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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과 義의 선비정신을 실천한 칼을 찬 처사 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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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학자들의 본분이 무엇이었을까. 유학자라면 학문을 이룬 뒤 이를 바탕으로 과거시험을 통과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를 대표한 학자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몸에 차고 그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경계와 반성을 그치지 않은 조식은 일생토록 타락한 권력을 질타하고 무기력한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이른바 ‘선비 정신’을 실천한 인물이다.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학자의 탄생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1501년(연산군 7년)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에 속해있는 삼가현 토동(兎洞) 외가에서 조언형(曺彦亨,1469~1526)과 인천 이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楗中)이며, 호가 남명이다. 18년간 살았던 김해에 ‘산해정(山海亭)’이라는 집을 지어 후진을 양성한 까닭에 산해선생이라고도 불린다.
조식의 집안은 증조인 조안습(曺安習) 때부터 삼가의 판현(板峴)에 살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집안이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는데, 안습의 경우 문관이 되고자 노력했으나 생원시(生員試)에 그쳐 가문의 중흥을 이루지 못했다. 가문을 일으키려는 조안습의 꿈은 조식의 부친인 조언형에 이르러 이루어졌다. 조언형과 조언경 두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이 열린 것이다. 부친 언형은 생원시와 전시에서 장원하였고 이후 요직인 이조정랑을 지내면서 가문이 창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광도 잠시, 조식의 숙부 조언경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가솔과 함께 목숨을 잃었고, 부친 조언형 역시 말년에 모함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조식의 외조부는 충순위 이국(李菊)이다. 조식의 외가인 인천 이씨 집안은 고려 때 6대조 이작신(李作臣)이 삼가로 유배 온 이래 이곳 토박이가 되었다. 외가의 집터는 풍수적으로 상당히 명당이었다고 전한다. 한 예언가가 지나가면서 그 집터를 보고 “신유년(1501)에 이곳에 태어나는 아이는 커서 반드시 성현이 될 것이다”라 예언했다고 한다. 이후 조식의 부모가 처가에 들렀다가 누런 용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꾼 뒤 이씨 부인이 임신을 했고, 예언처럼 신유년 음력 6월 26일에 이곳에서 조식을 낳았다.
벼슬살이를 했던 부친 덕분에 어린시절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았다. 5세까지 삼가에 있는 외가에 살다가 부친이 문과에 장원을 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어린 시절 그의 스승은 부친이었다. 서울에 올라온 조식은 연화방(蓮花坊)이란 곳에 살면서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부친인 조언형은 언론과 감찰 업무를 담당한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을 각각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언론과 감찰 업무를 맡은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원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서 우대를 받았던 관직이다. 그들은 고과(考課- 업무평가)를 받지 않았고, 당상관도 이들의 인사를 받으면 정중하게 답례하도록 규정하는 등 의 우대를 받았다. 특히 국왕에게 직언을 하는 사간원은 언론의 대상이 국왕인 점에 비추어 음직이 아닌 문과 출신자만 선발되던 자리다.
벼슬길을 버리고 진정한 학문의 길을 찾다
15세에 부친이 함경도 단천군수로 임명되자 단천으로 이주한 조식은 유교경전을 비롯하여 천문·지리·의학·병법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공부를 했다. 그가 실천과 비판 의식을 지닌 선비로 성장한 데는 지방관 생활을 한 부친의 영향이 있었다. 어린 조식은 지방 관아에 생활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이를 개선할 방법을 학문에서 찾았다. 방대한 독서량을 자랑했던 조식은 젊은 시절 [좌전(左傳)]과 유종원(柳宗元- 당송8대가 중의 한사람)의 고문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의 집은 성운(成運)·성우(成遇) 형제의 집과 가까웠다. 성운은 훗날 1545년(명종 1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형이 화를 당하자 속리산으로 들어가 은거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이웃사촌이었던 조식과 성운은 수시로 만나 학문을 토론하고 함께 인격을 수양해갔다. 평온하게 학문 활동에 매진하던 중인 1519년(중종 14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조광조(趙光祖)가 사사되었는데, 이때 조식의 숙부인 조언경도 화를 당했다. 기묘사화를 계기로 조식은 벼슬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운 형제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연이은 사화를 지켜보면서 벼슬길에 회의를 갖기도 했지만, 곧장 과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520년(중종 15년) 진사 생원 초시와 문과초시에 모두 급제한 조식은 이듬해 문과회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 후 과거 준비와 함께 학문을 닦던 그에게 일생의 항로를 바꾸는 전기가 찾아왔다. 과거 시험 공부를 하던 중 [성리대전(性理大典)]에 실려 있는 “대장부가 벼슬길에 나가서는 아무 하는 일이 없고 초야에 있으면서는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허형(許衡, 1279~1368, 원나라 학자)의 글이 그의 가슴을 친 것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였다. 이후로 조식은 출세를 위한 형식적이고 지엽적인 학문을 버리고 유학의 본령을 공부하는데에 전념하였다. 실생활에서도 유학의 성현이자 대유(大儒)들인 주렴계, 정명도, 주자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아침마다 절을 올릴 정도로 독실하게 공부했다.
경(敬)과 의(義)를 실천한 지리산 처사
의로써 바깥을 바르게 한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식은 좌우명과도 같았던 경과 의를 실생활에도 옮겨, 몸에 차고 다니던 칼에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을 새겼다. 그에게 있어 ‘경’과 ‘의’가 가진 의미는 마치 하늘의 해와 달과 같은 것으로,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모든 진리는 이 두 글자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었다.
1526년 갑작스레 부친이 돌아가시자 3년 상을 치른 뒤 조식은 벗인 성우와 함께 지리산으로 유람을 떠났다. 오랜만에 만난 벗 성우는 그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 그와 대화하면서 시골에서 게을리 공부하면 금방 뒤쳐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조식은 모친의 허락을 받아 의령 자굴산으로 들어가 공부에 전념했다. 2년간의 산속 생활을 끝낸 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사하여 집 근처 언덕에 산해정(山海亭)이라는 독서당을 짓고 본격적인 학문 활동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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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히히덕거리며 술과 여자에만 빠져 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산 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온 나라가 안으로 곪을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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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라이벌, 남명과 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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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이후에는 퇴계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류산(지리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했고, 남도에서는 의(義)를 앞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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