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손자, 연산군을 내쫓다
조선 역사를 주도한 완산이씨(전주이씨) 밀성군파 백강 이경여 가문에서 임금을 보는 시각은 강한 군주 그리고 도덕성 있는 군주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왕이 허약하고 도덕성을 잃었다면 백성의 안위를 위해 교체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세종의 13번째 아들인 밀성군은 강력한 왕권으로 나라의 안정을 추진한 세조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또 밀성군의 아들이자 세종의 손자인 운산군은 실덕한 연산군으로는 종묘와 사직을 수호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과감하게 왕실을 대표하여 임금교체를 추진하고 성공시켰다.
신임사화때 희생된 명상 백강 이경여의 손자인 소재 이이명과 한포재 이건명은 경종과 영조 사이에서 누구에게 충성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선왕인 숙종의 고명(顧命)에 따라 영조를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피의 숙청을 당해 집안이 멸문의 지경에 이르기도 했으나, 가문에 일관되게 내려온 임금이 임금다워야 충성하고 선왕의 고명을 죽음으로 지켜야 하다는 원칙은 무너지지 않았으며, 이는 결국 영조·정조의 부흥시대를 여는 도화선이 되었다.
<출처 : 이상주, ‘세종대왕 가문의 500년 야망과 교육’>
세종대왕 후손의 500년 삶을 추적한 '세종대왕 가문의 500년 야망과 교육(이상주 저, 어문학사 발행)에 소개된 집안은 세종대왕의 13남인 밀성군의 자손이다.
왕족인 전주이씨는 123계파가 있다. 이중에서 세종대왕과 조선의 신데렐라로 불리는 신빈김씨 소생인 밀성군파는 그중 백강 이경여와 그 후손만으로 3대 연속 문형 대제학에 6정승 9판서를 배출해 조선 최고의 명문을 형성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전주이씨 중에 단연 으뜸이라는 의미로 '일밀성(一密城)'이라고 칭한다. 약 500만 명에 이르는 전주이씨 중에 밀성군파는 불과 1만9천여 명. 그만큼 초정예 엘리트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왕족인 이 집안이 출세를 했던 것은 의외에 가깝다. 왕족은 일반인의 생각과는 달리 출세가 쉽지 않다. 왕권에 위협이 될 왕족의 정치참여를 막는 제도 탓도 있었고, 세도정치를 하는 외척들의 견제 탓도 있었다. 그런데 밀성군파 백강가문은 세종에서 순종 때까지 500년 동안 조선의 역사를 줄곧 올곧게 주도했다. 이완용이 을사늑약을 체결할 때도 학부대신 이용태가 이에 적극 반대했으나 이완용이 왕따를 시켜 몰래 체결하였다. 그래서 이들의 역사는 조선 상류층의 역사이고 이 가문의 역사는 바로 조선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