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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기정 심리교육 디오라마 원문보기 글쓴이: 문기정
‘퇴적공간’이 주는 메시지
그래픽 디자이너 오근재 전 홍익대 교수(73·현 연세대 특별 초빙교수). 오 교수는 대학에서 퇴임한 후에야 큰 깨달음을 얻는다.
“교수라는 직함을 반납하는 동시에 나는 ‘노인’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인된 직업으로 일정 수준의 소득을 벌어들이지 않는 이상, 나이든 자는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인 잣대로 ‘노인’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갑자기 고독이 밀려왔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노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진지한 질문이 뒤따랐다.”
그 진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이 원로 디자이너는 ‘노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탑골공원을 찾았다.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역사적 장소여서가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 노인들의 특별한 공간으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여기가 바로 ‘퇴적공간’이다.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쓸모를 인정받지 못해 질료적이고 잉여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인간군이 하구의 삼각주처럼 퇴적되어 있는 공간, ‘디자인 캐피털 시티 서울’의 아브젝트적 집적지인 실버 공간 혹은 잉여 공간이다.”
직설적 표현을 하자면 상품가치를 잃어버리고 가정이라는 집단에서 1차적으로 추방당한 노인들이 사회적 변화에 따라 형성된 공간이다. 퇴적공간은 또한 글로 풀어놓으면 소설 한 권은 쉽게 나올 온갖 사연을 지닌 노인들, 그 노인 한 명 한 명이 퇴적층처럼 쌓여 시대를 농밀하게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저자는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가족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은 노인들이 모여 있는 퇴적공간들을 ‘탐사’한다.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인근 지하철 종로3가역, 종묘시민공원, 낙원동 뒷골목 등이다. 나아가 무료 급식소, 현대판 기로소라 할 노인복지센터, 인천의 자유공원 등도 찾았다.
모래와 자갈이 떠밀려 내려오다 물살이 느려지는 강 하구에 닿으면 쌓이기 시작한다. '퇴적(堆積)'이다. 찰기 없는 '모래'는 늙고 쇠락해 시장에 떼어다 팔 수 있는 자원이 바닥난 '노인(老人)'에 대한 은유다. '퇴적'이 이뤄지는 곳은 유교적 도덕률의 붕괴로 가정에서 1차 추방된 뒤 도시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밀려 표류하는 노인들이 하루 3000명 이상 모여드는 서울 종로3가 전철역과 종묘시민공원, 탑골공원, 인천 자유공원…. 인생의 종점에서 향방 없이 떠도는 자들의 도피성 공간이다.
이 모래섬에 가난한 노인들만 우글대는 것은 아니다. 전직 교수인 저자는 카프카의 '변신'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어느 날 문득 나 자신이 노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교수라는 직함을 반납한 순간 자신이 이 사회의 걱정거리가 되었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벌레'로 변하자 자신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가족의 모습을 보고 절망하는 그레고리처럼.
'퇴적 공간' 탐사에 나선 것은 이때부터다. 종로3가 전철역에서 내려 탑골공원을 거쳐 낙원상가로, 경운동과 돈의동의 피맛골 골목, 종묘시민공원으로 옮겨가며 이 시대 노인들의 처절한 자화상을 목격한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잿더미에서 배고픈 성장기를 보냈고, 가난 속에서 자식들 키우느라 자신의 노후를 준비할 수 없었던 사람들. 그들의 44.6%는 빈곤층으로 분류돼 밥벌이의 구차함에 여전히 매여 있거나 치매, 파킨슨 같은 질병에 시달린다. 조금이라도 거동할 수 있는 노인들은 상실감을 달래려 '동년배'들이 모여드는 공원, 노인복지센터, 무료 급식소를 찾는다. 그들 중엔 한때 사업을 크게 했던 사람, 관공서의 장이었던 사람, 학자였던 사람도 있다.
“노인들은 젊어서 자신의 행동과 감정, 아이디어까지 화폐로 교환 가능한 모든 것을 내다팔고 이제는 팔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환 가치를 잃은 잉여인간, 쓰레기 취급을 받는 이들이 떠밀리고 떠밀리다 강 하류 모래섬처럼 쌓인 공간이 종묘공원, 탑골공원 같은 곳이죠.”
“‘나만 멸시받고 쓸모없는 게 아니었구나.’ ‘저들도 나 같구나.’ 하는 확인을 받고 싶은 게 가장 큰 이유죠. 하지만 이곳의 ‘거주자’로 여겨지고 싶지 않아서 말로는 ‘어쩌다 한번 와 봤다.’고들 해요. 스스로를 이곳의 거주자가 아닌 방문자로 여기는 사람으로만 수천 명씩 군집이 이뤄진다는 사실이 참 역설적이죠?”
노령연금, 노년층과 젊은 층으로 분리된 승차 공간, 시간 죽이기를 위해 마련된 고궁의 무료 개방은 노인에 대한 '배려'가 아닌 '배제'라고 지적한다.
노인을 요양원, 병원 같은 시설로 보내야 더 많은 복지 혜택을 주는 정부 정책은 노인이 가족에게 버림받고 경제적으로 무능하다는 점을 부각시킬수록 국가 보조금을 더 많이 받아낼 수 있다는 점을 자녀들에게 학습시킨다. 노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대신 당장의 결핍을 채워주는 데 급급한 복지정책은 노인들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는 동시에 가정과 공동체 해체를 가속화한다.
요즘 어르신들은 어떨까? 물론 아무런 힘도 권위도 없다.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집안 어른에게 지혜를 묻고 그들의 경험을 기준으로 삼아 왔던 젊은 자녀들이 이 시대에는 많지 않다. 이제 젊은이들은 그 해답을 노인 대신 디지털 미디어에서 구한다.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과 그것의 사회적 침투는 어느 틈엔가 노인들을 능력 없고 사회적 기여도 없는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노인들이 무능한 존재로 변했다기보다는 노인들을 그 자리에 둔 채 디지털 미디어가 지배하는 새로운 영토로 시대가 이주해 버린 탓이다.
쌓아 온 지식도 쓸모없게 되고 지혜를 구하는 이도 없을 때 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제는 노인들이 사회적 중심으로 자리할 수 있도록 아무도 지지해 주지도 않을 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이 보내는 존경도 그 형식만 간신히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충분한 경제력이 있는 소수의 노인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집 안에 머무를 수 없게 됐다.
지금의 복지제도는 자녀와 노년의 부모 사이를 가족의 의식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를 재정(財政)이 매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녀의 체온이 스며들 공간을 제거하면서 실상 그 환자가 앓고 있는 질병의 증세와 그 처방에 직접 지원을 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인간은 복지의 중심에서 벗어나고 오히려 질병과 사건이 그 중심을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얼까? '죽음 의식을 지니고 있는 개인의 삶은 언제나 가치 있다'는 보르헤스적인 관점을 끌어들인다. “지금처럼 노인들을 공원이나 복지센터로 끌어내지 말고 가정과 작은 단위 공동체의 일원으로 복귀시키는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노인들이 존엄성을 지켜 나가고 주체권을 회복할 수 있도록 국가나 지자체가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질병 그 자체에만 비용을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작은 공동체의 회복을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오근재 교수는 노인이 되고나서, 노인의 실상과 그에 따른 노인 정책에 항변하고 있다.
(20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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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인들을 퇴적된 군상들로 보았군요.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이제는 노인들이 사회적 중심으로 자리할 수 있도록 아무도 지지해 주지도 않을 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이 보내는 존경도 그 형식만 간신히 남아 있을 뿐이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노인의 권위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부양의 대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노인들 각자 지니고 있는 달란트를 아낌없이 발휘하여 사회에 이바지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인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노인도 필요로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노인의식이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당해야 합니다. 과한 재정적 부와 권위는 내려 놓아야지요. 무엇보다 건강해야 합니다.
노인이 노인답게 사는 법을 전파하시는 김홍 학장님의 공감에 감사드립니다.
영암군 노인대학생들은 행복한 시간이 많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