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喪主)와 상제(喪制) 그라고 옛 진도 부주(扶助)
팽목 탈상바위 전설에 관한 기록들을 뒤지다 봉께 찰로 얼척없는 잘못덜도 많아다.
한 고을의 대표적 관찬지(官撰誌)인 군지(郡誌)와 현대판 ‘디지털진도문화대전’에서도 일본 덴노(てんのう)한테 쓰던 요배(遙拜)란 낱말을 망곡요배(望哭遙拜)라고 부모 탈상에 쓴 것도 그라제만
여러 기록들에서 망인(亡人)의 배우자와 직계 비속을 뜻하는 상제(喪制)를 두고 탈상바위 설화들에서 마치 사람에 이름인양
‘조도 섬에 사는 상제라는 사람이….’
‘효성이 지극한 상재라는 어부가….’
‘조도의 어느 마을에 상주가 살았는데….’
그리고 심지어 같은 글 안에서도 상재, 상제……. 로 두서없이 혼재해 쓰여 있다.
그래 이 기회에 상주하고 상제에 대해서 잔 알어봤다.
** 상주(喪主)와 상제(喪制) **
우리 전통 예법에 누군가가 죽으므는 '상주(喪主)'는 주(主)가 되는 상제(喪制)로 대개 큰아들이 상주가 된다.
그라고 망인(亡人)의 배우자와 직계 비속(卑屬, 아들 이하의 항렬에 속하는 친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 모두 상제(喪制)다.
상주(喪主)는 상제 가운데에서 장자(長子, 맏아들)가 되지만, 장자가 없으믄 차남이 아닌 장손(長孫)이 승중(承重, 적손인 손자가 할아버지로부터 직접 한집안을 거느릴 권리를 이어받는 일)해서 상주가 된다.
마누라가 죽으믄(妻喪) 남편이 상주가 되고, 손없이 아들이 죽으믄(長子喪) 아부지가, 아들이 먼저 죽은 뒤 손주(孫子)가 또 죽으믄 이 역시 할아부지(祖父)가 상주가 된다.
어짜믄 1989년부터 수차 개정되다가 2005년에 완전히 폐지된 옛 호주제(戶主制)의 기본과 비슷한 예라 하겠다.
그란데
진도에서는 대개 고인의 아들들을 모도 배깥상주, 며느리들은 모도 안상주라고 불룸시로 상제란 낱말보다 상주라는 낱말을 많이덜 썼다. 이러한 데서도 맏상주, 큰상주, 원상주라고 장자(큰놈) 구분은 분명히 했고 남지기(나머지) 아들덜은 작은 상주라고도 했다.
그라고 망자의 동고조(同高祖, 堂內) 즉 8촌 이내의 사람들은 상복(喪服)을 입는다는 의미로 복인(服人)이라고 했는데, 진도의 경우 아주 부잣집이 아닌 경우 일반적으로 상주들(상제를 칭함) 외에 복인들은 상복을 입기보다는 복건(幅巾)을 썼고 이 역시 복을 입는다고 표현했다.
지금이야 장례식장이 있어서 모든 진행에 어려움이 없으나 예전 전통 장례에서는 자기 집에서 3일씩 치르는 큰일인데 상주와 상제들은 조문객(弔問客) 맞이와 애곡(哀哭)으로 경황도 없고 대소사를 직접 챙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마을마다 상둣기(喪布契)가 있어 유사(有司)의 책임 아래 도움도 받지만 대개 집안(堂內로 8촌을 뜻하나 십촌 이내) 가운데에서 유식하고 능력있는 분을 호상(護喪)으로 정해서 장례 전반의 모든 일을 맡아 진행하게 했었다.
그란데 여그서 또 젤로 중요한 소임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칼짜’다. 표준어 뜻으로는 ‘칼자’가 ‘지방 관아에 속하여 음식 만드는 일을 맡아보던 하인’이지만 진도의 대삿집(婚家, 결혼식 치르는 집)이나 상갓집(喪家)에서 소임을 맡는 칼짜는 고기나 적, 전 등을 분배하는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은 사람이다. 잔치의 잘되고 못되고가 이 사람에게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손님의 중요도와 부주(扶助) 가져온 물량에 비하고 준비한 물량에 맞춰서 적절히 뒤탈 없이 잘 처리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칼짜에게 지워져 있었다. 상주와의 친분도 중하나 칼짜와의 개인 친분에 따라서도 문상객 상에 올려진 고기와 부주동구리에 담겨져 나가는 음식의 양과 질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으리라.
그 외에 유사 또는 집사라고 해서 손님을 맞아서 안방 건넌방 모방 행랑채 마당 챌밑 등등에다 경우에 따라 옆집 마래까장 벌어진 자리 가운데 어떤 문상객을 어느 자리로 모실 손님인지 구분해서 안내하는 사람의 소임도 역시 중했다. 거기에 더해 모든 이웃 친지들은 너나없시 정재 마당케 등에서 팔 걷어부치고는 노물 다듬고 전 지지고 음석(飮食) 맨들고 경씻치고……. 오만 궂인일덜도 마다 안했든 상부상조에 풍십(風習)이었고 오가는 정이 있었던 그 시절 그 풍경들이 아련하게 그립다.
집안(堂內) 초상에는 돈도 부주(扶助)하제만 암만 형편이 안 좋아도 산태미 부주는 했고 마포(麻布, 삼베)나 명뻬(綿布, 무명천) 한두 필썩은 가져들 갔다. 특히 사둔(査頓)네가 초상이 나므는 퐅죽(팥죽)을 쒀다가 동우차(동이째)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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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사투리사전 저자 조병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