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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미학 : 시화공단 조직화 25년의 기록과 교훈
『시화, 마침내 빛날 – 묵묵히 세상을 바꾸는 작은 공장 노동자들의 이야기』
(공계진, 고유서가, 2026)
홍석범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원장
우리나라는 OECD 개발원조위원회 회원국 가운데 공적개발원조(ODA)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된 유일한 국가다. 오랜 식민 지배의 아픔과 한국전쟁의 상흔에도 불구하고 70여 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일구어냈다는 점에서 그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 같은 경제성장의 주된 동력이 국가와 재벌 사이의 긴밀한 연계, 국가의 강력한 동원 규율, 그리고 수출지향적 제조업 육성에 있었다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비록 독과점 재벌그룹으로의 경제력 집중, 소수 대기업과 대다수 중소기업 간의 위계적인 분업구조와 격차 확대, 노동 배제적이고 억압적인 권위주의적 통치체제 같은 부작용이 있기는 했지만 절대 빈곤율이 감소하고 노동자 민중들의 평균적인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는 점에서 불평등 심화에 관한 이슈들은 성장 담론 뒤로 내몰려 종종 무시되거나 잊혀지고는 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그동안 산업·노동을 비롯한 사회과학 분야의 연구들 또한 대체로 존재감과 영향력이 막강한 재벌 대기업·대공장 위주로 전개되어 왔다. 산업구조, 기업조직, 고용관계, 노사관계, 노동조합 및 노동운동에 관한 연구들은 어떤 주제를 다루든 비교적 접근이 용이한 대기업·대공장 사례에 주목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영세 사업장, 사내하청, 파견, 플랫폼 등 다양한 형태의 불안정 노동과 이 요소들이 공간적·사회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공단 그 자체를 파고드는 연구는 소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불안정 공단 노동자들은 산업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 어두운 곳에서 산업 발전과 경제성장을 지탱해왔던 이들이다. 동시에 성장의 이면에서 함께 증식해온 불평등의 충격을 가장 가깝게 흡수했으며, 손에 쥐자마자 흩어져버리는 모래알 같은 처지에 놓인 까닭에 스스로 집단화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강력하게 내어보지 못했던 이들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최근 시화노동정책연구소의 공계진 이사장이 집필한 『시화, 마침내 빛날 – 묵묵히 세상을 바꾸는 작은 공장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매우 반갑고 특별하다. 이 책은 소외된 공단 작은 사업장 노동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나아가 이들이 자기 삶의 주체로 바로 설 수 있다는 희망과 그 경로를 제시하는 아주 드물고 귀한 관점에 서있는 저작인 까닭이다.
저자인 공계진 이사장은 한국 노동운동사의 굴곡진 투쟁 현장 곳곳을 누벼온 역사의 산증인이다. 대학 4학년이던 1983년 5.18 광주항쟁 3주년을 맞아 학내에서 고공 시위를 벌이다 징역살이를 한 그는 복학을 포기하고 구로공단으로 들어가 아이롱사로 취업,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하였다. 이후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노동자학교 야학을 운영하다가 1990년대 말 자동차연맹, 금속연맹 활동가로 복무하면서 2001년 금속노조 산별노조 출범에 기여하였다. 산별노조 출범과 함께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시화공단으로 들어간 그는 시화노동정책연구소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공단 조직화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 금속노조 노동연구원장을 역임하며 잠시 시화공단을 떠나기도 했으나 2013년 다시금 자신의 운동적 고향이자 거점인 시화공단으로 복귀하여 오늘날까지 공단 조직화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저자가 평생에 걸쳐 치열하게 고민했던 숙제를 단 하나 꼽으라면 바로 ‘시화공단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조직화’다. 이 책은 생애의 절반 가까운 시간을 시화공단 작은 사업장 노동자 조직화에 투여해온 백전노장 노동운동가가 자신의 숙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덤덤히 회고하는 글이다. 하지만 이 책이 비단 활동가 자신의 일생을 뒤돌아보는 자전적 에세이로만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회고록이란 형식만 빌려왔을 뿐 실상은 다양한 조건과 배경의 시화공단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열악한 현실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것, 여느 노동조합 조직화 활동가들이 고민해봄직한 조직 대상의 처지와 조직화 전략의 괴리를 쟁점화하는 것, 산업노동 분야 정책 활동가나 연구자들이 겪어볼 법한 조사 실무에서의 고충과 고민을 펼쳐놓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인 까닭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노동운동가인 저자 개인 및 그와 함께 활동해왔던 동료들의 자전적 회고록이자, 한 번도 주체로서 호명되지 못한 시화공단 노동자들의 실상을 기록한 역사서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역·공단 노동정책을 마련하고자 하는 정책·연구 활동가들을 위한 참고서이자, 공단 불안정 노동자 조직화가 처한 본연적 제약과 한계를 드러내고 나름의 해법을 제안하는 지침서라고 말할 수 있다.
책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부에서는 오늘날 시화공단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노동자들이 최초에 어떤 연유로 이곳으로 흘러들어오게 되었는지, 이곳에서 이들의 삶과 처지가 어떠한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문래동 마찌꼬바에서 일하다가 사장의 제안으로 함께 지역을 옮기게 된 문 씨, IMF 당시 원청업체의 갑질로 인해 남동공단에서부터 쫓기듯 넘어오게 된 남 씨, 반월공단 내 여러 PCB업체를 전전하다 반도체 경기 악화에 따른 폐업 때문에 인접한 시화공단까지 오게 된 안 양, 과거 연안 지역 염전과 갯벌에서 어업에 종사하다가 시화공단 조성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후 공단으로 재취업하게 된 조 아줌마, 집안에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혈혈단신 한국으로 넘어온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 호 씨 등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 노동자들의 사례가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시화공단에서 이들의 삶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격이다. 회사의 잘못으로 산재를 당해도 공상 처리를 실시함은 물론 자신을 자르지 않는 회사에 감사함을 갖는 삶, 당장 과로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장시간 노동에 놓여있음에도 매일 매일 잔업·특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삶, 조금이라도 임금을 올려볼 요량으로 이리저리 회사를 옮겨 다녀봤지만 언제나 쥐꼬리 신세를 면치 못하는 삶, 당장 생활비를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머무르고 있지만 언제든 이곳을 떠날 기회만을 노리는 삶이 이들 시화공단 노동자들의 처지다.
2부에서는 이 같은 시화공단 노동자들의 처지를 바꾸기 위한 초창기 공단 조직화의 활동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2001년 시화공단에 자리 잡은 저자는 시화노동정책연구소와 시흥안산일반노조를 설립하여 공단 조직화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활동가들이 시화공단 개척을 위해 택한 조직화 전략은 위로부터의 조직화, 즉 노동조합 상층부를 먼저 구성하고 이들의 지휘 아래 훈련된 활동가를 현장에 투입하여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방식이었다.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대부분의 입주업체가 영세한 규모인 신생 공단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란 쉽지 않았다. 때문에 저자와 동료들은 우선 활동가들이 들어가서 노동조합을 조직할 수 있을 만한 규모 있는 사업장을 조직하고 난 후 이를 거점으로 노동조합을 확산시키기로 하였다. 이러한 전략 하에 찾아낸 곳이 바로 금창공업이다. 당시 금창공업은 병역특례 청년들을 다수 고용하고 있던 150명 규모의 회사로서 공단 내에서는 꽤나 큰 축에 속했다. 하지만 실상 임금은 최저임금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노동자들은 매일 잔업·특근에 시달리며 살인적인 노동시간을 감내하고 있었다. 2002년 10월 설립된 금창공업 노동조합은 회사의 교섭 요구 묵살과 노조 파괴 시도에 맞서 장기간의 점거농성 투쟁에 돌입하였다. 하지만 2004년 투쟁을 마무리하며 회사와 타협하는 과정에서 활동가들은 퇴사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은 끝끝내 노조를 인정하지 않은 채 회사를 폐업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투쟁은 실패했고, 투쟁의 주체로 나서거나 곁에서 함께 했던 많은 노동자와 활동가들이 금창공업 투쟁 이후 시화공단을 떠나게 된다.
3부는 금창공업 투쟁이 끝난 후 시화공단을 잠시 떠나야 했던 저자가 2013년 시화노동정책연구소 이사장으로 복귀한 직후의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2001년 설립 이래 시화노동정책연구소는 정책·연구 사업보다는 노동자 상담과 조직화를 본연의 업무로 설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제자리에 복귀한 저자는 연구소의 방향성을 완전히 새롭게 재편하게 된다. 그동안 시화공단을 개척하겠다는 포부를 펼쳐보이고자 했지만 정작 공단 노동자들 개개인이 어떤 개인적, 조직적, 사회구조적 현실 속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연구소는 조사와 연구에 기반한 공단 실태조사 사업에 주안점을 두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후원금에 의존하는 작은 민간 연구소 사정상 대부분의 조사연구는 독자적인 기획 사업보다는 공공 부문에서 발주하는 정책연구 사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흥시 비정규직 노동자 실태조사, 시흥스마트허브 노동자 보육 및 방과후교육 실태조사, 경기도 대학 비정규직 실태조사, 경기도 산업단지 300인 이하 사업장 노동 실태조사, 시화공단 파견노동자 실태조사, 사업장 휴게실 실태조사 등을 거치면서 과거에는 깊이 알 수 없었던 지역과 공단의 현실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은 아주 값진 성과였다. 이 시기의 경험과 활동들은 연구소의 내재적인 정책 역량 향상과 인적 네트워크 확장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시흥 및 경기도 지역 내에서 연구소의 위상을 드높이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지자체 예산에 크게 의존하는 사업구조는 ‘연구자’란 명찰을 내걸고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유익하지만은 않은 결과를 불러온다. 연구자 개인 및 그가 속한 조직의 존속을 위해 자신들의 연구관심과 조직 정체성에 걸맞은 활동이 아닌 외부 발주처로부터 부여된 과업을 수행하는 데에만 집중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연구소의 궁극적 목적은 시화공단 노동자 조직화였지 조사·연구 그 자체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지역에서의 오랜 실태조사 사업을 통해 나름 운영의 안착화를 이루어낸 연구소 식구들은 이제 자신의 예산으로 자신의 정체성, 즉 ‘조직화’를 목표로 한 조사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4부는 이러한 목표 하에 연구소 사람들이 직접 만나고 대화한 시화공단 노동자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동안 시화공단 조직화가 유의미한 성과를 도출하지 못한 원인을 탐구하는 데에 천착하고 있다.
그동안 시화공단을 둘러싼 조직화 시도와 노력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입주업체의 99%를 차지하는 50인 미만 작은 사업장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왜 0%에 수렴하고 있을까? 왜 시화공단 조직화는 실패한 것일까? 저자가 내린 결론은 아주 단순하다. 노동조합이 시화공단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공급’된 바 없기 때문이다. 17년차 공단 노동자인 김복순 씨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노조에서 배포하는 홍보물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청업체 노동자인 정재욱 씨는 자신의 임금이 낮은 이유가 원청업체 노동조합과 그들 조합원의 고임금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 응웬 씨에게는 모든 행동 기준이 돈으로 귀결되는 까닭에 죽어라 일만 하면 그뿐 노동조합 같은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인근의 여러 공단 PCB업체들을 전전해왔던 박지혜 씨에게 노동조합이란 TV에서나 들을 수 있는 단어였으며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과격하게 시위하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문래동 마찌꼬바에서 자수성가한 사장이 세운 작은 공장에서 근무하는 장순예 씨는 자신도 모르는 새 봉건적 가족주의에 순응한 채 부당함을 견디는 것이 당연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노동조합을 의미 있게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데에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그동안 조직노동의 공단 조직화 사업이 내실 있게 추진되지 못했음을 강력히 지적한다. 공단 조직화를 추진하기 위해 구축했던 컨소시엄은 참여자들 간의 내부 갈등으로 인해 제대로 출발하지도 못한 채 유명무실해졌고, 기업지회마다 미조직사업 담당자를 선임하는 방식의 미조직위원회 제도는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한 의식화 교육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공단 조직화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뿐이라며 노동조합 조직화가 아닌 지역교섭이나 법제도개선 활동 같은 새로운 모델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활동가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이다. 공단 노동자 대다수가 연구소나 노동조합 선전물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동안의 미조직 사업이 광활한 황무지 어느 한 구석에 겨우 물뿌리개 한두 번 뿌려놓는 수준에 불과했음을 방증하고 있으며, 당사자가 주체로 나서지 않는 이슈파이팅이나 제도개선 요구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광장에다 의제를 던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저자가 던지는 해법은 ‘기다림의 미학’과 ‘노조 공급론’이다. 그동안 시화공단 조직화가 빛을 발하지 못했던 이유는 애초에 조직노동과 미조직 활동가들이 빛을 낼 수 있을 만큼의 노력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만나온 다수의 시화공단 노동자들은 비록 움직임이 느리고 더뎠지만 서서히 꿈틀대며 굴레 밖으로 한걸음씩 나오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잘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들 안에도 변화의 욕구와 역동성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직노동과 활동가들의 속도는 이들보다 너무 빨랐고 방향 또한 자기편의적이었다. 저자에게 있어 진정한 조직가란 자기 생각을 툭 던져놓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곧바로 실망하거나 포기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의 느리지만 분명한 꿈틀거림이 노동조합으로 한 발짝 더 가깝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한없이 기다리는 자’라 할 수 있다. 공단 조직화라는 빛 또한 어두운 방에서 전등 스위치를 누르듯 한순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른 새벽 여명이 스며들 듯 ‘더디게 찾아오는 것’이다. 마침내(始) 빛날(華) 것이란 이 책의 제목이 예고하듯, 이러한 기다림이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이고 쌓인다면 시화공단에도 노동조합이란 빛이 밝아올 것이란 희망이야말로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이 책의 진정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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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범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원장
‘한국 자동차산업 원하청 연결망 구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12년부터 금속노조 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다. 자동차산업, 산별노조 활성화, 작업장 숙련체제,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 등에 관하여 연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