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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후기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
―海窓 宋基植의 유교유신론 을 중심으로
후기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海窓 宋基植의 "유교유신론"을 중심으로.pdf
박 원 재**
1. 머리말 _ 20세기 초반 유교개혁론의 사상사적 좌표
2. 유교개혁론의 유형과 후기정재학파
3. 송기식의 생애와 현실인식
4. 유교유신론 의 내용과 논리 구조
5. 송기식 유교개혁론의 특징 _ ‘敬’의 종교화
6. 맺음말
요 약 문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정재 유치명의 재전再傳 제자 그룹에 해당하는
후기정재학파는 서세동점의 상황에서 유학의 현실대응력을 조망하는 데
유용한 참고 역할을 한다. 이들은 신실한 주자학자에서 유교개혁론자로
그리고 다시 사회주의자로, 시대적 요구에 따라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
418 _ 국학연구 제10집
럼을 펼쳐보이기 때문이다. 유교유신론 으로 대표되는 송기식의 유교
개혁론은 이와 같은 흐름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 유교개혁에 관한 송기
식의 생각은 유교의 종교화와 그를 통한 교육계몽 그리고 그 결과로서
국권회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발견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유교의 종교화를 담보하는 핵심적인 실천방법으로 ‘경敬’을 중시
한다는 점이다. ‘경’에 대한 중시는 리理의 내재성과 능동성을 시종일관
강조하며 그 리의 체득을 가능하게 하는 실천적인 방법론으로 ‘경’을 지
속적으로 강조해왔던 영남 퇴계학파의 분위기가 송기식의 유교개혁론에
남긴 흔적이다. 이런 점에서 송기식의 유교개혁론은 종교적 경건주의 요
소를 함축하고 있다고 평가받던 영남 퇴계학파의 사상적 경향성이 천주
교를 앞세운 외세의 도전을 계기로 그것의 종교화 가능성을 탐색한 하
나의 시험적인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다.
주제어 : 후기정재학파, 유교개혁론, 교육구국운동, 도학道學, 경敬
1. 머리말 _ 20세기 초반 유교개혁론의 사상사적 좌표
19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되어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지는 조선유학의 현실
대응 양태는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누어진다. 이 갈래를 구분 짓는 기준이
되는 양 꼭짓점은 잘 알려진 대로 ‘유학’과 ‘서학’이다. 이 시기의 한국사상사
는 유학과 서학의 길항관계가 만들어 놓은 흔적인 까닭이다. 물론 이 안에도
세부적인 흐름들은 있다. 가령 ‘유학’이라는 단일한 이름 안에 원시유학과 성
리학 혹은 주자학과 양명학 등에 대한 당시 유학자들의 선호와 비판의 시각
들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 그런 예이다. 이는 서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여기에도 종교로서의 서학, 즉 천주학과 철학으로서의 서학 그리고 과학 혹
은 과학기술로서의 서학에 대한 호불호의 정서들이 한 데 뒤섞여 있다. 이런
갈래들을 유학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유형화시킨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유학을 고수하고 서학을 배척하는 태도이다. 흔히 위정척사론으로
논문 / 후기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 _ 419
대표되는 이 입장은 유학과 서학을 각각 ‘정正’과 ‘사邪’로 놓고 후자를 시종
일관 배척한다는 데 특징이 있다. 둘째는 유학과 서학을 적절히 절충시키려
는 시도이다. 통상 온건개화 이론으로 분류되는 동도서기론이 주류를 이루
는 이 입장은 유학과 서학을 선택적으로 취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도道’와 ‘기器’의 대비에서 확연히 드러나듯이, 이 입장은 어디까지나 유학을
근간으로 놓고 그 단점을 서학으로 보완하려 한다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에
서 중간적 의미의 절충은 아니라는 것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셋째는 유학
을 버리고 서학을 선택할 것을 주장한 견해들이다. 이것은 전반적인 서구화
를 시대적인 대안으로 요청한다는 점에서 동도서기론을 지지하는 입장과
대비하여 급진개화파 혹은 변법파로 분류된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면, 유학과 서학의 만남의 방식은 유학에 대한 태도
를 기준으로 했을 때 편의상 묵수론, 절충론, 해체론으로 나뉨을 알 수 있다.1)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한국사상사는 서세동점의 격랑 속에서 조
선유학의 이와 같은 현실대응 방식들이 그때그때의 상황에 종횡으로 엮이
면서 만들어낸 흔적이다. 20세기 국권상실기를 전후하여 전통 유학자들 사
이에서 본격화되었던 유교개혁운동 역시 그런 흔적들 가운데 하나이다.
전통적으로 유교개혁운동의 사상사적 계보는 동도서기 계열로 분류된다.2)
유교개혁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유학자들 대부분이 정통 성리학자
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일단 타당한 진단으로 보인다. 주도세력의 성분
이 이러하였던 관계로 유교개혁운동은 어떤 새로운 이념의 형성보다는 유교
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개혁적 요소들을 보완해가는 사상운동의 성격을
띤다.3) 구한말 정통 성리학자들의 주류적인 현실대응 방식은 위정척사 운
1) 박경환은 이것을 좀더 구체화하여 ‘비타협적 묵수’와 ‘절충과 재해석’ 그리고 ‘유학 부정’ 세
가지 흐름으로 나눈다. 그리고는 ‘척사위정 운동’, ‘동도서기론과 유교개혁운동’, ‘변법개화파
와 동학’을 각각 이들을 대표하는 사상 운동으로 배속시킨다(박경환, 「동아시아 유학의 근
현대 굴절양상」, 국학연구 제4집, 2004 참조).
2) 앞의 박경환의 경우도 그렇고, 유준기 역시 기본적으로 이 입장을 취한다(유준기, 한국근
대유교개혁운동사 , 아세아문화사, 1999, 3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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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세동점과 일본의 국권침탈이라는 이중의 파고 앞
에서 현실대응책으로써의 한계를 드러내며 좌초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부의 성리학자들이 전열을 추스르며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유교개혁운동
이다. 그러므로 유교개혁운동의 사상사적 좌표는 위정척사론이 현실적 한계
를 드러내며 동도서기론 계열과 결합하는 지점쯤이라고 보는 것이 이에 대
한 부연설명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교개혁운동을 전적으로 동도서기론 계열로만 한정짓
기에는 무언가 미진함이 남는다. 이는 동도서기론이 딛고 서있는 근본 전제와
유교개혁운동이 실제로 전개된 모습이 서로 부딪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동도서기론은 동양의 ‘도’에 서양의 ‘기’를 접목시키고자 하는 시도이다. 여기
서 ‘도’는 흔히 정신문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윤리규범과 이를 지탱하는 제도
일반을 가리키고, ‘기’는 물질문명으로서 과학기술과 같은 실용적 측면을 지
칭한다. 따라서 비록 부분적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서구수용론이 만약 윤리규
범이나 사회제도의 일부까지 ‘서양’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다면 이것은 당
연히 동도서기론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런데 국권상실기를 전후하여 활성화되기 시작한 유교개혁운동의 흐름
가운데에는 이처럼 동도서기론의 범주를 넘어서는 움직임도 발견된다. 대표
적인 것이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의 경우이다. 영남 퇴계학파의 주류였
던 정재定齋 학파의 일원으로서 유교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의 구현을 위
해 노력하였던 이상룡은 단순히 ‘기器’ 차원의 서학 수용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와 함께 그는 예제禮制에 근본을 둔 유교적 사회질서의 핵심과 배치되는 내용
의 서학 수용에도 적극적이었다. 계약론적 국가론의 수용을 비롯하여 그 연장
선에 있는 입헌군주론의 옹호, 사민평등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 등이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유교의 대동세계가 인류가 도달할 궁극적인 이상향임을 굳
건히 믿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유교를 환골탈태시키는 혁신을 주장한 이상
3) 유준기, 앞의 책, 1999, 13쪽.
논문 / 후기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 _ 421
룡과 같은 경우를 동도서기론 계열로만 한정시키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러므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사상사의 흐름에서 유
교개혁운동의 좌표는 부분적으로 조정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동도서기론과
변법론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즉 앞에서 말한 절충론과 해체론의 중간
지점 정도로 말이다. 이에 따라 유교개혁운동의 성격도 다음과 같이 다시
자리매김될 수 있다. 20세기 초반에 들어와 활성화된 유교개혁운동은 국권
상실의 위기에 직면하여 위정척사론의 한계를 절감하고 그 대안으로 동도
서기론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인 조선의 정통 성리학자들이 이후 국권상실이
현실화되자 이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변법론의 방향으로까지
다시 한 걸음 더 나간 현실대응책이다.
2. 유교개혁론의 유형과 후기정재학파
국권상실기에 전개된 대부분의 사회운동이 그렇듯이, 유교개혁운동이 궁극
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민족의 보존과 국가의 근대화이다. 민족의 보존과 국가
의 근대화는 서로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 있는, 이 시기의 조선 지식인들의 화
두였다. 서양과 일본의 침탈 앞에서 민족의 보존은 누구나 동의하는 최대의
목적이었고, 국가의 근대화는 그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유력한 수단이
었다. 물론 서구화로 상징되는 근대화가 민족 보존이라는 절대절명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가장 유효한 수단이라는 인식이 처음부터 사회적 합의를
이루었던 것은 아니다. 특유의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하여 ‘서양’을 ‘금수’로까지
내몰았던 정통 성리학 계열에서는 그것이 유력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금기
였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국권상실이라는 초유의 경험은 근대문물의 수용을 통한 국력의 회
복이라는 시대적 요청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앞에서
422 _ 국학연구 제10집
말했듯이, 정통 성리학 계열도 유교개혁운동이라는 형식을 통해 동도서기론
을 거쳐 변법론으로 나아가는 사상적 전회가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유교
개혁운동은 국권상실기에 정통 성리학 계열 내부에서 이루어진 저항 주체
와 변혁 주체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4)
이런 특징은 유교개혁운동의 태생적인 방향성을 예시해준다. 그것은 유교의
근본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제한적인 근대화라는 방향성이다.
이런 까닭에 유교개혁운동의 부동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언제나 유교이다. 이
당시 활동했던 유교개혁론자들의 사상적 스펙트럼이 이런 정황을 엿볼 수 있
게 해준다. 20세기 초반에 활성화된 유교개혁론을 유형별로 정리한 선행연구
는 이들이 기반을 두고 있는 사상적 배경에 초점을 맞추어 이 스펙트럼을 모
두 네 갈래로 나눈다.5)
첫째는 도학道學, 즉 주자학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이승희李承熙(1847~1916)와
송기식宋基植(1878~1949)이 이에 속한다. 이 유형은 기존의 도학 전통에 대해 비
판적 태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유교 조직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계열이다.
둘째는 애국계몽운동을 배경으로 하는 유형으로, 신채호申采浩(1880~1936)를 비롯
하여 유인식柳寅植(1865~1928), 장지연張志淵(1864~1920)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의
특징은 청년기까지 도학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으나 계몽사상가로 전환하
면서 자신이 몸담았던 도학 전통의 폐단을 적극 비판하는 방식으로 유교개
혁운동을 추진한 것이다. 셋째는 양명학을 배경으로 하는 유교개혁론이다.
박은식朴殷植(1859~1925)이 대표적인 이 유형은 도학의 주류인 주자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대안으로 양명학적 관점에서 유교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특징이
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금문경학에 토대를 둔 유형이다. 이병헌李炳憲(1870~1940)
이 대표자인데, 공양학파의 금문경학을 유교개혁론의 이론적 기반으로 차용
4) ‘저항주제’와 ‘변혁주체’라는 용어는 19세기 후반 우리 민족이 당면한 과제를 민족의 독립 및
이를 위한 민족의식의 구현과 근대적인 개혁으로 개괄했을 때 이 두 과제의 담당 주체를 가
리키는 용어이다(유준기, 앞의 책, 1999, 27~28쪽 참조).
5) 금장태, 유교개혁사상과 이병헌 , 예문서원, 2003, 208~209쪽.
논문 / 후기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 _ 423
한다는 점이 차별점이다.
이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유교개혁론자들이 개혁시키고자 한 것도
유교였지만 그들이 시종일관 길잡이로 삼았던 것 역시 유교였다. 애국계몽 계
열의 유교개혁론이 혹 반유교적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이는 외견상의 인상일
뿐, 이 또한 유교의 비판적 계승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6)
따라서 의지처로 삼은 것이 주자학이냐 양명학이냐 혹은 경학이냐는 차이만
있을 뿐 하나같이 ‘유교’를 중심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은 동일했던 것이다. 이
처럼 유교를 중심적인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점 외에도 이들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추가로 발견된다. 일정 정도 서양문물에 대한 이해를 갖추었
다는 점과 유교를 종교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 그리고 그 이론적 배
경으로 중국의 강유위와 양계초를 선구로 삼고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7)
주자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실대응책을 추구하고자 했던 후기
정재학파의 구성원들에게서 발견되는 유교개혁론의 요소 또한 크게 볼 때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8) 이들 가운데 가장 먼저 유교개혁의 기치를 들
어 올렸던 유인식의 경우 1903년 성균관에서 이루어진 신채호와의 만남을
통해 혁신유림으로 사상적 전회를 감행하는데, 이때 계기를 제공한 것 역시
서양 문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양계초 사상과의 만남이었다. 이를 통하여
형성되기 시작한 유인식의 유교개혁론은 이후 다음의 몇 가지 특징으로 구
체화된다.
첫째, 유인식의 유교개혁론은 유교의 용도 폐기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6) 이 문제에 대한 애국계몽운동의 기본 입장에 대해서는 홍원식, 「애국계몽운동의 철학적 기반
―박은식과 장지연을 중심으로」( 동양철학연구 22집, 2000) 참조. 애국계몽운동에 속했던 또 다
른 인물인 신채호 역시 아나키즘으로 전향하기 전까지는 유교에 대해 비판적 계승의 입장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7) 금장태, 앞의 책, 2003, 209~210쪽.
8) 이 글에서 사용하는 ‘후기정재학파’라는 용어는 영남 퇴계학파 가운데 학봉계의 嫡傳을 잇는
定齋 柳致明의 再傳 제자 그룹 가운데 기존의 주자학적 현실인식을 벗어나 혁신유림의 길로
들어섰던 일군의 지식인들을 가리킨다. 이상룡과 유인식, 송기식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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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시대가 요구하는 사상으로 새롭게 혁신시키려는 시도였다. 이는 무엇
보다도 그가 비판한 것이 유교 자체라기보다 당시의 유림이라는 사실로부터
확인된다. 둘째, 이런 까닭에 유인식은 당시 유림의 의식세계를 지배했던 주
자학 일변도의 풍토에서 대해서 아주 신랄한 비판을 가했는데, 이는 다시 부
분적으로 양명학에 대해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셋째, 이처럼 유교의 전면적인 폐기를 요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유
교개혁론은 유교와 서학의 상호보완을 요구하는 ‘신‧구학절충론(新舊學參酌論)’
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렇게 본다면 유인식의 유교개혁론도 결국 여타의 유교
개혁론들이 그리고 있는 기본적인 궤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9)
이는 이상룡의 경우도 비슷하다. 이상룡의 유교개혁론 역시 정통 주자학
의 현실대응 방식으로는 국권상실이라는 부정적 현실을 타개할 수 없음을
자각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공자가
구축한 원시유교의 근본이념에 대해서는 더욱 밀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요
컨대, 의병활동이나 계몽운동과 같은 사회적 실천을 통한 현실과의 부단한
교감에 힘입어 익숙한 주자학자의 신분을 포기하는 대신 한 사람의 좀더 보
편적인 유학자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 이상룡의 유교개혁론의 특징이다. 다
만 차이가 있다면 이상룡의 경우 유교개혁운동과 함께 독립쟁취를 위한 무
장투쟁을 병행하는 적극성을 보였다는 점이다.10)
유인식과 이상룡의 유교개혁론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특징들은 송기식
의 유교개혁론에도 거의 그대로 발견된다. 그러나 같은 후기정재학파의 일원
이면서도 송기식의 유교개혁론은 유인식이나 이상룡의 그것에 비해 좀더 체
계적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들 가운데 유교개혁론과 관련된 독립적인 저술
을 남긴 사람은 송기식뿐이라는 데에서 비롯된다. 유인식 역시 「태식록太息錄」과
9) 유인식의 유교개혁론의 내용에 대해서는 박원재, 「동산 유인식의 계몽운동과 유교개혁론
―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2)」( 동양철학 26집, 2006) 참조.
10) 이상룡의 유교개혁론이 지니고 있는 특징에 대해서는 박원재, 「석주 이상룡의 현실인식과 유교적
실천론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1)」( 오늘의 동양사상 11호, 2004) 참조.
논문 / 후기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 _ 425
「학범學範」이라는 관련된 글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송기식의 유교유신론儒敎
維新論에 비해 단편적이며, 이상룡의 경우도 유교개혁에 대한 그의 입장을 추
론해볼 수 있는 단편들만 있지 별도의 독립적인 글은 없다. 이런 점에서 송기
식의 유교개혁론에 대한 검토는 조선유학 가운데 대표적인 보수파로 꼽히는
영남 퇴계학파의 마지막 궤적을 조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누
구보다도 신실한 주자학자에서 이를 부정하는 혁신유림으로 그리고 다시 사
회주의자로 사상적 전회를 감행했던 후기정재학파의 사상적 편력의 중요한
한 자락을 조망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3. 송기식의 생애와 현실인식
후기정재학파에 속하는 유교개혁론자들의 사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들의 생애와 사상적 편력을 먼저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은 대부분 주
자학자에서 유교개혁론자로 사상적인 전회를 감행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유
교개혁론에 투영되어 있는 이들의 문제의식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전회의 맥락을 규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송기식의 생애와 사상적 편력을 추
적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자료들 가운데 비교적 내용을 갖추고 있는 것은 대략
네 가지이다. 먼저 문집에 실려 있는 유사遺事와 행장行狀이 있고, 송기식 자신
이 쓴 「인곡가麟谷歌」라는 가사 그리고 유교유신론 에 실려 있는 연보이다.11)
이들 자료를 토대로 송기식의 삶의 자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송기식은 1878년(고종 15) 안동 임하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당시
11) 「遺事」는 넷째 동생 宋淵植이 썼고, 「行狀」은 이 유사를 토대로 金正模라는 사람이 썼다. 모두
송기식의 문집인 海窓集에 실려 있다. 「麟谷歌」는 송기식이 53세 되던 해인 1930년 음력
12월에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쓴 자전적인 가사인데, 문집과 儒敎維新論 모두에 실려
있지 않다. 이 글에서는 A4용지 형태로 45쪽 분량의 복사물로 영인되어 있는 자료를 참
고했다(쪽수 표시는 문집의 경우처럼 2장을 1쪽으로 표기하고 있어 이를 따랐다).
426 _ 국학연구 제10집
대부분의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주자학적 소양을 교육받으며 컸다. 그러다
가 18세 되던 해인 1895년 안동에서 일어난 을미의병에 부통副統으로 임명된
할아버지를 따라 의병대에 참가하였고, 다음해에는 의병장 척암拓菴 김도화金
道和(1825~1912)의 휘하로 들어가 대장영서기大將營書記 직책을 담당하였다. 그러다
가 이 해 가을 고종의 명령으로 의병이 해산하자 집으로 돌아가 다시 학업에 전
념하였다.
다음해인 1898년(21세) 정재학파의 적통을 이루었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
1899)을 뵙고 스승으로 모셨다. 하지만 아쉽게고 이듬해에 김흥락이 죽자 3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제를 올리며 제자의 예를 다하였다. 이어 김흥락의 문집 발
간 사업이 시작되자 바로 이 일에 전념하여 7년간 정성을 쏟아 마무리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1902년(25세) 김도화에게 논어 를 질의하고 그 인연으로 문하
에 들어갔고, 1905년(28세)에는 다시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1842~1910)에게 역대 유
학자들이 남긴 도설圖說에 대해 질문하고 이를 계기로 문하에 입문하였다.
1908년(31세)에 스승 김흥락의 문집 발간 사업을 마무리하였다. 그 후 석주
이상룡이 시국을 의논하자 이에 호응하였으며, 다음해인 1909년(32세)에는 이
상룡이 앞장서 설립한 대한협회 안동지회에 유인식 등과 함께 적극 참가하였
다. 아울러 이해 안동지역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던 협동학교協東學校의 건립
작업에 참여하였고, 자신은 또한 몸소 봉양서숙鳳陽書塾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
하였다. 이와 함께 안동 하회의 동화東華와 도산의 보문寶文 학교 일에도 관여하
였는데, 이 네 학교를 통하여 교육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1910년(33세) 경술국치를 당하자 식음을 전폐하였다가 한때의 울분을 참고
큰일을 도모할 것을 권유하는 할아버지의 충고를 받고 단식을 중단하였다. 이
후 봉양서숙의 운영에 매진하였으나 사립학교에 대한 일제의 감찰이 심해짐
에 따라 곧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이 일로 천도교 측에 도움을 청하
기도 하였지만 운영난을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가산까지 탕진하기에 이
른다. 1914년(37세)에는 무장투쟁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이상룡의 연락을 받고
만주로 떠나기로 하고 집을 나서기도 하였으나 집안과 고향 걱정 때문에 중도
논문 / 후기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 _ 427
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12) 이어 같은 해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
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일단 자중하며 시대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한다.
1919년(42세) 1차 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론에 힘입어 3‧1 운동이 일어나
자 지인들과 함께 3월 17일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거사를 약속한 당일 일본 경찰에 잡혀 만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대구감옥에 갇혔다. 당시 대구감옥에 있을 때 수인 가운데 기독교도
가 있어 감옥 안에서 기독교를 전도하자 몸소 중용장구 를 외우며 사람들을
단속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얼마 뒤 경성감옥으로 옮겨졌다가 다음해 영친
왕의 가례를 계기로 형이 감축되어 풀려났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는 저술
에 몰두하여 한문훈몽漢文訓蒙과 국문사서國文四書를 지어 아이들과 한문을
못읽는 이들의 교재로 삼았고, 유교개혁의 포부를 담은 유교유신론 을 저술
하였다. 이어 사서차의四書箚疑‧ 격치도格致圖 등을 지어 유학의 이치를 밝혔다.
유교유신론 을 지은 것은 44세 되던 해인 1921년이다.
1925년(49세)에는 안동의 남선면 인곡에 인곡서숙麟谷書塾을 건립하고, 꽃나
무와 과실나무를 심어 ‘백미원百味園’이라는 정원을 만들어 말년을 기약하였다.
이보다 앞서 1922년에 일제의 감시로 봉양서숙의 운영이 더 어려워지자 학
교일을 동생인 송연식에게 넘긴 일이 있는데, 이것이 인곡서숙이라는 교육
시설을 새로 세우게 된 계기였다. 같은 해 5월에는 단양에 설립된 명륜학원의
교수로 부임하여 활동하였고, 1932년(56세)에는 경성유교회의 초청을 받고 녹동
서원鹿洞書院의 명교강습소明敎講習所 교수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5년
경성에서 돌아온 후 이듬해인 1936년(59세)에는 고향인 안동에 유교회를 세우
기 위해 도산서원에 건의를 하고 설립취지서를 만들어 사람들의 지지를 호소
하였다. 하지만 이 일은 대성강습소를 만드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짐에 따라
중도에 그만두었다.
12) 후일 「麟谷歌」에서 송기식은 자신이 발길을 돌리게 된 이유로 연로한 조부와 형제 그리고 자
식들에 대한 걱정, 6년 동안 정든 학생들에 대한 염려, 젊은이들을 지도할 사람이 없는 고
향에 대한 걱정 등을 들고 있다(「麟谷歌」, 9~10쪽).
428 _ 국학연구 제10집
1945년(68세) 해방을 맞이하여 지역 인사들이 지역을 위해 중임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서지 않았다. 1948년(71세) 증조부 이하 3대의
글들을 모아 송천세고松川世稿 2권을 만들었다. 1949년 3월 22일 72세를 일기
로 세상을 떠났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볼 때, 송기식은 김흥락의 문집을 간행하던 일에 종사할
때까지는 그냥 위정척사의 의지로 무장한 평범한 주자학자로서의 삶을 살았음
을 알 수 있다. 이점은 이 시기에 그가 배움을 의탁했던 스승들의 면면을 통해
서도 유추할 수 있다. 차례로 문하에 들었던 김흥락과 김도화는 정재학파의 중
심인물로서 안동유림의 위정척사 운동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인물들이다.13)
마지막으로 스승으로 모신 이만도 역시 신실한 주자학자로서 경술국치를 당
하자 단식으로 순국했을 만큼 주자학적인 절의를 중시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송기식의 현실인식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
로 추정된다.14)
그러다가 김흥락의 문집 발간 사업을 마무리한 뒤 세상일에 관심을 기울이
면서 급변하는 시국의 변화를 감지한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이때의 심경을
“사문은덕 갚을길은 수택상신 문자로다 / 풍뇌헌 봉정사에 아홉해 서역書役이라 / 선
생문집 출판되자 시국일변 되엿구나”라고 술회하고 있는 것에서 엿볼 수 있다.15)
당시 송기식의 이와 같은 의식변화에 영향을 준 것은 이상룡이다. 이상룡은
13) 특히 김흥락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해서 처음 스승을 만났을 때의 감회를 「인곡가」에서
송기식은 이렇게 읊고 있다. “무술년 추팔월에 청성향약 구경가서/ 천백인 유림중에 일
대위인 와셧더라. / 이천년전 향당편에 또다시 뵈온다시/ 한번뵙고 감화대여 이내평생
귀숙이라.”(「麟谷歌」, 3쪽)
14) 이는 이 시기에 송기식이 스승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3명의 스승에게 보낸 편
지는 대부분 유교 경전의 의문처에 대해 묻는 내용과 유교적 덕목의 실천에 대해 자문을 구하
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海窓集에 있는 「上西山先生(戊戌‧己亥))」, 「上拓菴金先生(辛丑‧
乙巳)」, 「上響山李先生」, 「上響山李先生(癸卯)」 등의 편지 참조. 송기식의 문집인 해창집 은
그의 사후 9년 뒤인 1957년에 9권 5책으로 발간되었다. 여기서는 경인문화사에서 1999년
에 2책( 한국역대문집총간 2974‧2975)으로 영인한 판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15) 「麟谷歌」, 3쪽.
논문 / 후기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 _ 429
송기식에게 선배이면서 한편으로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16) 이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대한협회 안동지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라든가 이상룡의
부름을 받고 만주로 망명할 생각까지 했다는 사실로부터도 유추할 수 있다.
송기식이 문집발간 일을 마치고 시국에 대해 새로이 눈을 뜨던 시기는 이상룡
이 자신의 50평생을 지탱하던 주자학과 결별하고 애국계몽운동가로 변신하던
때와 일치한다.17) 따라서 이상룡의 그런 사상적 전회의 경험은 그대로 송기식
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이후 송기식이 국문사용을
주장하면서 직접 경전을 국역하고 국문경의강습소國文經義講習所를 설립하여
국역 강사를 양성할 것을 주장하며, 계급타파와 부녀교육의 강화를 주장하는
등 계몽운동에 헌신하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18)
이런 과정을 거치며 시국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뜬 송기식이 이후 심혈을 기
울인 일은 교육사업이다. 당시 대부분의 계몽운동가들처럼 나라를 빼앗긴 현
실에서 가장 생명력이 있는 구국활동은 교육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교
육의 효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하만사 많다해도 정치교육 두가지라. / 영웅사업 정치되고 성인사업 교육이라.
/ 정치사업 위험하고 교육사업 평이하다. / 정치사업 하드라도 시대변천 그뿐
이요, / 성인사업 할작시면 만고유택 무궁하다.19)
허황하다 하지말고 예산궁리 들어보소. / 일등인물 양성하여 강사자격 되는날에
/ 사방으로 흐터저서 골골마다 면면마다 / 노소부유 초동목수 하나둘씩 전도
하여 / 천만명 되온후에 마을마을 회당지어 / 공자도를 강론하여 노소부유
16) 동생 宋淵植은 「遺事」에서 송기식은 일찍 김흥락의 문하에 들었으며, 박식한 공부는 김도화
에게 얻었고, 이만도에게서는 바뀌지 않는 큰 법도(大經)을 들었으며, 이상룡에게서 변통
에는 원칙(經)이 있고 임기응변(權)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그 사승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 海窓集 권9, 342쪽).
17) 이상룡이 사상적 전회를 감행하는 계기가 되는 해는 1907년이다. 이 일의 자세한 맥락에
대해서는 박원재, 앞의 논문(2004) 참조.
18) 「麟谷歌」, 5쪽.
19) 「麟谷歌」, 2쪽.
430 _ 국학연구 제10집
인도하고, / 소학교 중학교로 청년후진 가르치면 / 문명사회 될것이며 풍속개량
되오리라. / 환난상구患難相救 할것이요 도덕단체 되오리라.20)
이를 보면 송기식이 교육에 전념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은 교육이 장기
적으로 사람들을 계몽시켜 문명사회로 가는 가장 실효성 있는 대책이라고 생
각하였기 때문이다. 당시가 일제하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동시에 교육이 구
국을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송기식이 확신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송기식의 유교개혁론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앞의 가사에서 교육의 중심적인 내용을 ‘공자도孔子道’라고
하고 있는 데에서 좀더 분명히 드러난다. 곧 교육을 통해 유교를 부흥시키고,
또 이를 통해 민중을 개화시켜 나라를 되찾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당
시의 유교는 이런 기대와 달리 기독교를 비롯한 여타의 종교들 사이에서 치
여있는 있는 상황이었다. 송기식은 이처럼 유교가 제역할을 못하는 상황에
서 다른 종교들이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을 보고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유
교개혁의 길로 나섰다고 스스로 밝힌다.21) 「인곡가」의 다음 내용은 송기식
의 이런 인식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민족 정치운동 위험하니 / 다시할말 없거니와 낱낱이 돌아보니
/ 평이한 종교사회 거룩하고 굉장하다 / 육십만 예수교인 개개히 진심이요
/ 삼백만 천도교인 개개히 문명이요 / 그여외 천주교며 시천교 보천교와 /
고래부터 불교이며 비밀중에 무극교라 / 삼천리 강산안에 이렇게 복잡하다
/ 정신단체 풍속개량 내막을 돌아보소.
적막한 공자교는 쓸쓸한 향교서원 / 만정춘초滿庭春草 적무인寂無人을 또다시
음케되네 / 그이유를 알아보면 한두가지 아니로다 / 삼십년전 흑암시대 저향
교 저서원에 / 갑둥배지牌旨 토호군들 무릅꿀림 상투돌림 / 무고한 백성잡아
적악積惡을 하든데라 / 그러기로 백성들이 향교서원 돌아볼때 / 감옥같이 원
수같이 몸서리를 치는구나.
20) 「麟谷歌」, 22~23쪽.
21) 海窓集권4, 「答蔡熙覺」, 9쪽.
논문 / 후기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 _ 431
도덕주의 공자교가 그러하지 않건마는 / 글을배운 그사람이 안된행동 한까닭에
/ 오늘날 조선사람 반대파가 절로난다 / 그중에 흑암시대 계급이 엄절하여 / 말
과절이 등분달라 씨종이 있게된다 / 이게모두 불평되어 천지화기 없어젓네.
그중에도 이세월에 태극교니 유도회니 / 공자도덕 들석이되 구식시대 구태물이
/ 모정승의 자손이며 모정승의 후예라고 / 주장하는 까닭으로 우리민족 밉게
보네 / 그중에 어떤이는 반대로 하는말이 / 오백년 구도덕이 시대불합不合 안
된다네 / 그럴듯 하거니와 깊은생각 못해봣네 / …… / 하로라도 공자도를
당세시행當世施行 못되엿네 / 그러기로 이사람은 부흥할 시기왔다.22)
이 술회 속에는 그가 추구하고자 한 유교개혁론의 기본 얼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중차대한 시국에서 제 역할을 다해야 할 유교가 제몫은커녕 다른
종교들의 틈새에서 끼여 질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이는 일차적으로 유교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송기식은 그런 문제점들이
공자의 본원유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쌓여진 폐단 때문이라
고 진단한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교육을 통해 ‘공자의 도’를 올바로 펴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유교의 본래 면목을 되살림으로써 시대적인 소임
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송기식의 유교개혁론이 담겨 있는
유교유신론 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의 기본 구도이다.
4. 유교유신론 의 내용과 논리 구조
유교개혁에 대한 송기식의 생각은 편지글에서도 단편적으로 피력되고 있긴 하지
만 가장 집약적으로 담겨 있는 것은 역시 유교유신론 이다. 유교유신론 은 국한
문혼용으로 된 필사본인데, 문집인 해창집 에는 실려 있지 않고 별도의 단행
본으로 유통되고 있다.23) 구성은 서언에 이어 모두 1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22) 「麟谷歌」, 20~22쪽.
23) 儒敎維新論은 1998년 후손들에 의해 앞에 번역문을 싣고 뒤에 원문을 영인하여 합본한
432 _ 국학연구 제10집
이 순서에 따라 유교유신론 의 내용과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24)
먼저 서언緖言에서는 유교부흥의 당위성을 선언한다. 유교가 지공무사至公
無私한 진리임을 전제하고,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동안의 역사는 군왕으로 대표되
는 정치권력이 스승으로 대표되는 학문권력을 압도한 정치체제였던 관계로
그런 유교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군왕도 헌법
아래에 있는 시대이고 종교의 역할이 새롭게 강조되는 시대이므로 유교부흥
의 호기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일부에서는 송기식 자신
의 재목됨과 유교부흥이 시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망상이라고 비판
하지만 노력한다면 대동세계가 분명히 도래할 것으로 확신하므로 능력부족을
알면서도 유교부흥의 길로 나선다고 결의를 밝히고 있다.
1장에서는 유교는 예로부터 ‘불역不易’의 측면과 ‘변역變易’의 측면이 공존함
을 밝히면서 유교개혁론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불역의 측
면은 곧 유교의 근간을 이루는 ‘도체道體’의 부분이고, 변역의 측면은 그 도체
가 현실 속에서 활용되는 것으로 ‘시중時中’에 해당한다. 그러면서 유교의 여러
경전으로부터 불역의 도체에 해당하는 구절 17개 조목과 변역의 시중에 해당
하는 9개 조목을 발췌하여 나열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송기식의 유교개혁론
을 관통하는 논리는 곧 ‘체용론體用論’임을 유추할 수 있다.
다음은 유교가 쇠퇴하게 된 원인에 대한 분석으로, 2‧3‧4장이 이 내용이다.
그러면 불역과 변역의 측면을 고루 갖춘 그런 유교가 근세로 내려오면서 쇠
퇴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송기식은 이에 대해 과거의 유교가 보여준 부정
적인 기풍과 유학자들의 개별적인 폐해를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근세에 유
교가 쇠퇴한 원인은 4가지이다. 첫째는 인재선발에 있어서 문벌주의의 폐단
이다. 조상이 공을 세우면 대대로 자손들이 양반노릇을 하게 됨으로써 자연스
형태로 ‘註譯 儒敎維新論’이라는 제목으로 대구에서 정식으로 발간되었다(宋基植 著, 宋
秉杓 註釋, 註譯 儒敎維新論, 신흥인쇄소, 1998).
24) 이하 儒敎維新論의 내용은 장의 순서에 따라 서술하였으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출전을 별도로 표시하지 않는다.
논문 / 후기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 _ 433
럽게 문벌을 숭상하는 고질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학문을 해도 세상
을 구제하려는 이념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권세와 지위를 얻으려는 데
목적을 두는 풍조가 성행하여 유학이 쇠퇴하게 되었다. 둘째는 한문을 숭상하고
한글을 천시한 점이다. 한문은 중국의 문자에 불과한데 사람들은 한문이 곧 유
교인 줄 잘못 생각하고, 나아가서 한문을 배우기 어렵다고 해서 유교를 싫어하
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과문科文, 즉 과거에 필요한 문장에 힘쓰고 유
학의 참뜻을 알려고 하지 않은 점이다. 넷째는 당론黨論에서 탈피하지 못한 점이
다. 당시에는 이미 당론이 거의 힘을 잃기는 했으나 은연중에 그 영향이 남아 있
어 서로 상대를 모함하는 풍조가 유학의 발전을 저해했다고 한다.
유학자의 개인적인 품성이 유교의 쇠퇴에 영향을 준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모든 것을 운수에 맡기고 스스로 난국을 타개하려는 의욕이 없는 일부의
자포자기적인 태도이다. 또 이와 함께 외관상으로는 유학자로서 손색없으나 실
제로는 유교의 근본정신을 실천하지 못하는 향원鄕原과 같은 무리도 있음을
지적하고, 그 유형을 5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는 혼돈노성파混沌老成派로 불리는
부류로, 과문科文과 사장詞章을 숭상하며 지식은 잡다하나 새로운 학문은 아
주 외면하는 유형이다. 둘째는 구학고집파舊學固執派로서, 말 그대로 성리학에
대해 알기는 하지만 사고가 완고하여 성인의 근본사상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
해하지 못하는 유형이다. 셋째는 부귀자존파富貴自尊派로 불리는 부류로, 조상의
은택으로 부귀를 누리면서 그 조상의 유업을 고수하는 것만을 도리라 생각하
고 일체의 혁신은 외면하는 유형이다. 넷째는 외관파外觀派로서, 생활습관과 행
위규범은 유교를 따르지만 대외적으로 유교의 각종 활동에 대해서는 외면하
고 협조하지 않는 유형이다. 마지막 다섯째는 자훼파自毁派로서, 서양의 새로
운 문화에 현혹되어 여태까지 믿어오던 유교를 배반하고 비난하는 유형이다.
송기식은 근세유교와 유학자들의 이와 같은 폐단을 지적하면서 이 때문에
공자 이래로 포용성을 장점으로 하던 유교가 그 본래의 모습을 잃고 말았다
고 아쉬워한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학파가 갈라지고 주장이 서로 맞서게 되
면서 유학이 점차 포용성이 없는 협애한 유학으로 쇠퇴하였다는 것이다. 송
434 _ 국학연구 제10집
기식이 볼 때 이것이 근세에 유교가 쇠퇴한 가장 큰 원인이다.
다음은 유교가 그처럼 쇠퇴하여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생긴 부작용으로,
5장과 6장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송기식은 유교가 그와 같은 처지로 전
락함에 따라 조선인의 각종 부정적인 습성들이 고질화되기에 이르렀다고 진
단한다. 이것을 모두 7가지 유형으로 정리하는데, 공적인 일을 하면서 언제나
자기의 공명심을 앞세우는 호명파好名派, 어떤 일에서나 오직 이익 추구만을 앞
세우는 탐리파貪利派, 금전 만능주의에 빠진 금전파金錢派, 자주성이 없이 늘 남에
게 의존하는 의뢰파依賴派, 옛 사람의 예언에 미혹되어 이성적인 판단과 행동을
못하는 참위파讖緯派, 생활이 곤궁하여 정신적으로 남에게 굴종을 일삼는 곤궁파
困窮派, 주색잡기를 일삼으며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부랑파浮浪派가 그것이다. 이
상의 7가지 유형은 유교가 쇠퇴함으로서 생겨난 폐단으로서 결과적으로 유교가
사회 각 방면에서 배격을 받는 계기로 작용한다. 유교가 그 본래의 정신을 발휘
하지 못하자 모든 사회적인 반목과 알력의 원인이 유교에서 유래되었다고 비
판받으면서 유교가 배척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단 후에 송기식은 7장과 8장에서 지금이야말로 그렇게 쇠퇴한
유교가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부흥시킬 수 있는 호기라고 주장하며 그 근거
들을 제시한다. 사상에는 흥하고 쇠하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유교가
현재는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으나 지금처럼 시대가 혼란할수록 역설적으로
절대적인 진리를 지닌 유교의 본면목이 새롭게 조명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
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유교에 잠재되어 있는 그런 대안적인 가능성의
예로 예기 「예운禮運」편에 나오는 대동사회론을 제시한다. 뿐만 아니라 조선
사람들의 생활 속에 유교문화가 알게 모르게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도 유교의 부흥을 가능하게 하는 든든한 자산이라고 지적한다. 유교적인
생활의식에 익숙하게 젖어있는 일반대중의 존재와 곳곳에 있는 향교와 서원
이 교육시설로 그대로 전용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고을마다 청년을 가르칠
수 있는 선비가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쇠락한 유교를 정상으로 돌려 부흥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논문 / 후기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 _ 435
무엇인가? 이에 대해 송기식은 9장에서 모두 11가지의 방법을 든다. 차례로
살펴보면, 공자를 종교적 대상으로 받들어 단결할 것, 유교도 종교적인 예식
의 절차를 갖출 것, 각 지방에 신도조직을 만들게 하고 신도가 수십 호가 되면
교회를 세우도록 할 것, 복일復日 즉 일요일마다 강연회를 가져서 경전의 뜻과
당면한 과제를 교육시킬 것,25) 유교 경전의 의미를 가르치는 경의강습소經義講
習所를 설립한 후 경전에 밝은 강사를 두고 지방 유교회에서 18세 이상의 유능
한 사람을 강습생으로 선발하여 6개월‧1년‧3년의 기간으로 교육시키고 졸업
하면 지방 유교회와 향교 및 서원 등의 임원 또는 강사로 활용할 것, 유교 경
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누구나 쉽게 경전의 뜻을 알 수 있도록 할 것, 선행자
특히 효행자를 표창하여 윤리도덕을 장려할 것, 제자를 받아들일 때 차별이 없
었던 공자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 불평등한 사회적 계층구조를 타파할 것, 관
혼상제의 예를 시대에 맞게 조정할 것, 국민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여 이들로 하여금 장차 부인회의 활동을 담당하게 할 것, 국민
모두가 학교교육을 통하여 현대과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할 것 등이다.
이와 같은 방법들을 제시한 후 송기식은 10장과 11장에서 이를 다시 본원적
인 방법과 실용적인 방법 두 측면으로 나누어 개괄한다. 본원적인 방법론은 말
그대로 유교의 본원을 기르는 것으로, 곧 ‘경敬’을 통하여 하늘로부터 품부받은
‘성性’을 함양함으로써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송기식은 이 이치를
‘치지致知’에 해당하는 철학적 측면과 ‘함양涵養’에 해당하는 종교적 측면 둘로 나
누어 설명하면서 유교는 이 두 부분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상이라고 말한다. 그
러면서 실천론에 해당하는 ‘경’의 위상을 특히 중시하여 공자 이후 한국과 중국의
여러 선현들과 대학 ‧ 중용 ‧ 논어 등에 언급되어 있는 ‘경’의 의미와 그 실천
방법들을 자세하게 거론한다. 아울러 여타의 종교와도 비교하여 불교의 참선과
25) ‘復日’은 주역 復卦의 괘사에 나오는 “7일만에 다시 돌아온다(七日來復)”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곱 번째 날 즉 지금의 요일 체계에서 일요일을 가리킨다. 이는 初爻부터
上爻까지 모두 6개의 효로 이루어져 있어 일곱 번째에는 다시 초효로 돌아가는 주역
괘의 구조적인 특징으로부터 비롯된 용어이다.
436 _ 국학연구 제10집
기독교의 기도 그리고 천도교의 주문呪文도 모두 이 ‘경’과 유사한 것임을 주장하
고, ‘경’이야말로 대동세계를 실현할 수 있는 유학의 핵심 공부라고 강조한다.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행하여야 하는 방법으로는 먼저 공자묘孔子廟에
교적敎籍을 비치하고 각 지방에 교회敎會를 설립할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유교
회가 설립되면 복일復日을 지켜 그날에는 지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두 참
석하여 예식을 행하되, 먼저 정좌靜坐의 절차를 가져 10분 혹은 20분간 고요하
게 앉아 마음을 정리하고 다음으로 강연을 열어 경전의 뜻을 풀이하기도 하고
시사時事에 관한 해설을 듣게 한다. 이것이 끝나면 다시 처음 시작할 때와 같이
정좌를 하여 마음을 정리한 후 폐회를 하도록 한다. 이렇게 하여 유교에 관심있
는 사람들이 일종의 종교공동체를 조직하여 이를 활성화시키면 유교의 법도를
실천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다음은 여타의 사상이나 종교와 비교해 볼 때 유교가 지니고 있는 우월성
으로서, 12장에서 다루고 있다. 동서고금의 학설과 종교는 각기 다른 모습으
로 발전되어 왔으나 천天이 하나이듯이 그 근본원리는 하나일 뿐이라고 송기
식은 말한다. 그러면서 특히 유교는 오랜 역사를 지닌 진리의 체계이므로 그
속에는 다른 종교와 철학, 과학에서 말하는 내용들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선교仙敎의 연성鍊性과 불교의 참선, 기독교의 기도, 천주
교의 송주誦呪, 대종교의 제천祭天은 모두 유교의 ‘경’에 해당하고, 선교의 지치
至治와 불교의 대승大乘, 기독교의 심판, 천도교의 광제廣濟는 유교의 ‘대동大同’
에 해당하며,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은 유교의 ‘인仁’에 해당한다는 등
이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철학사상도 마찬가지여서, 탈레스 이래로 소크라
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하여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서양의 중
요 철학자들의 근본사상도 모두 유교에서 이미 설파되고 있음을 이들의 학
설과 유교의 교설을 일일이 대비하며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유교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이에 대해 송기식은 서양의
여러 학설들과 유교의 그것 사이에는 조금의 차이도 없고 순수한 취지면에서는
오히려 유교가 더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우승열패가 갈린 이유는 서양
논문 / 후기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 _ 437
은 학설을 실제에 적용하여 발전시켰으나 우리는 이론에만 그치고 그것을 실
제 현실에서 적용하여 시행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요
컨대, 그만큼 유교는 포괄적이며 근원적이므로 교리나 학설상으로는 서양에
비해 절대 열등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이상과 같은 논증을 마친 후 송기식은 13장에서 유교는 동서고금의 모든
종교와 철학과 과학을 포괄하는 통일주의 사상임을 천명하고 그 내용으로 4가
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시중주의時中主義이고, 둘째는 집대성주의集大成主義이며,
셋째는 일용사물당연주의日用事物當然主義이고, 넷째는 지어지선주의止於至善主義
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4장에서 이와 같은 유교의 장점을 제대로 살려 부
흥시킨다면 장래의 세계는 유교사상에 힘입어 태평의 세계를 실현하게 될 것
임을 예언하는 것으로 유교개혁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마무리한다.
5. 송기식 유교개혁론의 특징 _ ‘敬’의 종교화
유교유신론 에 담겨 있는 유교개혁에 대한 송기식의 생각들을 살펴볼 때
일단 당시 여타의 유교개혁론자들이 품었던 생각과 크게 다른 점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유교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폐단을 개혁하여 국권회복이라
는 시대적인 요청에 새롭게 부응하게 하겠다는 유교개혁에 임하는 근본 태도
에서부터 유교의 위기를 후대 유학자들의 부정적인 행태에서 말미암은 근세
유교의 위기로 한정하고 공자의 본원유학에 대해서는 긍정하는 점, 또 그렇게
본래적인 면모에서 본다면 유교는 동서양의 모든 종교와 철학과 과학을 포괄
하는 제일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점, 유교개혁의 돌파구를 유교의 종교화에서
찾고 있는 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특히 유교의 종교화는 송기식의 유교개혁론의 근간을 차지하는
주제이다. 이는 그가 유교를 통한 종교입국이 현시점에서 유교의 제일의 존재
438 _ 국학연구 제10집
이유라고 천명하는 데에서도 충분히 드러난다.26) 또한 당시의 교육을 공리학
으로 비판하고 종교를 통해 도덕성을 먼저 기르게 해야 비로소 교육이 완성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27) 대학교는 오히려 지엽에 불과할 뿐 유교회
를 먼저 세우고 그 혁신의 방책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이 먼저라고 강조하는
것에서도 이점이 확인된다.28)
그런데 유교개혁론에서 유교의 종교화를 중시하는 송기식의 이런 태도는
그의 유교개혁론을 평가하는 데 이중적이며 중층적인 요소이다. 그것은 먼저
송기식의 유교개혁론을 동시대의 유교개혁론과 연결시켜주는 통로이면서
동시에 차별성을 확보해주는 요소로서 작용한다. 또한 그것은 송기식의 유교
개혁론을 후기정재학파의 그것과 차별화시켜 주는 동시에 정재학파의 전체
적인 특징과 연결시켜주는 역할도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종교를 중시하는 송기식의 태도는 여타의 유교개혁
론자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유교개혁론의 핵심적인 방법으로 유교의 종
교화의 길을 걸었던 유학자들이 이 문제와 관련하여 품었던 공통적인 문제의
식이 송기식의 경우에도 그대로 발견된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당시 유
교를 종교로 각성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중요한 문제점들은 우리 민족을 지탱
시켜온 실질적인 국교로서 정통 유교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을 비롯하여 모든
종교와 사상을 아우르는 유교 진리의 보편성, 유교의 교조로서의 공자의 위
상 그리고 타종교에 대한 유교의 우월성 등을 분명히 확인하는 일이었는
데,29) 이런 요소들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송기식의 구상 속에서도 그대로 발
견된다.
그러나 이 종교화의 문제는 후기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으로 비교의 범위를
축소시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상룡이나 유인식과 비교해 볼 때 이점이
26) 海窓集권4, 「答張鶴天」, 11쪽.
27) 海窓集권3, 「答李丈鼎民李文德純」, 27쪽.
28) 海窓集권3, 「與李子愼」, 32쪽.
29) 금장태, 「한국 근대유교와 종교운동」, 대동문화연구 37집, 2000, 264~275쪽.
논문 / 후기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 _ 439
송기식에게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유교개
혁의 일환으로 유교를 종교화하는 문제에 대해 이상룡은 그다지 주목할 만
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서양사상에 대한 활발한 수용과 이
해를 통한 철학적이며 이론적인 측면에서의 보완에 좀더 관심을 기울인다.
사회계약론 및 국가유기체설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과 입헌군주제의 옹호,
사민평등에 대한 긍정, 사회주의적 이상과 유교사상의 결합 그리고 그에 수
반되는 진보적 역사관의 수용 등이 그런 것들이다.30)
유인식의 경우는 당시의 현실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해 이상룡보다는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지만 그 역시 단편적인 선에 그치고 만다. 그가 종교의 역할에 대
해 정면으로 언급하고 있는 곳은 배우는 길에 있는 사람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학문적 자세에 대해 논한 「학범學範」이라는 글의 제일 마지막에서
이다. 그는 여기에서 젊은이들에게 종교를 가질 것을 권유하면서 반드시 종교
가 있은 뒤라야 마음에 주지할 바가 있고 일에 의거할 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말한다. 세계의 강대국치고 종교적인 신앙의 힘으로 단결을 유지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는 것도 또 다른 권장 이유이다.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
지만 여러모로 볼 때 유인식이 이 글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종교는 유교로 보인
다. 하지만 이에 대한 더 이상의 추가적인 언급은 없어 유교의 종교화에 대한
유인식의 구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지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다.31)
이 두 사람에 비하여 송기식은 유교를 종교화하는 데 한층 적극적이다. 여
기에는 아마 송기식의 유교유신론 이 집필된 때가 1921년으로 유교종교화 운
동이 국내외에서 활발히 전개되던 1910년대를 잇는 시기라는 점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32) 이는 서양의 강성 원인을 기독교에서 찾던 강유위康
30) 박원재, 앞의 논문(2004) 참조.
31) 박원재, 앞의 논문, 2006, 48쪽.
32) 朴殷植과 張志淵이 중심인물로 활동했던 大同敎가 설립된 것은 1909년이고, 송기식과 함께
도학적 유교개혁론자로 분류되는 李承熙의 孔子敎가 만주에서 조직된 것은 1913년이며,
李炳憲의 孔子敎가 국내에서 결성된 것은 1923년이다. 일제시대에 조직된 그밖의 유교회
의 현황에 대해서는 금장태, 앞의 논문(2000), 296쪽 참조.
440 _ 국학연구 제10집
有爲 이래 동양 지식인들의 현실인식과 국권상실이라는 초유의 사태에서 민족
의 단결을 담보하는 구심점의 확보라는 조선의 정통 유학자들의 시국인식이
송기식도 그대로 시대적인 유산으로 물려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유교를 종교화하고자 하는 송기식의 이런 관심은 구체적인 실천
론의 측면에서 여타의 유교개혁론자들과 차별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유교를
종교로 거듭나게 하는 데 핵심이 되는 요소로 ‘경’을 주목한다는 점이다. 당시
의 유교개혁론자들 가운데 송기식만큼 ‘경’을 중시하는 유학자가 없다는 점에
서 이것은 그의 유교개혁론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징이라고 해도 좋다. 이는
도학적 유교개혁론자로 분류되는 이승회도 ‘경’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의를 기
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33) 따라서 ‘경’의 역할에 대한
중시와 강조는 송기식의 유교개혁론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경’에 대한 이와 같은 관심은 영남 퇴계학파의 적통을 잇는 정재학파 구성
원이라는 송기식의 학파적 위치가 분명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퇴계학파에서
‘경’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송기식의
다음과 같은 생각 속에는 ‘경’에 대한 퇴계학파의 기본이해가 고스란히 녹아들
어 있다.
유교의 ‘경’은 천지만물이 본래 나와 일체이기 때문에 내 마음이 바르면 곧 천지의
마음도 바르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천지간의 만물을 가지고 응용한다면
먼저 나의 본연성本然性을 함양하는 것이 제일이니, 항상 나의 본성에 조금이라도 다
33) 이승희의 유교개혁론의 특징은 유교적인 교육체계를 구체적으로 구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장태 교수는 이에 대해 이승희의 경우는 전통에 대한 혁신적 개혁이 아니라 주희가 남긴
업적을 철저히 존중하면서 이를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맞게 재구성하여 적용시키려는 개량
주의적 태도가 특징이라고 평가한다(금장태, 앞의 책, 2003, 212~213쪽). 공자교 운동을
근간으로 하는 이승희의 유교개혁론를 다루고 있는 기타 연구성과로는 유준기의 한국근
대유교개혁운동사 를 비롯하여 김종석의 「한계 이승희의 공자교 운동과 유교개혁론 문제」
‧「한주학파 유교종교론의 본질과 공자교 운동」, 홍원식의 「한국 공교 운동과 이승희」 등이
있다.
논문 / 후기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 _ 441
른 것이 섞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본성은 상제께서 나에게 내려주신 본연의 이치
(理)이다. 그런 나의 본성을 허명정일虛明靜一하게 하는 방법은 오직 ‘경’ 공부일 뿐
이니, 이 ‘경’은 고요히 있을 때나 움직일 때나 늘 견지해야 하는 것이다.34)
그러면 송기식이 퇴계학파의 유산 가운데 이처럼 ‘경’을 유교 종교화의 방
법론으로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경’이 기독
교로 대표되는 서양 종교에 대적할 수 있는 유교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유교는 종교적인 측면과 철학적인 측면을 모두 갖
추고 있다고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종교성에 더 비중을 두는 데에서 잘 드
러난다. 송기식은 유교가 이 양면을 모두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세에
쇠퇴하게 된 이유는 철학성에만 너무 치우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복희의 팔
괘八卦와 공자의 인仁은 모두 종교성에서 나온 것인데 후대에 이를 모르고 그
철학적 측면만 궁구하는 바람에 유교가 쇠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35)
만약 이와 같은 진단이 타당하다면 대안은 자명해진다. 그것은 유교의 종교성
을 다시금 부활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종교성의 회복은 곧 ‘경’ 공부에 달려
있다. 이것이 송기식이 ‘경’을 중시하는 맥락이다. ‘경’은 성학聖學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이것을 인류에게 시행하면 대동의 세계가 이룩될 것이라고 하는 데
에서 ‘경’의 중요성에 대한 송기식의 그런 인식을 잘 드러나 있다.36)
송기식의 이와 같은 판단의 이면에는 은연중에 격물치지학, 즉 과학에서
는 서양에 뒤지므로 거경함양학, 즉 종교 방면에서 유교의 우위성을 확보해
야 승산이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경’을 근간으로 종교성의 함양이 모든 교육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
로 이어진다. 이것이 송기식이 여전히 정재학파의 일원인 가장 큰 이유이다.
유학의 종교성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으로 ‘경’에 관련된 선현의 여러 구절들
34) 번역문의 의미가 불명확한 부분이 있어 의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원문에 의거하여 표현
을 고쳤다( 儒敎維新論, 신흥인쇄소, 1998, 89~90쪽(번역문)‧ 230~231쪽(원문)).
35) 儒敎維新論, 81~82쪽.
36) 儒敎維新論, 86~87쪽.
442 _ 국학연구 제10집
을 인용하곤 하는 그의 태도는 퇴계 이래 서산 김흥락까지 퇴계학파에서 반
복적으로 내려오는 전통이다. 특히 대산大山 학파에서는 ‘경’을 천지생물지심
으로 파악하면서 이것을 만물일체와 연결시키는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논
쟁이 있기도 했다.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천주교의 도전에 대한 퇴계학파의 응전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근기 지역을 활동무대로 했던 성호학파는 천주교의 영향으
로 원시유교의 상제설上帝說을 복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면서 이들은
조상 귀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주자학의 양면적 태도 가운데 그것이 일정 기
간 동안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측면을 상대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천주교
의 영혼불멸설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이에 반해 영남 퇴계학파는 이런 성호학
파의 태도를 비판하고 시종일관 주자학의 리理가 지니고 있는 내재적 성격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음으로써 이 문제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이들은 상제를 내재화된 리로 환치시키고 이를 체인하기 위한 공부로서
‘경’을 중시하였으며, 아울러 조상 귀신의 존재처를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
임으로써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의 정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요컨대, 상제와
같은 초월적인 실체를 경배하지 않아도 ‘경’ 공부를 통해 도덕적 고양을 충분
히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37)
영남 퇴계학파를 관통하고 있는 이와 같은 학파적인 분위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박은식과 같은 양명학 계열의 유교개혁론자들이 ‘만물일체가 곧 인’이라
고 하는 양명학적 전제를 대동사회의 근거로 삼은 데 대하여 그런 요소들은
이미 퇴계학파의 ‘경’ 속에는 충분히 녹아 있다고 송기식은 생각했을 가능성
이 높다. 이것이 송기식으로 하여금 양명학적 유교개혁론자들과 다르게 여전
히 ‘경’을 유교종교화의 근간으로 삼게 만든 사상사적인 맥락이다.
37) 이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논의는 안영상, 「천주교의 천주(상제)와 영혼불멸설에 대한
영남 퇴계학파의 대응양식」( 시대와 철학 26호, 2005) 참조.
논문 / 후기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 _ 443
6. 맺음말
조선 후기의 성리학사에서 정재학파의 존재는 여러 가지 점에서 주목을 끈다.
그것은 이 학파의 구성원들의 사상적 스펙트럼이 가장 보수적인 주자학자에서
부터 가장 진보적인 사회주의자에까지 걸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재 유치명
의 재전 제자 그룹에 해당하는 후기정재학파에서 이런 현상은 집중적으로 발견
된다. 이 그룹의 좌장격인 이상룡은 1910년대 중반 의병활동을 통한 구국운동에
실패하자 서구의 새로운 학문을 적극 수용하며 유교의 혁신을 추구하였고, 국권
상실 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병행하였다. 유인식의 경우도 1903년
성균관 유학길에서 서울서 만난 신채호의 소개로 중국근대의 개혁가 양계초의
사상을 접하면서부터 철저한 유교개혁론자로 변신한 후, 교육구국운동을 중심
으로 과단성 있는 실천가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유교유신론 으로
대표되는 송기식의 유교개혁론은 후기정재학파의 이와 같은 흐름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
유교 혁신에 관한 송기식의 생각은 동시대의 유교개혁론과 일정 부분 호흡
을 함께 한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종교화를 통한 유교의 부흥과 그렇게 부흥된
유교를 통한 교육구국운동이다. 그러니까 유교의 종교화와 그를 통한 교육계몽
그리고 그 결과로서 국권회복이 송기식의 유교개혁론을 떠받치는 기본 구도이
다. 이러한 입론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송기식만의 특징도 발견되는데, 유교의 종
교화를 담보하는 핵심적인 실천방법으로 ‘경’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이 ‘경’에 대한 중시는 영남 퇴계학파의 전통을 잇는 주류 가운데 하나인 정
재학파의 후예로서의 송기식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는 주자
학의 근본 입장에 충실하여 리의 내재성과 능동성을 시종일관 강조하며 그 리
의 체득을 가능하게 하는 실천적인 방법론으로 ‘경’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던
영남 퇴계학파의 분위기가 송기식의 유교개혁론에 남긴 흔적인 까닭이다. 이
런 점에서 송기식의 유교개혁론은 진즉부터 종교적 경건주의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고 평가받던 영남 퇴계학파의 사상적 경향성이 천주교라는 현실적인 도
444 _ 국학연구 제10집
2007. 5. 17 : 논문투고 2007. 5. 20 ~ 5. 30 : 심사
2007. 6. 10 : 수정완료 후 제출 2007. 6. 15 :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
전에 계기로 그것의 종교화 가능성을 탐색한 하나의 시험적인 사례라고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특징에도 불구하고 송기식의 유교개혁론은 결과적으로 현
실적인 설득력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유교
자체에 대한 철저한 자기비판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유교
개혁론자들처럼, 송기식 역시 유교 쇠퇴의 모든 원인을 근세 유학자의 책임으
로 돌리는 것으로 만족했을 뿐, ‘유교’ 자체에 내재해 있는 사상적‧이론적 부적
합성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아니 침묵했다기보다는 유교의 부흥을 자신이 수행
해야 할 시대적 소임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유교 자체에 대한
성찰적인 문제의식이 애초부터 부재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점은 국외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병행했던 이상룡이나 교육계몽운동
가에서 노동운동가까지 사회적 실천의 폭을 꾸준히 넓혀갔던 유인식 그리고
기존의 유교적 현실대응책의 한계를 자각하면서 사회주의자로 과감히 전향
하였던 같은 시대 안동지역 혁신유림의 경우와 비교하더라도 그 보수성이
한층 대비되는 부분이다. 이들이 현실에 대해 좀더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송기식은 여전히 유교에 좀더 많은 희망을 걸고 각 지역 유교회에서 운영
하는 교육시설을 돌며 이른바 ‘경의經義’를 가르치는 데 매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점을 잘 보여준다. 유교개혁론자로서의 송기식의 삶에 드리워져
있는 도학의 그림자는 그만큼 짙었던 것이다.
논문 / 후기 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 _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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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 _ 국학연구 제10집
A Study on Confucian Reformation by the
Late Jeongjae School
-Focused on Yugyoyusinron (Confucian Theism) by Haechang Song Gi-sik
Park, Won-jae
(Korean Studies Advancement Center)
In terms of the intellectual history of the late Joseon period, the
late Jeongjae School, which belongs to a group of followers whose
teachers were followers of Jeongjae Yu Chi-myoung, plays a role of
useful reference in considering Confucian ability to cope with reality
when the west prevailed over the east. This is because the followers
of the school showed the wide spectrum of thoughts transforming
themselves from sincere Neo-Confucian scholars to Confucian reformist,
and to socialists later responding to social demands. Song
Gi-sik's Confucian reform theory represented by Yugyoyusinron
(Confucian Theism) was on the line of the trend. His opinions about
the Confucian reform were shaped into religionization of Confucianism,
educational enlightenment through its religionization, and recovery of
sovereign rights. The most outstanding characteristic in the process
was that he attached importance to ‘Gyoung(敬)’ as a key practical way
that enables the religionization of Confucianism. Valuing the ‘Gyoung’
was an indication of Youngnam Toegye School which always emphasized
immanence and activity of Li(理) and stressed ‘Gyoung’ as
Abstracts _ 447
a practical way of acquiring the Li. In this respect, Song Gi-sik's
Confucian reform theory can be appraised as a test case where intellectual
tendency of Youngnam Toegye School, which was said to
imply elements of religious piety, searched for a possibility of religionizing
Confucianism against foreign powers with Catholic at the head.
Key Words: the late Jeongjae School, Confucian reform theory,
movement to save the nation through education,
the doctrines of Chu-tzu(道學), Gyoung(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