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1979년 11월 어느날 총각하나가 낫설은 공장안으로 들어왔다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대학원을 다닌다고 한양대학에 원서를 내고 아버지께 통보했더니
그 노인네는 아들이 객지서 혼자살고있어서 그런생각이 들어다고 판단하여서
아버지가 사는 곳으로 데리고 왔다
그당시 방직공장에서는 천여명이 넘는 어린여공들이 삼교대로 일하고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그냐들은 대부분 중학교만 나온이들이었다
그들은 전부 기숙사생활을 하였고 공장내에있는 부설고등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그녀에게도 하루 24시간은 마찬가지로 주어졌고
그중 8시간은 그무했고 그나머지는 학과일과 기숙사내에서의 생활이 전부 다였다
주말이 되어도 외박을 할려고해도 잘 허락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밖에 있는 저희들이 근무를 핑개되어서 그들에게 잔업명령서를 기숙사에 제출하고서
그녀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올수가 있었다
제가 내려갈때만 하더라도 4년제대학을 졸업한이는 공장장밖에 없었던것이다
그때에는 후리후리하고 총각인지라 여러여공들에게 관심을 많이 샀다
그때 많은 이들이 사내결혼을 하는터인지라 만일 제가 그때에 여자에게 관심이 많았더라면
여공중의 하나와 결혼했을것이라 여긴다
저도 방직과에서 근무했고 신입사원인지라 그들에게 일을 애웠는데
그녀들중의 반장이 있었는데 신자였다
어느정도 친하게되자 그녀는 저에게 와서 한달에 한번 가까운 수도원에 가는데 같이 갈수가
없냐고 해서 그때 나간것이 공장에서 얼마떨어지지 않는곳에 있는
'예수의 작은자매들의 우애회'였고 일반가정에서 여럿이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다
한달에 한번가면 그 공동체에 신부님이 초대되어서 미사도 드리고 식사도 하고 기탄반주에 노래도 부르고
돌아오곤했다
같은과에 근무하는 수녀님이 계신다는 것을 그때에 알았다
청치마원피스를 입고계셨고 같은천으로 된 머리수건을 쓰고계셨고 가슴에는 큼직한 십자가를 메고계셨다
그래서 그녀가 수녀님인줄은 몰랐던것이다
수도공동체를 다닌지 일년좀지나서 저는 대구주교좌성당에서
같이 근무하던 남자선배님을 대부로 모시고 세례를 받았다
그때가 1980년이었고 일년이후에 중매로 외인과 결혼하고 양가부모님몰래 그전날 성당에서
방직과 선배님이셨던 분을 증인으로 모시고 아내의 대학친구들중에 신자를 모시고
관면혼배를 받았다
그때에 아내와 같이 수도공동체에 인사하러갔는데 그때에 귀중한 아이콘을 받았는데
요한바오로2세교황이 축성하시는 모습이 담긴사진이었다
몇년이 지나고 저는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오게되고
그리고 몇년이 지나고
광주교구의 신부님과 연을 맺어서 목포의 삼학도성당에 계실때에 내려가서
사제관에서 묵을때일이다
월요일아침 저는 잠을 자고 있었고 신부님은 새벽미사를 드리고 오셔서
어디 갈때가 있으니 서둘러라고 하셨다
어느분의 차를 얻어타고 목포부두쪽으로 나갔다 거기서 내려서
부두반대쪽으로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며 올라갔다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는
알수없었지만 반대방향을 보니 저멀ㄹ서 부두가 보였다
허름한 집에 들어가니 세례때에 만났던 수도공동체분들과 같은 모양새를 하시는
수녀님들이 여럿이 계셨다 그곳에서 신부님과 공동체분들과 미사를 드리고
아침이라고 준비되었던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해보니
바로 그 수도공동체였던것입니다
10여년전에 대구에서 세례를 받게해준 그 수도공동체가 그이후로 목포에서 만났던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큰영향을 주신 그 수녀님은 거기에 계시지는 않았다
광주교구 그신부님은 그이후로 교구내에 여러본당을 거치는 동안
그 부임지에 다 내려가보았습니다
지금은 신안군앞해도 맡은편에 있는 어느섬에 있는 본당에 계시고 한달에 한번정도 뭍으로 나오신다고 하셨지만
어떻게 가 봐야하는지 잘 몰라서 몇년동안 뵙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1960년생 1990년도 수품하셨고 사제가 되신지 몇년안된 햇병아리 신분로 만났는데
지금은 어느듯 머리가 히끗거리는 중년사제로 되어있어서
세월의 무상함을 금치못하지만
만나면 그래도 개구장이같은 말투는 여전하시고 아무 거리낌없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유일한 사제로 제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