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의 마지막 장처럼
임종찬(부산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2025.03.16
늙음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늙으면 늙는 대로 삶의 재미가 있고, 거기에 맞추어 새로운 가치관으로 살면 늙음은 새로운 희망일 수도 있지요. 활기찬 노인(active senior)으로 재탄생하는 일이지요. 키케로는 말년에 『노년에 대하여』(소울클래식 2015)란 글에서 의미 있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것에 욕망을 품지 않게 해주는 노년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
노년의 탐욕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그넷길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노자(路資)돈을 더 마련하려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포도주가 오래 되었다고 모두 시어지지 않듯이 늙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비참해지거나 황량해지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정해져 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단 한 번 정해진 길을 가야만 한다. 그리고 인생의 매 단계마다 정해진 특성이 있게 마련이다. 유년기에는 나약하고, 청년기에는 활기가 넘치며, 중년기에 접어들면 위엄을 갖추고, 노년기에는 원숙해진다. 이러한 특성들은 마치 제철이 되어야만 그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연의 섭리와 같다."
젊은 시절 강렬했던 육체적 쾌락이 사라진 대신 소박한 정신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시간임을 노인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다 이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야구의 격렬한 운동을 게이트 볼로 바꾸면 그것대로 즐거움이 있는 것 아닌가요. 젊은이들은 힙합 댄스를 즐긴다면 노인은 사교 댄스로 즐기면 그만 아닌가요.
노인은 긴 시간 견디고 이겨낸 승리자이므로 늙음은 훈장으로 하사받은 시간입니다. 노인은 이제 훈장을 가슴에 부착하고 영광을 누려야 합니다. 내 앞에 먼저 간 친구들의 순조롭지 않은 삶을 기억하면 거기서 제외되어 오늘을 맞은 나는 얼마나 큰 은혜로운 삶인를 생각해야 합니다.
모래시계의 흘러내리는 모래알을 헤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아직 흘러내릴 모래알이 남아 있음에도 그것의 적음을 한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그것만이라도 남아 있음이 얼마나 다행한가를 생각해야지요.
젊은 시절은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할 시간입니다. 수많은 생각과 계획은 오직 나를 위해 수립되어야 합니다. 내 삶의 설계도는 누구의 간섭을 배제한 나만의 건축을 위한 도면입니다.
은퇴를 하였을 당시, 사람들은 한 순간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남은 내 삶을 보다 보람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여태까지 타인을 위한 삶에서 해방되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나 자신의 삶을 위한 시간 벌기가 드디어 왔음을 행복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늙음을 옳게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칼 융은 『C.G 융 무의식 분석』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의 오후는 인생의 오전 못지않게 깊은 의미가 있다. 단, 인생의 오후가 가진 의미와 목적은 인생 오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어찌 다르다는 것인가. 융의 말은 인생의 오전은 자연 목적의 삶을 살았다면 오후는 문화 목적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 목적은 생명체의 생존과 번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문화 목적은 자연 목적을 초월한 삶의 세계를 말합니다. 융은 성취를 위한 노력에서 해방되고 자신만의 남은 시간을 자족하게 살 수 있는 삶, 여태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 인간으로서의 바람직한 삶을 목적에 둘 수 있는 삶을 문화 목적이라 한 것입니다.
오후의 시간은 오전의 시간 상당수가 부질없는 시간의 연속이었음을 반성하게 하는 고마운 시간이라는 겁니다. 오전에 악전고투해서 힘들어 벌어들인 재산, 이것도 결국 이 세상에 던져놓고 가는 것을 자각할 시간이 오후의 시간이지요.
"대머리가 되니 빗이 필요치 않고,
이가 없으니 치통이 사라지고,
눈이 어두우니 공부를 안 해 편안하고,
귀가 안 들려 세상 시비에서 멀어지며,
붓 가는대로 글을 쓰니 손 볼 필요가 없으며
하수들과 바둑을 두니 여유가 있어 좋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남긴 글입니다. 신체의 결함을 결함으로 해석할 일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양으로 살 일이지 현실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일은 노년의 할 일이 아니라는 것 아닌가요.
젊은 시절에는 감투 쓰기를 좋아해서 이걸 위해 온갖 짓을 자행하여 주위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더 많은 재산 축적을 위해 밤낮 바빴다면 이것 다 부질없는 도로(徒勞)에 불과함을 알게 해주는 시간이 오후의 시간입니다. 그렇다고 오전의 시간을 부정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그 시간은 그 나이에 적당한 긍정의 시간이지만 오후의 시간은 오전의 시간의 연장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음악에서 마지막 끝마무리는 여태까지의 음악의 흐름을 달리 표현하여 긴장감을 높이고, 음악을 역동화시킵니다. 오후의 시간은 내 삶을 역동화시킬 그 무엇을 위해 고심해야 할 시간이지요. 그런 고심 없이 오후의 시간을 보낸다면 그건 시간을 탕진하는 셈이지요. 오전의 시간을 연장해서 사는 오후는 지루하고 고루한 것 아닙니까.
교향곡의 마지막 장처럼 변화를 주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면 인생은 실패한 음악에 불과합니다.
(공개되지 않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