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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알파인가이드 원문보기 글쓴이: 꿀밤
키르키스탄의 대지에 안기다 (데케토르 초등정기)
‘따르릉 따르릉’
뜨거운 햇볕아래 모심기가 한창인데 한통의 전화가 왔다.
“ 형님, 키르키스탄에 4000m 급의 암벽이 수두룩한데 바위 타러 가시지 않을래요?”
그리고는 이런 저런 안부의 내용, 머릿속에는 이미 결정지어져 있는 상황, 며칠 뒷면 조경수 협회 서부지부에서 중국여행을 일주일간 가야하는데 무슨 염치로 또 마누라에게 등산 보따리를 싸들고 나가겠다는 말을 할까……. 그리고는 잊어버렸는가. 마는가하고 시간이 흐른다. 그러다 6월 말에 출국할 거란 말에 경비라도 좀 만들어 줘야 겠다 싶어 여기저기 전화를 하다 보니 헌우 형님이 대뜸 가시겠단다. 어라. 또다시 깊은 기억 한 구석이 꿈틀거린다. ‘키르키스탄이라. 그리고 4000m 급 암벽이…….
생 떽쥐 베리의 비행이라는 소설 속에서 황량한 대지와 사막 위를 날아가며 별을 보고 고뇌하는 비행기 조종사가 또 머릿속을 뒤집어 놓고야 만다.
그래 딱 20년 전 이 맘 때지. 혼자 보따리를 싸매고 아이거, 죠라스, 드류를 미련 없이 기어올랐지. 결정은 끝이 나고 7월3일 인천공항에서 비쉬켁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4명 중의 한명에 들어있었다. 사천과 함안 두 곳의 현장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마무리 짓고 7월1일 오후까지 농장에서 농약 살포를 하고는 말이다.
오후에 출발하여 오후에 도착하였다. 해가 떨어져가는 서쪽으로만 7시간을 비행하고 3시간의 시차를 감안한 도착이다. 덜거덕거리며 택시가 어둠을 가르고 대지의 품속으로 빨려들어 비쉬켁의 깊은 곳에서 여정을 푼다.
아침 일찍 현지 가이드인 경북 봉화출신 선교사 아사와 시장 이곳저곳을 누비며 식량 준비를 하고는 중식 집에 들러 고량주 대신 보드카로 긴 여정의 성공을 기원해 본다. 현지에서 고용한 포더들에게 짐을 분배하여 알라차이의 깊은 곳을 향해 한발두발 옮겨보지만 경험이 없는 이삿짐 센터의 인부들이라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늦긴 해도 B.C에 도착하여 캠프를 설치하고 공항에서 사간 참이슬로 잠을 청해본다.
보름달이 너무 밝아 잠이 오질 않는다.
장비와 짐을 정리하고 휴식을 겸해서 주변 정찰을 간단히 나가기로 하고는 어슬렁어슬렁 모레인지대를 거슬러 오르다 우박을 실컷 맞고는 B.C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저녁 회의 결과, 새벽 2시에 기상하여 4시에 출발하기로 하고는 장비를 준비해 놓고 잠자리에 들어보지만 맨숭맨숭 잠이 오질 않는다. 뒤척뒤척 하다 2시 무렵 기상하여 경래가 준비해둔 국거리와 밥을 준비해 먹고 우치텔을 향하여 어둠을 가르기 시작한다. 1시간 반가량의 가파른 모레인을 올라보니 멀찍이 빙벽사면이 보여 그곳으로 가서 장비를 착용하고 로프를 매었다. 이곳의 선택이 얼마나 잘한 것인지는 하산 길에서 바로 증명 되었다.
치영이가 앞서가고 내가 중간 그리고 경래가 후미로 로프를 매고 후렌치테크닉으로 길고 긴 빙벽을 쉼 없이 올라간다. 몇 백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데로 끝이 날 기미는 보이지 않고 경사만 가팔라진다.
한참을 더 그렇게 오르다 우측 능선에 올라서면 가닥이 잡힐 것 같아 그곳으로 가보니 정상 능선이 손에 잡힐 듯하다. 정상 능선에 올라 한참을 퍼질러 앉아 있으니 고산초기증세인 졸음이 꾸벅꾸벅 몰려온다. 한참을 졸다 정상 쪽을 바라보니 경사가 가팔라 보여 서로 머뭇거리다 치영이가 앞서가니 경사도 약하고 얼마가지 않아 우치텔 정상에 올랐다.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4540m의 우치텔정상을 실컷 즐기다 하산하여 내려오는 벽면이 조금씩 녹아서 내려오기가 아주 수월해진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그냥 그대로 내려올걸. 왼쪽 능선 쪽으로 걸어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어 그쪽으로 들어섰는데 참 기가 찰 정도의 너덜지대이다. 다시 빙벽으로 들어가기도 뭣하고 해서 그냥 내려오긴 하지만 후회가 막심하기가 짝이 없다.
B.C로 돌아와서 오늘과 내일은 푹 쉬기로 하고, 여유로운 망중한을 즐기기도 하고, 러시아 여인들의 선탠 모습에 시선을 어디에 둘까 고민하기도 하다 이틀을 쉬고는 밤 12시에 기상하여 2시부터 데케토르를 등반하기위해 악사이 빙하를 향해 두 번째 어둠을 가르기 시작한다. 잘 다녀오라는 헌우형님의 배웅을 받으며 아마 24시간 정도면 B.C로 되돌아 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뒷말을 흐렸다.
데케토르 남벽, 건조 비빔밥을 대충 끓여 먹고 설사면을 천천히 오른다. 오른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다. 아무도 오르지 않은 미지의 벽을 오른다는 것은 더욱 기쁜 일이다. 하지만 그 오름 짓에는 책임이 따르고 부담이 따르고, 어려움과 고통의 짐을 메고 올라야하는 또 다른 의무가 있는 것이다.
긴 설벽 그리고는 물이 흘러내리는 폭포 옆의 끌르와르 디에드르를 오르고 간간히 직벽의 경사를 오르면 채석장 같이 생겨 먹은 작업장을 올라야 한다. 길이가 짧다면 별 문제 없지만, 등반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60m 로프 두 줄을 끌고 가고 나와 경래가 연속으로 올라야하니 중간에선 나의 부담은 더욱 커져가기만 한다. 원래 채석장의 돌들은 아래를 향해 굴러 내려가고픈 본능의 녀석들이 아닌가? 이런 등반이라고는 한 번의 경험도 없는 경래 녀석은 위험도 모른 채 씩씩하게 등강기를 밀어대니 위의 녀석들이 또 굴러 내려온다.
참으로 행운이다. 참 좋겠다. 위험을 모르고, 부담을 모르고 그냥 씨익 웃기만 하는 경래녀석. 참 착하기만 한 녀석. 타들어 목마름과 벽의 가팔라짐과 더 이상 돌아설 수 없는 지점으로 들어가는 지점에서 치영에게 사정을 하였다. 되돌아가자고! 헬기라도 부르자고!
두려웠다. 무서워서 되돌아서고 싶었다. 굴러 내려오는 놈들에게 한 개라도 맞아 버리면, 내가 왜 이럴까. 막내 딸 민정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그 때 “형님 저도 무섭습니다. 돌아 내려가기가 더 겁납니다. 탈출 할 수 있는 곳은 위 쪽 뿐입니다. 형님 힘냅시다. 아찔했다. 내가 왜 이럴까. 내가 잘 쓰던 말을 저 녀석이 쓰고 있으니! 그리고는 두려움을 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저 녀석도 얼마나 두려울까. 오래 전 고등학생이었던 녀석을 산악회에 입회시켜 이것저것 고생도 많이 시켰는데, 그리고 무엇하나 제대로 해준 것도 없는데, 이 벽에 와서까지 후배 녀석의 짐이 된다면 하는 생각이 들자 치영에게 미안함과 다시 오르는 용기와 감사의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가파른 크랙을 올라 폭포 옆 페이스로 들어가니 어김없이 오는 오후의 우박과 천둥이 내려치기 시작한다. 가스도 많이 차고 날씨도 어두워진다. 10m 쯤 트레바스하여 폭포 상단 직벽 아래에 확보를 하고 번개가 우릴 피해 가길 기다린다. 그냥 하염없이! 이곳의 날씨는 틀림없으니까 한 시간 이상 가지 못하니까, 우박도 가스도 한 시간 이상 끌어 본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가스 사이로 상단 좌측 어깨 능선을 보였다. 아주 잠깐, 희망이 보였다 잠깐이지만, 올라감. 왼쪽 어깨에 올라섬 그러나 또 깊은 절망. 아주 긴 페이스와 설벽이 깔려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경사가 누웠다. 치영은 오르고 나는 빌레이를 보고 경래는 쥬마링을 하고, 너무나 단순한 짓거리들. 그러기를 몇 피치를 더 오르다 치영의 소리가 들린다.
“형 릿지에 올라섰어요!” 자식 좋아하기는, 나는 속지 않는다. 남은 릿지가 얼마나 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나도 릿지에 합류를 해보니 느낌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쉬운 릿지를 오르다 보니 또 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눈바람을 맞으며 더 이상 오르지 않아도 될 곳에 설수 있었다. 그때가 현지 시간으로 21시 20분이었으니 참으로 긴 터널을 빠져 나온 듯하다.
간단히 사진 촬영을 마치고 반대쪽으로 넘어가 자일을 걸고 있는데 태연한 경래 답게 B.C에 무전을 날리고 있다. 짧은 암벽을 로프로 하강을 하여보니 오른쪽 능선으로 발자국이 보였다. 분명히 발자국이었다. 눈이 저렇게 만들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었다. 다시 우측 암벽으로 들어가서 확보를 하며 설벽을 클라이밍 다운을 한다. 조심조심 몇 번을 내려서는데 또 슬링을 발견하였단다. 정상적인 하강라인을 잡은 것 같다. 길게 60m를 하강하여 또 불안하게 생겨먹은 하켄을 발견하였다. 살았다 싶었다. 다시 60m를 하강하여 내려서니 더 이상 오도 가도 못할 곳에 와버렸다. 60m를 트레버스 하강하여 더 내려가 보니 그곳에는 밤을 보내기 더 어려울 것 같아 다시 되돌아와 날이 새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구덩이를 팠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날이 샐 것 같아 깊이 파지도 않았다. 깊이 팔 힘도 없었지만.
몇 번 꾸벅거리다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에 잠을 깨보니 0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주위가 밝아온다. 다시 내려가자. 고생한 두 녀석을 데리고 가야하고,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대장님이 있지 않은가. 어제 갔던 곳으로 되돌아가 커니스진 눈벽을 픽켈로 뜯어내고 암각에 로프를 걸고 내려서니 다음 능선이 복스 피크와의 안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런데 60m의 암각 많은 직벽을 내려왔는데 로프 회수가 되질 않는다. 다된 밥에 재를 뿌리는 듯하다 기분, 아무것도 먹지 않은 독기 때문인지 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돌멩이로 찍어서 자일을 잘라버렸다. 아직 60m가 남아 있으니, 위안을 삼으며, 질퍽거리고 경사진 채석장을 트레버스 하니 소련 사람들이 버리고 간 붉은 자일이 걸려있다. 나만 버리고 갈 수 있나. 니들도 버리고 갔는데……. 우리는 한번 자일 버림으로 다른 돌멩이에 걸어야하는 영특함이 생겨나고 긴 버림 끝을 걸어야하는 요령도 생겨서 이제는 로프를 버리지 않아도 탈출을 할 수 있었다. 소련 사람들이 버리고 간 로프 끝자락을 이용할 줄 아는 영특함까지 발휘하며. 그러나 조금 뒤 다시는 위리는 스크류 2개를 데케토르의 하산 길에 바쳐야함을 잊고…….
아주 긴 너덜. 이런 하산 길에는 밍기적 거리다 맨 뒤에 내려가고, 올라 갈때는 기를 쓰고 먼저 올라가야한다는 옛 산 친구의 말이 귓속에 울리지만 자꾸 위에서 떨어지는 돌덩이들은 진리를 내팽개칠 수 밖에 없다. 진리고 뭐고, 하느님도 공자님도 겁낼 낙석 앞에서는 긴 너덜에서도 다리에 힘이 생겨 날 수 밖에 없다.
한참을 달렸다. 미끄러지며, 약간 구르며, 빙하의 물이 흐른다. 반갑다. 배가 부르도록 마시자 더럽지만, 차가운 빙하 물이 뱃속에서 꿀렁꿀렁한다. 발을 씻자 살았다. 지리를 신봉하는 치영이와 경래가 저만치서 걸어 내려온다. 그래 고마운 녀석들. 그래도 꾸역꾸역 잘도 걸어 내려온다. B.C로 되돌아오는 길은 온통 졸음이다. 뻐꿈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헌우형님은 10년은 늙어보였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얼마나 빠져서 흙묻은 눈알을 짚어 넣느라 고생했을까. 그러니 10년은 더 늙어 보일 수밖에...
참이슬은 참으로 맛있는 물건이다. 뒤따라온 치영이와 셋이서 참이슬의 참맛에 바로 빠져든다. 36시간만의 B.C 귀환. 밤새 뜬 눈으로……. 경래도 보지 못한 채 그 무거운 눈꺼풀과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경래가 물에 빠졌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일을 어쩌나. 제대로 데리고 내려오지 못한 못난 형을 용서해 다오. 깊은 자책에 빠졌다.」
놀라서 잠을 깼다. 텐트에서 경래 녀석이 자고 있다. 깨웠다. 내려오다 모레인 지대에서 잠을 자다 비를 맞고 잠을 깼단다. 어쨌든 살아 있다. 질긴 놈.
라첵 산장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 보드카가 있음을 알았다. 산장지기 아들놈이 씌워주는 큼직한 바가지를 쓰고도 비싼 달러 값한다며 형님과 보드카 두병을 들고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는 텐트로 자랑스러운 표정과 약간의 거만함을 보이며 돌아왔다. 그 기막힘. 빙하 물에 담가둔 그 껄쭉함. 누가 알까.
그리고는 이틀을 더 쉬기로 하였다. 그런데 날씨가 나빠져 하루 더 쉬었다 가기로 하고 있는데 낯익은 소리가 들린다. 가. 나. 다를 쓸 줄 아는 한국 사람들. 참으로 반가운 사람들이다. 하루 종일 날씨가 나쁜데도 불구하고 짐을 수송하는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어진다.
데케토르의 피로가 풀리고 나니 다시 건방짐이 솟아난다. 악사이 산군의 최고봉인 텐산 스코바는 오르고 가자고.... 또다시 새벽 2시에 출발하여 긴 모레인 지대를 올라가니 노란색의 무인 대피소가 보인다. 약 2시간가량 걸린 것 같다. 대피소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5시쯤에 건조 비빔밥을 데워 먹고 우치텔 빙하 쪽으로 올라가니 우리가 계획하였던 꿀루와르가 눈앞에 펼쳐진다. 짧아 보인다. 좋아 보인다. 또 건방져 진다. 12시에서 13시 사이쯤 끝이 나겠다고 하니 치영이는 한술 더 떠본다. 남스카랴비나 능선을 올라 보잔다. 길고 긴 빙벽이다. 표면이 살짝 크러스트 된 긴 빙벽을 올라 60m 씩 피치를 끊고 오름 짓만 계속한다.
60~70도 정도 되는 꿀르와르는 해가 들기 전에는 쾌적한 등반라인이지만 해가 들기 시작하면 낙석의 통로가 되어 위험해지는 곳이다. 좌측 암벽 면에 하켄을 설치하며 치영이가 피치를 끊어 나가기를 몇시간 반복하였는데도 아직 상부의 넓은 곳이 나오질 않아 다시 불안감이라는 이상한 녀석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며칠 전에 내렸던 눈이 쓸려 내려간 흔적도 뚜렷하고, 루트 화인팅도 정확한데, 끝없는 길이에 또 질려버린다. 대충 사탕과 행동식을 꺼내먹으며 오르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몰려드는 구름이 서서히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저 구름 속에는 눈이 들었을까. 우박일까. 번개는 몇 개나 가지고 있을까. 두려움이다. 그러던 차에 우박과 함께 천둥을 쏟아 붓는다. 우리는 이제 데케토르 때보다는 더 여유로워 졌다. 경험자니까. 피치를 세는 즐거움도 한 개더 추가해가면서…….
“형님 스무 개 왔는데 다섯 개만 더하면 되지 않을까요?”
“글쎄, 그러면 좋은데…….”
이런 얘기를 나누면서 다섯 개를 더 지났는데도 아직 위쪽의 바위가 섞여 있는 꿀르와르가 보이니 조금씩 조바심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러다 끝이 나겠지. 암벽과 혼합된 믹서지대를 올라서는 치영이의 소리가 가벼워진다. 끝이 나려나 하며 올라보니 대충 2개 정도면 정상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길고도 긴 꿀르와르를 벗어나 정상에서까지 빌레이를 봐 가며 29피치 1500m의 어둠에서 벗어났다. 아직은 해가 있어 B.C에서 만들어온 산악회기로 사진을 찍고 하산을 하는 데 이것 또한 장난이 아니다. 원래 하산은 장난이 아닌 것이 아닌가.
끄덕이는 암각에 슬링을 걸고 60m를 하강하여 틈새에다 앨글하켄 하나를 더 설치하고 내려서면 저 아래 설사면이 손에 잡힐 듯 한데 잡히질 않는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더 이상 위험한 모험을 할 수 없어 러시아 산악인들에게 전해들은 하강 위치로 다시 올라가기로 결정하고는 설사면을 가로질러 스크랴비나의 경계쯤에 다다를 수 있었다.생각보다 빨리 진행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암봉에서 다시 내려서니 스크랴비나 쪽 벽이 막히고 아래쪽은 대형 크레파스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
“ 형님 여기 또 구덩이 파시죠??”
지친 치영이의 말에 따르고 싶었지만 또 이곳도 확보가 되지 않는 곳이다. 왼쪽 설사면으로 가보자고 토닥 거리니 또 우직스레 불을 밝혀 나간다.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아래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걸어보았다. 경사가 약해진다. 한없이 걸어 보았다. 계속 내려설 만하다 계속 계속 그러다 풀석 주저 앉고 말았다. 지친 동생들에게 물을 끓여 주어야겠다. 뜨거운 물을 마시고 나니 무인 대피소 까지 갈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우치텔 빙하 끝을 어렵게 돌아 거친 모레인지대를 걸어 내려가는데 아무래도 무인 산장이 나오질 않는다. 조바심 속에 어둠을 뚫다 무인 산장을 발견하였는데 산장안에 비상용 촛불이 켜져있다. 인기척에 놀라 뛰쳐나온 아저씨는 등반을 하러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 모닝커피를 마시다 죽음의 지대에서 내려오는 우릴 보고 더 놀라는 기색을 하며 마시던 커피를 빨리 마시라고 건네준다. 뜨거운 커피. 눈이 확 터져 나오는 느낌이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경래와 치영에게 커피를 나눠주고 산장으로 기어들어가니 우리가 빨리 쉴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하기 위해 보따리를 급하게 챙기고 있는게 아닌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러면서 새로 커피를 끓여 주며 몸을 따뜻하게 하라고 짐 싸기를 서두른다. 스르르 잠이 몰려든다. 잠시 졸다 일어나서 보니 그 아저씨는 온데 간데없고 사탕 세알을 놓아두었다. 먹고 힘내서 살아 돌아가라고.. 사탕하나에도 눈물이 핑돈다.. 날이 밝았다. 내려가자.
거친 모레인 지대를 터벅터벅 내려서니 멀리 B.C가 눈앞이다. 오늘도 흙 묻은 눈알을 주워 넣느라 고생하실 대장님을 생각하니 힘든 줄 모르고 B.C에 도착하였다. 오늘도 늦게 올까 고민하다 포기하고 주무시고 계신다.
다행이다. 아침식사로 먹으려고 끓여놓은 밥을 우리 셋이서 허겁지겁 미안함도 없이 퍼 넣었다. 그리고 또 ZZZZZZ
잠에서 깨어나니 이제는 더 이상의 오름 짓이 필요 없을 듯 하여 짐을 정리하기로 결정하고 산장에서 사온 보드카와 맥주로 스스로를 자축해본다. B.C를 떠나 푸른 초원 위에서 되돌아보는 악사이의 산들은 여전한데 나는 떠나는구나. 뷔시켁으로 구름들은 다시 모여 모여를 외쳐 어느 산골짜기에서 하켄을 박고 픽켈을 휘두르는 젊은이들을 괴롭히고 있을까?
그것이 있어야 진정한 악사이 인가.
그것이 있어야 진정한 벽인가.
선교사 아사가 마중을 나와 반가이 맞이 해준다. 메마른 들판을 지나며 우리는 다시 결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결정들을 하고 있다. 선택의 여지없이 보드카와 현지음식으로 키르키스탄의 밤으로 마구 빠져들어 가기로...
후덥지근한 게스트 하우스를 빠져나와 여행사에서 치영이와 경래의 항공원을 조정하고 키르키스탄 산악협회 사무실로 찾아갔다.
블라리미어 회장님을 만나 데케토르 남벽 등반 사실을 얘기하니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조목 조목 준비할 부분을 설명해 주고는 그곳은 북동 벽이라며 충고도 아끼지 않으신다. 그렇게 긴 시간동안의 루트라인 설명서를 준비하는 동안 블라디미어회장님의 개인 점심식사에 초대를 받아 그곳의 풍습과 전통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 다시금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이국의 클라이머들에 대한 배려와 따뜻한 마음은 고맙지만 모레부터 레닌피크로 떠나야할 준비를 하고 있는 그들의 사무실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뺏는 것 같아 숙소로 되돌아와 마지막 정리를 하기로 하고 숙소로 되돌아 와서 다시 정리를 한다. 피로감..
다음날 아침 다시 사무실로 찾아가니 원두커피와 함께 보드카는 보약이라면서 너스레를 떨어가며 여유를 찾으라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오랜 시간 보완 작업을 마치고 블라디미어 회장님 부부를 모시고 한식집인 ‘아리랑’으로 가서 즐거운 점심식사와 소주를 곁들여 마시다 자신의 집에 들렀다가 사무실로 되돌아가자고 제안을 해온다.
내일 산에 갈 준비물을 챙기겠거니 하고 그의 안내로 집으로 가보니 어린 아기를 안고 나오는 게 아닌가. 손자 아니면 손녀? 자신의 아이란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기에 62세의 나이에……. 정열적인 삶과 그의 인생을 엿볼 수 있어 흐뭇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무엇인가를 들고 나와 우리 일행들에게 한 장씩 나눠주며 설명을 하는데 키르키스탄의 유명한 산악 화가인 ‘슈빈 아파나스’의 그림이란다. 당연 그의 친한 산 친구임은 두말할 나위 없이…….
캉덴그리에서의 추억어린 판화 그림을 이국의 친구들에게 기꺼이 선물을 해주신 것이다. 사무실로 돌아와 마지막 작업을 마무리 짓고, 루트 이름을 ‘코리아 빛을 가져라’ 라고 명명하니 초등정인정서에 사인을 하고 한 장씩 나눠주는데 ‘뭐 이런 것까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지난 등반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뒤흔든다. 이로써 중앙아시아의 산에도 한국인이 개척한 길이 생겨난 것이다.
올해 가을이면 한국에 올 것이고 내년이면 레닌피크 등정 75주년 행사가 있으니 꼭 참석해 달란다. 지속적인 우정을 약속하고 그는 산행준비를 위해 우리는 귀국 준비를 위해 각자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키즈키스탄의 무더운 여름밤. 한국에 가면 더 덥겠지. 농장에는 잡초가 내 키만큼 자라있겠지. 그렇지만 아직은 더 즐길 시간이 있고, 형님과 수고한 치영과 경래, 즐길 수 있는 보드카가 있으니, 깊은 대지의 품속에서 취하고 싶다.
첫댓글 담에 함 낑가 주소----고생 마이 했소---!!
등정 축하합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자욱이 정말 대단힙니다. 존경스럽습니다~~~~
형! 정말 대단 합니다 여전히 변함 없는 그 모습 참 좋습니다 언제나 건강^^
축하!!!!! 글 솜씨도 등반 못지 않네요.....
등정을 축하합니다. 수고가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