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밀양박씨연안공파제주도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운영자
조정철(趙貞喆, 1751년(영조27년辛未)~1831년(순조31년辛卯)) 본관은 양주(楊洲) 字는 성경(成卿), 태성(台城) 號는 정헌(靜軒), 대릉(大陵)이며, 노론(老論) 4대신(大臣)의 한사람인 영의정 조태채(趙泰采)의 증손(曾孫)이다. 할아버지는 조겸빈(趙謙彬)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조영순(趙榮順)이며 어머니는 김시눌(金時訥)의 딸이다. 부인 홍씨는 홍지해(洪趾海)의 딸이다. 1775년(영조 5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별검(別檢)이 되었다. 1777년(정조 1년) 정조(正祖)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濟州)에 유배되었고, 그 후 1781년에 정의(旌義), 1790년에 추자도로 이배되었다. 1800년 7월 4일 純祖가 즉위하며 1803년에 전라도 광양(光陽), 구례(求禮)로 이배되고, 1805년 3월에 양이(量移→섬이나 외지에서 귀양중인 자의 죄를 감형하여 내지나 가까운 곳으로 옮김)가 거론되더니 황해도 토산(兎山)으로 양이(量移)되었고 7월에 유배에서 방면되었다. 실로 29년의 길고긴 유배 생활에 젊은 청춘을 다 보내고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이에 방면된 것이다. 1809년(純祖 9년) 6품으로 재임용되고 1810년(純祖 10년) 정언(正言)이 되더니, 1811년(純祖11년) 전라도방어사겸제주목사((全羅道防禦使兼濟州牧使), 1812년 동래부사(東萊府使)를 거쳐 1813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816년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된 뒤, 이조참판(吏曹參判), 병조판서(兵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등을 두루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1831년(순조 31년) 5월 9일 졸(卒)하였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이 있다.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은 제주의 유배 기간 동안의 피눈물 나는 기록이며 시문집으로 본래 4권이다. 이 문집은 유배인의 슬픔과 억울함, 한을 읊고 있으면서도 당시 제주도의 풍속과 자연은 물론 특히 귤의 종류까지 말해주고 있어서 오늘날 제주 향토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있다.
정헌(靜軒)이 제주 유배의 단초(端初)가 되는 정조(正祖) 시해사건이 발생되었는데, 정헌(靜軒)을 경계하던 홍국영 세력에 의해 죄를 뒤집어쓰고 정헌(靜軒) 자신은 끝끝내 결백을 주장하였지만 죄인의 신분으로 제주로 유배되게 되었다. 그의 형 조원철도 이 사건과 연루되어 기장으로 유배되었다. 당시 이 사건과 연루된 자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지만, 정헌(靜軒) 형제는 정조(正祖)의 도움으로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국문 중 정조(正祖)가 말하기를 “너는 충신의 자손이므로 반역을 안 했을 것이다. 그러니 심문하는 형벌을 주지 않겠다”고 하셨고 또한 특별히 형벌을 가하지 말도록 하교 하였고 나중에 교시에서도 “다만 신중하지 못한 까닭이다”라고 하셨다. 이는 증조부(曾祖父)이신 충익공(忠翼公)우의정 조태채(趙泰采)를 배려한 정조(正祖)의 조치로 보여진다. 정헌(靜軒) 형제가 시해 사건에 누명을 쓰게 된 계기는 이 사건과 연루된 홍상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의 형 홍상범의 여종이 조정철의 집에 드나들며 정헌(靜軒)의 부인 홍씨와 만났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사연으로 인해 부인 남양홍씨는 가문의 멸문지화를 자초했다는 자책감을 이기지 못하여 그해 9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때 슬하에는 8개월 된 아들을 두고있었다. 그는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절해고도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죽고 싶은 심정을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에 “내가 성세를 만나 살다가 불행히도 무고를 입어 망극하게도 갑자기 형틀에 헐떡이다가 영해 밖으로 멀리 유배되어 죄수로 복역을 하며 두려웠던 점은 매번 한 번 죽고 싶은 것이 한이었지만 오히려 늦어지는 것이었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정헌(靜軒) 조정철(趙貞喆)과 제주와의 인연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우선 집안 내력에서 3대에 걸쳐 무려 네 차례나 제주에 유배된 집안이다. 그의 할아버지 조겸빈(趙謙彬) 형제들인 조승빈은 1723년(景宗 3년) 신임옥사(申任獄事)로 정의현(旌義縣)에, 조관빈(趙觀彬)은 1731년(英祖 7년)에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고 정헌(靜軒)의 부친인 조영순(趙榮順)도 1754년(英祖 30년)에 제주의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됐으며, 정헌(靜軒) 자신도 27년이란 길고 긴 세월을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한 것이다.
또한 정헌((靜軒)이 제주 유배 중에 의녀 홍랑(義女洪娘→홍윤애(洪允愛))와의 애절한 사랑은 후세에 전해지며 애달픈 사연을 전하고 있는데,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을 중심으로 자료들을 보면, 홍윤애(洪允愛)는 향리(鄕吏) 홍처훈(洪處勳)의 딸로 어렸을때 기적에 올랐었으나 면천된 여인으로 정헌(靜軒)이 제주에 유배되었을 때 그의 적거(謫居)에 드나들었다고 기록에 전하여 지고 있다. 그런데 정헌((靜軒)이 제주에 유배 중인 1781년(正祖 5년) 3월에 김시구(金蓍耉)가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김시구는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노론(老論) 4대신(大臣)을 탄핵하여 무고하게 처형했던 소론파(少論派) 김일경(金一鏡, 1662년(顯宗 3년)~1724년(英祖 원년)의 계파였다. 김일경이 탄핵한 노론 4대신 중에 정헌(靜軒)의 증조부인 조태채가 포함되어 있었으니, 김시구와 정헌(靜軒)은 서로 원수지간이었던 셈이다. 김시구는 정헌(靜軒)을 죽일 수 있는 새로운 죄목을 캐기 위해 염탐하던 중, 정헌(靜軒)의 적소(謫所)에 홍윤애(洪允愛)가 출입하는 것을 알고 그녀를 잡아다가 음모 여부를 문초하였다. 그러나 홍윤애는 모든 사실을 부인하였고 끝내 죽음으로 조정철을 변호하였다. 김시구(金蓍耉) 목사는 죄상을 밝힐 증거도 없이 사람을 죽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제주도 유배인들이 역모를 꾸민다는 허위 보고를 올렸다. 이에 조정(朝庭)은 제주목사 및 대정현감(大靜縣監), 정의현감(旌義縣監)을 갈아 취우고, 어사를 파견하여 조사하였다. 정헌(靜軒)은 혹독한 심문 끝에 결국 무혐의가 밝혀졌고, 1782년(정조 6)에 정의현(旌義縣)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정헌(靜軒)은 제주목(濟州牧) 유배 기간에는 제주사람인 신호의 집에서 적거했는데, 유배 시작부터 시련을 맞았다. 그는 정헌영해처감록에서 '판관(判官) 경래운( 慶來運)은 사사로이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나로 하여금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했다. 경래운은 천한 예속(隸屬) 사람으로 전에(정헌(靜軒)이 관직에 있을 때)부터 부정한 일로 비록 우리집에 출입했어도 내가 아는체를 하지 않던 자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개인적인 원한으로 단 하나 데려 온 노비를 도착한 날 잡아가두더니 돌려보내고 내게 온 쌀도 육지로 보내버리는 등 너무한다. 양식 얻는 길 조차 혹독하게 금하니 굶주려 견디지 못할까 걱정이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유배인 조정철은 제주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 심지어 독서조차 금지된 채로 지내야 했고 1779년 정월에는 관가에서 집주인을 바꾸어 "큰 비 내리는 가운데 급박하게 쫓겨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토록 피박되고 곤궁한 삶을 산 것이다.
한편, 김시구 목사는 판관 황인채와 공모하여 정헌(靜軒)을 제거 할 목적으로 홍의녀를 잡아들여 문초하였지만 홍의녀는 시종일관 "청소하고, 빨래하며 잔일을 거들어주었을 뿐"이라고만 답했다. 그녀로 하여금 정헌(靜軒)에게 불리한 진술을 받아내려 했으나 혹독한 문초에도 불구하고 홍의녀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고, 김시구는 그녀에게 장 70대를 쳐서 혈육(血肉)이 낭자하였다고 기록되있다. 그러나 홍윤애(洪允愛)는 목메어 죽음으로 정헌(靜軒)을 지켜 내고자 하였다. 당시 상황을 정헌(靜軒)은 다음과 같이 영해처감록에 기록했다. “목사 김시구는 출신이 흉악한 남인의 한 사람이다. 배에서 내린 날부터 이미 나를 죽이려는 뜻을 가지고, 그 무리인 판관 황인채와 더불어 둘이 한 패가 되어 나쁜 일을 같이 하며 서로 도왔는데 홍윤애를 강제로 불러다가 나의 적거에 출입한 죄로 특별히 만든 서까래와 같은 매로 70을 헤아리게 때리기에 이르니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찢어져 죽었다. 사건이 너무 놀랍고 참혹하여 생각나는 대로 절구 한 수를 적었다. 신축(정조5년, 1781) 윤 5월 15일이다.
『외로운 신하 임금의 은혜에 피눈물 흘리는데 모든 일 남녘 변방에서 한결같이 경계하네. 어제 광풍 큰 나무 흔들게 불어내니 시든 꽃 새로 돋아난 잎 어지럽게 떨어지네.』
홍윤애(洪允愛)와 정헌(靜軒)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홍의녀가 옥사(獄死) 당시 3개월짜리 젖먹이였었다. 천애고아가 된 여식(女息)은 외가인 홍씨 집안에서 성장하여 애월읍 곽지리 박사원(朴師源)의 5남1녀 중 3남인 박수영(朴秀榮)에게 시집을 갔으며 1남을 낳고 일찍 졸하였다. 그런데 정헌(靜軒)은 1803년에 전라도 광양(光陽)으로 이배(移配)되면서, 27년 간 제주도 유배 생활에 종비부를 찍었으며, 181 1년(純祖11년) 6월에 전라방어사 겸 제주목사(全羅防禦使兼濟州牧使)가 되어 한 맺힌 제주에 부임하였다. 그가 제주목사로 부임한 해는 홍윤애가 절명한 지 30년만인데, 조정철의 나이 환갑(61세)에 이른 때였다. 그는 오자마자 홍윤애의 무덤을 찾아가 애도시와 비문을 지어 묘비명을 새겨주었고 자신의 혈육을 찾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딸은 이미 8년전에 죽고 없었고 사위 마저 그가 도임하기 3개월전에 죽고 말았다. "홍의녀지묘(洪義女之墓)"라 써있는 홍윤애(洪允愛) 묘비의 비음(碑陰-비의 뒷면)에는 정헌(靜軒)조정철(趙貞喆)이 지은 비명(碑銘)이 아직도 남아 있다. 『묻힌 옥, 숨은 향기 문득 몇 년이던가 누가 그대의 억울함 푸른 하늘에 호소하리 황천길 아득한데 누굴 믿고 돌아갔나 정의의 피 깊이 감추고 죽음 또한 까닭이 있었네 천고에 아름다운 이름들 형두꽃처럼 빛나며 한 집안에 두 절개, 형제가 현숙하여라 젊은 나이의 두 무덤, 이제는 일으킬 길 없고 푸른 풀만이 말갈기 앞에 돋아나는구나』 (이 비문에서 “한 집안 두 절개”란 홍윤애와 더불어 홍윤애의 언니가 품은 절개를 말한다. 홍윤애의 언니는 참판 이형규의 부실이었는데, 이형규가 죽자 독약을 먹고 순절했다고 한다) 지금의 제주시 전농로 토지공사 앞 도로의 왕벗나무 고목이 있는 곳에가면 의녀(義女) 홍윤애(洪允愛)의 무덤이었다는 조그마한 표지석이 있고 인근 도로를 '홍랑로'라 이름 지은 것은 아직도 홍윤애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양주조씨 문중의 사당인 경북 상주시 함창의 "함녕재"에는 조정철과 홍윤애를 배향되고 있다.
|
유수암리에 있는 홍의녀의 묘비
(보는 쪽에서 왼쪽 묘는 홍의녀 자매 합장 묘이며, 오른편 오석 비가 있는 묘는 외손자 박규팔의 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