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가풍
趙州云 若依根說法 自有三乘十二分敎 我這裏 只以本分事接人-조주어록
조주운 약의근설법 자유삼승십이분교 아자리 지이본분사접인
조주스님이 말씀하셨다. “만약 사람들의 근기와 수준에 맞추어서 이치를 이야기한자면 불교에는 3승 12분교가 있다. 그러나 나는 다만 본분사로서 사람들을 만날 뿐이다.”
해설 ; 선가와 교가의 차이점을 잘 나태 낸 말이다. 교가는 사람들의 근기와 수준을 맞춰가며 알맞게 이치를 설한다. 그것이 3승 12분교라는 다종다양한 가르침의 형식이다. 사람들의 근기가 여러 가지이므로 여러 가지의 교설이 자연 나눠지게 된다. 마치 유치원생과 초등학생과 중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차이와 같다. 그러나 조주스님 자신은 그렇지가 않다. 다만 본분사라는 인간의 본분을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그 본분에 들어가게 할뿐이다. 본분이 아니면 아예 입을 떼지 않는다. 이것이 선가의 가풍이다. 그러므로 선가를 자처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원칙을 따라야한다. 이를테면 꽃을 들어 보이든지 손가락을 세워 보이든지 할을 하든지 방을 쓰든지 오로지 본분도리로서 사람들을 맞이해야한다. 지저분하게 공이나 연기나 인천인과이야기나 하고 있으면 그것은 저급한 교가가 될 뿐이다.
인연
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 我佛大沙門 常作如是說-아함경
제법종연생 제법종연멸 아불대사문 상작여시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생기고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소멸한다. 우리 부처님 큰 사문께서는 항상 이러한 말씀을 하신다.
해설 ; 하늘, 땅, 사람 모두가 인연에 의해서 생겼다. 구름, 바람, 비, 물, 풀, 나무, 흙, 돌, 일체 산하대지와 삼라만상 모두가 인연으로 생겼다. 사람들의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들도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부귀도 명예도 행복도 불행도 역시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세존은 이런 이치를 발견하고 도를 깨달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늘 이런 가르침을 말씀하셨다. 실로 불교의 경전에는 연기의 이치에 대한 가르침이 무수히 등장한다. 모든 존재의 실상을 깨달은 안목으로 바라 볼 때 단지 인연에 의해서 잠간 거짓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표현으로는 현상 그대로가 공이요[色卽是空], 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사리불과 목건련이 바라문교를 믿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노란 가사를 입은 사람을 보았다. 그는 매우 품격이 있고 고상하였다. 그리고 이상한 복색을 하고 있었다. 사리불과 목건련은 그의 고상한 인품에 매료되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어떤 가르침을 배우며, 어떤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세존 석가모니라는 분을 스승으로 받들고 있으며, 그의 가르침을 배우며, 내가 입고 있는 이 옷은 가사라고 하며, 나의 법명은 마승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스승 석가모니는 무엇을 가르치기에 당신의 인품이 그렇게나 고상하십니까?” “저는 아직 그분께 귀의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깊이 알지를 못합니다.” “그렇지만 한마디 정도는 들려줄 수 있지 않습니까?” “예,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생기고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소멸한다. 우리 부처님 큰 사문께서는 항상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리불과 목건련은 곧 바로 세존께 인도되었다. 그동안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가르침을 버리고 부처님께 귀의하여 큰 제자가 되었다.
경전
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展開無一字 常放大光明.-채근담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종이나 먹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펼쳐보아야 글자 하나 없지만 항상 큰 광명을 발하고 있다.
해설 ; 경전이란 흔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기록하여 책으로 만들어서 법보로 삼아 불교의 삼보(三寶) 가운데 하나인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진정한 살아 있는 경전은 그것이 아니다. 사람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생명의 경전, 마음의 경전이다. 그 경전은 종이나 먹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펼쳐보아야 글자 하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를 않고 간단없이 보고 듣고 느끼고 한다. 헤아리고 분별한다. 삼라만상 모두를 알고 춥고 따뜻한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감지한다. 신령스럽게 알고 신기하게 안다. 잠을 잘 때도 쉬지 않는다. 이 경전이야말로 진정한 살아있는 경전이다. 생명의 경전이요, 진리의 경전이다. 이것이 불교의 생명이며 사람 사람들의 참 생명이다.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인 것이 그것을 들어 보인 것이며, 구지화상이 손가락을 세워 보인 것이 그것을 보인 것이며, 황병스님이 임제스님에게 세 번이나 죽도록 후려친 것이 그것을 후려친 것이며, 임제스님이 대우스님의 허리를 세 번 쥐어 밖은 것이 그것을 쥐어 밖은 것이다.
경전
此經甚深義 大衆心渴仰 唯願大法師 廣爲衆生說-청법게
이 경전의 깊고 깊은 이치를 여기 모인 대중들은 마음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원하옵노니 법사스님께서는 중생들을 위하여 널리 설하여 주십시오.
해설 ; 이 게송은 법사스님에게 법을 설하여 주기를 청하는 청법게(請法偈)다. 어떤 법사가 어떤 법을 설하든 관계없이 <이 경전의 깊은 이치를 대중들이 목말라하고 있다.>라는 말에 마음을 써야 한다. 이 경전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가지고 있는 경전이다. 종이나 먹으로 만들어진 경전이면서 아울러 생명의 경전, 마음의 경전이다. 생명의 경전, 마음의 경전을 스스로 설할 수 없으면 반드시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설하신 경전을 정직하게 설하는 것이 법사의 의무다. 대중들은 그것을 청한 것이다. 대개 설법이란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설하신 경전을 풀이하여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는 것이 설법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그 원칙에서 벗어나면 대중들이 목말라 바라는 마음에 어긋난다.
설법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소동파
개울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곧 부처님의 크나큰 진리의 설법이다. 그렇다면 울긋불긋한 산천초목의 모습은 어찌 청정법신 부처님의 몸이 아니겠는가. 하루 종일 시내물이 흐르는 소리 밤이 되면 팔만사천 게송이나 되니 이 이치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것인가.
해설 ; 설법 또는 법문이란 무엇인가. 통상적으로 말하면 진리, 이치, 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는 어떤 말씀이나 동작이나 또는 계기를 통해서 진리의 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을 설명하여 깨우치기 위해서 수많은 말을 한다. 그것을 기록한 것들이 경전이며 어록들이다.
그러나 소동파는 그 진리를 깨닫고 보니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나 그것을 기록하여 모아 놓은 것만이 결코 법문이나 설법이 아니라 바람소리, 시냇물소리, 시장에서 상인들이 떠드는 소리, 찻소리 등등 모든 소리가 법문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다. 심지어 유정무정이 움직이고 작용하는 모든 행위도 일체가 법을 설하고 진리를 설하는 법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법문을 토해내고 표현하는 모든 존재는 그대로가 저절로 청정법신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 푸른 산색이 청정법신 부처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실로 소동파는 우렁차게 흘러내리는 시냇물소리는 듣고 그와 같은 이치를 깨달았으며 역사적으로 무수한 도인들이 하나의 계기와 하나의 사건에서 깨달음의 눈을 떴던 것이다. 결코 어떤 말씀과 그 말씀을 기록한 팔만장경만이 법문은 아닌 것이다. 요컨대 언제나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항상 그와 같은 계기가 있게 되며, 또한 반드시 진리의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전법
假使頂戴經塵劫 身爲床座遍三千 若不傳法度衆生 畢竟無能報恩者-지론
가령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한량없는 세월동안 섬긴다 하더라도, 그리고 자신의 몸이 삼천대천세계와 같이 넓은 평상과 의자가 되어 부처님을 앉고 눕게 하여 받든다 하더라도,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여 사람들을 제도하지 못하면 끝내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리라.
해설 ;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선대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의 은혜에 의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된 것이다. 만약 성인들의 올바른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소나 되지 같은 동물들의 삶이나 다를 바 없으리라. 현재에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성인들의 가르침을 등지고 아무렇게나 사는 이들을 보면 동물들의 삶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대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오늘 날 그나마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성인들의 막중한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것이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불자들은 다른 세속인들과는 다른 생활을 하며 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 오로지 부천님의 가르침 덕택이다. 그렇다면 그 막중한 은혜를 갚아야 하는 것이 또한 사람의 도리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길인가. 그 바른 방법을 이 게송은 잘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부처님께 잘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하는가. 물질과 마음으로 큰 봉사를 아끼지 않는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부처님에 대한 봉사가 정말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 되는가. 깊이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거듭 말하지만 부처님의 막중한 은혜를 바르게 갚는 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배워서 다시 그 소중한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는 일이다.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는 일이 아니면 그 어떤 일을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수는 없다.
부처님 스스로도 부처님께 올릴 수 있는 갖가지 공양 중에 제일은 법공양이라고 하였다. 그 법공양이란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여 참되고 바른 이치로써 사람들에게 이바지 하는 일이다.
僧乎莫道靑山好 山好如何復出山 試看他日吾踪迹 一入靑山更不還-고운
중아,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라. 산이 좋은데 왜 다시 산에서 나오는가. 뒷날 나의 자취를 잘 지켜보시오. 나는 한번 청산에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
해설 ; 고운선생은 신라말기 중국에 가서 장원급제를 하고 중국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다시 신라에 돌아와서 한 때 한림학사를 지냈다. 기우러져 가는 신라의 국운을 뒤로하고 가야산에 들어가서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자신은 세상과 인생을 버리고 비장한 각오로 입산을 하러 가야산에 들어가는데 산 어귀 홍류동에서 산을 내려오는 스님들을 만났다. 산이 좋아 세상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서 산다는 사람들이 다시 산을 내려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은 시다. 그는 이 시를 짓고 가야산에 들어간 이후 다시는 세속에 내려오지 않고 뒷날 신선이 되었다는 말만 전해질 뿐이다. 그 징표로서 지금도 해인사에 고운선생이 꽂아 두었던 지팡이가 큰 나무로 자라있다. 해인사 건너편 산에는 그가 살았다는 고운암도 있다.
필자는 어려서 가야산 해인사에서 살았다. 강원을 거쳐 선방에 들어가서 이 시를 외면서 크게 깨닫기 전에는 산을 내려가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하였다. 깨닫기 위해서 모든 인간적인 삶을 모두 포기하였다. 그러면서 이 시를 반야심경보다도 더 많이 읊조리면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또 포기하였다. 깨닫기를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붓도 꺾어 버리고 그동안 많은 글을 기록해 두었던 노트도 불살라버렸다. 참으로 깊은 인연이 있는 시다.
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운문
봄에는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달빛이 좋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눈이 아름답다. 만약 쓸데없는 일이 마음에 남아 있지 않으면 그것이 곧 인간의 좋은 시절인 것을.
해설 ;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생활을 바란다. 그런데 그 행복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모두 다르다. 행복이 다르므로 그것을 얻는 방법도 다르다. 흔히 등이 따뜻하고 배가 부르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이도 있다. 또는 나물밥을 먹고 팔을 베고 누워있는 것으로 행복을 삼는 이도 있다. 또는 한 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가는 재산을 가지고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고,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다. 그리고 보면 행복이란 어떤 조건도 기준도 없는 것이고 스스로가 행복을 느끼면 되는 것인가 보다.
이 시는 춘하추동의 사계절의 변화를 잘 살펴 감상하고 그 자연의 변화에 따라 어떤 모습이든 그대로 받아드려 함께 동화되는 것으로 만족을 삼는 내용이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부질없는 일들을 마음에 두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부질없는 일이 무엇인가. 모든 일이 다 부질없다. 무엇이든 다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자연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연의 변화에 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들이 마음에 끼어 있다는 의미다. 인간의 좋은 시절은 다시 없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받아드려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가히 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鍊得身形似鶴形 千株松下兩函經 我來問道無餘說 雲在靑天水在甁
몸을 단련하여 마치 학의 형상과 같고, 천 그루의 소나무 아래서 두어함의 경전을 두고 있네. 내가 와서 도를 물었는데 아무런 말이 없고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하네.
해설 ; 어떤 학자가 도를 잘 안다는 선사를 찾아가서 "스님, 도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선사는 마우런 말이 없고 다만 손으로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가리키고 또 병 속에 있는 물을 가리키었다. 그러나 이 학자는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다시 물었더니 "구름은 저 하늘에 있고 물은 저 병 속에 있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학자는 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눈을 떴다. 그리고는 이 시를 지었다.
그 선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의 모습과 광경을 그리고 있다. 몸이 여위고 여위어 마치 학처럼 되어 있었다. 주변에는 천 그루의 노송이 둘러있고 옆에는 두어함의 경전을 두고 있다. 참으로 신선을 그린 한 폭의 그림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아무리 도를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거나 도를 너절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도는 첫째 조건이 간결하고 소박한 것이다. 그리고 저절로 그러한 것이다. 속기를 멀리 벗어던진 탈속한 모습니다. 또 그 끝을 모르도록 깊고 그윽해야 한다. 준엄하고 고고해야 한다. 우주가 갑자기 멈춰버린 듯한 정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변화가 없는 고정된 관념을 철저히 거부한다. 한 번은 구름을 가키고 한 번은 병을 가리킨 그 간결하고 소박함과 탈속함과 유주의 무게와 같은 정적은 차라리 사람의 숨을 멎게 한다.
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花開五葉 結果自然成-달마
내가 본래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꽃 한 송이에 다섯 개의 잎이 열렸으니 그 열매 저절로 익으리라.
해설 ; 달마스님은 진정한 불법을 전하여 사람들을 바로 깨우치기 위하여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인도에서 중국에 건너왔다. 그로부터 불법의 최첨단이며 진수라고 할 만한 선법이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달마로부터 혜가, 그리고 승찬, 도신, 홍인, 혜능으로 이어졌다. 그것을 한 송이의 꽃으로 본다면 육조혜능 이후에 다섯 종파가 번성하면서 불법이 중국천하를 뒤덮었다. 위앙종, 임제종, 조동종, 법안종, 운문종이 그것이다. 여기에 황용파와 양기파를 더하여 오가 칠종이라고도 한다. 그 교화활동의 결과가 자연스럽게 성취되리라는 예언을 하신 것이다.
달마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본래 이 땅에 온 것은 진리의 가르침을 전파하여 미혹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하는 교화활동의 결과는 다섯 종파가 중국천하를 뒤덮어서 저절로 잘 이루어지리라."하였다.
塵勞永脫事非常 緊把繩頭做一場 不是一番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황벽
번뇌와 망상들을 영원히 벗어 던지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대의를 굳게 잡아 한바탕 공부를 지어가라. 매서운 추위가 한번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해설 ; 인생을 바꾸는 일, 즉 생사해탈하는 일이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불법을 깨닫고자하는 문제에 목숨을 걸고 덤벼야 한다. 모든 인간적인 일을 다 포기하고 깨닫고자하는 이 일에만 마음을 써야 한다. 이일 저일 기웃거리면서 생사를 해탈하려한다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벼슬에 오르고 사업을 이루고자 하는 일도 목숨을 걸고 한다. 하물며 도를 이루고자 하는 일이겠는가.
한 송이의 향기로운 매화꽃을 피우는 일도 뼈에 사무치는 추위를 견디어 내야만 가능한 일이다.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지 못한 꽃들과는 그 향기가 사뭇 다르다.
황벽스님이 그와 같은 정신으로 사람들을 지도하였기에 천하의 임제스님 같은 분이 출현하였던 것이다. 불법의 대의를 물으러 온 사람에게 다짜고짜로 몽둥이로 20방망이를 후려쳤다. 무려 3번에 걸쳐서 60방을 퍼부었던 것이다. 당신들은 그렇게 정진하고 또한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지도하였던 것이다.
寧以砒霜殺人 毋以小乘敎人-보살계서
차라리 비상으로써 사람을 죽일지언정 소승법으로써 사람들을 가르치지 말라.
해설 ;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상과 주의 주장이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는 산다는 문제 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비상으로써 사람을 죽일지 언정 나쁜 사상과 잘못된 주의 주장으로 사람들은 오도하는 것은 더욱 잘못된 일이 된다. 비상으로 인명을 해치는 것은 한 번의 생명과 관계되지만 나쁜 사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세세생생 나쁜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소승의 가르침이란 불법에 붙어있는 외도라 하여 옛 사람들이 크게 경계하였다. 사람이란 한 생만을 사는 것이 아니고 세세생생 살아가는 일이기 때문에 좋은 사상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佛是衆生心裏佛 隨自根堪無異物 欲知一切諸佛源 但自無明本是佛-지눌
부처란 중생의 마음 속 부처다. 모두들 자신의 근기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따를 뿐 달리 다른 물건이 아니다. 일체 모든 부처님의 근원자리를 알고자 하는가. 다만 자신의 번뇌 무명이 본래로 부처이니라.
해설 ; 부처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사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만 그 부처의 모습과 작용은 각각 다르다. 각자의 그릇과 근기에 따라 그 나타나는 모습과 작용이 다르다. 마치 30볼트의 전구는 30볼트만치만 그 빛을 비추고 100볼트의 전구는 100볼트의 빛을 비추는 것과 같다. 1천 볼트, 또는 1만 볼트의 전구라면 그 빛도 또한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전기의 성질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 다른 바가 없는 성질을 전기라고 하듯 사람들의 근기 정도가 어떠하든 그 본성은 똑 같은 부처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처의 근본은 무엇인가. 사람들의 번뇌와 무명이 부처의 근본이다. 어둠이 밝음이고 밝음이 어둠이듯 어둡다고 생각하는 번뇌 무명이 곧 부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탐진치 삼독과 번뇌 무명을 가득이 가지고 있는 모습 그대로가 부처인 것이다. 세상을 비추든 비추지 못하든 그것은 본래의 부처와는 관계가 없다.
夜夜抱佛眠 朝朝還共起 起坐鎭相隨 語黙同居止
纖毫不相離 如身影相似 欲識佛去處 只遮語聲是
밤 마다 밤 마다 부처님을 안고 자고, 아침 마다 아침 마다 함께 일어난다. 일어나고 앉고 하는데 늘 함께하며, 말하고 침묵하는데도 또한 같이 한다. 터럭만큼도 서로 떨어져 있지 않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몸을 따르는 것과 같다. 부처가 간 곳을 알고 싶은가. 다만 이렇게 말을 하는 그것이라네.
해설 ; 불교는 부처가 되는 일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인사를 할 때도 불자들은 성불(成佛)하라는 말로 한다. 그렇다면 부처가 무엇이며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이 시는 부처가 있는 곳을 명료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사람 사람들이 매일 밤 부처와 함께 자고 매일 아침 부처와 함께 일어난다. 아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자고 일어나는 그 사람, 그 사실이 곧 부처인 것이다. 말을 할 때나 침묵할 때나 언제나 떠나 있지 않고 말하고 침묵하는 그것이 곧 부처라는 말이다. 따로 있어서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토록 찾고자 하는 부처가 이렇게 거리도 없고 시간도 없이 존재한다. 부처를 찾는 데는 조건도 없고 방법도 없다. 오히려 참선이나 염불이나 독경과 같은 조건이나 방법을 사용하면 더욱 멀어질지 모른다. 마치 물로써 물을 씻으려는 일이 되며 손으로써 손을 만지려는 일이 될 것이다.
靑梅禪師의 十無益頌 청매선사의 십무익송
心不返照 看經無益-청매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보지 않으면 경전을 읽어도 이익이 없다.
해설 ; 불교는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의 문제를 가르치는 종교다.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것도 마음을 깨달은 것이고 수행을 한다는 것도 마음을 닦는 일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모든 가르침인 경전이나 조사님들의 일체 어록이 모두 마음에 대한 가르침이다. 달리 말하면 마음으로써 마음을 가르치는 일이기 때문에 어떤 말씀도 마음에 돌이켜 비춰보아야 한다. 마음을 설명하는데 마음에 돌이켜 비춰보지 않는다면 그 마음을 설명한 경전을 아무리 읽어 보아야 이익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그래서 불교공부의 첫째 요건이 마음을 반조하는 일이다. 더욱 확실하게 표현한다면 불교는 처음도 마음이며, 중간도 마음이며, 끝도 마음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불교의 종지로 삼는다. 법이란 것도 마음의 법인 심법(心法)이다.
不達性空 坐禪無益-청매
성품이 공함을 사무쳐 알지 못하면 좌선을 하더라도 이익이 없다.
해설 ; 불교의 안목 중에서 특기할만한 내용 중에 하나가 모든 존재의 근본 바탕을 텅 비어 없는 공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의 본 성품도 공하고 몸의 본 성품도 공하고 우주와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의 근본 성품이 모두 공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그러므로 어떤 수행을 하던 먼저 모든 존재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아 알아야 한다. 존재의 본성이 공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 아는 견해가 선행되지 않고는 어떤 수행을 하던 이익이 없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등 모든 수행을 바르게 하고 또 그 수행의 결과가 있으려면 모든 존재의 본 성품이 텅 비어 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不信正法 苦行無益-청매
정법을 믿지 아니하면 고행을 하더라도 이익이 없다.
해설 ; 불교에서는 정법구현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불교를 선양하더라도 그 가르침이 바람직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처님의 훌륭한 정신을 오도하는 내용을 선전한다면 불교발전이 아니라 패망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 개인의 수행에 있어서도 정법을 잘 알고, 그리고 정법을 철저히 믿고 수행을 할 때 그 수행이 이익이 있다. 고행이란 더욱 정법을 모르고 하는 것은 외도들의 고행이 되고 만다. 좋은 결과를 희망하고 한 수행이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수행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청매스님께서는 경계한 것이다.
불교를 믿고 공부하려면 가장 먼저 불교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려면 그 가르침이 담겨있는 경전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과 아울러 그 외 다른 제자들의 깨달음의 가르침도 많이 읽어야 한다. 경전 속에는 수많은 깨달음을 얻은 선각자들이 계신다. 우리는 지금 이 말세라는 세상에 살고 있으나 경전과 어록을 통해서 훌륭한 성인들을 얼마든지 만나고 그분들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경전과 어록이 곧 부처님이요, 조사님들이다. 경전과 어록들을 통해서 불교의 정법을 바로 알고 바로 믿으면 어떤 수행을 하던지 큰 이익이 있을 것이다.
不折我慢 學法無益-청매
아만을 꺾지 못하면 불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다.
해설 ; 불교공부를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람다운 사람이란 저 혼자만 잘난체하는 자만하는 마음이 없고 모든 사람들을 다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길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그 어느 누구도 모두가 부처님이 아닐 이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출가수행을 위해서 불문에 처음 입문하면 행자라고 부른다. 어느 절을 가 보던지 그 행자들이 사는 방에는 반드시 걸려있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경하라는 하심(下心)이라는 문구다. 불문에 들어와서 맨 처음 배워야 할 공부가 이 하심이며,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지켜나가야 하는 마음가짐도 이 하심이다. 대중들과 더불어 살다보면 불교의 수많은 용어 중에서 이 하심이라는 말처럼 좋은 말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므로 저만 잘난체하는 자만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아무리 법을 배워야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경계하신 것이다.
欠人師德 濟衆無益
다른 사람들의 스승 노릇할 덕이 없으면 대중들을 거느려도 이익이 없다.
해설 ; 다른 사람들의 스승노릇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지혜가 있어야 하고,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릇이 커야 하고, 사람 됨됨이[爲人]가 남달라야 하고, 안목과 견해가 뛰어나야 하고, 건강이 좋아서 병이 없어야 하고, 마음이 넓고 너그러워야 하고, 덕이 있어야 한다. 한 단체의 장이 되는 데도 필요한 사항이며 국가를 경영하는 책임자가 되는 데는 반드시 갖춰야할 조건이다. 스승이 스승답지 못하고 장이 장답지 못하고 책임자가 책임자답지 못하면서 대중들의 위에 있거나 대중들을 거느리면 그 자신에게도 이익이 없으며 그를 따르는 대중들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문제를 야기하여 큰 혼란과 피해를 가져오게 된다. 남의 스승이 된 사람으로서 또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책임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살피고 또 살펴야 하며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할 일이다.
內無實德 外儀無益-청매
안으로 실다운 덕이 없으면 밖으로 위의를 세워도 이익이 없다.
해설 ; 균형과 조화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한 개인에 있어서나 가정이나 단체나 국가에 있어서도 이러한 조건은 모두 적용된다. 불문에서 수행을 하여 남의 사표가 되려는 입장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안과 밖의 균형과 조화다.
출가 수행자로서, 또는 승직자로서 안으로는 학식과 지혜와 덕을 지니고 밖으로는 그 신분에 알맞은 모양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아무런 학식과 지혜와 덕이 없이 겉으로만 수행자의 모습을 하며 당당하게 활보한다면 참으로 꼴불견이다. 옛 어른들은 속이 텅 비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오래된 누더기 옷을 기워 입고 있는 것으로 도덕이 높은 수행자인양 뽐내는 것은 개가 코끼리의 가죽을 둘러쓰고 코끼리인양 위장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안으로 학덕이 있고 밖으로 수행자다우면 그 모습은 우러러 보이고 아름다우나 안팎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밖으로만 뽐내는 것은 사람들에게도 또한 자신에게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 반드시 살피고 경계해야할 일이다.
心非信實 巧言無益-청매
마음이 진실하지 아니하면 말을 잘 하더라도 이익이 없다.
해설 ; 유교에도 반지르르한 말과 겉치장만한 외모는 어진 마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 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정직하거나 진실하여 믿음이 가면 아무리 말이 서툴고 표현력이 부족하더라도 그의 말은 들을만하여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진실치 못하고 성실성이 없어 보이면 말을 아무리 조리가 있게 잘 하더라도 왠지 감동이 오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느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본능적인 것이다. 그르므로 진실성이 없이 말만 잘하는 것은 서로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다. 말보다 그 마음이 우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輕因重果 求道無益-청매
원인을 가벼이 여기고 결과를 중히 여기면 도를 구하여도 이익이 없다.
해설 ; 불교는 모든 존재의 현상을 인과의 법칙에 의해서 생성하고 변화하고 발전하고 또 소멸한다고 깨달았다. 인과의 법칙이란 부처님이 없던 것을 만든 법칙이 아니다. 다만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실을 깨달아서 가르쳤을 뿐이다. 그래서 인과법칙에 의한 가르침에 감동을 받은 사리불과 목건련은 출가를 단행하였다. 그 때 먼저 출가한 마승이라는 스님에게서 전해들은 내용은 이러하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생기고 모든 것은 또한 인연에 의해서 소멸한다. 우리의 스승 부처님께서는 항상 이러한 이치를 말씀하신다."
불교가 존재의 현상들을 인연의 법칙에 의해서 생성하고 소멸한다고 본 것은 대단히 위대한 깨달음이다.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빗방울 하나, 봄이 오고 겨울이 가는 이 모두가 인연의 법칙에 따르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러한 이치를 깊이 통찰하여 사람의 삶에 적용시키고 따른다면 어떠한 성공과 실패에도 그리고 나아가서 늙고 병들고 죽는 일까지도 기뻐하고 슬퍼할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남을 원망하거나 탓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구하고 수행을 하는 문제에 있어서야 재론의 여지가 없다. 원인을 가벼이 여기고 결과만을 크게 바란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모든 존재의 현상은 일체가 인과의 법칙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滿腹無識 驕慢無益
뱃속에 무식만 가득하면 교만하여 이익이 없다.
해설 ; 우리말에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이 있다. 또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도 있다. 불교를 공부하는 데는 믿음과 이해를 강조한다. 알고 이해하는 문제는 수행하는 문제에 있어서 필수 요건이다. 알지 못하고 행동을 우선시하는 것은 마치 맹인이 무턱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아서 어디에 부딪힐지 모르는 것과 같고 또 어떤 낭떠러지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것과 같다. 위험천만이다. 그래서 아는 것과 실천이 함께 갖추어져서 조화를 이루는 것은 새의 양 날개와 같다고 하였다.
수행자로서 무식이 뱃속에 가득하여 연륜만을 내세우면서 교만을 부린다면 그 꼴이 어떠하겠는가. 아는 것도 없이 마음만 높은 것은 마치 주린 호랑이와 같다고 하였다. 가까이 가면 잡아먹힌다. 상상해보라. 굼주려 있는 호랑이에게 가까이 가면 잡아먹히듯이 무식하고 아상만 넘치는 사람을 가까이 하면 반드시 상처를 입을 것이다.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피해를 입는다. 청매스님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줘야하는 수행자에게 특히 경계하고 주의를 내리신 것이다.
一生乖角 處衆無益-청매
일생동안 자기의 고집을 버리지 못하면 대중과 함께 하더라도 이익이 없다.
해설 ; 괴각(乖角)이라는 말은 소의 뿔이 두 개가 가지런하게 나지 않고 두 뿔의 방향이 서로 다르게 뻗은 것을 말한다. 이렇듯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살면서 언제나 옳지도 않는 자기고집을 부린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고 자신에게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 사찰에서는 거의 모두가 대중생활이다. 대중생활을 하다보면 쓸데없는 개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진나친 자기 고집만을 부리는 괴각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 사람이 반드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충고를 하다가 안되면 체념하는 말이 있다. "괴각도 하나의 소임이다." 라고 한다. 한 철을 같이 살려고 결제하여 모이다 보면 무슨 일인지 괴각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어서 생긴 말이다.
다른 각도에서 해석해보면 대중들이 여럿이 함께 모여 사는 데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으니 자신의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지 말고 수용하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대중생활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와는 전혀 다른 그만의 독특한 개성을 수용하지 못하면 대중생활에서 소득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대중생활의 지침 제1조에 "밥을 먹는 발우에 똥을 싸더라도 가만히 있으라. 씻어버리면 그만이다."라는 매우 극단적인 조언을 하시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이 필요치 않는 괴각이 없는 대중생활이 바람직하므로 괴각을 부리지 말라. 괴각은 대중생활, 사회생활, 단체생활에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경계하신 것이다.
一鉢千家飯 孤身萬里遊 靑日睹人少 問路白雲頭
彌勒眞彌勒 分身百千億 時時示時人 時人自不識-포대화상
발우 하나로 집집마다 밥을 빌며 외로운 나그네 되어 만리를 떠다니네. 밝은 대낮에도 보이는 사람 없어 내 갈 길을 흰 구름에게 물어 본다.
미륵불로, 또 미륵불로 천 만억으로 분신하며, 언제나 사람들에게 나타나도 사람들은 미륵을 아는 이 없다.
해설 ; 포대화상은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전설의 인물이라고도 하고 또는 역사적 실재 인물이라고도 한다. 알려진 바의 특징은 큰 포대(布袋), 즉 큰 자루를 하나 메고 온갖 잡동사니를 다 집어 담고 다닌다고 한다. 그래서 포대화상이라고 한다. 또 아이들을 좋아하여 아이들이 항상 따라다니는데 그림에도 언제나 아이들이 함께 있다. 그래서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부인들은 이 포대화상의 그림이나 조각상을 잘 모셔두면 아이를 얻을 수 있다는 설화가 늘 따라다닌다.
그리고 중국에는 사찰의 첫 법당에 이 미륵불상을 모시거나 첫 마당에 크게 모시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그래서 중국에는 어떤 사찰을 가든지 맨 처음 예배드릴 수 있게 되어있는 것이 이 미륵불, 즉 포대화상이다. 요즘에는 우리나라에도 포대화상을 모시는 사례가 가끔 있다. 사찰의 맨 앞의 위치에 계시면서 사찰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웃음과 기쁨으로 맞이하고 떠나는 사람들을 모두 웃음과 기쁨으로 보낸다. 그가 누구든, 어떤 목적으로 사찰에 오든, 불자든 불자가 아니든, 악인이든 선인이든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기쁨으로 맞이하고 기쁨으로 전송한다. 부처님의 넓은 자비심을 이 포대화상은 가장 잘 표현하고 있으며 불교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전설적인 이 포대화상은 언제나 거지의 모습으로 그러나 넉넉한 몸에서 풍기는 웃음으로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인간의 온갖 선과 악을 포대에 다 집어 담으면서 외로운 여행을 계속 한다. 발우 하나로 집집마다 걸식을 하며 역행보살의 길을 가지만 어느 누구 하나 아는 이 없다. 얼마나 고독하였을까. 하루 종일 길을 물을 사람 하나 없어 흰 구름 붙잡고 억지를 쓴다. 내 갈 길이 어디냐고.
天下叢林飯似山 鉢盂到處任君餐 黃金白璧非爲貴 惟有架裟被最難 朕乃大地山河主 憂國憂民事轉煩 百年三萬六千日 不及僧家半日閑 悔恨當初一念差 黃袍換却紫袈裟 我本西方一納子 緣何流落帝王家 未生之前誰是我 我生之後我爲誰 長大成人纔是我 合眼朦朧又是誰 百年世事三更夢 萬里江山一局碁 禹疏九州湯伐桀 秦呑六國漢登基 兒孫自有兒孫福 莫爲兒孫作馬牛 古來多少英雄漢 南北東西臥土泥 來時歡喜去時悲 空在人間走一回 不如不來亦不去 也無歡喜也無悲 每日淸閑自家知 紅塵世界苦相離 口中吃的淸和味 身上願被白納衣 五湖四海爲上客 逍遙佛殿任君棲 莫道出家容易得 昔年累代重根基 十八年來不自由 山河大戰幾時休 我今撒手歸山去 那管千愁輿萬愁 -순치황제출가시-
천하 어디를 가나 모두가 총림이요, 먹을 밥은 산처럼 쌓여있어 발우만 들면 어디든 마음대로 먹을 수 있네. 황금도 흰 구슬도 귀한 것이 아니지만 오직 가사를 입기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짐은 산하대지의 주인으로서 나라와 백성들을 걱정하여 마음이 무거웠는데, 임금으로서의 백년 삼만 육천일이 절에서의 한가한 반나절만 못하더라. 지난 세상 한 생각 잘못하여 가사로써 임금의 황포와 바꿔 입었네. 나는 본래 서방의 한 수행납자로서 무슨 인연으로 제왕의 집에 태어났던가. 태어나기 전에는 누가 나였으며 태어난 이후에는 내가 또한 누구인가. 자라서 성인이 되어 겨우 나라고 하지만 눈을 감으면 아득하여라 이 또한 누구인가. 백년의 세상사는 하룻밤의 꿈이요, 만리의 강산은 한판의 바둑일세. 우임금은 구역을 나누어 나라를 잘 다스렸고, 탕임금은 걸주를 쳐서 나라에 평화를 가져왔다. 진나라는 여섯 나라를 통일시키고 한나라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자손들은 스스로 자손의 복이 있으니 자손들을 위해서 소나 말이 되지 말라. 예부터 그 많은 영웅호걸들 동서남북에 모두 흙이 되어 흩어졌네. 태어날 때는 기쁘나 죽을 때는 슬픈 것. 공연히 인간 세상에 와서 한바탕 돌다가네. 차라리 오지 말고 가지도 않는다면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을 것을. 나날이 맑고 한가한 맛 스스로 알뿐, 자욱한 먼지 세상 그 고통 떠낫도다. 입으로 먹는 것은 맑고 담박한 음식이요, 몸에 걸치는 것은 누더기뿐이로다. 다섯 호수 사방 천지 나그네 되어, 이절 저절 소요자재 마음대로 드나든다. 입산출가를 쉽다고 하지 말라. 세세생생 쌓은 인연 그 뿌리가 있어서다. 십 팔년의 왕 노릇이 너무나 힘들었네. 방방곡곡 일어나는 전쟁 그 언제 그칠런가. 나는 이제 손을 털고 산으로 돌아가니 천만가지 근심걱정 무슨 관계있을 손가.
해설 ;
菩提無發而發 佛道無求而求 妙用無行而行 眞智無作而作 興悲悟其同體 行慈深入無緣 無所捨而行檀 無所持而具戒 修進了無所起 習忍達無所傷 般若悟境無生 禪定知心無住 鑒無身而具相 證無說而談詮 建立水月道場 莊嚴性空世界 羅列幻化供具 供養影響如來 懺悔罪性本空 勸請法身常住 迴向了無所得 隨喜福等眞如 讚歎彼我虛玄 發願能所平等 禮拜影現法會 行道足躡虛空 焚香妙達無生 誦經深通實相 散華顯諸無著 彈指以表去塵 施爲谷響度門 修習空華萬行 深入緣生性海 常遊如幻法門 誓斷無染塵勞 願生惟心淨土 履踐實際理地 出入無得觀門 降伏鏡像魔軍 大作夢中佛事 廣度如化含識 同證寂滅菩提 -만선동귀집-
보리심은 발함이 없이 발하고, 불도는 구함이 없이 구해야 한다. 미묘한 작용은 행함이 없이 행하고, 참 지혜는 지음이 없이 지어야 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모두가 한 몸임을 깨달아야 하고, 사랑을 행하는 것은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깊이 이르러야 한다. 베푸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고 가지는 바 없이 계행을 지녀야 한다. 정진을 행하되 마음에 일어나는 바 없어야 하고 인욕을 익히더라도 상처 받는 바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반야지혜는 경계가 생멸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며 선정은 마음이 본래로 머묾이 없음을 아는 일이다.
몸이 없음을 알고 상호를 잘 갖추며 설할 것이 없음을 깨달아 법을 설해야 한다. 물에 비친 달그림자인 도량을 건립하며 본질이 공한 세계를 장엄하라. 환영(幻影)인 공양거리를 나열하여 그림자인 여래에게 공양 올리라. 죄의 본성이 공한 것을 참회하고 법신은 항상 머무는데 머물기를 청하라. 철저히 얻을 바 없음에 회향하고 복은 진여와 같음을 따라 기뻐하라. 피차가 텅 비어 없음을 찬탄하고 주객이 평등함을 발원하라. 그림자처럼 나타난 법회에 예배하고 길을 걷되 발은 허공에 두어라. 향을 사르되 생멸이 없음을 깊이 통달하고 경을 읽되 법의 실상을 깊이 깨달으라. 꽃을 올리는 것은 모든 것에 집착이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요 손가락을 퉁기는 것은 번뇌를 제거하는 것을 나타낸다. 메아리와 같은 덕목들을 행하고 허공 꽃과 같은 육도만행을 닦는다. 인연으로 생멸하는 성품의 바다에 깊이 들어가서 환상과 같은 법의 문에서 항상 노닌다. 본래로 물들 것이 없는 번뇌 끊기를 맹서하고 유심의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한다. 실제의 진리 위를 걸어 다니고 얻을 것이 없는 관조의 문을 출입한다. 거울 속의 마군들을 항복받고 꿈속의 불사를 크게 일으키며 환화와 같은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여 적멸의 보리를 다 함께 증득하리라.
해설 ;
目無所見無分別 耳聽無音絶是非 是非分別都放下 但看心佛自歸依 -부설거사-
눈으로는 보는 것이 없으며 분별도 없고 귀에는 들리는 소리 없어 시비가 끊어졌네, 시비와 분별을 모두 놓아버리고 다만 내 마음의 부처님을 보고 스스로 귀의한다.
해설 ; 부설거사는 신라 때 이러 이러........한 사람이다.
삶이 매우 소극적이기는 하나 인생을 깊이 살아 본 사람이라면 부설거사의 이러한 자세를 충분히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인간의 삶의 역사란 예나 지금이나 모두가 사사로운 욕심을 앞세우고 진실과 의로움을 은폐하는데서 오는 시비와 분별과 모함과 투쟁과 살상이 난무하는 광장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스스로 인생을 중도에서 포기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면 어떤 마음으로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까. 그 누구도 못하는 일을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로잡을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다. 길은 단하나, 세상의 시비분별과 보고 듣는 일을 떠나서 자기 자신 마음의 부처님 세상에서 행복과 평화의 길을 모색하는 일이다. 밖으로 향하던 눈을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여 자기 마음속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나 아닌 바깥세상을 바꾸려고 아무리 노력을 기우린다 하더라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바뀔 때 세상도 달리 보인다. 부설거사의 이 한마디 말 속에 인생사와 세상사를 다 설명하고 있으며 그 살아가는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법구경
온갖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라. 그 마음을 스스로 텅 비우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이다.
해설 ; 불교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게송이다.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매우 알맞은 답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 문에 들어가는 입구에 써서 세워져 있는 것을 흔히 볼 수가 있다. 성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 사람들을 잘 가르쳐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면 반드시 모든 사람들을 이렇게 선을 행하고 악을 짓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 바른 길이다. 세상이 평화롭지 못하고 억울한 일, 불행한 일이 많은 것은 천재지변도 있지만 사람들이 짐짓 만들어서 생긴 것이 대다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가 악한 일을 하지 말고 선한 일만 한다면 세상은 아름답고 행복하리라.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채우려고 이 순간도 인간은 끊임없이 숱한 음모와 투쟁과 살상을 저지르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어쩌면 악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수많은 성인들이 출현하여 세상을 바꿔보려 했지만 참으로 역부족이다.
이 글에는 조과 도림선사와 백낙천의 이야기가 전한다. 천하가 다 알아주는 당시의 대문장가인 백낙천이 도림선사가 법력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먼 길을 찾아와서 불교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물었는데 이 게송으로 답을 하였다. 그랬더니 백낙천은 그런 말은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안다. 라고 하자 도림선사는 "세살 먹은 아이도 다 알지만 80세를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렵다."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겼다. 실로 말은 쉬우나 실천하기는 그토록 어려운 것인가. 그래서 세상은 아직도 이렇게 불이 타는 집 속이며 고통의 바다인가보다.
自歸依法歸依 自燈明法燈明 自洲法洲-아함경
자신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라.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자신을 편히 쉴 곳으로 삼고 법을 편히 쉴 곳으로 삼아라.
해설 ; 이 법문은 어쩌면 부처님께서 가장 많이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감수성이 남다른 소년으로 성장하면서 인간들의 온갖 불행을 보고 듣고 하면서 결국 어디에도 의지할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근본적인 불행은 나 아닌 다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끝내는 출가의 길을 나섰다. 물론 깨달음의 내용이 그렇기도 하지만 교화를 펴는 도중에 이 세상을 먼저 떠나는 제자들도 많았다. 제자들이 떠날 때마다 함께 수행하던 남은 제자들이 비통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부처님은 언제나 이 법문을 하셨다. 그리고 그 법문은 곧 자신을 향한 법문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 하라. 그리고 다른 무엇에도 귀의하지 말라.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그리고 다른 것은 등불로 삼지 말라. 자신을 편히 쉴 안식처로 삼고 법을 편히 쉴 안식처로 삼아라. 그리고 다른 것을 편히 쉴 안식처로 삼지 말라.
妻子眷屬森如竹 金銀玉帛積似邱 臨終獨自孤魂逝 思量也是虛浮浮 朝朝役役紅塵路 爵位纔高已白頭 閻王不怕佩金魚 思量也是虛浮浮 錦心繡口風雷舌 千首詩輕萬戶候 增長多生人我本 思量也是虛浮浮 假使說法如雲雨 感得天花石點頭 乾慧未能免生死 思量也是虛浮浮 -부설거사 사부시-
처자와 권속들이 대숲처럼 많이 있고 금은보화와 비단들도 언덕처럼 쌓였는데 죽음에 다다르니 나 홀로 가는구나. 생각하면 생각수록 허망하기 뜬구름일세. 매일 매일 세상사 속에서 시달리다가 벼슬이 겨우 조금 높아지니 머리는 이미 백발이네. 염라대왕은 벼슬이 높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생각하면 생각수록 허망하기 뜬구름일세. 비단결 같은 마음과 훌륭한 말솜씨와 뛰어난 문장과 만승의 제후라도 다생토록 아만만 높이는 근본이어라. 생각하면 생각수록 허망하기 뜬구름일세. 가령 설법이 구름 같고 비 내리는 것 같아서 하늘에선 꽃비가 내리고 돌이 점두를 하더라도 온전하지 못한 지혜로는 생사를 면할 수 없네. 생각하면 생각수록 허망하기 뜬구름일세.
해설 ; 불교에는 인생이 무상하고 세상사가 무상하다는 내용의 말씀은 대단히 많다. 불교에서 발심한다는 것은 첫째 무상한 세상사를 버리고 영원한 출세간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근본 취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신라의 부설거사가 지는 이 사부시(四浮詩)는 7언 절구가 네 개로 되었고 끝에는 뜰 부[浮]자로 운을 달았다고 해서 부쳐진 이름이다. 형식도 잘 되었지만 그 내용이 인생사의 무상을 노래한 것으로는 제대로 잘 갖추고 있어서 인구에 많이 회자된다.
처자와 권속들, 금은보화들, 그리고 높은 벼슬들이 죽음 앞에는 모두 아무런 쓸데가 없다는 뜻이다. 더욱 비단결 같은 마음씨나 훌륭한 말솜씨나 뛰어난 문장은 결국 사람들의 아만만 높이는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나아가서 출가 수행하여 경전 공부를 많이 하고 설법을 잘하여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돌이 점두를 하는 지극히 감동적인 법문을 하더라도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면 생사해탈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무서운 경계를 하였다.
경전에는 부처님이 설법을 할 때 꽃비가 내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중국에는 어떤 스님이 정법을 잘 설하였으나 당시의 대중들이 인정을 하지 않으므로 돌 너들에 가서 다시 법을 설하였다. 그랬더니 돌들이 고개를 끄덕여서 점두를 하여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소주 호구산 공원에 가면 지금도 그 점두석이 있어서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應無所住 而生其心-금강경
응당히 마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해설 ; 사람들의 마음은 본래 어디에 머무는 바가 없는 것이 그 특색이며 장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걸핏하면 어디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물질이나 일이나, 명예 등 다섯 가지 욕망을 중심으로 온갖 것에 머물고 집착한다. 머물고 집착하다보면 더 머물고 더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 집착의 대상은 그대로 있어주지를 않고 수시로 변화하고 급기야는 떠나게 된다. 모든 것이 유동성이므로 집착하는 마음이나 집착의 대상이나 모두가 변화하고 흔들린다. 그 변화하고 흔들리는 것과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목하면 문제가 발생하고 그 문제는 곧 인간의 고통을 불러온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이 그 본래의 성질인데 그 본래의 성질대로 따르지 못하고 어디에 머물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다. 건강의 문제에 있어서는 언제나 건강하기를 바란다. 젊음에 있어서는 언제나 젊기를, 명예에 있어서는 더욱 더 명예가 올라가기를, 경제적 부에 있어서는 언제나 늘어나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뜻하는 바대로 되지 않고 변화무쌍한 것이 모든 존재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은 마음의 본령대로 반드시 머물지 말고 그 변화의 실상을 따라서 그 마음을 내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모든 문제와 고통도 자연히 사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육조 혜능스님은 출가하시기 전에 나무를 팔려갔다가 어떤 객주 집에서 금강경의 이 구절을 우연히 듣고 그 순간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출가를 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고 제도하게 된 역사가 있다. 그 때 이 구절을 듣고 마음이 밝아진 것이 곧 견성성불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뒤에 알았다. 마음의 이치를 확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열반경
모든 것은 무상하며 이것은 생멸의 이치다. 생과 멸이 다 소멸하고 나면 적멸한 것이 즐거움이니라.
해설 ; 이 게송은 열반경의 사구게(四句偈)라 한다. 사구게란 한 경전의 뜻을 요약하여 네 구절의 시형식으로 나타낸 글을 말한다. 열반경은 세존이 일생을 교화하시다가 열반에 드시는 과정과 그 광경들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그리고 열반의 의미와 열반을 통해서 사람들이 깨달아야할 내용들을 가르쳐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한 가르침이다.
특히 이 사구게는 세존의 전생에 한 구절의 가르침을 얻어 듣기 위해서 위법망구(爲法忘軀)하는 정신을 잘 나타낸 이야기가 전한다. 설산동자라는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수행을 위해 여기 저기 산천을 유행하다가 어느 험한 산 바위 밑에 이르러 쉬고 있었다. 그 때 조용히 들려오는 진리의 가르침 반 게송이 있었다. "모든 것은 무상하며 이것은 생멸의 이치다[諸行無常 是生滅法]." 설산동자는 이 말을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다음의 구절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다 못해 소리를 질렀다. "누구신지는 모르나 그 다음의 구절을 마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한참 후에야 나찰귀신이 나타나서 "그 법구는 내가 부른 노래인데 다음 구절을 말을 하려니 배가 고프고 힘이 없어서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소." "그렇다면 음식을 제공하고 법을 듣고 싶은데 무엇을 드시겠소." "나는 나찰귀신이라 살아있는 사람의 뜨거운 피만 먹소." "그렇다면 법을 듣기 위해서 내가 그것을 공양하리다. 그런데 내가 듣고 죽어야지 죽은 뒤에는 설해줘야 소용이 없으니 먼저 설해주시오. 약속은 지키리다." 이렇게 먼저 듣고 난 뒤에 죽어서 뜨거운 피를 공양드리기로 하고 들은 것이 다음의 구절이다.
"생과 멸이 다 소멸하고 나면 적멸한 것이 즐거움이니라[生滅滅已 寂滅爲樂]." 이 게송을 듣고 난 설산동자는 깨달음을 이루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혼자만 알고 목숨을 마치기에는 아까운 생각이 들어 여기 저기 바위벽에다 써서 두고 높은 바위에 올라가서 몸을 날려 나찰귀신에게 공양하였다. 육신으로써 법공양을 한 것이다.
이런 경우 진리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또는 그 가르침을 널리 전하기 위해서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고 공양하고 희생하는 일을 위법망구정신이라 하여 불교에서는 가장 가치 있고 위대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칭송한다. 세존은 그와 같은 생을 수없이 거듭하였다고 한다. 역대 조사스님들도 그렇게 사신 분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여기서부터 불교의 제행무상이라는 말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모든 존재는 늘 변화를 거듭하여 항상 그대로 있어주지를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존재의 어쩔수 없는 법칙이며 존재원리이다. 우리들 마음에서 일어나고 소멸하는 것으로부터 우주와 삼라만상 모두가 한결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생멸변화를 인식하는 우리들 마음에서부터 그 생멸변화가 사라지고 적멸한 자리, 즉 생멸변화 속에서 본래로 공적한 마음자리를 수용할 때 억지로 표현하자면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卽心是佛 非心非佛-마조
현재의 이 마음이 부처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해설 ; 마조스님은 이 한마디로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대변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었지만 특히 법상(法常)스님을 깨우쳐 준 것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다. 평소에 마조스님은 "현재의 이 마음이 부처다." 라고 가르치셨고 이 마음을 알면 모든 공부를 다 한 것이라고 하셨다. 법상스님은 마조스님 회상에서 그 법문을 듣고는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마음을 찾아서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곳에 가서 지내고 있었다. 몇 해가 지난 뒤 마조스님은 다른 제자를 시켜서 법상스님의 공부를 점검하였다.
법상스님을 찾아간 제자가 말하기를, "스님은 여기서 무슨 공부를 하며 어떻게 지내십니까?" "지난 날 마조스님이 '현재의 이 마음이 부처다[卽心是佛].'라고 하여 그렇게 알고 살 뿐입니다." "마조스님의 요즘 법문은 다릅니다. 요즘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하십니다. "그 노장이야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하든 말든 나는 현재의 이 마음이 부처다."라고 하였다. 제자는 들은 대로 가서 마조스님에게 말씀드렸더니 마조스님은 "매실이 참 잘 익었구나."라고 하였다.
법상스님이 사는 그 산은 마침 이름이 대매산(大梅山)이다. 그 산 이름을 빌어 법상스님의 도가 높은 것을 인가한 것이다. 그 후 법상스님을 <대매 법상>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음도 그 물건이고 부처도 그 물건이다. 마음도 아니라고 해도 그 물건이고 부처도 아니라고 해도 그 물건이다. 일물천명(一物千名)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그 한물건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觀心一法 總攝諸行-달마
마음을 관하는 한 가지 법이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한다.
해설 ; 마음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하다. 일체제불과 역대조사가 모두 마음을 가장 중요한 근본으로 말씀하셨다. 경전과 어록이 모두 마음을 설명하여 마음을 깨닫게 한 가르침이다. 불교의 수행이란 것도 이 마음을 깨달으면 끝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근기와 취향들이 갖가지이다 보니 그 마음을 깨닫는 방법을 설명한 것도 여러 가지다. 수기설법(隨機說法)이라 하여 모두가 다른 근기들을 따라 그 근기에 알맞게 맞추어서 말씀하시다 보니 흔히 말하는 팔만사천의 각각 다른 가르침이 있게 된 것이다.
인도에서 중국에 불법을 전하려고 오신 달마스님이 처음 중국의 불교를 보니 여러 가지의 가르침은 있으나 정곡을 찌르는 명쾌한 가르침이 보이지 않아서 새로운 기치를 들고 나온 것이 이 "마음을 관하는 한 가지 법이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한다."라는 것이 다. 그 후 중국의 불교는 달마스님의 이 명쾌한 가르침을 따르는 이가 많아졌다. 그 계통을 우리는 선종이라 한다. 달마스님이 동토불교의 초조가 되고 제자인 혜가(慧可)스님이 제2조가 된다. 3조와 4조 5조를 거치면서 이 가르침은 차츰 왕성하게 일어나서 불교에서 보편화가 되기에 이르렀다.
마음을 관하는 한 가지 법이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한다는 이 가르침은 만고에 명언으로 빛나고 있다. 그 이후 수많은 조사들은 하나같이 마음을 깨닫고 마음을 설명하고 마음을 노래했다. 그리고 마음을 중심으로 하여 설해진 대승경전들도 새삼 그 빛을 발하게 되었다.
실로 불교에는 다양한 수행법이 있다. 근기가 각각 다르다 보니 자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마음을 관하는 한 가지 수행이 가장 근본이 되며 모든 수행의 우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다른 수행법도 모두 이 마음을 관하는 일과 관련지어서 행해져야 한다.
卽今問我者 是汝寶藏 一切具足 更無欠少-마조?
지금 나에게 묻는 사람이 그대의 보물창고다. 일체가 다 구족하여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해설 ;
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是-장경각주련
원각의 도량이 어디던가. 지금 삶의 이 자리가 곧 원각이네.
해설 ; 이 구절은 해인사 장경각 입구에 걸려있는 주련이다. 장경각에는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모든 가르침이 총 집결되어 있는 곳이다. 그 많은 가르침 중에서 가장 빼어난 말씀을 선택하여 대표로 삼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팔만사천 법장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씀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대단히 함축적이고 중요한 말씀이다.
원각도량이란 액면대로 보면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한 장소를 말하는 것 같으나 실은 부처님의 깨달음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말씀의 뜻을 살려 표현 하자면 "부처님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현재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라네."라고 바꾸어 볼 수가 있다. 팔만장경은 깨달음에 대해서 무수한 설명을 한다. 설명을 사람들의 수준과 근기에 따라 너무 많이 하다 보니 본래의 뜻과 어긋나서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 것도 많다. 그래서 경전을 읽으려면 엉뚱한 다른 길을 가기 쉬우니 반드시 이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말씀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다면 아무리 경전을 많이 읽어도 해로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란 현재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하든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호흡을 내쉬고 들여 쉬고 하는 이 사실 그대로다. 그것이 곧 사람의 삶이며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곧 사람의 삶이다. 현금의 생사란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 사실을 말한다. 그래서 이 살아가는 사실이 곧 원각도량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현재 살아가는 이 사실을 떠나서 달리 깨달음을 찾으면 십만 팔 천리나 어긋나 버린다. 불교를 공부하고 깨달음을 위해서 정진하는 모든 이들은 반드시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뜻으로 장경각 입구에 걸어두어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菩堤自性 本來淸淨 但用此心 直了成佛 -육조단경-
깨달음의 자성이 본래 청정하니 다만 이 청정한 마음을 쓰면 곧바로 성불이니라.
해설 ;
捲箔秋光冷 開窓曙氣淸 -금강경오가해-
발을 걷어 올리니 가을빛이 차고 창문을 여니 새벽기운이 맑다.
해설 ; 우리나라는 고려에 와서 중국의 임제종의 선법을 전승하여 온 뒤로 선종이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교(敎)불교든 선(禪)불교든 거의 멸절의 위기에 까지 이르렀으나 다행히 마지막에 경허(鏡虛)라는 걸출한 선승이 있어서 다시 선불교를 일으켜 세웠다. 또 근년에 와서 다시 선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선원도 전국에 많이 세워졌다. 매철 마다 선원에 입방하여 좌선생활을 하는 이들이 스님들만 2천여 명이 넘을 정도이다.
불교라는 것도 2천 6백여 년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각 방면으로 많은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그 중에서 선불교는 이 시대에까지 발전하여 온 모든 불교 중에서 가장 첨단 불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렇게 가장 첨단의 불교라고 표현하는가하면 선을 하는 선심(禪心)에는 다른 불교에서 엿볼 수 없는 대단한 정신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개된 게송은 그 선심의 일면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인적이 끊어진 깊은 산 양지바른 곳에 아담하고 간결한 선실이 하나 있다. 계절 따라 풍광의 변화는 있을지언정 일년 내내 속된 사람도 보이지 않고 속된 일도 일체 일어나지 않는다. 여름에 쳐 두었던 발을 걷어 올리니 어느새 가을빛이 차게 느껴져서 가을이 온 것을 알뿐이다.
한 밤 내내 선정에 들었다가 문득 창문을 여니 이른 새벽이다. 산사의 새벽기운이 너무 맑아 가슴을 파고든다. 참으로 간결하고 소박한 삶이다. 탈속 그 자체다. 시중에서 살아도 이런 마음가짐과 생활모습이라면 그대로가 선생활이다. 굳이 산 속에 가서 살아야만 선생활이 아니다. 더 깊은 산 속에 선원을 세우고 선원이라는 명패를 걸어놓고 살더라도 이와 같은 마음, 즉 선심이 없으면 그것은 선이 아니고 선생활이 아니다. 선은 무엇을 목적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 선심으로 사는 삶일 뿐이다. 선을 하는 사람들은 이 시와 같은 소박하고 간결하고 탈속한 삶이 좋아서 그렇게 산다. 그러므로 참 선객들은 개울물에 노니는 물고기들이 물속에 비친 달빛을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선심으로 사는 선불교를 최첨단 불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莫道無心云是道 無心猶隔一重關-십현시
무심을 일러 도라고 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이 막혀있다.
해설 ; 선가에는 오직 무심으로 으뜸을 삼는다는 말도 있다. 무심이란 일체의 번뇌와 망상심이 없다는 말이다. 번뇌와 망상이란 선한 마음의 반대인 악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심악심 모두를 일컫는다. 그렇다고 무정물인 목석과는 또한 엄연히 다르다. 사람의 마음을 무엇이라고 한 가지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공적하여 텅 빈 상태를 마음의 본 모습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바탕이 꽉 차 있지 않고 텅 비어 있으므로 어떤 마음이든지 일으킬 수 있고, 일으켜서 채울 수도 있다. 이미 어떤 마음이든지 꽉 차 있으면 다른 마음이 자리를 차지하기가 어렵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어야 한다. 일체가 부정당한 자리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인 무심을 귀중하게 여기고 높이 숭상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겹의 관문이 막혀있다는 말은 가만히 살펴보면 마음이란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본 모습이 아니라, 그 텅 빈 데서 신령스럽게도 보고 듣고 감지하는 능력이 작용하고 있다. 선악을 사량 분별하고 이해타산을 하는 그런 마음 작용이 아니라, 사량 분별이 떨어진 상태에서 신령스럽게 보고 듣고 감지하는 작용이다. 그것을 공적한데서 신령스럽게 안다하여 공적영지(空寂靈知)라 하고, 신비하게 감지한다 하여 신해(神解)라 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유하자면, 거울은 아무런 사량 분별의 마음이 없다. 그런데 사물이 가까이 오면 사물이 생긴 모습대로 사심 없이 그대로 다 비춰준다. 악한 사람이라고 비추지 않고 착한 사람이라고 다 비춰주고 하는 일은 없다. 앞에 오는 즉시 비춰주고 앞에서 떠나면 즉시 비추지 않는다. 사물이나 사람의 종류에 따라 흔적이 남는 법도 없다. 텅 비어 공적하면서 사심 없이 신령스럽게 작용하는 것이 마음의 본령이다. 흔히 말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도 그러한 뜻이다. 그런데 무심하기도 대단히 어렵지만 무심하기만 하다면 그것은 아직 한 겹의 관문이 막혔다고 할 수 있다.
信如水淸珠 能淸濁水故 -유식론-
믿음이란 물을 맑게 하는 구슬과 같다. 능히 흐린 물을 맑히기 때문이다.
해설 ;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믿음과 같이 소중한 것도 없지 않을까 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서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세수를 하고 식사를 하고, 출근을 하여 하던 일을 하고, 다시 집으로 퇴근 하는 등등 일이 모두 믿음에서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의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서로의 믿음이 없으면 그 분위기는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
더구나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성인을 믿고 성인의 가르침을 믿고 그 가르침대로 사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일찍이 성인들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사람들의 생활이 어떠했을까. 개나 소나 돼지 같은 동물들의 생활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사나운 이리나 호랑이나 여우같은 생활이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보다도 천배 만배 뛰어난 영혼을 가진 성인들의 밝은 생각과 올바른 가르침이 있어서 그래도 세상은 이쯤에 머물고 있으며, 사람들은 그나마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사나운 동물들의 세상을 성인들의 가르침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관계로 이정도 라도 맑게 만들고 살아가고 있다. 사람은 태어난 모습 그대로 두면 그야말로 혼탁한 물이다. 저 아프리카 오지의 사람들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원시인들의 삶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인들을 믿고 성인들의 가르침을 믿고 살아가는 일은 그야말로 흐린 물을 맑게 하는 구슬의 역할과 같다.
또한 믿음은 대지와 같다는 말도 있다. 대지에서 모든 식물이 자라고 사람은 대지위에서 건물을 세우고 삶을 영위한다. 믿음은 지팡이와 같다고도 한다. 늙고 몸이 불편한 이는 지팡이를 의지하여 길을 간다. 사용해 본 사람이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또 믿음은 큰 배와 같다고도 한다. 아무리 무거운 짐도 배에다 실으면 바다를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다. 이와 같이 성인을 믿고 성인의 가르침을 믿는 일은 사람이 보다 사람답게, 그리고 의미 있고 보람 있게 살아가는데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른다.
風送水聲來枕畔 月移山影到窓前-지홍선사
바람이 부니 물소리 베개 맡에 들려오고 달이 기우니 산 그림자 창 앞에 이른다.
해설 ; 어떤 사람이 지홍(智洪)선사에게 선의 미묘함에 대하여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참으로 아름답고 미묘하기 그지없다. 바람소리 타고 귓전에 들려오는 개울 물소리를 듣는 정적은 고요의 극치다. 달이 조금씩 기울 때 마다 옮겨가는 산 그림자가 어느덧 창 앞에 이른 것을 감지하는 그 섬세한 관찰은 선심(禪心)의 그윽하고 유현함을 다한 것이다. 선심의 고요함이란 꽉 막혀서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가녀린 바람결에 실려 오는 개울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고요함이다. 보살은 코끼리가 항하강을 건너는 물소리를 설산에 앉아 선정에 들어 있으면서 역력히 듣는다고 한다. 선객은 선방에 앉아 좌선을 하면서 마당에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를 다 들어야 한다. 몇 마리가 기어가는 것 까지 알아야 한다. 선정의 고요함이란 그쯤 되어야 선이라고 할 수 있다.
달빛이 물속을 스며들어도 그 흔적 보이지 않고, 대 그림자가 뜰을 쓸어도 먼지가 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어찌 보면 귀신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귀신들의 일 같지만 선을 하는 마음은 이렇게 투명하다. 달이 기울어 가니 산 그림자 창 앞에 이른 것을 환하게 볼 수 있는 것도 혼몽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꿈속의 일이다. 앉기만 하면 망상과 혼침으로 시간을 죽이는 그런 생활로는 꿈속의 일이 아니라 꿈에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극도의 정적과 깊고 유현한 선심이 잘 드러난 시다.
江月照 松風吹 永夜淸霄何所爲 -증도가-
강에 달은 밝게 비치고 노송에 바람이 불어온다. 밤은 길고 하늘은 맑은데 무엇을 하랴.
해설 ; 저절로 그러한 상태는 선심(禪心)의 중요한 하나다. 이 시는 사람도 자연도 시간도 공간도 모두가 철저히 저절로 그러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선심의 저절로 그러함이 잘 나타나 있다. 뼈 속까지 파고드는 맑고 밝고 고요하고 한가함이다. 선의 향과 맛은 첫째 조건이 이와 같아야 한다.
선은 하나의 맑은 거울이다. 온 우주와 삼라만상을 환하게 비춘다. 사람의 마음 상태와 그 삶을 또한 환하게 비춘다. 드러나지 않는 사물이 없고 드러나지 않는 일이 없다. 대낮의 밝음보다 한 밤의 밝음이 더욱 깊이가 있는 밝음이기 때문에 한 밤의 맑은 하늘로 표현한 것이다.
무엇을 하랴. 할 일이 없다. 그래서 자고로 선사들은 일이 없는 사람, 즉 무사한(無事漢)을 높이 산다. "일이 없는 사람이 진정한 귀인이다."라는 임제스님의 말씀도 있다. 그렇다고 손과 발을 묶어 놓고 가만히 있다는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부지런 하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한가하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심심하다. 너무 심심해서 경전으로 눈을 가리는 눈가리개로 삼는다. 경전으로 눈을 가리고 있으니 더 한가하고 심심할 뿐이다.
窮釋子 口稱貧 實是身貧道不貧 貧則身常被縷褐 道卽心藏無價珍 -증도가-
궁색한 부처님 제자 말로는 가난하다 하지만 실은 몸이 가난하지 도가 가난한 것은 아니다. 가난한 몸에는 언제나 떨어진 옷을 입고 있으나 도는 마음속에 무가보를 감추고 있다.
해설 ; 부처님의 제자로서 수행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가난하고 궁생하게 사는 것이 옳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자는 마음으로 출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도를 알아서 도로써 삶의 가치와 보람을 삼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명예를 가지고 높은 위치에서 군림하자는 뜻도 아니다. 남의 존경을 받자는 뜻도 아니다. 언제나 겸손하고 하심하여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학덕과 도덕과 선행으로써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를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형으로는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치고 나물밥을 먹으며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생활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누구도 넘겨다볼 수 없는 높은 도덕으로써 끝을 모를 긍지와 자부심이 있다. 그 도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불가사의하고 무궁무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고로 옛날 세존으로부터 역대 조사스님들과 모든 출가 수행자는 한결 같다.
만약 이 원칙에서 벗어난 사람이라면 출가자가 아니다. 수행자가 아니다. 마음 가운데 일체 인간적인 문제에 애착하지 않아야 부처님의 제자인 사문이라하고, 세속적인 가치에 연연해하지 않아야 출가 수행자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觀惡言 是功德 此則成吾善知識 -증도가-
악한 말을 잘 살피라. 이것이 공덕이다. 이 것은 또한 나에게 선지식이 된다.
해설 ;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자기의 뜻과는 관계없이 온갖 비난과 악언을 들을 때가 있다. 결코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심한 비난을 들을 때가 있다. 사실은 누구에게나 흔히 있는 일이지만 증도가의 저가 영가스님은 그 비난을 듣는 일이 매우 극심했던 것 같다. 본래 천태학을 깊이 연구하여 천태학 계통에서는 장래에 대표자의 위치에 으를 촉망받는 스님이었다. 그러다가 육조 혜능 스님을 만나서 자신의 깨달음을 인가받고 선종의 인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천태종 계통에서는 대단한 빈난을 하였던 것이다. 증도가에 나타난 비난의 문제에 관한 말만 보더라도 짐작이 간다.
비난을 받는 문제는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달려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마다 모두 비난을 어느 정도 들어가며 사는 것이 또한 인생이다. 영가스님은 그 악담들이 곧 공덕이라고 하였다. 악담을 잘 수용하고 소화하면 공덕이 크게 생긴다. 좋은 일을 하여 쌓는 공덕보다 악담을 잘 수용하여 생기는 공덕이 더 크다. 나아가서 악담을 듣는 일과 악담을 하는 사람들이 곧 나의 선지식이다. 나를 깨우치고 성장으로 이끈다. 유교에도 "나를 선하다고 하는 사람은 나의 적이요, 나를 악하다고 하는 사람은 나의 스승이다."라는 말이 있다. 실로 나를 잘 가르치고 나의 수행을 높이 쌓게 하는 좋은 선지식은 나를 나쁘다고 하는 사람들과 나에게 들려오는 나쁜 말이다. 그러므로 나를 시기질투하고 모함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과 그들을 용납하지 못하면 끝내 덕을 쌓을 수 없다. 수행이란 꿈에도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그들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분들이다. 그들이 하는 말이야말로 가장 좋은 법문이며 큰 가르침이다. 반드시 이 훌륭한 선지식과 은혜로운 분들을 마음으로 따뜻하게 감싸고 존경해야할 일이다.
夢裏明明有六趣 覺後空空無大千 -증도가-
꿈속에서는 분명하고 분명하게 여섯 갈래의 삶이 있으나 꿈을 깨고 나면 텅 비고 텅 비어 온 우주가 하나도 없네.
해설 ; 불교에는 꿈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꿈과 현실의 관계가 미혹과 깨달음의 관계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꿈을 꿀 때 모든 사물과 사건들이 현실과 조금도 다름없이 그대로 다 있다. 그래서 꿈속에서 전혀 꿈인 줄 모르고 생활한다. 꿈을 깨고 난 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그때에야 비로소 꿈인 줄 안다. 꿈을 깨고 난 뒤 꿈에 보았던 사물들이나 겪었던 일들을 돌아보면 아무 것도 없다.
그와 같이 우리가 현실이라고 하는 이 현실도 깨달은 사람들이 볼 때 미혹의 삶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버젓이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게송에서는 여섯 갈래의 삶의 양상들이 너무도 분명하게 존재하지마는 미혹을 깨닫고 나면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은 당연하며, 또한 무슨 일이나 지나고 나도 아무 것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사실은 생각이 있는 사람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아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나 꿈에서나 꿈을 꾸는 그 당체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꿈을 꾸는 능력과 꿈을 꾸는 그 사람은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깊이 사유해 봐야할 일이다.
幾回生 幾回死 生死悠悠無定止 -증도가-
몇 번이나 태어났으며 몇 번이나 죽었던가. 태어나고 죽는 일이 길고 길어서 멈추지 않는다.
해설 ; 사람들이 어떤 사물을 보고 그것을 느끼고 알고 판단하는 일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은 없다. 혹 말로 표현할 때는 같다고 하더라도 마음으로 이해하는 각도와 넓이와 깊이를 세밀히 분석해보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의 사물을 이해하는 것도 그와 같은데 만약 삶과 죽음의 문제라면 이 일은 사람마다 느끼고 아는 차이는 엄청나게 다를 수밖에 없다. 세상에 태어나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도 아무런 깨달음이 없고 누구에게 들은 바도 없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물론 그것도 사람마다 같을 수는 없지만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예부터 세존은 생사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세상사를 버리고 출가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은 것도 이 생사문제를 깨달았으며, 결국 생사로부터 해탈하였다. 불교의 역사는 세존의 수행과 그 깨달음과 가르침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가르침의 모든 내용은 결국 삶과 죽음의 내용으로 귀착이 될 수밖에 없다.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수많은 제자들이 역시 그의 사상과 가르침을 계승한 것이다. 이 시를 지은 영가스님도 마찬가지다. 생사의 문제를 깨달으신 안목으로 생사의 일면을 멋있게 표현하였다. 물론 불교의 공부가 깊지 아니한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며 믿어지지도 않는 말씀이다.
생과 사는 단순히 한 번뿐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생사를 거듭하면서 또 지금 이렇게 태어났다. 그 끝은 없다. 영원히 지속한다. 하루에 수많은 생각과 일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삶이 계속되듯이 영원한 생사도 한 생이 그 하루의 일과 생각처럼 일어나고 또 사라지고 하면서 영원히 지속된다. 영원히 지속한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았기 때문에 모든 깨달음을 이루신 분들은 온 생애를 다 바쳐서 이 문제를 깨우쳐주려고 노력하신 것이다. 안목이 짧고 단순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생사문제의 전문가들 에게는 간단히 이해되는 일이다. 무슨 분야든지 전문가의 안목은 비전문가의 안목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듯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이 생사문제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無位眞人 面門出入 -임제록-
차별 없는 참 사람이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해설 ; 임제스님 가르침 중에서 첫 손을 꼽는 말씀이다. 그만치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이 사람이 꼭 얼굴을 통해서만 출입하는 것은 아니지만 9할 이상이 얼굴을 통해서 출입하므로 그렇게 말씀한 것이다.
참사람. 참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다. 빈부귀천, 노소남녀, 유식무식, 동서고금, 그 어떤 사람들도 모두 이 참사람의 입장에서는 평등하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한다. 차별이 없는 참사람이라고 하는 뜻이 여기에 있다.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일상에서 보고 듣고 말하고 무엇을 알고 느끼고 하는 그 사실이다. 그 사실이 있으므로 사람이라 하고 그 자체를 사람이라 한다. 그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 어떤 경우의 사람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다. 참으로 지극히 평등한 일이다.
임제스님은 이어서 "그대들은 잘 살펴라."라고 하였다. 이 사람을 살피고 찾는 일을 수행이라 하고, 공부라 하고, 참선이라 하고, 기도라 한다. 불교의 모든 일은 그 어떤 일도 이 일에 귀결된다. 이 사람만 잘 살피고 알아서 이 사람의 능력대로 살면 모든 일을 다 마친 무사한(無事漢)이다. 공부 끝이다. 수많은 불교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 한마디뿐이다.
已起者莫續 未起者不要放起-임제록
이미 일어난 생각은 더 이상 지속하지 말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은 일으키지 말라.
해설 ; 인생을 살다보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서 하는 일도 있지만 대개가 이미 만들어진 환경에서 피동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더욱이나 우리들의 생각은 내 의지로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거의가 다 저절로 일어나는 것들이다.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소위 불필요한 망상이라는 범주 속에 드는 것들은 모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요는 그 일어난 망상들을 붙들고 늘어지는데 문제가 있다. 공부를 열심히 지어가는 과정에서도 망상인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지속해 가고 있는 경우를 본다. 어떨 때는 망상인줄을 아는 순간 곧바로 버리고 공부로 돌아오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조금만 망상을 부리고 말아야지 하면서 어느 사이 훌쩍 한 시간을 보내버리기가 일쑤다. 망상이란 그야말로 망상이지 아무런 이익이 없는데도 말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그래서 경계하기를 "이미 일어난 생각은 더 이상 지속하지 말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은 일으키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런 일이 하필이면 공부하는 일에만 해당되겠는가. 보통의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꼭 필요한 명언이다. 내 주변에 불필요한 일들과 인간관계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제 그만 마무리 짓고 더 이상 지속하지 않아도 좋다. 그렇다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일과 관계들을 새롭게 시작할 것은 더욱 아님을 깨달을 것이다. 굳이 공부인이 아니더라도 일상에 이런 자세가 곧 선심(禪心)을 배워가는 일이다. 선심으로 간결하고 소박하고 멋있게 사는 첫걸음이다.
道是通流-육조단경
도란 툭 터져 흐르는 것이다.
해설 ; 도란 세상과 우주, 그리고 인생의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삶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과 그 방법일 수도 있다. 진리니 삶이니 길이니 방법이니 하는 것은 결국 또 무엇인가. 육조스님은 툭 터져 흐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에 대하여 수많은 말이 있지만 가장 간단명료하고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가 없는 사람을 보면 안다. 곳곳에 걸리고 일마다 걸리고 보고 듣는 것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장애와 막힘 투성이 로 일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도가 있는 사람에게는 일체에 막힘이 없고 무엇에나 툭 터져있기 때문에 옆에 있기만 해도 속이 시원하다.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은 어느 한 순간만이라도 걸림이 없이 툭 터져 있어야 한다. 걸려있고 장애가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행복이란 생각할 수가 없다. 도란 행복한 인생이다. 멋진 인생이다. 행복하고 멋진 인생은 툭 터져서 무엇에나 흘러들지 않는데 없어야 한다.
松老雲閑 曠然自適 -임제록-
소나무는 늙었고 구름은 한가한데 마음은 텅 비고 밝고 환하여 모든 것이 저절로 잘 맞다.
해설 ; 임제스님의 노년의 경지를 그린 말이다. 참 부럽다. 설사 노년이 아니더라도 도가 있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그러했으리라. 소나무는 노송을 더 알아준다. 키가 얼마인지 모르게 크고 둘레도 몇 아름이나 되게 굻다. 가지도 많고 옹이도 많다. 세월의 흔적으로 상처도 많고 구불구불한 것이 큰 용이 용트림을 하며 승천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거기에 구름이 흘러가다가 가지에 걸려 가도 오도 못하고 함께 있는 것이 멋진 벗을 만나 한가하게 한담을 주고받는 듯하다.
그러면서 한편 고고하고도 위엄서린 모습은 보통 범인이 함부로 올려다 볼 수 없다. 속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절대 접근불가다. 구름이 비끼고 나면 높은 소나무 가지에는 서릿발이 서 있고 얼음이 맺혀있다. 임제스님은 그와 같은 마음을 다 지녔다.
한편 "마음은 텅 비고 밝고 환하여 모든 것이 저절로 잘 맞다."라는 표현이 참으로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도인을 생각하게 한다.
이 짧은 글에서 진정으로 노선사의 고고함과 깊고 그윽하고 유현함과 탈속함과 지극히 고요함과 간결 소박함과 자연 그대로 임과 어디에도 고정되지 않은 예측불허의 변화가 그대로 다 묻어난다. 이것이 선심인가. 이것이 멋진 인생인가.
2006년 1월 8일 오전 문수원에...
霜松潔操 水月虛襟-영가집
서리 내린 소나무와 같은 맑은 지조와 물에 비친 달과 같은 텅 빈 마음.
해설 ; 영가집 서문에 나온 영가스님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불교인으로서 붓글씨께나 쓰는 사람이라면 모두 한두 번씩 써 봤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먹은 마음이 흐트러지고 첫 마음이 변해갈 때 누구나 옛 사람들의 경구나 교훈이 담긴 말씀을 되새기면서 마음을 새롭게 바로잡는다. 그래서 가정이나 수행자가 거주하는 방에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꼭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목표한 내용이 담긴 글들을 한두 가지 걸어두는 것이 상례다. 가훈을 써서 걸어두는 것도 그러한 예다. 뜻이 있어 사는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만인의 사표가 되고 오래 도록 사람들의 귀감이 되는 삶을 살려는 수행자는 더욱 그러하다.
높고 높은 산에 고고히 서 있는 소나무 가지 끝에 서리가 내려있다. 높은 산의 소나무라는 이미지도 그러한데 거기에 서리가 내렸다면 그 서릿발이 오직하겠는가. 그처럼 맑은 지조와 소신이라면 긍지와 자부심과 위엄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다. 수행자는 천하의 누구에게라도 녹녹하고 호락호락한 존재가 절대 아니다. 그 상대가 지금의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먼 과거 석가세존으로부터 먼 미래에 까지 다 포함하여 그 누구에게도 절대로 녹녹한 존재가 결코 아닌 지조와 소신과 긍지를 가진 사람이다.
물에 비친 달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다. 사찰에서 스님들이 축원하는 축원문에는 물에 비친 달과 같은 도량(水月道場)이라는 말이 있다. 참으로 운치가 있고 멋이 있는 말이다. 모든 존재의 실상을 깨달음 사람들은 일체 사물과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그림자처럼 본다. 이것이 불교적 안목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안목을 배우려는 것이다. 그것은 텅 빈 마음이 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를 물에 비친 달과 같이 보는 텅 빈 마음이라는 것이다. 존재는 분명 존재하는 것이로되 그림자이기에 사람을 상처 주거나 다치게 하지 않는다. 자신이 이미 그림자인데 나 아닌 다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게 무엇이든. 영가스님은 그런 삶을 산 사람이다.
妙應無方 不留朕蹟 -임제록-
미묘한 응대가 정해진 방법이 없으니 어떤 조짐이나 자취를 남겨두지 않는다.
해설 ; 임제스님이 제자들을 제접하여 가르치는데 그 수단과 방법이 무궁무진하여 일정한 방법에 얽매이지 않음을 표현한 말이다. 때로는 할로써, 때로는 방으로써, 때로는 자상한 말씀으로, 또는 침묵으로 근기와 수준과 성격과 소질을 따라 법을 쓰고 눈을 뜨게 하는데 그 수단과 방법이 무궁무진하여 옆에 있는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참으로 신묘불가측이다. 변화무쌍하다. 선의 또 한 가지 특징이 변화다. 일정하고 가지런하고 고정되고 판에 밖은 것들은 딱 질색이다.
이것인가 하면 저것이고 저것인가 하면 그것이다. 남쪽인가 하면 북쪽이고 북쪽인가 하면 서쪽이다. 물인가 하면 나무고 흙인가 하면 불이다. 사람인가 하면 남쪽이고 중인가 하면 돌이다. 도저히 어느 하나를 잡고 매달려 있을 수 없다. 상식과 고정관념은 아예 이 집에는 키우지 않는다. 그래서 미루어 짐작하여 조짐을 엿보려고 해도 안된다. 흘려 둔 자취에 눈을 돌려도 이미 십만 팔 천리다. 그러므로 임제스님은 없다. 실은 없다는 말도 틀리지만.
夫爲法者 不避喪身失命 -임제록-
대저 법을 위하는 사람은 몸을 상하고 목숨을 잃는 것을 피하지 않아야 한다.
해설 ; 때로는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도 목숨을 바치는 이가 있다. 또 벼슬을 얻으려는 사람들도 역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을 얻으려는 사람도 역시 목숨을 바치는 이가 있다. 혹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간혹 자신의 만용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어떤 성인들도 위의 목적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는 말씀을 한 분은 없다. 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한다면 그는 이미 성인이 아니다.
도를 위해서, 법을 위해서, 깨달음을 위해서, 사람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 목숨을 바치라는 말씀을 한 성인들은 많다. 그와 같은 사례들도 역시 많다. 임제스님은 진정으로 법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잃는 것을 피하지 말라고 한다. 목숨을 바치라고 한다. 그렇다. 법을 위해서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목숨을 바쳐서 정진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위대한 삶이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이다. 누가 알아주고 못 알아주고 와는 전혀 관계없이 제일가는 삶이다. 한 번뿐인 이 삶을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라면 가치 있게 쓰고 버리는 것이 당연하고 잘하는 일이다. 그 기개가 참으로 임제스님답다.
無位眞人 是什麽乾屎橛 -임제록-
차별 없는 참사람이 이 무슨 마른 똥 막대기인가.
해설 ; 무위진인(無位眞人), 즉 차별 없는 참사람에 대한 임제록의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임제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붉은 몸뚱이에 한 사람의 차별 없는 참사람이 있다. 그는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그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아라."
그 때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차별 없는 참사람입니까?"
그러자 임제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와서 그의 멱살을 움켜잡고,
"말해봐라. 어떤 것이 차별 없는 참사람인가?"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은 그를 밀쳐버리며 말했다.
"차별 없는 참사람이 이 무슨 마른 똥 막대기인가."라고 하시고는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覺則了 不施功 -증도가-
깨달으면 그만이다. 더 이상 공을 베풀 일이 없다.
해설 ;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기 때문에 깨달음에 대한 이론이 구구하다. 불교의 교조이신 세존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우렸다. 그 제자들도 물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세존 못지않은 노력을 기우렸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는 불교의 전체 교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수행이나 공을 베풀어야만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아무런 노력이나 공을 베풀지 않아도 되는 일인가. 이 게송은 깨달으면 끝이다. 아무런 수행을 드릴 필요가 없다고 한다.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나 역시 아무런 공을 드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사 깨닫기 위해서 무수한 노력을 드렸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 깨달음과는 무관한 것이고 또 깨달은 이후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깨달음이란 본래 있는 것이고, 모든 사람은 본래로 깨달음의 바다 속에서 노닐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바닷물고기가 바다에서 태어나서 바다에서 살다가 바다에서 생을 마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바닷물고기가 달리 무슨 바다를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깨달음이란 일찍이 한 순간도 떠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면 끝이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 돈오돈수(頓悟頓修)란 말도 그렇게 이해하면 된다.
無繩自縛 -임제록-
밧줄도 없는데 스스로 묶였다.
해설 ;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 중에 '자유'라는 말과 같이 좋은 말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외부로부터 또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여러 가지의 장애를 만나 매우 부자유한 삶을 산다. 어떤 외적 구속에서 풀려났을 때 누리는 자유도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기쁨 중에서 매우 큰 기쁨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밧줄도 없이 스스로 묶였다가 벗어난 자유야 말로 진정한 자유다. 임제스님은 그와 같은 묶임에서 벗어난 자유를 말하고 있다.
밧줄도 없이 사람을 묶는 것이란 좋은 일 나쁜 일이 모두 해당된다.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이 그것이고, 오욕낙이 그것이다. 나아가서 역대 성인들과 성인들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이 모두가 본래 인간의 대자유를 구속하는 구속물이다. 본래로 인간은 아무런 구속이 없이 자유 자재한 존재이기 때문에 밧줄도 없이 스스로 묶는다는 이유가 이것이다.
四大色身不解說法聽法 脾胃肝膽不解說法聽法 虛空不解說法聽法 目前歷歷底 勿一箇形段孤明 是這箇解說法聽法 -임제록-
지수화풍 네 가지 요소로 된 이 육신이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들을 줄 모른다. 비장 위장 간 쓸개가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들을 줄 모른다. 허공도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들을 줄 모른다. 다만 목전에 분명한, 형상 없이 홀로 밝은 이것이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
해설 ; 임제스님의 이 법문은 사람들이 돌아가시고 49재 법문을 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법문이다. 사람의 육신 이외에 또 다른 한 물건의 존재를 밝힌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고 나서 한줌의 재로 돌아가고 나면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허망하고 슬프고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들의 일생이 이것뿐이란 말인가? 진정한 생명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것으로 끝인가? 아니면 또 다른 생명의 실상이 있어서 영원히 지속하는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법문의 내용처럼 사람의 진실 생명은 육신이 아닌 또 다른 실체가 있다. 꼭 있다는 표현에는 물론 모순이 있지만 그것이 보고 듣고 말하고 꼬집으면 아플 줄 알고 부르면 답할 줄 안다. 잠을 잘 때도 꿈을 꿀 줄도 안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는 육신을 의지하지만 죽으면 또 다른 생을 위해서 새로운 육신을 준비해야한다. 인연을 따라서 그 준비를 할 줄 아는 존재가 바로 이 한 물건이다. 이 한 물건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깨우쳐주는 일이 천도재의식이다.
불교의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이 한 물건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들의 진실 생명일 뿐만 아니라 불교의 생명이기도 하다. 이 존재의 위대함은 무어라고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다. 팔만장경도 다 설명하지 못한 것이며, 바닷물을 다 갈아서 표현하더라도 부족한 것이 이 존재에 대한 문제다. 많이 듣고 많이 읽고 하면서 이해하고, 깊이 사유하면서 느끼고 깨달을 뿐이다.
隨緣消舊業 任運着衣裳 要行卽行 要坐卽坐 無一念心 希求佛果 -임제록-
인연을 따라 묶은 업을 녹이며 형편 따라 옷을 입는다. 걷게 되면 걷고 앉게 되면 앉는다. 한 생각도 부처가 되려는 마음이 없다.
해설 ; 어떤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인가? 진리를 알고 도를 깨달으면 어떻게 사는 것인가? 견성을 하고 성불을 했을 때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임제스님의 이 법문은 매우 간단명료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사실 흔히 하는 말로 도를 통하고 나면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어떻게 살자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불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다.
임제스님 특유의 이 법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반적으로는 활발하고 적극적인 보살도의 삶을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보살도의 정신이라는 것도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한낱 보통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의 삶이란 알고 보면 별 것이 없다. 조작 없이 인연 따라 살다보면 묶은 업도 사라진다. 업을 녹이려고 하는 조작된 행위를 할 필요는 없다. 걷게 되면 걷고 앉게 되면 앉는다.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이것이 곧 이상적인 삶이다. 진리를 깨닫고 도를 통하고 견성성불해서 사는 삶이다. 그렇게 사는 모습이 곧 중생제도의 길과 통한다. 굳이 부처가 되려고 할 필요도 없다. 부처가 되려고 한다 해서 무슨 특별한 부처가 되는 일은 없으니까.
萬緣都放下 但念觀世音 此是如來禪 亦爲祖師禪
만 가지 인연 모두 내려놓고 다만 관세음보살만 염하라. 이것이 여래선이며 또한 조사선이다.
해설 ; 불교가 근본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선불교로 발전하면서 깨달음의 국극의 경지를 표현하는 말에 조사선의 경지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그 경지는 분명 여래가 이른 경지보다 우위에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대상에 의지하는 타력신앙을 매우 하시하는 경향이 자연히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내용에서 보듯이 모든 인연을 다 놓아버리고 다만 관세음보살만을 염한다면 그것이 곧 여래가 이르러 간 여래의 경지며, 또한 조사가 이르러 간 조사의 경지다. 라고 하고 있다. 참으로 명쾌한 표현이다. 이 순간 이 자리에서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이 사람, 이 사실 외에 달리 무엇이 있어서 여래선이며 조사선이겠는가. 염불도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斜陽空寺裏 抱膝打閑眠 蕭蕭警覺了 霜葉滿階前 -경허집-
텅 빈 패사에 해는 기우는데, 무릎을 앉고 앉아 한가하게 졸고 있다. 소슬바람에 놀라 깨어보니 서리 맞은 낙엽이 뜰에 가득하네.
해설 ; 좌선을 하다보면 조는 일이 태반이다. 하지만 좌선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조는 것도 성성한 공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오래 묵은 선객들은 잘 존다. 해가 기우는 텅 빈 패사에서 홀로 있다. 선객이 하는 일이라고는 좌선이지만 그 좌선도 조는 것이 전부다. 일체 속된 일은 없다. 한참 졸다 소슬바람에 놀라 깨어보니 뜰에 서리 맞은 낙엽이 가득하다. 한가하고 간결하고 상큼한 선미(禪味)가 느껴지는 시다.
睡外更無事 低頭常睡眠 低頭常睡眠 睡外更無事-경허
조는 것 외에 달리 일이 없으니 고개 숙이고 늘 졸고 있다. 고개 숙이고 늘 졸고 있으니 조는 것 외에 달리 일이 없다.
해설 ; 한 마디로 한가하고 일이 없는 탈속한 선생활이 느껴지는 시다. 그리고 그 표현이 말장난 같으나 재미있게 되었다. 조는 것 외에 달리 일이 없으니 고개를 숙이고 늘 졸고 있다. 늘 졸고 있으니 조는 것 외에 달리 일이 없다. 일이 있다면 다만 조는 것이 일이다.
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받는 것이 그것이라네.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하는 일이 그것이라네.
해설 ; 사람들이 전생의 일을 궁금해 하고 또는 내생의 일도 궁금해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간단히 알 수 있다. 시의 내용대로 전생의 일이란 바로 금생에 받고 있는 일들이 그것이다. 전생에 지응 것이 없으면 이렇게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생의 일이란 것도 금생에 짓는 대로 간다. 만약 그것이 다르게 나타난다면 이치에 맞지 않다. 인과의 철칙이다. 다만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뿐이지 대체적인 줄거리는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내생의 내 인생을 위해서라도 금생에 좋은 인연 좋은 공덕을 쌓아야 한다.
四大元無主 五蘊本來空 將頭臨白刃 猶如斬春風 -승조법사-
지수화풍 네 가지 요소로 된 우리의 몸은 주인이 없고,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도 본래 공한 것이다. 머리를 들어 칼날 앞에 내미니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구나.
구마라습의 제자 승조법사는 조론(肇論)이라는 희대의 명저를 남긴 분이다. 그런데 불행히 왕난을 만나 비명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명한 시다. 칼날 앞에서 당당하면서도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이 잘 표현되어있다. 불교를 알아 인생을 보는 눈이 이쯤은 되어야 불교공부를 한 보람이 있지 않을까 한다. 불자들이 언필칭 입만 떼면 무상과 공을 말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모두가 유(有)에 걸려 있다. 누구 하나 그 있음을 벗어난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刹塵心念可數知 大海中水可飮盡 虛空可量風可繫 無能盡說佛功德-화엄경
우주의 먼지 같이 많은 생각들을 헤아려 알고, 대해의 바닷물을 다 마시고, 허공을 다 헤아리고, 바람을 휘어잡는 능력이 있어도 부처님의 공덕은 다 설 할 수 없네.
해설 ; 대해보다도 더 큰 것이 마음이다. 우주보다도 더 큰 것이 또한 마음이다. 경전에는 허공이 우리 마음의 큰 깨달음 속에서 나온 것이 마치 바다에서 물거품이 하나 일어난 것과 같다고 하였다. 마음의 크기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그 마음의 밑바닥까지 속속들이 남김없이 깨달아서 그 마음의 공덕을 다 지니신 분을 부처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 어떤 능력이 있다 해도 부처님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으며, 다 설명할 수 없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차별이 없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에 기준을 두고 그 모든 공덕이 결국은 모든 사람 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임을 연관 시켜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을 찬탄한 게송으로서 자주 등장하는 경문이다. 부처님 찬탄은 곧 마음을 찬탄하는 것이며 마음을 찬탄하는 일은 곧 사람을 찬탄하는 일이다.
何期自性本自淸淨 何期自性本不生滅 何期自性本自具足 何期自性本無動搖 何期自性能生萬法 -육조단경-
내 자성이 본래 청정한 줄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는 줄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자성이 본래 저절로 갖추고 있는 줄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는 줄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자성이 능히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줄을 내 어찌 알았으랴.
해설 ; 이 게송은 육조 혜능스님이 오조 홍인스님으로부터 금강경의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부분의 강설을 듣고 깨달음을 이루신 후 오도송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체 만법이 모두 자기의 자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으신 것이다. 전편의 내용이 모두 내 자성에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서 자성의 본래 청정성과 자성의 본래 불생불멸성 등 자성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다.
경전이나 조사스님들의 표현에 마음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경우가 있고, 또는 한 물건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임제스님은 사람이라는 말을 잘 쓴다. 진여나 자성이나 마음이나 법성이나 법계나 한 물건이나 사람이나 결국은 같은 존재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의 법에 천 가지 이름이 있다하여 일법천명(一法千名)이라한다. 오조 홍인스님은 노행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자성을 철저히 깨달았음을 믿고 인가하였다.
摩訶大法王 無短亦無長 本來非皂白 隨處現靑黃-오가해
위대하고 크신 법의 왕이여,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네. 본래 검거나 흰 것이 아닌데 곳을 따라 푸르고 누른색을 나타낸다.
해설 ; 세상에는 왕도 많다. 그러나 진정한 왕은 진리의 왕, 법의 왕, 모든 것의 근본인 심왕(心王)이다. 이 왕은 참으로 위대하다. 크다. 넓다. 깊다. 아득하다. 멀다. 자유자재하다. 신묘불측이다.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지만 형편 따라서 능히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 본래로 색깔이 없는데도 마음대로 뜻대로 시간 따라 곳을 따라 팔만 사천 색깔과 작용을 연출한다. 이것이 사람이고, 이것이 인생이고, 이것이 불교고, 이것이 도고, 이것이 선이고, 이것이 진리고, 이것이 부처님이고, 이것이 조사고, 이것이 모든 것이다.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서산집-
팔십년 전에는 저 사람이 나였는데 팔십년 뒤에는 내가 저 사람이구나.
해설 ; 이 게송은 서산스님이 자신의 영정(影幀)에다 스스로 찬한 글이다. 고령이 되니 제자들이 어느 날 영정을 그려왔는데 거의 자신의 모습을 닮았던 것 같다. 영정을 가만히 보시다가 문득 쓰신 내용인데 영정에 쓰는 글로서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명문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최근 모습의 사진을 보고 한마디 한다면 무어라고 할까?
"고생 많이 했다."? "뭘 하고 살았니?"? "참 열심히도 살았다."?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다."?
神光不昧 萬古輝猶 入此門來 莫存知解
신비로운 광명이 밝고 밝아서 만고에 찬란하게 빛나고 이다. 이 문에 들어오거든 모든 알음아리를 던져버려라.
해설 ; 이 시는 사찰의 입구에 들어서면 흔히 볼 수 있는 글이다. 왜 사찰의 입구에 이 글을 걸어두고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보이는가. "이 문에 들어오거든 모든 알음아리를 던져버려라."라는 말이 있어서다.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들어오려면 무엇보다 장애가 되는 것이 그동안 익힌 세속적 지식이다. 지식을 다 버려도 문재가 될 것이 없다. 버려야 오히려 많아지고 빛을 발한다.
신령스런 광명이 만고에 빛나고 있다. 이 광명은 본래로 불생불멸이다. 본래로 청정하다. 본래부터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어서 만행 만덕이 충만하다. 이러한 신령스런 광명을 이해하고 감지하고 깨달아서 나의 살림살이가 되게 하려면 모든 지식 모든 망념 다 버려야 한다. 사찰에 들어와서 부처님의 공부를 하고 참선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은 곧 이러한 광명을 깨닫자는 데 그 뜻이 있기 때문이다.
栴檀木做衆生像 及與如來菩薩形 萬面千頭雖各異 若聞薰氣一般香 -석문의범-
전단향나무로 중생의 모습을 만들고 여래의 모습도 만들고 보살의 모습도 만들어서 비록 천만 가지 얼굴이 다 다르지만 만약 그 향기를 맡아보면 모두가 같은 전단향의 향기라네.
해설 ;
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서산집-
千尺絲綸直下垂 一波纔動萬波隨 夜靜水寒魚不食 滿船空載月明歸-오가해 冶父
천 자나 되는 긴 실을 곧게 드리우니 한 물결이 막 일어나매 만 물결이 따라 일어나도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워 고기가 물지 않으니 배에 허공만 가득히 싣고 밝은 달 아래 돌아오도다.
해설 ;
一片新茶破鼻香 請君速來爲我賞
나에게 한 조각 향기 좋은 햇차가 있으니 그대는 속히 와서 나와 함께 맛을 보세나. 해설 ;
志操
幸福禪師 禪人 禪客 自由禪師 平和禪師 禪書 禪畵 禪花 禪香 禪味 禪食 禪語 禪黙 禪茶 禪武 禪天禪地 禪山禪水 禪東禪西 禪南禪北 禪春禪夏 禪秋禪冬--진정한 선객에게는 모든 삶이 다 선이다.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선이다. 선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만 선이 아니다. 숨 한 번 내쉬고 기침 한 번 하는 것이 일체가 선 아님이 없다. -- 聖解不在(留) 凡情脫落
선은 하나의 거울이다. 사람의 마음상태를 환하게 비춘다.
선은 하나의 등불이다. 사람의 마음의 길을 안내한다.
道人 至人 眞人 仙人 神人 佛人 佛祖 聖人 禪聖 禪僧 禪神 禪仙 至仙 至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