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W, 나의 친구
박 은 주
본방송으로는 아니지만 뒤늦게 재미있게 본 드라마가 있다. 극 중 회사원인 둘째 딸은 회사 동아리에 가입하라는 은근한 압박을 받는다.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비슷한 처지의 두 사람과 함께 지리멸렬한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그들만의 클럽을 만들게 된다.
극 초반의 이 장면들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은 직장에서 동아리를 조직한 경험이 내게도 있어서이다. 회원을 모집할 때 명칭을 무엇으로 할까 고심하다 ‘BMW’로 정했다. 특정 외제 차와는 물론 무관하고, 지구환경을 생각해 대중교통이나 걷기(bus, metro, walking)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니었다. 책, 음악, 영화나 산책(book, music, movie, walking)을 좋아하는 동료들 모임. 쉽고 짧게 영어의 머리 문자로 정해 일단 눈길을 끌고 싶었고 모집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모임 활동에 재미를 더해가며 드라마의 그들처럼 빡빡한 우리 삶도 조금씩 변화해갔다. 그 모임으로 인해 같은 취향을 함께하는 재미도 컸지만, 나 혼자만의 생활도 스스로 놀랄 정도로 풍성해져 갔다. BMW의 마력일까.
당시 나는 34년 차로 접어든 교사로 그동안 건강한 심신 덕분에 무난히 직장생활을 해낼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마음 가득했다. ‘내일 바로 퇴직해도 아무 아쉬움이 없다’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가르치는 일도,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는 학생들도 더없이 소중하고 예뻤다. 하루가 24시간인 것은 불변하지만 감사함으로 마음 여백을 채우니 시간이 더해지듯 매사가 여유로웠다.
출근해서는 틈틈이 학교 둘레길을 걷고 퇴근 후에는 매일 동네 저수지까지 산책을 다녀오곤 했다. 또 그 해 유난히 많은 책을 읽었고, 음악과 영화도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어느새 품 넓은 이 친구들을 마음 깊이 좋아하게 되었고, 아직도 그 사랑은 진행 중이며 우리 사랑은 날로 진화한다.
산책은 홀로 시작해도 셋이 되는 마법의 시간으로 변한다. 움직이는 나의 몸과 마음, 둘이 어느새 친구가 되고 또 길이라는 친구를 만나 동행한다. 초록이 산책로 숲길로 번져가는 싱그러운 봄이나 초여름에는 화창한 날도, 비 내리는 날도, 바람 부는 날도 산책하기 나쁜 날은 없다.
또 그날그날에 어울리는 시詩를 암송하거나 음악을 들으며 걸을 때면 나의 오감은 생생히 살아 숨 쉬었다. 달큼한 흙냄새를 맡으며 ‘풀잎’이란 시를 읊으며 걷다 보면 정말이지 내 입에서 푸른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고, 내 몸과 마음에 풀잎 물이 든 듯하며, 비 오는 날 통통거리며 몸을 흔드는 그것을 보면 마치 그 시안에 내가 들어가 버린 것도 같았다.
그때그때 계절이나 날씨, 내 마음 풍경에 따라 듣는 음악은 다르다. 몇 년 전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깊어진 후론 내 삶의 배경을 이루는 음악의 폭이 좀 더 넓어지게 되었다.
입춘이 지나 우수 무렵, 얼음이 녹고 그야말로 ‘잔 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 생각나서 꼭 듣는 노래는 「개여울」이다. 그즈음 어김없이 남녘 매화 소식이 들려온다. 화창한 봄날 듣는 하이든의 현악4중주 「종달새」도 참 좋다. 올봄에는 후배에게 선물 받은 베토벤 작품 CD 중「Spring」 편에 실린 곡을 들으며 아침을 시작하는 때가 많다.
여름비 잦아지는 날, 보랏빛 도라지꽃과 아슴푸레한 녹음을 배경으로 한옥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은 순간들. 그때는「빗방울 전주곡」도「창문 너머 어렴풋이…」도 빗속에 녹아들며 여름의 한순간을 만든다. 장마가 끝나고 불볕더위에 듣는 멘델스존의「베네치아의 뱃노래」나「핑갈의 동굴」은 머나먼 이국의 휴양지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가을이 되어 선선한 갈바람이 불어오면 박목월의 시詩에 곡을 붙인「이별의 노래에」 젖어 들고, 차이콥스키의「10월의 노래」를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로 듣다 보면 가을은 깊어 간다. 남편이 좋아하는 가수 배호가 부르는「안개 낀 장충단 공원」도 빠질 수 없는 가을 명곡이다.
겨울에 LP로 듣는 음악은 삼십여 년도 더 전 옛 추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내 첫 월급과 오빠가 준 용돈까지 보태서 산 전축은 처녀 시절 재산목록 1호였다. 하지만 결혼하고 몇 번의 이사 끝에 고장 수리를 반복하다 결국 그 전축은 명을 다하고, 오랫동안 상자 안에 처박혀 있던 LP판들을 발견한 것은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온 후 짐 정리할 때였다. 그해 나 자신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조그만 레트로 전축을 샀다. 유난히 눈이 많던 이듬해 겨울, 거실 통유리창 밖을 내다보거나, 부엌일을 하다 무심히 주방 창을 보면 춤추듯이 ‘펄펄’ 또 어떤 날은 ‘펑펑’ 눈이 쏟아져 내렸다. 그런 날, 턴테이블의 바늘이 ‘지지직’ 판을 긁으며 시작되는 「tombe la neige」(눈이 내리네)나 나나 무스쿠리의 노래들은 내 감성 순도를 100%로 올리고 마음은 어느새 20대로 돌아간 듯 설레었다.
책은 BMW 중에서도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꼬리 잇기의 명수이기도 하다. 내 경험상 재미있게 읽은 작가가 쓴 또 다른 작품을 찾아 읽거나 책 속의 책을 따라가면 거의 실패가 없었다. 책은 음악과 영화도 자꾸만 불러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음악을 따라 비틀즈를 다시 들었고 리스트의 ‘순례의 해’라는 곡도 알게 되었다.
책, 문학과 영화는 스토리라는 같은 근원을 가진다. 그러니 무수히 많은 소설이 영화화되어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 『남아있는 나날』, 『위대한 개츠비』 …. 영화의 감동에 젖어 이런 원작 소설을 찾아 읽거나 반대로 인상 깊었던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뒤늦게라도 꼭 보게 된다.
또한 영화는 음악으로 이어지게 된다. 작년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 <헤어질 결심>의 배경으로 만약 말러의 교향곡 5번 「아다지에토」나 가수 정훈희가 부른 「안개」가 없다면 절대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 주인공의 미묘한 감정의 줄타기와 그 안타까운 사랑을.
퇴직한 지 올 8월이면 만 3년이 된다. 남편은 나를 참 신기한 사람이라고 자주 말한다. 오래 직장을 다닌 사람이라 무료해서 할까 걱정했는데 혼자서도 너무 잘 논다고 말이다. 그러면 나는 그냥 빙그레 웃고 만다.
어느 재벌 총수가 말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를 나의 버전으로 바꾸면 ‘세상에 BMW는 많고 나는 바쁘다.’인 것을. 책과 음악과 영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이 탄생하고 있고, 같은 책과 영화와 음악도 다시 읽을 때마다, 보고 듣게 될 때마다, 그 느낌이 달라지지 않는가? 산책도 때마다, 순간마다, 새롭고 또 다르다.
이렇게 사시사철 맑은 물을 ‘퐁퐁’ 솟아내는 샘과 같이, 메마른 내 목을 적셔주고 내 마음까지도 씻어주는 친구, 언제 찾아가도 손 내밀어 나를 반기고 고개 끄덕이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하면서도 내 삶을 변주하여 쇄신刷新하게 하는 이 친구가 나는 참 좋다. BMW와 함께할 때 유한한 시공간을 넘어 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또 그 순간 나는 내가 나임이 좋고, 참 감사하다.
언제부터인가 아침을 짧은 기도들로 시작한다. 그중 나 자신에게 하는 기도는 진·선·미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진과 선, 앞의 둘은 불교적인 바람이요, 세 번째 미美는 삶 속에 알알이 박힌 작은 아름다움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기원이며 약속이다. 그 아름다움을 찾아 나 자신과 주변을 가꾸어 가는 여정에서 홀로 혹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걷고, 읽고, 듣고, 보면서’, 나의 소중한 친구 BMW가 삶의 끝날까지 나와 함께하기를, 부디 그러하기를 비는 것이다.
오늘도 BMW에 시동을 걸며 나는 나의 하루 여행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