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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스피치와 리더십 원문보기 글쓴이: 피터펜™
마음을 움직이는 부드러운 카리스마 이금희 아나운서 |
“촌스러움이 내 강점,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만 보여요” |
● 말 대신 눈과 귀로 상대를 허물다 ● 약속 잘 지키는 건 어머니, 술 잘하는 건 아버지 유전자 ● 철없는 비서, 아나운서 되다 ● 못 말리는 ‘긍정병 환자’, “비난도 관심 아닌가요?” ● “이젠 사랑을 잘할 것 같아요” ● “나는 튀는 법을 몰라요” |
질문 한두 개 놓치더라도… 이날 녹화는 평소보다 빠른, 1시간 반 만에 끝이 났다. 이금희 아나운서는 출연자와 제작진, 방청객들에게까지 허리 굽혀 인사를 한 다음에야 기자에게 눈길을 주었다. 방송국에서 나와 여의도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단순히 이동 시간을 줄여보자고 택한 장소인데, 그가 무척 좋아한다. “오랜만에 와보니 모든 게 새로워 보여요. 어느새 녹음이 이렇게 짙어졌네요.” 해맑게 웃는 모습이 소녀 같다. 녹화 중엔 볼 수 없었던 표정이다. -녹화 내내 서 있으려면 다리 아프지 않아요? “괜찮아요. 앉아서 진행하면 안정감은 주지만 역동성이 떨어져요. 다양한 시도를 하고 나서 지금의 구도가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출연자가 갑작스럽게 바뀌어서 난감했겠어요. “처음엔 당황스러웠죠. 그런데 학교 다닐 때도 ‘초치기’ 공부할 때 집중이 더 잘 되잖아요. 시간이 없는 만큼 집중력이 발휘됐어요. 다행이죠.” 방송가에서 이금희 아나운서는 준비를 철저히 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파워인터뷰’만 하더라도 이번 같은 돌발상황이 아니면 인터뷰 자료를 찾는 데만 꼬박 한나절을 투자한다. 다른 프로그램에 임할 때도 “광고 카피라이터가 촌철살인의 카피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에 몰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성을 다한다. 5월 초, 기자가 인터뷰 섭외를 위해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도 그는 다음날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영화배우 박용우의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있었다. -녹화 때 김원기 전 국회의장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예전에 토크쇼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는데 진행자가 저한테 시선을 안 주더라고요. 저는 그분한테 얘기하고 싶은데 다른 데 시선을 두고 있으니 민망했죠. 그때 명심한 게 ‘진행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게스트를 쳐다봐야 한다’예요. 출연자는 믿을 사람이 진행자밖에 없어요. 진행자는 질문을 한두 개 놓치더라도 출연자를 계속 쳐다보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심리적으로 안정돼야 속 얘기가 나오잖아요.” 지난해 11월5일 첫 방송을 시작한 ‘파워인터뷰’는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만한 인물을 초대해 진행자가 4명의 패널과 함께 궁금증을 풀어가는 시사교양 토크쇼다. 이 프로그램의 단독 MC로 이금희 아나운서가 발탁됐을 때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지금껏 온화하고 친근한 이미지로 일관해온 그가 시사 인터뷰어로 어떤 변신을 꾀할지에 쏠렸다. 그러나 이 아나운서는 ‘시사 인터뷰어는 날카롭고 공격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깸으로써 일반의 예상을 깼다. 공격적인 질문은 대체로 패널들 몫으로 돌리고, 그는 “한 사람을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분위기를 이끄는” 가장 그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방송에서 제가 서 있는 위치가 바로 제 역할을 상징해요. 게스트에게도, 패널에게도 치우치지 않고 상호 대화가 잘 진행되도록 연결하는 다리 역할이요.” |
인터뷰이의 거짓말은 직감”
아나운서는 본래 말하는 직업이다. 그런데 그의 진행방식은 어떤 프로그램에서든 말하기보다 듣는 데 치중한다. 자신보다 출연자가 더 많이 얘기하도록 귀 기울이는 것,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MC의 기본 소양이자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학창시절부터 친구들의 카운슬러 역할을 했어요. 친구들이 무슨 일로 찾아왔고, 제가 어떤 대답을 해줬는지는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지만 이상하게 친구들이 고민이 생기면 저한테 털어놓곤 했어요. 그래서 듣는 게 익숙해진 것 같아요.”
날카로운 질문으로 상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인터뷰어는 강한 인상을 남기고, 때론 보는 이를 통쾌하게 만든다. 이 아나운서의 인터뷰 방식은 그것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류승범 송일국 김주혁 같은, 인터뷰 안 하기로 유명한 배우들이 그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는 선뜻 출연해 무슨 얘기든 술술 풀어놓는 걸 보면 그가 탁월한 인터뷰어임은 분명하다.
-인터뷰이의 답변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아챌 수 있나요.
“인터뷰이가 거짓말하면 직감하죠. 하지만 대응하는 건 때에 따라 달라요. ‘파워인터뷰’인 경우 시시비비를 가려야죠. 특히 출연자가 공직에 있는 분일 경우는요. 하지만 라디오 프로그램 ‘가요산책’에 게스트로 출연한 연예인이 진실과 다른 얘기를 할 때, 그것이 사생활에 관한 것이라면 더 캐묻지 않아요. 그땐 거기까지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물론 더 파고들어가서 인터뷰어로서 개가를 올릴 수도 있겠지만 인간적인 신뢰가 훨씬 중요하거든요.”
‘이금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프로그램이 KBS ‘아침마당’이다. 1997년, 이 프로그램과 인연을 맺어 주말 진행을 하던 그는 1998년 6월부터 매일 아침 시청자들과 만나고 있다. 지난 6월15일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지 꼬박 8년이 됐다. 그 사이 남자 진행자는 이상벽에서 손범수로 바뀌었다.
-‘아침마당’엔 서민들, 주부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요.
“저도 연탄을 갈아봤고, 형제 많은 집에서 아옹다옹하면서 자랐고, 어릴 적 한복이 정말 입고 싶었는데 3년 만에 겨우 한 벌 얻어 입었고…. 그런 경험이 도움이 많이 돼요. 처음 방송을 시작할 땐 결혼도 안한 내가 과연 주부들과 얘기가 통할까, 정말 겁이 났어요. 막상 부딪쳐보니 결국 사람 이야기예요. 그분들 처지에서 생각해보니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았어요. 저도 결혼해서 남편이 친정 험담하면 기분 나쁘고, 시어머니가 남편 편만 들면 서운할 것 같거든요.”
-감정이입이 빠른가 봐요.
“영화를 봐도 5분이면 감정이입이 돼서 잘 웃고 잘 울고 그래요.”
-저도 그래요.
“남자들이 50대가 되면 드라마 보고 운대요.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남편과 같이 보시면 되겠어요(웃음).”
부부 문제 공론화한 ‘아침마당’
-‘아침마당’이 15년이나 방송했다죠?
“15년 전만 하더라도 부부 문제를 방송에서 시시콜콜 얘기한다는 게 익숙하지 않았어요. 요즘 부부 문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많아지고 시청자들이 배심원이 되는 재현 드라마까지 생긴 건 ‘아침마당’의 영향이라고 생각해요. 부부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속으로만 끙끙 앓던 주부들이 ‘아침마당’을 보면서 나만 그렇다는 피해의식을 버리고, 또 삶의 지혜를 터득하게 되는 그런 학습효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싶고요. 그런 것들이 부부관계를 비롯해 가정, 나아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작으나마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아침마당’이 “가부장적이고, 시청자 수준을 너무 낮게 본다”는 지적도 있어요.
“예전에는 그랬어요. 보수적인 시각으로 접근한 적이 많았죠.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요. 주제도 그렇고, 출연자 연령대도 젊어졌고요. 꾸준히 보신 분들이라면 그런 변화를 느끼실 거예요.”
-그동안 호흡을 맞춘 이계진, 이상벽, 손범수 씨를 평가한다면.
“‘사랑의 리퀘스트’를 함께 진행한 이계진 선배님은 딸 같은 보조작가들에게도 절대 반말하지 않는 ‘매너 짱’이세요. 이상벽 선배님은 셔츠 등판이 다 젖을 정도로 치열하게 방송을 하시죠. 손범수씨는 누구에게나 정말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는 순수함이 있고요.”
-‘아침마당’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달라진 점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죠. 물론 그 전에도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은 늘 제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죠. 심지어 아버지 칠순잔치 때도 중간에 방송하러 나왔어요. 늘 그런 식이었는데, ‘아침마당’을 진행하면서 ‘정말 잘 산다는 건 가족과 더불어 사는 것’이라는 걸 절감했죠. 그 뒤로는 휴가를 내면 그중 절반은 꼭 가족과 보내고, 두 달에 한 번씩은 가족과 1박2일 여행을 가고, 한 달에 두 번씩은 가족과 외식을 하고…. 의도적으로 애를 쓰죠. 또 결혼은 그냥 생활이 아니라 노력이구나, 내가 방송을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결혼생활도 노력해야 잘 영위해 나갈 수 있겠구나, 그런 걸 배우죠.”
그가 진행하는 프로그램들은 대체로 장수한다. ‘아침마당’과 ‘인간극장’이 그렇고, ‘TV 동화 행복한 세상’은 지난해 1000회를, ‘이금희의 가요산책’은 올해 8주년을 맞았다. 혹자는 그가 맡은 프로그램들을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착한 방송’이라고 표현한다. “방송을 오래 하다 보면 프로그램의 성향을 닮아가요. 얼마 전 ‘인간극장’ 팀과 6년 만에 처음으로 회식을 했는데 모두 ‘인간극장’에 나올 법한 사람들이더라고요. 어려운 처지에서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다 보면 건강하다는 것,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닫죠.”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는 좀 들떠 있는 것 같아요. ‘아침마당’이나 ‘파워인터뷰’의 그 이금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맞아요. 제가 좀 까불죠? 좋아서 그래요. 그 모습이 평소의 저와 가장 닮았어요. 제가 일로 만나면 먼저 인사도 하고 그러지만 원래는 낯을 가리는 편이에요. 하지만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땐 까르르 웃고 떠들죠. ‘가요산책’을 진행할 때 그 모습이 나오더라고요.” 첫 번째 만남은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했다. 그는 다음 약속장소가 광화문이라며 자신의 차로 함께 이동하자고 했다. 회사 앞에서 내리려는데 그가 “출출할 때 드시라”며 빵 봉지를 내민다. 이 여자, 참 따뜻하다. 부지런한 어머니, 따뜻한 아버지 두 번째 만남은 이틀 뒤 여의도 KBS 본관 커피숍에서 이뤄졌다. 오후 2시 정각에 그가 나타났다. 약속을 참 잘 지키는 사람이다. 어머니를 닮은 모양이다. 1999년에 출간된 그의 자서전 ‘나는 튀고 싶지 않다’에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세계 어린이 명작동화’ 전집이 몹시 갖고 싶었던 그에게 어머니는 “반에서 1등을 하면 30권을 사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는 악착같이 공부해 목표를 이뤘고, 어머니는 몇 달간 경제적으로 쪼들릴 것을 감수하고 그에게 전집을 사줬다. “어머니 하면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라요.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물론, 당신 입으로 하겠다고 한 것은 하늘이 두 쪽 나도 하시죠. 단 한순간도 손을 놀리시는 적이 없어요. 제가 어렸을 땐 끊임없이 부업을 하셨어요. 인형 눈 붙이는 일도 하시고, 코바늘 뜨개로 한 켤레에 1원 하는 덧버선 바닥을 뜨기도 하셨죠. 일흔이 넘은 지금도 일을 안 하실 땐 염주 돌리며 불경이라도 읽으세요.” 이금희 아나운서는 서울 토박이다. 은평구 불광동에서 태어나 지금껏 그 언저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은평구 대조동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미혼인 셋째언니와 함께 산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분 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결혼해 어렵게 가정을 꾸려왔다. 그의 아버지는 말단 경찰공무원이었다. “아버지는 지극히 평범한 분이에요. 술을 좋아하시죠. 팔순이 다 되어가는데 지금도 반주를 즐기세요. 어릴 땐 아버지가 술 드시는 게 좋았어요. 그때는 제과점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이 최고로 호사스러운 음식이었는데, 아버지가 술 드시면 가끔 떠먹는 아이스크림을 사와 저희를 깨우셨거든요. 그래봐야 1년에 한두 번이었는데도 그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해요.” 애주가인 아버지를 닮아 그도 한때는 술을 제법 마셨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저녁 방송이 끝나면 선배 아나운서들과 술 한잔씩 하고 헤어졌는데, 아침 프로그램을 맡은 뒤로는 술을 멀리하고 있다. 지금은 맥주 한두 잔, 와인 한 잔에도 ‘쉽게’ 무너진다고 한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진 않았나 봐요. “커다란 피아노학원 가방을 들고 다니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피아노를 정말 배우고 싶었거든요. 초등학교 4학년 때는 걸스카우트를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고요. 유치원도 못 다녔으니, 속상한 적이 많았죠. 근데 만일 아무런 부족함 없이 원하는 것은 뭐든 쉽게 손에 넣으면서 자랐다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심정,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안타까움, 그런 데서 시작되는 도전의식 같은 걸 이해하지 못했겠죠. 그런 점에선 다소 부족하게 자란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
-딸만 다섯인 ‘딸부잣집’ 넷째인데, 자라면서 옷 때문에 서러웠던 기억은 없어요?
“세 언니들끼리는 나이 차가 별로 안 나는데, 셋째언니와 저는 다섯 살 터울이에요. 아마 셋만 낳으려다가 뒤늦게 절 낳으신 모양이에요. 게다가 언니들은 키가 큰데, 전 중3 때까지 아주 작았어요. 그래서 다행히 언니들 옷을 물려입어야 하는 설움은 겪지 않아도 됐죠. 어머니가 재봉틀로 직접 모자며 물방울무늬 원피스 같은 것들을 만들어주셨어요. 겨울에는 뜨개질로 바지나 외투를 짜주셨고요. 또 어머니가 미용 일을 하신 덕분에 어릴 적 친구들은 저를 ‘옷 잘 입고 머리 모양도 참 예뻤던 아이’로 기억하더라고요.”
-어떤 학생이었나요.
“동창들이 저를 잘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아이, 방송반 활동은 열심이던 아이 정도로 기억할까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방송반 활동을 시작해 고등학교 때도, 대학 때도 교내 방송국에서 활동했거든요. 선생님 말씀은 단 한마디도 거역하지 않는 학생이었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요. 좀 답답하죠? 지금도 그래요. 정말 답답하고 우직한 스타일이에요. 요령 피울 줄 몰라요.”
-혈액형이 O형이네요.
“식구가 전부 O형인데 다들 조용해요. A형 기질이 강한 O형인가 봐요. 어제 아버지 생신이라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했는데, 조용히 밥만 먹다 왔어요(웃음).”
철없는 비서에서 아나운서로
그는 초등학교 시절 KBS 전국 어린이 동요 대회 ‘누가 누가 잘하나’를 방청하러 갔다가 ‘예쁜 아나운서 언니’의 친절한 모습에 반한 뒤부터 줄곧 아나운서의 꿈을 키워왔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어 대학 때까지 방송반 활동을 한 걸 보면 야무진 구석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숙명여대 4학년 재학 중 처음 도전한 KBS 아나운서 공채 시험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공교롭게도 불합격 소식을 듣던 날,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지방에 머물고 있었다. 여관방에서 혼자 “평생 그렇게 서럽게 운 적은 없었을 것”이라고 할 만큼 밤새 펑펑 울었다.
그러던 중 KBS 라디오에서 아나운서 시험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리포터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마저 4개월 만에 접었다. 종일 뛰어다니다 보니 집에만 오면 물먹은 솜처럼 픽픽 쓰러지는 그를 보며 부모님이 만류했던 것. 그 스스로 ‘나는 방송과 맞지 않은가’ 하는 회의에 젖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을 정말 못했어요. 워낙 내성적이라 힘들어도 누구에게 도움을 못 청했어요. 고맙게도 은사님의 추천을 받아 기업체에 들어가 9개월간 비서로 근무했는데 거기서 좋은 분들을 만났어요. 제가 좀 철없는 비서였어요. 일도 엄벙덤벙했는데 그래서인지 더 챙겨주고 아껴주셨어요. 그러다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렇게 몇 번 실패해본 경험과 직장 생활이 인생에 약이 됐죠. 비서로 일한 덕분에 눈치가 생겼고, 짧게나마 리포터 생활을 ‘찐하게’ 한 덕분에 그들의 고충을 헤아릴 수 있게 됐고요.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1987년 첫 도전에 실패하고, 1988년 응시한 시험에서 합격해 1989년 2월, KBS 공채 16기 아나운서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그의 최대 라이벌은 정은아 아나운서였다. 두 사람은 같은 해 아나운서 시험을 치렀다 고배를 마시고, 고달픈 라디오 리포터 생활도 함께 했다. KBS 입사는 이금희 아나운서가 한 해 빠르다. 그는 선배이면서도 정은아 아나운서가 부러웠다. 입사하자마자 주도면밀하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정 아나운서에게 주눅이 들었다. 그러던 중 정 아나운서 또한 그의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좋아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열등의식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방송 초년병 시절, 재기발랄한 아나운서들이 부러웠어요. 그때는 나의 부족한 점만 보였는데 다행히 ‘나는 나’라는 걸 일찍 깨달았죠.”
KBS에서 가장 촌스러운 아나운서’
그의 내성적인 성격이 ‘단점’이 아니라 ‘다른 점’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 사람이 있다. 그가 ‘6시 내고향’을 진행할 당시 ‘6시 내고향’ 팀장이다. 그 팀장은 어느 날 대뜸 이금희 아나운서에게 “네가 왜 이 프로그램의 MC가 된 줄 알아?” 하고 물었다.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KBS에서 가장 촌스러운 아나운서이기 때문이야” 하는 말이 뒤따라왔다. 그 팀장은 그 뒤로도 입버릇처럼 “너는 이 일을 10년 해야 돼. 너처럼 촌스러운 아나운서는 10년 이내에 안 들어올 테니까” 하고 말했다. 기분이 상했을 법한데 그는 오히려 “동료들에게 가졌던 경쟁의식이나 열등감, 나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제 자신이 시골밥상처럼 촌스럽지만 그래서 더 편하고 부담 없는 존재이며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나만의 강점임을 깨달은 거죠.”
-2000년에 프리랜서 선언을 한 계기가 있었나요.
“1999년이 제겐 큰 변화의 시기였어요. 1998년 가을부터 1999년 5월까지 하루에 3시간 이상 자본 기억이 없어요. 1998년 가을부터 연말까지 석 달 동안 대학원 졸업논문을 쓰고, 1999년 1월1일부터는 책(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는데 5월까지 끝낼 계획이었기 때문에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논문 쓸 때도 책 쓸 때도 코피를 자주 흘렸는데 그 여파가 꽤 컸어요. 1999년 여름부터 2000년 봄까지 저혈압으로 세 번 쓰러졌어요. 혈압이 뚝 떨어졌죠. 지금은 정상으로 회복됐지만 그땐 정말 건강에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그 무렵 그는 차장으로 승진했다. 논문 쓰고, 자서전을 집필하느라 피로가 누적됐는데도 내색을 할 수 없었던 그는 2000년 8월15일 남북이산가족 2차 상봉 방송을 계기로 KBS를 떠날 결심을 굳힌다.
“새벽부터 자정까지 여의도와 삼성동 코엑스를 오가며 프로그램 세 개를 연달아 찍고 나니 ‘이래선 안 되겠다, 또 쓰러질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사흘 만에 마음의 결정을 내렸죠. 결국 그해 10월 KBS를 그만뒀어요. 그러고 나서 가장 먼저 헬스클럽에 등록했어요. 그때부터 건강이 좋아졌고, 일도 조절할 수 있게 됐죠.”
프리랜서 선언 직전 상황이 방송인 생활의 첫 번째 고비였다면 두 번째 고비는 아마도 지난해 초 진행했던 MBC ‘퀴즈의 힘’이었을 게다. 프리랜서 선언 후에도 KBS 일만 하던 그의 첫 ‘외도’였는데, 3개월 만에 종영을 맞았다. 더욱이 한 일간지에서 그를 두고 ‘뚱뚱한 아나운서는 프로근성이 없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자 일부 네티즌들은 이에 동조해 “몸매 관리를 안 하는 이금희씨는 방송인 자질이 부족한 것 아니냐”며 그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퀴즈의 힘’과 다이어트
“처음엔 펑펑 울었어요. 기사를 쓴 기자에게 전화도 걸었지만 소용없었어요. 글 쓰는 선배한테 울면서 얘기했더니 울 일이 아니라고, 관심의 표현이라 생각하고 여태껏 해온 것처럼 씩씩하게 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한참 수다를 떨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어요. 제가 좀 ‘긍정병’ 환자예요. 뭐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죠. 인생 전체로 보면 덧없이 짧은 순간인데 뭐하러 그 때문에 아파하고 실의에 빠져 있겠어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텐데(웃음).”
-사랑관이나 결혼관이 있나요.
“관(觀)이랄 게 없는 게, 결혼을 해봤어야죠(웃음). 근데 제가 아직 철이 덜 들어선지 한눈에 반하는 사람을 찾고 있는 것 같아요. 인연이라면 첫눈에 어떤 느낌이 올 것 같아요. 처음 봤는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저 사람이랑 손잡고 싶어’ 하는 느낌.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저는 의외로 사랑에 푹 빠지는 스타일이에요. 제가 컴퓨터 게임을 안 배운 것도 시작하면 푹 빠질 테고, 한번 빠지면 다른 것 전혀 돌아보지 않고 그것만 할 게 뻔하기 때문이에요. 연애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과거 두 번의 연애 경험에 비춰볼 때 저는 사랑에 빠지면 잠자는 시간만 빼놓고 온종일 그 사람 생각을 해요. 늘 안테나를 그 사람을 향해 세워놓고 있죠. 정말 놀라울 정도로 집중하고 몰입하고 빠지는 스타일이에요. 다시 사랑을 하면 여전히 그럴 것 같아요.”
내 친구, 이선희
연애를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그는 영화와 공연 관람에 단단히 빠져 있다. 한때 개봉 영화의 90%를 ‘극장에서’ 보는 것이 목표였고, 요즘은 ‘바빠서’ 개봉 영화의 절반쯤 본다. 그러니 주말에 일을 안 해도 몸은 여전히 바쁘다.
“하루에 여섯 편을 본 적도 있어요. 오전 7시, ‘조조’ 전에 하는 ‘특회’를 시작으로 시간표를 짜서요. 뮤지컬도 정말 좋아해요. 국내 무대에 오른 뮤지컬의 절반 이상은 볼 걸요. 최근엔 ‘찰리 브라운’을 봤는데, 우리 정서에 잘 맞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근래 본 것 중엔 ‘I LOVE YOU’가 가장 재미있었어요.”
그는 책 읽기도 좋아하는데, 이어령 교수가 쓴 책 ‘디지로그’와 법정스님이 쓴 책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를 인상 깊게 봤다고 한다.
-문화생활을 그렇게 폭넓게 즐길 수 있는 건 솔로의 특권이죠. 결혼하면 그러기 어려울 걸요.
“그래서 남자친구가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같이 보러 다니게요. 제가 꿈꾸는 데이트는 그런 거예요. 함께 영화 보고, 한강시민공원에서 산책하고, 돗자리 깔고 앉아 책 보고, 도란도란 얘기도 하고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