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보살과 보현보살
袈湖闡提(가호천제)|선제사 주지
5.
그 후로 노장님(성철스님)은 해인총림의 대외적인 일에 대해서 대선사(광덕스님)와 의논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어떻게 보면 대선사는 해인총림의 부방장(?) 같은 역할을 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노장님과 대선사께서는 매우 밀접하게 불사를 의논했고 협력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두 분의 관계를 잘 아는 나로서는 더더욱 대선사를 의지했고 노장님께 말씀드리기 어려운 부분은 오히려 대선사께 먼저 말씀드려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그 당시 나는 무슨 일이든지 대선사께 먼저 여쭈어서 처리하리라 다짐했으며 그러한 나의 생각을 좌우명으로까지 생각하여 실천한 적도 있었다.
노장님께서는 해인총림을 중국 당대의 절정기에 도달했던 선문총림 수준으로 승격 발전시키는 것이 장차 한국불교의 중흥에 기초가 된다고 하시며, 모든 수행자들의 조석예불도 ‘선문일송’의 일과를 시행토록 하셨다. 그 일과는 ‘보현행원품’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예불대참회문’과 ‘능엄신주’ 그리고 ‘발원문’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때 마침 대선사께서 번역한 『보현행원품』이 출판되었을 때였다. 해인총림 방장이셨던 노장님께서는 불자들에게 항상 보현행원을 실천하라고 강조 하셨고 지도했다. 그리고 108배 참회예배를 권할 때 노장님께서는 대선사께서 번역한 『보현행원품』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말씀하시면서 노장님 스스로 그 유명한 ‘보현행원품 서문’을 직접 쓰셨다. 그 당시 노장님과 대선사의 관계는 모든 것을 부처님께서 미리 아시고 시킨 것처럼 착착 들어맞았다.
아무튼 『보현행원품』 출판을 크게 반기신 노장님께서는 해인총림에서 사용할 수행과 일과집을 제작하는데 대선사의 번역본을 그대로 원고로 사용할 것을 허락하셨다. 다만 ‘능엄신주’와 ‘발원문’을 더하고 노장님께서 지은 서문을 붙여서 일과집이 완성되었다. 바로 오늘날까지도 노장님의 지도를 받고 있는 승속 모든 수행 권속들은 한결같이 그때 만든 일과집에 의지하여 독송하며 수행하고 있다. 후일 그 고마움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뜻으로 노장님의 첫 법어집 판권을 불광출판부에 드리기도 하였다.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 더 있다. 한번은 백련암에 다니는 어느 불자가 입적하여, 그 유족들이 영가를 위한 법보시를 물어 왔을 때, 노장님은 즉시 대선사께서 번역 출간한 『법보단경』을 법보시하도록 일러주셨다. 노장님께서 만년에 직접 『돈황본 법보단경』을 번역하여 선문에서 읽도록 권하기도 했지만, 그때에도 수선자에게 대선사 번역의 『법보단경』이 수행의 지남(指南)이라 하시고 대선사께서 번역한 『법보단경』을 권하신 것이다. 이러한 노장님의 지극한 배려는 사형사제간의 견해와 뜻이 항상 일치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는 비록 사변(事邊)뿐만 아니라 이변(理邊)에도 항상 뜻을 같이한 증거이기도 하다. 양변을 초월하신 경지가 두 분 사이의 진정한 면모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욱 문수.보현 양대보살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6.
그 무렵 해인총림이 출범하여 초대 주지에는 지월스님이 담임하셨는데, 오래지 않아 지병으로 입적하시어 그 자리를 맡을 스님이 마땅하지 않았다.
그래서 노장님께서는 대선사께 해인총림 운영을 맡아줄 것을 청하는 일을 내게 하명하셨다. 나는 즉시 대선사를 찾아뵙고 해인사에 오실 것을 간청하였다. 그때 대선사께서는 경기도 남양주의 보현사로 거처를 옮기기 전, 서울 종로 대각사의 옛 법당 뒤편 구석의 좁은 방에서 불광 포교불사를 막 시작했을 때로 기억이 떠오른다. 대선사께서는 종단 일과 불광 포교불사 등 할 일이 많다고 간곡하게 사양하시면서, 그 대안으로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사형인 도광스님을 모실 것을 일러주셨다. 그래서 화엄사 주지로 계시던 도광스님을 해인총림 주지로 모시고 한때 총림을 운영하였다.
주지를 서로 하겠다고 아귀 다툼을 하는 작금의 현실에 비하면, 대선사의 고고하신 겸양을 마땅히 모든 출가자가 길이 본받을 사표로 기억에 남는다. 이 모두가 노장님과 대선사 두 분의 이심전심의 근본 뜻이었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가슴 아픈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한국불교 정화불사 이후의 조계종사는 분규의 연속으로 기록되듯이, 그간 종단에서도 노장님과 대선사, 두 분의 지혜로 종단분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은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흔히들 총무원이 둘로 나뉘어져 ‘조계사 총무원’이니 ‘개운사 총무원’이니 할 때였다. 종단이 양분되어 팽팽하게 대립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그래도 뜻을 가진 분들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지속적인 노력으로 새로운 해결책을 찾았다. 그러한 시도의 하나가 그 당시 해인사에서 열린 임시종회였다. 조계종 중앙종회가 반대편의 힘에 의해 매번 유희가 되자 해인사 임시종회 개최를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인사 임시 종회가 성원이 되지 않을 것으로 반대측은 추측하였으나 대선사께서 미리 며칠 전에 해인사 백련암에 도착해 있었으므로 성원이 되었고, 그 종회의 결정이 결국은 종단 화합의 계기가 된 것이다.
7.
그 후, 10.27 법난을 거치면서 노장님이 종정으로 추대되고 불교중흥의 기회를 갖게 된 것도 돌아보면 대선사의 공로가 컸다고 생각한다. 이 자리를 빌어 우선 대선사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물론 시간이 많이 흘러 때늦은 일이긴 하고, 또 두 분 어른들의 사이에 내가 끼어드는 것 같아 외람스러운 생각도 없지 않지만, 그 당시 어려운 상황을 다시 회상해 보니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 울컥 목적을 타고 올라옴을 느낀다.
노장님께서 종정으로 추대되어 10년의 임기를 마치고 다시 재추대되어 열반하실 때까지 종정으로 계신 것도 돌이켜보면 대선사를 비롯하여 문중 스님들의 적극적인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고 본다. 이 자리를 빌어 모든 용성 문도의 어른들과 대덕들께도 지극한 감사를 드려고 싶다.
노장님께서는 종정의 직을 맡고 있으면서도 가야산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큰 일은 항상 원로회 스님들과 중진 스님께 자문하셨고, 그때마다 대선사의 의견을 우선 존중하셨다. 이로 보면 노장님과 대선사, 두 분은 사형사제 이상의 관계였고 인간 세상의 친분 이상의 각별한 모습을 가지고 서로를 대했다. 다시 한번 문수, 보현 양대보살의 특별한 관계를 새겨보고 되짚어 본다.
이와 같이 선교에 두루 밝고 뛰어난 지혜와 실천수범으로 수많은 불자들을 전법 교화하신 대선사의 업적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는 일이기에, 다만 알려지지 않은 노장님과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에 몇 가지만 간략히 소개했다.
8.
종로 대각사의 옛 법당 뒤, 구석방 좁은 공간에서 세우신 대선사의 원력이 잠실 벌판 불광사에서 그 결실을 맺어 불광사 봉헌법회를 하던 날 내가 뵙는 대선사의 모습은 바로 보현보살의 화신, 그대로였다.
이제 노장님 가신지도 여덟 해를 맞았고, 대선사 떠나신 지도 어느덧 2주기가 다가오고 있다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과 허전함이 겨울바람처럼 내 가슴을 파고든다. 분명 한국불교는 두 큰 기둥을 잃었다. 아직도 종단 일각에서는 아집에 사로잡혀 본분을 망각한 출가자들의 자만으로 분규의 사태는 끊이지 않고 있다는 얘기가 왕왕 들린다. 그래서 서로 위하고 아꼈던 사양과 겸양의 미덕으로 종단의 앞날을 염려하시던 대선사 같은 분이 더욱 기려지고 간절해지는 시기이다. 자기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개인보다는 종단의 앞날을 먼저 걱정하시던 대선사, 헛된 지위나 이름에 연연하지 않으시던 대선사의 우뚝하신 수행은 오래도록 우리 불자들에게 교훈이 되고 귀감이 되어 이 시대의 횃불이 될 것이다.
대선사께서는 일찍부터 수행과 보살행에 몸을 돌보지 않으신 까닭에 육신의 불편을 안고서도 위법망구의 원력과 신심으로 보현행을 평생 실천하셨다. 그러한 대선사의 숭고한 원행은 이 시대 보현의 화신으로 불자들의 가슴에 오래 간직되고 기억될 것이다. 부디 대선사께서 어서 속환하시어 불광운동을 거듭 펼쳐 주시기를 간곡히 기도 한다.
끝으로 대선사의 고족인 송암 사제로부터 내가 기억하고 있는 노장님과 사숙님에 대한 지난 인연을 써달라는 편지를 받고 곰곰 생각하면서 며칠을 묵연히 보냈다. 나이든 사람은 지나간 과거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은 아직 오지 않는 미래에 산다고 했는데, 이미 나도 나이가 들었는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해 보게 되었고, 아무런 하릴없이 청산의 미덕을 음미하고 지내는 이즈음에 지난날을 돌아볼 서신을 뜻밖에 받았던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노장님의 경책 같기도 했다.
스승의 위업을 자기 출세의 발판으로 삼는 과욕이 스승과 자신을 함께 욕되게 하는 요즘 세상에, 송암사제야말로 참된 시자의 모습을 몸소 실천하는 것으로 느껴져 큰 감명을 받았다. 열반하신 스승님의 가르침을 애써 드날리고자 하는 제자의 고귀한 뜻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맺는다. 아무쪼록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져 우리나라 방방곡곡에서 광덕 대선사 같은 보현보살이 수없이 탄생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나무보현보살마하살.
신사년 정초 선제사 月窓에서
闡提 焚香 敬拜
광덕스님 시봉일기 7권 『사부대중의 구세송』 중에서
첫댓글 성철 큰스님과 광덕 큰스님과의 일화를 2주에 걸쳐 사경하였습니다. 늘 성철큰스님께서 광덕큰스님의 말씀을 우선으로 하셨다는 점으로도 큰스님의 행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성철큰스님의 법을 지키는 절에 가면 매일 예불시간에 보현행원의 10가지 행이 담겨있는 예불대참회문에 맞추어 절을 합니다. 옥천사에는 법당을 보현행원으로 장엄을 해놓았지요.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열심히 보현행원으로 절을 하여 일과수행을 하시니 신도님들이 단정하고 깔끔하시며 정갈함이 있으신데 대하기가 편하지 않은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공양 감사합니다..문수,보현보살!..내생명부처님 무량공덕생명.._()()()_
감사합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