西) 지역 청동기문화를 과연 어느 주민집단의 문화로 보느냐 하는 점이다.
요서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일반적으로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하가점(夏家店) 유적의 생활 문화층을 기준으로 '하가점 상·하층문화'라고 부른다. 특히 하가점 상층문화는 요령성 서쪽인 요서 지역 전체에 분포하고 있다. 그 대표 유적으로는 영성현 소흑석구·남산근, 릉원시 삼관전자, 조양시 십이대영자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돌널무덤 안에 많은 청동기와 껴묻거리를 가진 주인공들이 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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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소흑석구 유지 | 남산근 출토 | 요서 능원현 삼관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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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흑석구 출토 투구 |
중국 선진(先秦) 문헌에는 요서 지역에서 기원전 8∼7세기경에 활동한 종족으로 산융(山戎)·동호(東胡)족이 등장한다. 그 동쪽지역에 예맥(濊貊)·조선(朝鮮)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비파형 동검은 산융족이 활동한 요서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비파형 동검을 주로 사용한 주민집단이 살았던 지역이 요서일대라는 것이다. 또한 하가점 상층문화 분포지역은 대부분 산과 계곡 사이에 있다. 이것은 산융의 명칭과도 부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하가점 상층문화 무덤 가운데 대량의 무기들, 예를 들면 청동창·청동단검·청동칼 등이 출토되는 것은 오랑캐들이 정복전쟁에 뛰어났다는 것과 잘 부합한다. 그렇다면 남만주 일대에서 비파형 동검문화를 주도한 민족은 요서 지역에 거주한 '산융' 등 여러 오랑캐족으로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요동~서북한 지역 비파형 동검문화의 담당자
고조선의 세력권이나 영역과 관련해서는 요서 지역보다 요동지역이 주목된다. 그것은 요동지역의 청동기문화가 한반도 청동기문화와 직결되고, 또 요서 지역과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표지유물로는 비파형 동검 외에도 고인돌과 미송리형 토기라는 새로운 자료가 중요하다.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 문화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그 가운데 전기 문화는 기원전 1,000년기 초에 나타난 초기 비파형 동검문화의 발전에 기초하여 기원전 8∼7세기경에 형성되었고 이때 초기 고조선 사회가 성립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초기 고조선 시기에는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이 하나의 일정한 세력권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요동지역의 고인돌은 중국학계에서는 석붕(石棚)이라고 하는데, 모두 탁자식(북방식)으로서 한반도 서북지방의 탁자식(북방식, 오덕리형) 고인돌과 기본적으로 같은 형식을 하고 있다. 이것의 분포 지역은 천산산맥 언저리의 산지와 요하 남쪽 즉 요동반도 지역에 집중한다. 고인돌 내부에서는 팽이형 토기가 나오는데 이는 미송리형 토기와 함께 고조선 시대의 중요 토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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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주 석붕산 석붕 | 해성 석목성 고인돌 |
고인돌의 형식 및 입지상 특징은 얇은 두께로 잘 다듬은 판돌을 짜 맞추어 벽체를 만들고 그 위에 커다란 뚜껑돌을 덮어 'ㅠ'자형의 무덤방을 만든 것으로 그 형태가 마치 제단과 같은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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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령성 해성시 석목성 지석묘 |
특히 지석묘가 위치한 지점은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구릉상에 단독으로 분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한반도 서북지방의 경우도 동일한 사항이다.
고인돌의 형식[탁자식]과 입지상의 특징 및 고인돌 안에서 같은 형식의 아가리를 따로 만들어 붙인 토기가 나오는 것이 요동지역과 한반도 서북지방이 거의 유사하므로 양 지역 간에 문화적 유사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양 지역에 걸쳐 동일한 정치체가 있었음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즉 요동∼서북한지역에 걸친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의 분포지역은 대개 초기 고조선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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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 정가와자 박물관 | 심양 정가와자 1,2지점출토 유물 | 심양 정가와자 출토 토기 | 심양 정가와자 |
고인돌 외에 요동지역에서 고조선 세력과 관련되는 중요한 유적으로는 심양 정가와자와 요양 이도하자를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초기 미송리형 토기와 비파형 동검이 나오는 유적과 그 이후 단계의 후기 미송리형 토기[=검은간토기]와 세형 동검이 나오는 유적이 같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동일지역에서 예맥 계통 주민집단이 계속 거주하고 문화를 영위해 나갔음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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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 미송리 출토 미송리형 23.5 |
나머지 말
우리나라 요령지역 청동기문화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 역사상 초기국가와 관련된 문헌이 적으므로 고고학 자료를 통해 그 실상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여름방학 등을 이용해 중국 땅에 가보면 잡초와 우거진 풀 때문에 과거의 역사적 현장을 제대로 살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지형만이라도 보겠다는 심정으로 답사하는 것은 무엇보다 유적과 유물을 실제 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적·유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그 유물 하나하나에 대해 역사학자의 해석이 필요하며 해석을 위해서는 문헌자료에 바탕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최종적인 판단은 문헌에 두어야 하며 한국 고대사 전 체계 속에서 과연 요령지역의 청동기문화를 우리 역사와 관련시켜 보아도 문제가 없는 지를 기본적으로 염두에 두고 서술해야 할 것이다 .
송호정(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고대사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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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육조문화와 백제문화
1. 육조와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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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직공도(梁職貢圖)』중 백제사신도 |
몇년 전 한 일본인 고고학자가 말했다. "남경(南京)을 다녀오십시오. 그러면 백제가 보일 겁니다." 그러나 그 말을 귀담아 두지 않았다. 백제문화의 독자성을 시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경이 백제와 교류하던 남조국가들의 도성인 점은 알고 있었으나 그걸로 그만이었다. 남경은 대학살이란 어두운 이미지로 다가올 뿐이었다.
작년부터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물을 정리하면서 수백 점의 중국 도자기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중국 강남지방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육조 문물에 대한 관심은 증대되었고 백제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방편이 될 것이란 생각을 굳히면서 남경답사를 계획하였다. 마침내 8인이 의기투합하여 올해 6월 강소(江蘇)·절강(浙江) 일대를 답사하게 되었다. 답사단은 짧은 일정 내내 백제문화와 육조문화의 긴밀한 관련성에 놀랐고, 이제야 그것을 깨닫게 된 그간의 무지와 무관심을 반성하였다.
2. 육조의 시간적·공간적 범주
육조는 현재의 남경에 도읍하였던 여섯 왕조, 즉 동오(東吳, 222∼280), 동진(東晋, 317∼420), 송(宋, 420∼479), 제(齊, 479∼502), 양(梁, 502∼557), 진(陳, 557∼588)을 일컫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기에 서진(西晉, 265∼317)을 포함시키기도 하는데, 280∼317년은 서진 통일기로서 강남지역에서도 서진시기 문물이 다량 발견될 뿐만 아니라 월주요(越州窯) 청자의 발전과정에서 이 시기가 매우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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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강성박물관 |
남경은 동오가 성으로 삼으면서 건업(建業)이란 야심찬 명칭을 붙인 데서 출발한다. 훗날 동진이 남천(南遷)하면서 건강(建康)이라 개칭한 후 진(陳)까지 이어졌다. 『양직공도(梁職貢圖)』와 흑치상지묘지(黑齒常之墓誌)로 우리에게 친숙한 남경박물원(南京博物院)과 남경시박물관(南京市博物館)이 육조문물에 대한 조사와 전시의 중심이다. 남경의 동편에 위치한 진강(鎭江)은 손권(孫權)이 남경으로 천도하기 전의 수도였으며, 단양(丹陽)에는 제(齊)와 양(梁)의 황족 능묘가 다수 분포하고 있다.
항주(杭州)는 절강성의 성도(省都)로서 서호(西湖) 옆에 자리잡은 절강성박물관에는 소흥(紹興)·상우(上虞) 등 항주만 일대에서 제작, 사용된 월주요 청자가 다수 전시되고 있다. 영파(寧波)는 바다를 통한 대외교역의 출발점으로서 고려·베트남·일본의 유물도 발견되고 있다.
3. 육조관련 중요 유적과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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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강 화산만고성(花山灣古城) 성벽과 해자 |
1) 성터[城址]
남경의 건강성(建康城)은 양 무제(武帝)대에 28만 호, 10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거대도시였는데, 549년 성왕(聖王)이 파견한 백제 사신이 후경의 난으로 파괴된 성곽을 보고 울다가 구금되는 고초를 겪었던 바로 그 성이다. 석두성(石頭城)은 서쪽으로 양자강을 접해 축조된 천혜의 요지로서 건강성을 방어하는 기능을 가졌다. 212년 손권이 건설하였고 동오 멸망시 손호(孫皓)가 여기에서 항복하였다.
진강에는 손권의 최초 도성이었던 철옹성(鐵甕城)이 있다. 화산만고성(花山灣古城)은 구릉 위에 위치한 판축토성으로서 길이 2.3km, 높이 12∼15m로서 성벽 바깥에 해자(垓子)를 갖추고 있는데 답사단 모두 백제의 풍납토성과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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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제명제릉(齊明帝陵) 석각 |
2) 능묘(陵墓)
남경을 둘러싸고 있는 야산에는 육조 귀족들의 무덤이 가족단위로 분포하고 있다. 대개 벽돌로 쌓은 전실묘( 室墓)이며 월주요에서 제작된 청자류, 돌이나 전돌에 새긴 묘지(墓誌)와 매지권(買地券) 등을 부장하는 점이 특징이다. 진(晉)의 남천 이후 경제력의 고갈로 황제릉이라도 그리 규모는 크지 않고 석각(石刻)도 세워지지 않다가, 제(齊) 이후 황제릉 앞에 다양한 석각이 세워지기 시작한다.
단양(丹陽) 일대에는 제 명제(明帝), 양 문제(文帝)와 무제(武帝) 등의 무덤이 존재하는데 무덤에서 1km 정도 앞부터 신도(神道)가 이어지고 신도가 시작하는 부분에 석각이 존재한다. 석각은 석수(石獸)와 석주(石柱), 석비(石碑)로 이루어지는데 석수 중 뿔이 둘인 것을 천록(天祿), 하나인 것을 기린(麒麟)이라고 하며 황족만이 석각을 세울 수 있었다. 남경의 감가항(甘家巷)지구에도 양(梁) 황족의 능묘와 석각이 집중되어 있는데 소수(蕭秀), 소회(蕭恢), 소담(蕭憺), 소경(蕭景) 등의 석각이 저명하다. 이 무덤들은 모두 6세기 전반에 해당되므로 무령왕릉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렇다면 무령왕릉 앞에도 신도와 석각이 있었을 가능성을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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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 서하사 천불암 |
3) 신앙관련 유적
남경의 서하사(栖霞寺)는 489년 남제(南齊)가 창건한 후 제와 양의 귀족 원찰로서 기능하면서 천불암(千佛岩)이 형성되었다. 1994년 조사시에 석굴은 250개소, 불상은 520개가 확인되었다. 남경 북교 자금산(紫金山)에서는 1999년 남경시 문물연구소에서 제단(祭壇) 유적을 발견했다. 5단의 석축 방단(方壇)으로 구성되었으며 전체 면적은 8000㎡로서 내부에서 제사용 구덩이(목탄과 동물뼈 출토), 벽돌[塼], 평와(平瓦), 와당(瓦當) 등이 다수 출토되고 있다. 송(宋) 효무제(孝武帝)대의 북효단(北郊壇[地壇])으로 추정된다. 공주 송산리에서 발견된 방단유구는 개로왕의 허묘라는 주장과 제단이란 주장이 맞서고 있는 형편인데 양자의 비교가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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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강 왕가롱 요지(王家弄 窯址) 주변 청자 각종(만당~오대) |
4) 청자가마
절강성 은현(浙江省 縣)의 동철호(東錢湖) 주변과 자계시(慈溪市) 상림호(上林湖) 주변에는 육조 이후 5대에 걸쳐 번성한 청자가마가 집중되어 있다. 이곳은 월주요의 본고장으로서 토지가 비옥하고 수운이 발달하여 한대(漢代) 이후 청자 생산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현재도 가마 주변에서는 청자편과 소성에 이용된 갑발(匣鉢)이 수없이 발견된다.
4. 백제와 관련된 육조문물
고구려나 신라와 달리 백제지역에서는 육조 문물이 다량 출토되고 있다. 대부분의 유물은 서울, 공주, 부여 등 백제의 도성이나 지방 수장급 분묘에서 출토되고 있어서 백제 유적·유물의 연대결정에 활용되기고 하고 위세품의 분여에 나타난 중앙-지방관계의 추적에도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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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풍납토성 출토 전문도기 |
서울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홍성 신금성에서는 서진(西晉)의 시유도기(施釉陶器)와 전문도기(錢文陶器)가 다수 출토되었으며 개성(開城)과 웅천(熊川) 지역에서도 서진제 청자류가 출토된 바 있다. 종전 백제유적에서 발견되는 육조문물의 연대는 『진서(晉書)』와 『삼국사기』의 관련기록을 근거로 모두 372년 이후로 여겨왔다. 하지만 최근 서진 유물이 백제지역에서 다량 발견됨으로써 백제와 중국의 최초의 교섭은 100년 정도 상향조정되었다. 동진(東晋) 이후의 유물은 서울 몽촌토성·풍납토성·석촌동고분군, 원주 법천리, 천안 화성리와 용원리, 익산 입점리, 부안 죽막동 등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공주 송산리 6호분 출토 "양관와위사의(梁官瓦爲師矣)"명 전(塼)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백제 전실묘( 室墓)가 육조, 특히 양(梁)의 그것과 관련됨은 분명하다. 6호분에 그려진 사신도는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린 것이기 때문에 남조의 화상전묘(畵像 墓)나 전화묘( 畵墓)와는 차이점이 있다. 이점에서 직접적인 연결이 주저되었지만 남조 전실묘 중에는 송산리 6호분처럼 벽에 석회를 바르고 그린 벽화가 상당수 존재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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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묘지 각종 |
무령왕릉의 축조 주체에 대해 중국과 일본 학자들은 대체로 중국 장인(匠人)을 상정하며 국내 학자들은 중국 장인의 기술지도하에 백제 장인의 활약을 강조한다. 아울러 무령왕릉 벽의 가구방법이 남조의 그것과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최근 남조묘에 대한 조사가 증대하면서 무령왕릉의 구조와 흡사한 예들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에 단편적인 사실만으로 논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남조묘에 대한 종합적인 정리가 시급히 요망된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돌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이 묘지냐 매지권이냐 하는 해묵은 논쟁도 육조의 묘지와 매지권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 없이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반성할 만하다. 그러다 보니 "율령(律令)"이란 문구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거나 무령왕릉의 "부종율령(不從律令)"이란 표현이 중국에는 없다는 주장마저 나왔지만 동일한 표현이 중국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현 단계에서 판단컨대 무령왕릉의 경우는 묘지와 매지권을 결합시킨 것으로 판단되며 육조 무덤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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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의 청자 호자 | 개성출토 청자호자 |
육조 문물은 직접 유입되었을 뿐 아니라 백제 문물에 직간접의 영향을 끼친 부분도 적지 않다. 백제에서 발견된 육조 자기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반구호(盤口壺)와 계수호(鷄首壺)이다. 양형기(羊形器)와 타호(唾壺), 호자(虎子)는 각 1점씩에 불과하며 오련관(五聯罐), 벽사(酸邪) 등은 전무하다. 따라서 백제인들이 선호하였던 별도의 기종이 존재한 것으로 이해된다. 청자 호자(虎子)와 삼족연(三足硯)은 백제 토기로 변용된다. 특히 삼족연은 백제 토기 고유의 기종인 삼족기로 장기간 제작된다. 중국의 벼루가 삼족에서 다족(多足)으로, 그리고 대좌형태로 바뀌는 양상은 백제 토기에서도 충실히 재연된다. 백제 토기 뚜껑의 발생에도 중국 자기의 영향이 지대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청자 세(洗)와 궤( )를 모방한 토기가 제작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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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 연화문 와당 | 백제 연화문와당 |
육조 자기의 제작기법 중 특징적인 부분들, 예컨대 기면(그릇면)을 회전시켜 깎아서 요철문의 효과를 내거나 점토띠를 꾹꾹 누른 부가퇴문(附加堆文), 사격자문(斜格子文)과 연주문(聯珠文) 등은 한성시기 백제토기 제작법에 채용된다. 이런 점에서 육조문물의 직접적인 유입양상 만이 아니라 백제 문화에 끼친 물질적·정신적 영향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가 요망된다.
권오영(한신대 국사학과 교수, 고대사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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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중국 한~당 고분벽화의 비교
고분벽화는 죽은 이의 쉼터인 무덤 안에 그린 그림이다. 때문에 장의미술의 한 장르로 구분된다. 자연히 고분벽화는 무덤에 묻힌 주인공이 살던 사회의 우주관, 내세관 등을 담아낸다. 어떤 경우에는 고분벽화에 고분이 만들어지던 시기의 풍속이나 생활습관까지 자세히 표현되기도 한다. 고분벽화는 그림으로 남겨진 당대의 생생한 역사의 증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누구인가 벽화가 그려진 고분 안에 들어간다면 그는 타임머신을 타고 고분이 만들어지던 시대로 들어간 것과 같은 느낌을 지니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고분벽화가 다수 만들어졌다. 오늘날 고구려의 벽화고분은 발견된 것만 90기가 넘고 전기의 수도였던 집안, 후기의 수도였던 평양과 그 주변지역, 재령강 유역의 안악지역에서 주로 발견된다. 고분벽화가 그려지던 초기에는 주로 생활풍속, 중기에는 생활풍속·장식무늬·사신, 후기에는 사신(四神)이 벽화주제로 즐겨 선택되었다. 초기에는 중국 장의미술의 영향을 받기도 하나, 점차 고유의 문화를 바탕으로 외래의 문화요소들을 고구려식으로 소화하고 재창조한 작품들을 선보이게 된다. 후기의 사신도 가운데에는 구성과 표현 모두에서 고구려 고분벽화 특유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들이 많다. 반면 백제와 신라, 가야에서는 고분벽화가 유행하지 않아 현재까지 각각 2기, 2기, 1기가 발견된 상태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한∼당 고분벽화와의 영향관계를 짚어내게 하는 주요한 장면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①각저총 앞방 및 널방 벽에 등장하는 거대한 나무와 한(漢) 화상석의 연리수(連理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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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저총의 거대한 나무 | 한(漢) 화상석의 연리수(連理樹) |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각저총 벽화의 주요한 소재 가운데 하나인 '거대한 나무'는 우주나무, 신성한 나무, 땅과 하늘을 잇는 우주 기둥이라는 신화적 의미를 지닌 존재이다. 남으로 내려오던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거대한 나무 밑에서 쉬다가 어머니 유화가 보낸 전령 비둘기를 발견하고 오곡의 종자를 건네 받았다는 이야기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나무'라는 벽화 소재의 관념적 근거는 고구려인 고유의 나무 신앙에서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압록강 중류지역 산간지대 자작나무 숲에서는 찾아내기 어려운 넝쿨꼴 가지의 조형적 연원은 한나라 화상석에서 확인되는 상서(祥瑞) 관념 표현 가운데 하나인 연리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각저총 벽화의 나무는 고구려인 나름의 신성한 나무에 대한 신앙을 한나라 화상석 이래의 연리수 표현 방식을 빌려 나타낸 사례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②장천1호분 앞방 천장고임의 역사와 전한 마왕퇴1호분 출토 백화 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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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1호분 앞방 천장고임의 역사 | 전한 마왕퇴1호분 출토 벽화 중의 역사 |
불교적 소재 중심의 벽화로 잘 알려진 장천1호분에서 고구려의 대외 문화교류의 양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 새롭고도 주요한 소재 가운데 하나는 천장고임의 각 삼각석 측면에 그려진 역사(力士)이다. 코카서스계 인종의 특징을 얼굴에 담고 있는 이들 역사는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틀라스와 같은 존재로 하나 같이 하늘세계를 힘껏 떠받치는 존재로 그려진다. 장천1호분 벽화의 역사는 중국의 전한대 고분에서 출토된 백화(帛 ) 중의 역사가 전형적인 중국인으로 그려지는 것과는 대비되는 존재이다. 만일 장천1호분 벽화의 역사가 중국 장의미술에 등장하는 이와 같은 소재 표현의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결과라면 얼굴 모습이나 몸매, 복식에서 왜 양자 사이에 명백한 차이가 나타나는지를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결국 장천1호분 벽화에 묘사된 역사는 다른 몇몇 소재와 함께 초원의 길을 통해 서역으로부터 고구려에 직접 전해진 문화요소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③진파리1호분 널방 벽의 하늘연꽃과 낙양망산상요촌 출토 북위석관 선각화 속의 하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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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파리1호분 널방 벽의 하늘연꽃 | 낙양망산상요촌 출토 북위석관 선각화 속의 하늘연꽃 |
6세기 중국의 남북조 미술에서는 강한 기운의 흐름을 타고 움직이거나 모습이 바뀌는 존재들이 즐겨 표현된다. 용이나 호랑이, 봉황과 같은 상서로운 동물을 타고 하늘을 나는 신선, 혹은 천인들, 온갖 존재로 화생하는 연꽃, 기운을 타고 흐르는 구름 등은 이 시기 남북조 석굴사원의 장식과 석관 선각화에서 쉽게 확인되는 대표적 제재라고 할 수 있다. 하늘연꽃과 용을 탄 주악천인들로 가득한 낙양 망산 상요촌 출토 북위석관 역시 이 시기를 풍미하던 이러한 흐름을 잘 담고 있는 유물이라고 하겠다. 용을 탄 채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의 머리 뒤에 묘사된 것은 화생 중인 연꽃인데, 유사한 표현이 고구려의 진파리1호분 벽화, 백제 무령왕릉 출토 왕비 목침 문양 중에 보인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진파리1호분 널방 벽 곳곳에 보이는 연꽃 역시 화생 중인 하늘연꽃이다. 이미 용(龍)이나 서조(瑞鳥)로 화생한 것도 있고, 이제 막 봉오리가 열리려고 하는 것도 있다. 변화를 자아내는 기운의 강하고 빠른 흐름, 그 흐름의 일부로, 혹은 흐름을 타고 나타나는 온갖 존재에 대한 관념과 형상화라는 면에서는 서로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허공을 허공답게 비워둠으로써 기운의 흐름을 보다 넓은 공간 속에서 인식하고 나타내려는 점에서 진파리1호분 벽화는 북위 석관의 선각화와 구별된다. 넓고 여유 있는, 그래서 깊이도 있는 공간인 까닭에 진파리1호분 벽화 하늘연꽃의 인동잎은 기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기운의 일부처럼 인식되고 표현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간의 여유가 없어 인동잎의 끝이 뻗거나 흐르지 못하는 북위 석관 선각화와는 다른 세계를 고구려 고분벽화 속에서 읽어낼 수 있지 않은가.
④오회분4호묘 널방 천장고임 해신, 달신과 당(唐) 아스타나 고분 출토 백화의 복희,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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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달신,오회분4호분,널방 천장 |
6세기 집안지역 고분벽화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널방 천장고임에 묘사된 신들의 세계이다. 특히 사람 몸에 용꼬리를 지닌 모습으로 그려진 해신과 달신은 같은 시기의 다른 지역 고분벽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소재이자, 높은 회화적 완성도를 과시하는 작품이어서 벽화 제작 당시 고구려 사회를 풍미하던 신화체계 및 고구려 문화의 수준과 관련하여 관심과 연구의 대상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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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희,여와, 당(唐) 아스타나 고분 출토 벽화 |
사람과 뱀, 혹은 사람과 용의 합성체로 그려진 신(神)에 얽힌 이야기는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신화적 소재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경우, 중국 창세신화 중의 남매신 복희, 여와 이야기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음양론의 본격적 전개와 함께 인신사미(人身蛇尾)의 복희, 여와는 이전의 창세신적 성격을 일부 간직한 채 해신과 달신으로 새롭게 인식되고 표현되기에 이른다.
중국의 투르판 아스타나 당대(唐代) 고분군 출토 백화 중의 복희, 여와는 손에 창세신의 상징인 규(規)와 구(矩)를 든 해신과 달신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와 달리 백화 중의 해와 달은 각각 복희, 여와의 머리와 꼬리 근처에 배치되어 이들 신이 해신과 달신으로 인식되었음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고구려의 해신과 달신이 머리 위로 해와 달을 받쳐들어 자신의 신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과는 대비된다.
오히려 아스타나의 복희, 여와는 손에 규구(規矩)를 쥔 채 서로의 꼬리를 얽어 교미하는 모습이어서 창세신적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때문에 신적 정체성이 명확하지 못한 존재로 인식될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양자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해신과 달신이 중국에서 인식되고 표현되던 해신, 달신과는 다른 신앙적 관념과 전통을 바탕으로 성립된 존재로 보게 하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⑤강서대묘 널방 안벽 현무와 야원(冶源) 북제(北齊) 최분묘(崔芬墓) 널방 안벽의 현무
마주보는 위치에서 비스듬히 허공을 쳐다보는 자세인 거북과 뱀의 벌린 입에서 불꽃이 뿜어 나온다. 서로의 기운을 마주 치게 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우주적 생명과 질서를 재생시키고자 함이다. 배경을 생략한 벽면이 허공의 깊이를 더한다. 강서대묘 널방 안벽 현무의 모습이다. 중국 함양 출토 진대(秦代) 와당에서 이미 거북과 뱀이 하나로 어울린 모습으로 표현되는 현무가 고구려 특유의 힘과 긴장이 자연스럽게 체현된 존재로 재창조되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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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대묘 널방 안벽 현무 | 야원 북제 최분묘 널방 안벽의 현무 |
고구려 후기의 고분벽화에서 현무를 포함한 사신수(四神獸)가 자신만의 공간을 지닌 우주수(宇宙獸)로 묘사되는 것과 달리 위진남북조 및 수당시대 중국의 고분벽화에서 사신은 신선이 부리는 신수(神獸)로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산동 임포(臨 ) 야원 북제 최분묘(551) 널방 안벽에 그려진 현무는 뱀과 거북의 어울림이 격렬하여 언뜻 보기에 고구려 고분벽화의 현무보다 더 강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 곁에서 이 신수를 다독이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신선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현무는 더 이상 우주수로 인식되기 어렵게 되고 만다. 문화적 기원, 혹은 종교관념상의 출발이 같다고 하더라도 이후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게 된다면 형상으로 확인되는 결과물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위의 두 작품이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전호태(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고대사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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