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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7D Thunderbolt "GABRESKI"
P-47D Thunderbolt "GABRE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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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달아 미라지의 마음도 급하기만 합니다. 말일이라 결산도 해야하고 결재도 받으러 다녀야하는데 신제품들이 쏟아져나오니....
그래도 울 회원님들을 윈한 서비스(?)는 멈출수 없죠...
제품출시에 앞서 오늘도 실기체 공부를 먼저 해보죠~~
P-47 Thunderbolt
1939년 리퍼블릭사는 미국이 점차로 전쟁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아지자 미군의 전투기 개발요구를 받아들였다. 당시의 요구사항은 빠른 속도와 강력한 화력 그리고 손상에 잘견디는 기체강도등이 핵심적인 요구사항이 있었다. 사실 애초에 P-47의 설계는 날렵한 경전투기로서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기관총도 2정만 장비되었고 중량도 가벼운 상태였다.
[대전초반 리퍼블릭사에서 개발한 P-43 "LANCER" 이는 F2A 버팔로와 비슷한 최악의 기동력을 가진 기체였지만 방어력에 중심을 둔 든든한 장갑을 가진 전투기라는 점은 훗날 이를 바탕으로 걸작전투기 P-47 썬더볼트가 탄생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미공군의 조달책임자들은 초기형에 장비되었던 직열식 수냉식 엔진이 손상에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전투 손상에 강한 공냉식의 성형엔진을 장비하도록 계획이 변경되었고 리퍼블릭사가 기존에 생산했던 P-35의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형식으로 개발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기수의 디자인이 애초의 계획보다 대폭 바뀌게 되었고, 커다란 엔진을 장착하게 됨에 따라서 전체적인 디자인도 전투기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일정도로 투박하게 되었다. (당시 미공군의 생각은 수냉식 엔진의 전투기는 피탄시 쉽게 엔진이 고장나기 때문에 전투기로서는 부적합하다는 입장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인 전투기들인 Bf 109와 스핏화이어가 수냉식 엔진을 장비했음에도....)
[P-47 초기 양산형의 모습 본격적인 양산형의 특징이 모두 잡혀 있음을 알수 있다]
게다가 무장강화의 요구에 따라서 8정의 기관총을 장비하도록 개량되었고 이에 따라서 중량이 더욱 늘어가게 되자 이 기체는 더욱 중량이 증가하게 되었고 전체적인 크기도 대형화 되었다. 이러다보니 이 무거운 기체를 날려올리기위해서 엔진은 더욱 강력한 출력을 가진 2300마력의 플랫휘트니 R-2800이 장비되었고 동체 뒤쪽에는 고공에서 엔진을 효율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한 터보차져가 장착되었다. 엔진출력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3날 프로펠러가 부적합 하다는 의견에 따라서 무려 직경이 12피트에 달하는 대형 4날 프로펠러가 P-47을 위해서 생산 되었다. 결국 이 강력한 엔진덕분에 기체의 힘은 큰 덩치를 극복하고도 남아돌고 있었다. 물론 기체의 무게에 비해서 주익이 작은 편으로서 익면하중이 높아지게 되었으므로 필연적으로 날렵한 기동성은 확보되지 못했다.
[P-47의 괴물같은 성능을 가지게 해준것이 바로 2300마력의 플랫휘트니 R-2800 성형엔진이였다. 이 엔진의 개발은 P-47 씨리즈의 미공군 및 F-6F 헬켓이나 콜세어 같은 미해군 기체들이 괴물같은 비행성능을 낼수 있는 주된 이유중 하나로 당시 1200~1600 마력을 내는 엔진개발이 고작이였던 독일의 비행기용 엔진에 비해 23000마력이라는 괴력을 내는 엔진으로 이로 인해 중장갑 , 중무장을 하고도 시속 600킬로 이상의 고속비행이 가능하게 해준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최초의 양산형인 P-47B는 최고속도가 고도 25,000피트에서 시속 691km로서 매우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따라서 생산되자마자 전량이 영국의 미 제 8공군 소속으로 대서양을 건너 파견되어 P-38과 함께 미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사용되었으며 썬더볼트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이 B형은 총 171기가 생산되었다고 한다. 최초로 이 P-47B를 장비한 부대는 훗날 '울프팩'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해진 제 78 연대의 56 전투비행대대로서 이 부대는 이후 오직 P-47만을 사용하여 상당한 성과를 올리게 된다.
[실전에 처음 참전한 P-47B형의 모습 최초의 양산형인 P-47B는 최고속도가 고도 25,000피트에서 시속 691km로서 매우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따라서 생산되자마자 전량이 영국의 미 제 8공군 소속으로 대서양을 건너 파견되어 P-38과 함께 미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사용되었으며 썬더볼트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이 B형은 총 171기가 생산되었다고 한다. 최초로 이 P-47B를 장비한 부대는 훗날 '울프팩'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해진 제 78 연대의 56 전투비행대대로서 이 부대는 이후 오직 P-47만을 사용하여 상당한 성과를 올리게 된다.]
1943년 4월, 호위 전투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날아올라 몇차례의 실전을 경험한후에 이 전투기는 고공에서의 성능이 우수하여 고공에서는 독일 전투기들보다 빨랐으며 한계고도도 높았고, 게다가 하강속도에서는 강력한 엔진과 육중한 무게덕분에 어떠한 전투기에도 절대 뒤지지 않는 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빠른 하강속도라는 강점은 독일기들과의 공중전에서 매우 큰 무기가 되었다. 특히 Bf 109의 조종사들은 적기의 추격을 받을 때 급격하게 하강하여 회피하는 것을 주로 사용했었는데 P-47의 경우에는 Bf 109를 따라잡을 수가 있었으므로 이런 전법이 별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캘리버 .50 기관총 8정이라는 강력한 화력과 상당히 많은 피해를 입고서도 귀환이 가능한 튼튼함으로 조종사들로부터는 그럭저럭 만족할만한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여전히 짧은 항속거리로 인해서 폭격기를 독일 영내까지 호위할 수가 없었으며 독일 전투기들과 비교해서 상승률이 떨어지고 고공의 냉기에 보조익이 얼어붙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기동성도 떨어지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게다가 이 고도에서 캐노피가 제대로 열리지 않아 비상탈출이 불가능한 점도 드러났다. 이후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 몇가지 조치가 취해졌고 탈출시에 캐노피를 자동으로 떨어져나가도록 하는 장치와 보조익의 구조를 약간 변경하여 고공에서도 작동이 원할하도록 했다. 이후에는 고공에서의 우수한 성능이 인정받아 항속거리가 허용하는 한도까지 미군 폭격기대를 호위하는 임무에 투입되었다.
[P-47의 변천과정을 실루엣으로 표현한 그림 P-47B/C형 D형 초기형은 전형적인 창살형 캐노피를 채택하여 시야가 안좋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D형 후기형부터는 P-51 머스탱에 장착된것과 같은 버블형 캐노피를 채용 시야가 상당히 개선되었다. 또한 고고도에서 미익이 얼어붙어 조종불능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별도의 도셜핀이 장찯된것도 D형 후기형의 특징중 하나이다]
[P-47 은 엄청난 멧집과 빠른 기동성 그리고 6정의 12.7 밀리 50구경 기관총이라는 강력한 무장으로 인해 유럽상공에서 수많은 에이스들을 배출한 기체이기도 하다 그림은 이런 에이스기체들을 일러스트화한 그림이다]
그러나 P-47은 여전히 기동성이 떨어지는 점이 문제였으며, 기동성을 개선하기 위해서 동체길이를 조금 연장하고 175갤런들이 외부 연료탱크 2개를 장착할 수 있도록 개량된 P-47C형이 등장했다. 이형부터는 독일 영내 깊숙하게까지 항속거리가 연장되었으며 따라서 폭격기 호위임무를 어느정도는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무렵에는 장거리 호위전투기 P-51 머스탱이 유럽전선에 등장하여 폭격기 호위임무를 맡아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머스탱은 항속거리가 P-47에 비해서 훨씬 길었고 전투기를 상대하는 공중전에서는 날렵한 기동성과 빠른 속도로 더욱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로 폭격기 호위는 P-51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P-47C형의 모습 동체가 연장된 C형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지만 캐노피는 여전히 창살형 타입으로 이는 시야가 한정되어 있어 조종사들의 불만이 많았다]
1943년 말에는 보다 두터운 조종사 보호장갑을 도입한고, 물분사장치를 갖추어 추가동력을 얻는 것이 가능한 더블 와스프 엔진을 장비하고 내부연료탱크를 확장함과 동시에 200갤런들이 동체연료탱크를 장비할 수 있도록 개량된 P-47D형이 등장했다. 이 D형은 P-47의 최대 생산형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12602기가 생산되었는데 이수치는 단일 형으로는 미군기중에서 최대 생산수치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P-47D 초기형은 이러한 내부적인 개량만 되었을뿐 외형에서는 P-47C형에 비해서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고, 특히 P-47B/C형에서 조종사들이 불평을 늘어놓았던 후방시계의 불량함이 아직 개선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이로인해서 조종사들은 계속 개선 요구를 했다. 결국, P-47D도 P-51D형이나 스핏화이어 후기형처럼 버블캐노피를 도입하기로 결정이 되었고, 후기형인 P-47D-25-RE형부터는 버블캐노피를 사용하여 이전형에 비해서 시야도 매우 좋아지고 기체의 디자인도 기존보다 훨씬 다이너믹하게 바뀌게 되었으며 실전에서도 좋은 성과를 올려 탑승해본 조종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 특유의 엄청난 멧집은 많은 조종사를 사구에서 구해냈다.
[P-47 의 조종석 내부의 모습... P-47의 조종석의 내부는 방탄판으로 둘어쳐져 있어 조종사를 보호하는 역활이 탁월했다. 이로인해 웬만큽 피탄되어도 귀환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고 독일공군에게는 격추하기 매우 어려운 기체로 정평이 자자했다]
1944년초 태평양 전선에 일부 투입된 P-47D형이다. 사진의 기체는 제 49 전투비행대 제 9중대 소속의 기체이다. 태평양 전선에서는 유럽에서만큼의 활약을 못했다. 이것은 고공비행성능을 발휘할 기회가 적었던 것과 항속거리가 짧은 점등 때문이었다.
[ 제 49 전투비행대 제 9중대 소속의 기체의 비행모습 1944년초 의 모습이다]
[궁극의 썬더볼트라 불리던 P-47D형의 모습.. D형 초기형은 기체의 많은 부분이 개선되었음에도 정작 시야에 제한이 있는 창살형 캐노피를 채택하고 있어 많은 불만이 있었던 기체이다 소위 '레이져백 (RazerBack) '이라 불리는 이 창살형 캐노피는 후방 시야의 제한이 많았다]
[P-47D형 후기형에 이르면 드디어 물방울형 캐노피라 불리는 신형 캐노피를 장착한 모델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P-51 머스탱에 장착된 것과 같은 둥근형태의 캐노피로 시야가 대폭 개선된 타입이다]
[일명 버블탑 (BUBBLE TOP) 이라 불리는 물방울형 캐노피를 장착한 P-47D 의 모습 썬더볼트의 대표적인 이미지 이기도 하다 일러스트의 기체는 기수 부분의 해골 마킹으로 유명한 P-47D-30-RE, 420473, FT-L, 354 FG/9 AF as flown by Maj Glenn T. Eagleston 기의 기체이다]
이후 1943년 후반부터는 점차로 미군 전투기들을 상대할 독일전투기들의 숫자가 적어지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에는 제공권이 완전히 연합군에게 넘어와 전세가 연합군쪽으로 기울면서 연합군 전투기들은 상대할 적을 찾아 지상으로 내려와야 했다. 그러나 지상공격 임무는 저높은 곳의 공중전과는 달리 지상포화라는 장애물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지상공격 임무에서는 기체가 튼튼하여 피해를 잘 견디고 캘리버 .50 기관총 8정이라는 강력한 화력을 가진 P-47이 P-51에 비해서 훨씬 적합한 것으로 예상되었다.
[버블탑 캐노피는 시야확보가 매우 우수했다 그로인해 썬더볼트의 전과 역시 증가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쟁후반에 이르러 썬더볼트의 임무가 대공임무에서 대지공격 임무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 5 인치 (130 mm) rocket을 발사하는 P-47D 형의 모습 공대공 임무에서 공대지 임무로 전환한 P-47들은 특유의 멧집과 중무장으로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었다. 초기 P-51 머스탱이 공대지 임무기체에서 공대공 임무로 전환하면서 큰 활약을 펼친것과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다만 썬더볼트의 경우 고고도 임주기체로 설계되었지만 저고도 공대지 임무전용으로 돌려진 특이한 케이스라는게 틀리긴 하다]
사실, P-51을 지상공격임무에 투입해본 결과 냉각계통에 한발이라도 피탄을 당하면 엔진이 과열되어 정지해 버리기 때문에 그대로 추락해 버리는 약점이 드러났던 것이다. 따라서 웬만한 손상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P-47의 능력이 더욱 주목을 받았으며, 실전에 본격적으로 투입되었다. 물론 예상대로 억세고 튼튼한 P-47은 지상군의 진격을 근접엄호하는 지상공격 임무에서도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실전을 통해서 입증했다. P-47의 강력한 엔진은 조종석과 연료탱크 주위에 중장갑을 두르는 것이 가능하도록 해주어 웬만큼 피탄당해도 무사히 비행이 가능했었기 때문이었다.
[썬더볼트가 근접지원 임무기체로 이용되면서 사진의 2.36-Inch M6 로켓을 주무장으로 하기도 하였다. 이는 바주카포로 유명한 로켓을 3개씩 묶은것으로 원래 대전차 용으로 개발된 물건이라 공중에서 발사되는 이 로켓은 지상의 목표물에 매우 효과적이였다]
한번은 파리로 진격중인 미군의 한 보병중대가 진격로를 가로막고 있던 강력한 독일군의 토치카에 직면하여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전진이 막혔을 때 공중지원을 요청하자마자 한 대의 P-47이 나타났다. 독일군 진지에서 대공기관총 사격이 시작되었지만 이 썬더볼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빙빙 돌면서 로켓탄과 기총소사를 퍼부어 순식간에 토치카를 침묵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 멋진 에어쇼를 지켜보던 미군병사들은 신이나서 외쳐댔다.
[P-47의 주무장은 뭐니뭐니해도 주익 부분에 각 3정씩 장착되어 있는 M2 12.7mm 중기관총이었다. 총 6문의 중기관총에 뿡어대는 불의 연사는 공중의 적을 비롯 지상의 모든 목표물에게 상당한 위협이였다]
[썬더볼트의 활약상을 잘 보여주는 기록필름중 하나. 보기드문 칼러 동영상으로 무시무시한 썬더볼트의 성능을 잘 보여주는 동영상중 하나이다]
"우와!~ 저 전투기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만 해준다면 우린 베를린까지도 한걸음에 갈 수 있겠다."
이후부터는 썬더볼트는 계속 그 뛰어난 범용성을 인정받아 영국공군도 이 기체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16개의 비행대대에 총 826기의 P-47을 도입했다. (사실, P-47의 이러한 지상공격능력은 후대에도 인정을 받아 미공군의 현재 주력 지상공격기인 A-10의 이름이 P-47의 후예라는 의미로서 썬더볼트 II로 명명되었다.) 후에는 소련군과 자유 프랑스군에도 상당수의 P-47이 공여되었다.
[썬더볼트의 방어력은 엄청난 수준이라 이처럼 기체가 너덜너덜해져도 거의 90% 무사귀한을 할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현대전의 대지상공격기로 유명한 A-10 이 썬더볼트 II 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 것도 선조의 P-47 썬더볼트의 활약상이 그만큼 컷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P-47의 공중전 능력이 별로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유럽전선 미군 조종사들중 격추기록 31기로 1위에 랭크된 프란시스 가브레스키나 28기의 스코어를 올려 2위에 랭크된 로버트 S. 존슨등은 P-47의 공중전 능력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증명한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실제로 P-47은 독일 전투기들과의 공중전에서 격추 교환비가 무려 4.7 : 1로 압도적인 승리를 기록했던 것이다.
[대전후반에 이르러서는 강력한 무장과 방어력으로 거의 지상폭격 및 근접지원 임무가 돌려 졌다]
분 류
단좌 전투기/전투폭격기
동 력
플랫 휘트니 R-2800-59 공냉식 성형엔진 (2300마력)
최고속도
시속 689km
상승속도
분당 677m
항속거리
2028km (외부 연료탱크 장착시)
무 장
주익 - 12.7mm 캘리버 .50 중기관총 8정 (각 기총당 425발 장탄)
1944년이 끝나갈 무렵에 등장한 P-47M형의 경우에는 보다 2800마력에 달하는 엄청난 출력과 신형 터보차져를 부착하여 최고속도가 무려 시속 762km에 달했다고 하나 이미 이 속도를 활용할 공중전에서의 적기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이후에는 타평양에서의 장거리 작전을 위하여 기체를 전면 재설계하여 내부 연료탱크를 확대하고 주익의 형태를 바꾸고 약간 연장하여 항속거리를 더욱 연장시킨 발전형 P-47N형이 등장했다. 그러나 태평양에서도 이미 전세가 거의 기울어있는 상태였으므로, 일부가 태평양전선에 파견되어 B-29의 호위비행에 일부 투입되었으나 태평양에서는 별다른 활약이 없이 종전을 맞게되었다. 종전이후에는 남아도는 기체들이 자유중국, 이란, 브라질등의 미국의 우호국들에게 공여되었다.
강철의 날개'라는 호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유럽 하늘의 멧돼지, P-47은 2차대전중 가장 다양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우수한 전투기였다. 유럽전선에 투입된 P-47 썬더볼트는 1943년부터 1945년 사이에 총 546,000회의 출격회수를 기록했으나 전체 출격회수의 단지 0.7%라는 적은 손실률을 기록하여 어떠한 전투기보다도 강인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위대한 전투기는 항공전의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P-47의 약점은 속도와 상승력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강성능은 아주 우수했으며, 독일 전투기들에게 후미를 잡혀 공격을 받더라도 하강자세에서는 절대 잡히지 않았다. 그럴 때는 마치 '다음에 보자! 그때는 누가 나은지 겨루어보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 독일공군 발터 그루핀스키 장군 -
[전쟁후반에 이르면 더 우수한 성능의 P-51 머스탱들이 등장하면서 대다수의 썬더볼트들은 공대지 임무기체로 돌려졌다. 특유의 투터운 장갑을 기반으로 썬더볼트들은 공대지 임주기체로 놀라운 전과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내가 P-47에 대해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그 막강한 화력과 멧집이었다. 우리 전투기들의 사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면 공격을 걸어오는 P-47을 만나게되면 그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사실 서로 정면으로 마주보고 사격하는 상태에서는 그녀석의 강력한 장갑과 화력 때문에 우리쪽에게는 승산이 없었기 때문에 먼저 선회하여 피하는 수 밖에는 없었고 그렇게 되면 쉽게 꼬리를 내주는 결과를 나타내기 때문이었다.'
- 독일공군 아돌프 갈란트 장군 -
"P-47은 그들이 격추시킨 P-47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Fw 190, Bf 109를 격추시켰다. 실제로 P-47은 엔진의 절반이 정지된 상태에서도 계속 비행하여 귀환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어떤 전투기보다도 격추시키기 힘들었다. 큰 비행기이면서, 가장 안전한 것이기도 했다. 공중전이든 지상지원이든 어떤 임무에서도 나는 항상 P-51보다는 이것을 택할 것이다. 나는 전후에 제트전투기인 F-80, F-86을 타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P-47이 최고였다."
- 미공군 토마스 매스터스 대위 -
[P-47 썬더볼트는 전쟁 후반에 이르면 기동성이 떨어지는 전투기라는 평도 있었지만 특유의 투꺼운 장갑과 중무장은 어느 전투기에도 없는 큰 장점중 하나였다. 특히 에이스들에 의해 조종되는 썬더볼트는 상당히 위협적인 무기임이 증명되었는데 사진의 "Gabby" Gabreski 의 경우 썬더볼트를 이용 총 34기라는 초유의 격추률을 보이면서 연합군 최고의 에이스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래 글 참고]
Francis Stanley "Gabby" Gabreski
[2차대전 당시 연합군 최고의 에이스중 하나인 Francis Stanley "Gabby" Gabreski 그는 총 34기라는 격추률을 기록한 초 에이스로 이는 상대적으로 기량이 우수한 서부 독일공군의 초에이스를 상대로 전투를 벌여 기록한 경이적인 기록이다]
이렇게 가브레스키가 처음 조종 훈련을 받을 때만해도 그는 한마디로 열등생이었다. 1940년 미 육군 항공단에 소속되어, 힘든 비행훈련을 겨우 겨우 해 나가고 있었다. 훈련생 가브레스키는 정말 비행에는 소질이 없어 보이는 후보생이었다. 공중에 떠서는 겨우 수평을 잡고 비행하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는 첫 단독 비행을 할 때도,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에 덜덜 떨었고, 그후로도 다른 후보생들의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악순환을 계속했다.
[비행전 작전희의중인 카브스키 (맨좌측) 의 모습]
그의 교관이었던 메이어는 좀 퉁명스러운 사람으로, 이런 가브레스키와 조화를 이루질 못했다. 메이어와 그의 상관 레이 워셀 대위는 가브레스키에게 "마지막 시험 비행"이라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결정을 내렸다.
"마지막 시험 비행"이란 조종사 부적격 심사로, 비행 기회를 마지막으로 한번 더 줘서, 거기서 탈락하면, 조종사의 기회를 박탈하는 어마어마한 결정권을 가진 절차였다고 한다. 1940년 9월 가브레스키는 "마지막 시험 비행"을 해야만 했고, 뜻밖에 자신이 했던 비행중 최고의 비행을 선보였다.
그 당시 지휘부의 결정은 이랬다. 가브레스키가 거의 최하 수준의 비행기술을 가진 조종사지만, 교관을 바꿔주면,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결정에서 가능성이란 평범한 동료 파일롯 정도의 수준에는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일 뿐, 그 어느 누구도 가브레스키가 유럽전선에서 미국 제 1위 격추기록을 보유하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었다.
1940년 11월, 새로운 교관이 가브레스키를 지도하게 되었고, 그후로는 별다른 문제없이 훈련비행을 마칠 수 있었다.
소위로 임관한 가브레스키의 첫 부임지는 하와이에 있는 전투 비행단이었다. 15전투 비행단 소속 제 45 비행편대의 일원이 되었는데, 그곳의 주력 기종은 P-40기로, 이 기종은 1000 마력이상의 엔진 파워를 가진 단좌 전투기였다.
조종사들은 한달에 약 30시간씩, 5,000에서 10,000 피트 (1500미터 - 3000미터) 상공에서 비행을 했는데, 이것은 고공에서 필요로 하는 산소 마스크 장비가 없어서, 고도를 제한해야 했기 때문이다.
편대장이 갑작스런 기동이나, 선회를 하면, 신참 편대원들은 대형을 유지하기 위해, 똑같은 기동을 해야 했으므로, 매우 힘든 비행훈련이 지속되었다. 주간 훈련이 끝나면, 조종사들은 장교 클럽에 모여, 비행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로 기동의 보완점들을 교환하곤 했다. 이런 대화는 서로의 비행술을 발전시키는 촉매가 되었다.
하와이에는 장교들을 위한 해수욕 해변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조종사들과 사귀길 원하는 젊은 아가씨들이 많았고, 가브레스키는 그곳에서 육군 대령의 조카딸인 케이 커크레인이라는 여자를 만나게된다. 그들이 처음 같이 밤을 지내게 내는 날이 바로 1941년 12월 6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가브레스키는 화장실로 가서 면도를 하며, 자신의 여자친구를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는 영내에서는 듣기 힘든 큰 폭발음을 듣게 된다. 건물 밖으로 뛰어나간 가브레스키는 생전 처음 보는 기종의 항공기를 보았다. 엷은 회색에 붉은 원이 그려진 문양이 태양빛에 번쩍이는, 고정식 랜딩기어를 달고 있는 뇌격기들..... 그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터진 듯한 연속적인 엄청난 폭발음을 들었다. 그리곤 이내 비행기 격납고에서 불길이 치솓았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시작된 것이었다.
미군 조종사들은 활주로로 달려가서는 아직 손상 입지 않은 전투기들을 격납고에서 끄집어 냈다. 편대장 테일러 대위는 편대원들에게 전투기 급유와 무장을 명령했다. 약 10대의 전투기가 준비가 되었고, 그중엔 가브레스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진주만 상공으로 날아갔을 땐, 이미 모든 군시설들이 불길과 검은 연기에 뒤덥힌 뒤였다.
1942년 10월, 유럽전선으로 가길 열망하는 가브레스키의 꿈이 이루어져, 그는 영국 공군의 폴란드인으로 구상된 비행대에 보내진다. 얼마후 그는 다시 제 315 비행대로 옮겨졌고, 거기서, 새로운 전투기 스피트화이어 MK IX (마크 나인)기를 몰게 된다. 이기종은 전에 가브레스키가 탑승했던 P-40 보다 성능면에서 앞선 기종으로, 무전이 가능한 산소마스크 장비가 장착되어 있어 30,000 피트 상공에서 기동이 가능했고, 더 빠르고 더 좋은 비행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가브레스키가 스피화이어를 탑승한후, 첫번째 임무는 1943년 1월초의 일이었고, 폭격기를 호위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독일 전투기와의 조우는 없었다.
가브레스키가 처음 독일 전투기들과 만난 것은 그해 2월 3일로, FW 190 편대가 가브레스키의 편대로 뛰어들었다. 공중전이 시작되었고, 편대장은 가브레스키의 바로 앞쪽 우측에 있는 적기를 발견했고, 가장 유리한 사격 지점에 있는 가브레스키에게 발포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극도로 흥분한 가브레스키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전방에 작은 점같이 보이는 물체뿐이었고, 그는 기총사격을 해댔다.
그들이 비행장으로 돌아온 후 건 카메라(Gun camera)로 찍은 필름을 분석했고, 가브레스키는 놀라 자빠질 수 밖에 없었다. 전투중엔 작은 점 밖에 본 게 없는데, 찍어 온 필름 한 귀퉁이엔 커다란 FW 190기가 바로 자신의 오른쪽 전방에 있었던 게 아닌가?.. 바로 몇발만 쐈으면 격추시킬 수 있는 위치였다. 이 임무 후 가브레스키는 한가지 깨달은 바가 있었다. 즉 공중전에 들어가면, 마음에 평정을 찾아야 한다는 것.... 흥분하면 절대 안되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목표물이 자신의 기총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어려웠고, 적기의 거리감을 빨리 익혀야 한다고 느꼈다.
1943년 2월 27일, 그는 다시 미국 제 8 공군으로 옮겨졌고, 허브 젬크(Hub Zemke)가 비행대장으로 있는 (울프팩비행대로 더 유명한) 제 56 전투 비행대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킹스크리프 비행장에 주둔하며, P-47 썬더볼트 전투기에 탑승하게 되었다. 썬더볼트는 크기가 매우 큰 육중한 전투기였지만, 조작성이 꽤 훌륭한 기종이었다. 상승력은 약간 딸렸지만, 롤기동이 매우 빨랐고, 경이적인 급강하 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브레스키는 P-47의 편한 조종석과 또 50 캘리버 기관총을 매우 좋아했다.
56 비행대는 그해 3월내내 훈련 비행을 했고, 독일 편대전술인 슈밤을 변형해 핑거 포(finger four)대형을 기본 편대형으로 채택하게된다. 가브레스키는 당시 대위였고, 56비행단 소속 61 편대의 B 조 편대장이 된다(한조는 9명의 파일롯으로 구성되었음).
가브레스키 편대는 1943년 4월 중순, 첫번째 비행 임무를 부여 받는다. 5월에 접어 들면서 임무의 횟수가 늘어났고, 어떤 조종사들은 격추기록을 세우기 시작했고, 운이 나쁜 파일롯들은 하나 둘 격추되어갔다. 그러나 가브레스키는 아직 격추 스코어를 전혀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5월 15일, 가브레스키는 독일의 Fw 190기를 명중시켜 손상을 입힌다. 적기를 처음 명중시킨 것이다. 그러나 내구성이 강한 Fw 190은 데미지를 입고도 가브레스키의 사격범위에서 탈출하고는 달아나버렸다. 6월 9일, 울프팩의 비행대장 허브 젬크는 가브레스키를, 61 편대의 모든 비행조를 총괄하는 편대장으로 임명하며, 소령으로 진급시켜준다. 가브레스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예상치도 못했던 이런 영예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브레스키는 나중에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1943년 중순 유럽주둔 울프팩 비행단의 편대장 당시의 카브스키의 모습... 1년전만 해도 비행기도 겨우 띄웠을만큼 열등생이였던 그는 1년만에 비행단 최고의 에이스가 되어 있었다]
"단 1 년전만 해도 나는.... 어떻게 날아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주의력이 부족한 파일롯이었다. 그런데 이젠,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적기들과 겨뤄야하는 비행대의 편대장이 되다니...." 그는 그의 편대를 신념과 용기로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격추기록은 자꾸만 그를 피해갔다. 한마디로 편대장으로서 체면이 안 서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1943년 8월 24일 드디어 가브레스키의 실망은 끝을 보게 된다. 그는 대망의 첫격추의 기쁨을 맛보게 되고, 그이후는 발동이 걸렸는지 격추 스코어가 곱절, 세곱절로 늘어났다.
[P-47를 타고 화려한 전과를 올린 카브스키의 애기의 모습 P-47은 당시 최고 성능을 가진 P-51 무스탕에비해 결코 우수한 공중전 성능을 가진것은 아니였지만 중장갑에 중무장 한 기체로 특히 저공공격에서는 더 강한면이 있어 에이스들중에서는 P-47을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폭격기들과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그들이 거의 도착했을때, 가브레스키는 자신들이 호위해야 할 폭격기들이 독일의 Bf 109와 Bf 110기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독일기들은 폭격기 격추를 위해 로켓을 장착하고 있었다. 즉시 가브레스키의 편대는 Bf 110기들의 후미로 접근했다. 그러자 회피기동에 들어가려던 Bf 110기 두대가 서로 공중 충돌을 하고는 폭발해버리고 만다. 독일기들은 연합군 전투기의 출현을 모두 알게 되었고, 사방으로 산개했고, 전투대형을 잡기 시작했다.
[그의 애기인 P-47 에 그려진 수많은 킬마크.... 그는 상대적으로 기량이 우수한 서부독일공군을 상태로 올린 전과라 더 의미가 깊다 하겠다]
미군기들은 독일기에 달려들었고, 서로 빙글빙글 선회하며, 꼬리를 잡으려고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전투기들의 엔진소음은 흡사 사냥감을 찾는 맹수의 포효 그자체였다.
가브레스키는 3대의 Bf 110기가 편대에서 이탈해 달아나는 것을 발견하고는 P-47의 최대 장기인 급강하 공격에 들어갔다. 곧 적기를 따라 잡았고, 그중 1기를 격추 시켰다. 그러나 급하강하는 바람에 자신의 편대에서 많이 이탈되어, 정신을 차리고 난 가브레스키의 눈에는 빈 하늘만이 비춰졌다.
그는 동료들을 찾으려 이리 저리 고개를 돌리며 두리번 거리다가, 전투기들이 편대를 이루고 비행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곧 그들에게 합류하려고 접근했다. 연료도 얼마 남지 않아서 그의 마음은 급해졌다. 그런데 이게 왠걸.... 가브레스키가 다가간 전투기 떼거리는 다름아닌 독일의 Fw 190기들의 무리가 아닌가?.... 그는 다시 연료계를 보니, 도저히 기지로 귀환할 수 없는 적은 양이었다. 그는 기수를 서쪽으로 돌리고, 경제 속도로 비행을 시작했다.... 기도를 하면서....
얼마나 갔을까.... 가브레스키가 다시 연료계를 체크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3시 방향에서 한대의 전투기가 날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독일의 Bf 109기였다. 그는 이 정도의 연료로는 적기와 공중전은 무리라는 것을 알았고, 회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독일 조종사는 일대일 공중전에는 자신이 있었던지, 가브레스키에게 접근해서는 기총사격을 가하고 P-47을 위로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가브레스키는 회피하면서, 서쪽으로 계속 기수를 잡았다. Bf 109가 세번째 접근해 왔고 기총사격을 해댔다. 이번 조우로 가브레스키의 P-47은 러더에 손상을 입고 말았다. 더 안좋은 것은 엔진도 손상을 받은 것..... 엔진은 갑자기 털털거리기 시작했고, 그의 P-47기는 나선형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가브레스키는 다른 조작 없이 전투기가 움직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완전히 기동을 상실하고 추락하는 것 처럼 보이게 해서, 독일 조종사가 격추 스코어 올렸다고 스스로 의기양양하게 돌아가게 끔 하려고..... 가브레스키의 눈속임은 몇초간은 효력이 있는듯 했다... 그런데 얼마후 독일 조종사가 추격하기 위해 다시 하강해 오는 게 아닌가?.... 와 완전히 확인 사살까지 하려고..... 그런데 다행히도 하늘이 도와, 낮게 떠 있는 구름 덕분에 가브레스키는 독일기의 눈을 피해 달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손상받은 기체를 어렵게 어렵게 이끌고 기지로 귀환했다.
적진영 상공에서 가브레스키는 비행장에 대기하고 있는 독일기들을 발견했다. 그는 급하강을 시도했고 지상에 서 있는 적기를 향해 기총 사격을 가했다. 그가 두번째 적기에 접근할때, 갑자기 P-47의 엔진이 급격하게 요동을 치더니만,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는 적진영에 동체착륙을 하게된 것이다. 가브레스키는 비행기가 멈추자 마자 전투기에서 뛰어내려 가까운 숲속으로 죽어라 달려갔다. 독일 병사들은 뒤에서 추적에 나섰다. 5일간이나 이리 저리 도망다니다가 끝내 독일군들에게 잡히고 만다. 그는 연합군 조종사들만 수용되는 포로수용소로 옮겨진다...
[1956년 찍은 미공군 소속의 가브스키의 모습 그는 한국전을 통해 6기의 미그15를 격추... 제트기로 옮겨 탔어도 그의 기량이 여전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최초의 제트기기리의 공중전에서 그만의 독특한 전투기 전투 기법을 연구 발전시켜 이후 미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의 기량을 높이는데 큰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이차대전이 끝난 후, 가브레스키는 시험 비행 조종사로 복무하다가, 한국전쟁시 미 51 전투 비행단장으로 참전했고, 새로운 제트기 공중전의 전술 발전에 공헌했으며, 6기의 Mig 15기를 격추시킨다. (참고로, 이차대전과 한국전쟁 모두에서 5기 이상의 격추를 한 에이스는 가브레스키를 포함해 단 7명 뿐이다) 출처 고공출격 중에 (http://user.chollian.net/~hartmannshim/gabreski.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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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타는 하늘 (http://airwar.hihome.com/gwp/p-47/p-47.htm)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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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하늘 (http://airwar.hihome.com/frame2.htm)
고공출격 (http://user.chollian.net/~hartmannshim/dogframe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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