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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예술의 개념
김성호 (미술평론가)
서론
이 글1)은 융합예술의 개념을 검토한다. 21세기에 대두되고 있는 융합예술에 관한 실천적 논의는 대개 과학 혹은 테크놀로지가 주도하는 가운데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 핵심도 대개 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예술의 매체적 확장과 타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는 형식적 이종혼성에 집중하고 있다. 일테면 다음과 같은 필자의 분석이 예시하고 있듯이 말이다. ①‘예술+예술’(예술의 장르별 통합), ②‘예술+비예술’, ③‘예술+테크놀로지’, ④‘예술+컨텍스트’ 2)
반면 융합예술의 본질적 개념이란 20세기 포스트구조주의의 담론에서 구체적인 뿌리가 찾아진다. 그것은 융합이라는 개념과 마치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데리다의 해체, 들뢰즈의 정신분열증과 같은 개념들과 마주한다. 융합과 해체가 어떻게 같은 뿌리로 이해될 수 있을까?
우리는 본론에서 이 상이한 개념이 만나는 지점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융합예술의 개념을 이해하는 단초를 마련하고자 한다.
아울러 일상과 차별화되면서 지켜왔던 예술의 독자적 영역이 모호하게 되면서 초래된 오늘날 예술의 위상을 보드리야르의 ‘예술의 무가치’론과 아서단토의 ‘예술종말론’을 검토하면서 예술과 일상의 통합이 결국 오늘날 융합예술의 개념을 전개시켜왔음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개입하는 과학 혹은 테크놀로지의 노력이 무엇이었는지를 검토하면서 과학이 접근하는 융합예술에 대한 오해 또한 세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이 글이, 미디어아트로 대별되는 융합예술의 위상이 오늘날 우리의 예술현장에 던지는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1. 해체로부터 융합_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
아이러니하게도, 융합(convergence, fusion)의 개념은 데리다(J. Derrida)의 해체(déconstruction)와 같은 상반되어 보이는 개념들로부터 일정 부분 빚지고 있다.
그런데 데리다에게서 해체란 부정적 파괴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언어 이상(plus d'une langue)”3)으로 더 이상 하나의 언어가 아님을 의미한다. 즉 해체란 자기 동일성을 지니지 않은 복수성(multiplicté)의 상태로, 어떤 중심을 만들지 않으며, 설령 중심이 있더라도 그 중심은 고정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차연(différance)만이 적용되는 일종의 비위치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데리다의 해체는 “스스로 해체되는(ça se déconstruit)”4)것이자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개념과 담론들 안에서 의미가 아직 미정인 상태로 남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운동, 즉 ‘탈-전유(ex-apprioriation)’의 운동들5)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고정된 중심을 거부하고, 잠정적으로 정해진 위치들이 끊임없이 떠도는 자유로운 놀이가 된다.
그렇다면 융합은? 융합 역시 다르지 않다. 데리다에게 있어 해체란 차연의 결과이듯이, 데리다식式으로 말하면 융합 역시 차연의 결과에 다름 아닌 셈이다. 데리다가 융합이란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그의 ‘텍스트’ 개념은 우리의 융합 개념과 부합한다. “우리가 생산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필연적으로 텍스트이다.”6)라는 그의 언급처럼 그에게 텍스트란 생산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텍스트를 정신과학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정신생리학과 물리학까지 포괄하고자 한다.7) 아니 더 나아가 아예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il n'y a pas de hors-texte)”8)라고 선언하기까지 한다. 결국 그에게 있어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생산이라고 하는 텍스트성에 있어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리다에게 있어 생산성의 텍스트(우리가 융합으로 간주하는) 자체는 이미 해체론적이다. 텍스트에 내재하고 있는 의미는 언제나 중층적으로 규정되는 상호텍스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텍스트 내에는 이미 다른 텍스트의 trace들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의 trace은 다른 trace들에 빚지면서 나타난다. 텍스트를 구성하는 trace은 ‘trace에 trace을 더하는 제3의 trace’으로서 중첩된다. 이 세계에는 하나의 텍스트가 생성하는 동시에 또 다른 텍스트가 소멸하기를 거듭하는 일련의 사건, 즉 상호텍스트성으로 가득하다. 즉 융합과 해체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그가 머리말, 각주, 인용 등을 거론하면서 그것들이 텍스트 자체일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듯이, 그에게 텍스트는 그 자체가 인용의 반복이요, 각주들의 짜깁기이다. 그것은 참조, 주석, 인용, 콜라쥬, 보충들로 둘러싸고 채우는 일을 한다. 9)
이것을 우리의 융합 논의와 관련하여 생각하면, 세계의 파편들 혹은 아주 미천한 보충물조차 이미 생산성의 텍스트이며 그것은 이미 세계인 것이다. 즉 차이들이(데리다의 차연들이) 만들어내는 무한 생성 운동 그 자체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물리학에서 수소, 중수소, 3중수소 등 가벼운 원자핵끼리 융합하여 거대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핵융합(nuclear fusion)을 상기시키지만, 융합의 철학적 개념이 이것과 다른 점은 ‘그것이 언제나 원인과 결과를 잇고 있는 순차성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에 있다. 그것은 쉼 없는 운동의 양태로 무한 지속되는 것이다. 우리가 융합으로 바라보는 데리다의 텍스트가 이미 해체를 바탕으로 하고 있듯이, 우리의 논의 예술융합에서 융합이란 이와 같은 해체적 개념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J. Derrida
2. 해체/융합_들뢰즈의 차이(différence)
융합과 해체의 상호텍스트성은 데리다의 철학에서보다 들뢰즈(G. Deleuze)의 철학에서 보다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메시지로 드러난다. 우리가 데리다의 차연과 관련한 해체로부터 융합의 개념을 도출해내는 수준이라고 한다면, 들뢰즈는 이러한 해체와 융합이 차이의 개념을 통해서 하나로 묶여있다. 그의 해체/융합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와 가타리(F. Guattari)의 공저에서 나타난 리좀(rhizome)에서 이러한 개념을 살펴볼 수 있겠다. 주지하듯 리좀이란 바랭이(crab-grass) 혹은 잡초(mauvaise herbe)처럼 뿌리 같은 형태로 변형된 복수의 줄기들을 가진 근경식물(plante sans racine)이다. 리좀은 복수성의 변형줄기를 통해서 수목식물(arbres-racines)의 법칙에 저항하는 반계통학(l'anti-systématique)을 실현한다. 그들이 언급하는 리좀의 6가지 법칙들10)에서 3번째 ‘복수성의 규칙(Principe de multiplicité)’은 이러한 차이들의 융합/해체의 개념을 전사한다. 그들은, 리좀의 복수성을 n-1이라는 수식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n은 일반적 개체이고 1은 우월한 어떠한 존재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리좀의 복수성은 하나의 우월한 어떤 존재를 덧붙임으로써 가능한 n+1의 차원의 복수성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우월한 어떤 존재를 없앰으로써 가능한 n-1의 차원의 복수성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차이들이 ‘단일체(unités)’를 형성하지는 않지만, 운동체(mouvantes)로 존재하는”11) ‘탈중심적 복수성’으로 우리의 논의인 ‘융합/해체’에 다름 아니다. 리좀이란 출발도 도달도 없이 언제나 사물들 사이에 있는 사이 존재(inter-être) 또는 인터메쪼(intermezzo)이면서도12) 파열(rupture)과 탈주의 선(ligne de fuite)을 종국까지 밀고 가는13)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리좀이란 ‘-이다(être)’의 존재이기보다는 ‘-되다(devnir)’의 존재, 즉 운동체의 존재인 것이다.
들뢰즈의 알(œuf)은 또 어떠한가?
알이란 들뢰즈에게 있어 기관들이 분화되지 않은 “유기적이지 않은 생명 전체”14)이며 “비생산적이고 비소비적이지만, 욕망 생성의 모든 과정을 등록하기 위한 표면을 제공”15)하는 미분화 단계의 장이다. 그것은 ‘기관없는 신체(le corps sans organes)’로서의 잠재적 실재의 양태이다. 이러한 불투명(우리의 논의 식으로)하고 잠재적인 존재인 알은 “기관의 조직화와 유기체로의 확장은 물론 계층의 형성 전에 이미 가득한”16) 존재이다. 기관 형성 전에 “이미 운동 중인”17)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존재인 알은 내포량을 분배하고 쪼개며 분화되고 개체화된다. 그것은 운동성이자 운동하고 있는 경향들18)인 실재이다. 들뢰즈에게서 운동(mouvement)이란 “전체 속에서의 질적 변화(changement qualitatif dans un tout)” 19)이듯이, 이질성이 지속하는 ‘차이의 반복’을 통해 끊임없이 운동을 생성한다. 물론 여기서 “반복은 본질적으로 재현표상과 다르다.” 20) 그것은 언제나 이질성의 반복인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의 비유 ‘리좀’과 ‘알’은 차이의 복수성이 만드는 융합이자 탈주의 운동을 지속하는 해체이다. 즉 융합/해체의 존재이다.
우리의 융합예술 논의에 따라 번안, 종합하면, 데리다에게서 융합이란 해체를 중심으로 한 차연의 지속적 생산에서 도출될 수 있는 개념이었다면 들뢰즈에게서 융합이란 해체/융합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운동을 벌이고 있는 차이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데리다의 해체나 들뢰즈의 정신분열증 그리고 우리의 논의인 융합예술의 공통점이란 차이들이 생성시키는 무한한 운동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G. Deleuze
3. 예술과 일상의 융합-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데리다의 차연과 해체 그리고 들뢰즈의 차이와 해체/융합이 야기하는 운동성으로서의 융합이란 실제로 예술융합의 현장에서 어떠한 담론들로 구체화되었을까?
양자의 철학에서 해체와 융합이 기실 같은 뿌리처럼 사용된 개념들은 미국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아서단토(A. Danto)의 역사철학에 근거한 예술철학에서 하나의 정점으로 정의된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영향관계를 언제나 서술해야 하는 특성상, 융합의 개념은 1960년대의 한 시점을 ‘예술종말’이란 이름으로 구체적으로 장착된다.
구체적으로 아서 단토가 1984년 예술종말을 선언하게 된 계기는 20년 전인 1964년 뉴욕의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전시되었던 앤디워홀의 작품 브릴로 박스를 본 충격으로 거슬러 올라가 깊은 재성찰을 거치면서 비롯되었다. 슈퍼마켓에서 볼 수 있는 브릴로 박스와 그것을 똑같은 양상으로 재현한 앤디워홀의 브릴로 박스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에 대한 심각한 사유는 결국 일상과 예술의 차이를 식별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결국 슈퍼마켓의 산업생산품과 워홀의 예술작품 사이, 즉 일상과 예술작품 사이의 ‘식별불가능성(indiscernibility)’21)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일상과 예술의 융합을 선언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 이전까지의 그린버그 식의 ‘훈련된 눈’22)으로 가능했던 예술과 일상의 구분은 이제 아서단토에 이르러 불가능해졌다. 달리 말하면, 예술을 일상과 다른 것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기에 예술의 위상을 철학과 미학으로 서술하는 것 자체가 브릴로 박스의 등장 이후 이제는 불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단토에게 있어,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일상을 주요 소재와 테마로 삼아온 팝아트 경향의 당시 미술 현장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일상과 예술을 동일시하게 된 팝아트류의 당대 예술은 이제 일상과 그 차이를 식별할 수 없기에 일상과 별리된 예술의 위상을 설명할 길이 막연해진 것이다.
그래서 단토는 이 식별불가능성에 대한 해답을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문제가 아닌 ‘어떻게 그것이 예술이 되는가’의 문제를 통해서 풀어가기로 했다. 즉 그것은 관계의 차원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문제는 우리가 무엇에 관계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관계하느냐는 것”23)이다. 그래서 팝아트 이전까지의 예술과 일상과의 관계의 역사를 검토한다.
단토의 견해로는 이 시대 이전에는 예술이 일상과 구분된 탓에 충분히 그 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파악했다. 그 예로 그는 이전까지의 예술을 두 개의 시대로 구분하고 팝아트 이후를 하나의 시기로 펼쳐놓는다. “처음에는 미메시스의 시기이며 이데올로기 시기가 그 다음을 따르고, 그 다음은 역사후기(post-historical)의 시기”24)로 전개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는 본연의 미술개념이 잉태했던 13C로부터 20C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를 ‘바자리25) 내러티브’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재현 미술의 역사가 실재와의 유사성을 목적으로 진보해간다”26)는 내러티브이다. 따라서 이 시대를 단토는 모방에 근거한 담론인 미메시스(mimesis)의 시기라고 규정했다. 한편, 20C로부터 20C중후반(1964년 워홀의 브릴로 박스 나아가 1960년대 팝아트)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를 단토는 ‘그린버그27) 내러티브’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당시의 예술은 ‘매체의 물리적인 조건에서 미술의 고유한 특징을 찾는 일’28)에 집중했던 예술창작이었고 “매체의 극한을 받아들여 각각 분리되고 집중되고 규정”29)되는 종착점이었던 추상미술의 경향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린버그에게 있어서, “캔버스의 평평한 표면과 같은 매체적 한계가 오히려 모더니즘 시기에 이르러서는 회화가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긍정적이고 가중 중요한 본성”30)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평면이라는 2차원성은 어떠한 다른 예술과도 공유하지 않는 회화의 유일조건이었기에, 모더니스트 회화는 어떠한 다른 것과도 공유하지 않는 평면성 그 자체로 적응해 왔다.” 31)
이렇듯 종국에 극도의 평면성을 강조하는 추상예술을 극단으로 두고 팝아트에 이르러 마감하는 이 시대의 예술은 늘 새로운 것들로 충만하기를 염원했던 탓에, 전통의 구식의 것으로 내몰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지속적으로 창출해 나갔음을 성찰하면서 단토는 이 시대를 ‘이데올로기의 시기’로 명명한다.
반면, 추상의 끝에 도래한 팝아트의 양상을 단토는 어떠한 내러티브로도 규정할 수 없었다. 일상이 예술 안에 깊이 잠입하여 일상으로부터 예술을 분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토는 예술종말을 선언한다. 철학의 어떠한 내러티브로도 설명할 수 없게 된 팝아트의 시대로부터 그동안 진술 가능했던 거대 내러티브가 결국 종말하고 말았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예술의 종말이란 결국 일상과 한 덩어리가 된 예술을 설명할 거시적 내러티브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즉 예술에 관한 새로운 거대 내러티브가 종말했음을 말한다.
단토의 견해로는 이제 진보적인 거대 내러티브는 사라졌다. 이 시대에 남은 것은 거시적 내러티브로 설명할 수 없는 다원주의 미술이다. 예술을 설명해왔던 진보적 거대 내러티브가 소멸했다는 차원에서 그는 워홀의 브릴로 박스(넓게는 팝아트)의 시대를 기점으로 예술종말을 선언하고 팝아트 이후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를 이제 ‘역사 후기의 시기’로 상정한다. 종말을 통해 열리는 역사 후기 시대란 마치 기독교의 종착 지점인 ‘천국’, 막시즘의 종착지인 ‘계급 차별이 없는 평등의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즉 단토는 우리에게 ‘목적론적 종결점(a teleological end-point)’에 이미 도달했음을 거듭 상기시킨다. 그래서 일상과 예술이 융합된 종말 이후의 시대에 위치한 지금의 컨템포러리 시대에는 더 이상의 진보적 행진이 없음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관론이기보다는 새로운 시대의 열림을 천명하는 것이다. 더 이상의 진보적 내러티브가 없는 이 시대에는 모든 것이 가치를 지니며 모든 것들이 동등하게 자격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단토의 예술종말론이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는 희망이란 이와 같이 모든 스타일이 가능한 다원주의적 양상의 풍부한 가능성과 정당성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예술종말 이후의 시대에 등장하고 있는 오늘날 다원주의 예술이란 저마다 상대적 가치 판별이 가능한 다원주의비평으로 그 가능태가 보다 더 넓어진 희망적 세계가 된다.
A. Danto
4. 일상과 예술의 융합-보드리야르의 ‘예술의 무가치’
물론 ‘일상과 예술이 융합된 다원주의예술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 또한 없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의 평범한 한 미술에세이 ‘예술의 음모(Le complot de l'art, 1996)’32)에서 이러한 비판적 논의들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글은 비록 전문적인 논문의 성격을 띠고 있지 않은 그저 한 편의 ‘미술에세이’일 뿐이지만, 이 글이 당시의 프랑스 사회에 미친 파장은 자못 심대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예술(art)과 비예술(non-art)이 혹은 예술과 일상이 서로의 정체성을 닮아가게 되면서 야기되는 부정적인 견해들로 가득하다.
보드리야르는 “나는 무가치하다, 나는 무가치하다, 정말 무가치하다.”33)라고 한탄한다. 이러한 한탄은 미학이 예술의 위기로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조였다. 구체적으로 그의 한탄은 예술이 일상의 평범함으로부터 줄곧 벗어나려 하고 고상함과 초월적 가치를 독점하려고 시도하면서 특권화하려는 태도를 지속하게 되는 상황으로부터 출발된다.34) 즉 현대예술은 이제 일상과 별리된 ‘예술로서의 초월적 가치’를 찾을 곳이 더 이상 없게 되자 일상 자체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즉 그에 따르면 현대예술이란 “진부함, 쓰레기, 보잘것없음에 이데올로기와 가치를 부여하고 적용시키는 것”35)이다. 그럼으로써 art은 오히려 일상과 하등의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예술이 일상과 구분되려고 애쓰다가 아예 일상이 되어버린 셈이다. 결과적으로 일상의 세계 전체는 어느덧 미적으로 되어버렸고, 예술은 미적 가치를 상실한 평범한 일상이 되고만 것이다.36) 어느 것이 예술이고 어느 것이 일상인지 구분조차 불가능하게 된 세계를 구현하게 된 것이다.
“환영의 욕망을 잃어버린 예술 역시 미학적 평범함에 이르는 모든 것을 고양시키기 위해 결국은 초미적(transesthétique)인 것이 되었다” 37)
달리 말하면 오늘날 예술이 가장 외설스러운 것과 가장 평범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미적으로 추구하게 됨으로써 미적인 것이 결국 평범함에 이르게 되어 오늘날 예술은 초미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초미적이란 미가 너무 많아 더 이상 미가 아닌 지점에 이른 것에 다름 아니다. 즉 한마디로 현대예술이 무가치해졌다는 것이다. 38)
특히 보드리야르는 컨템퍼러리 문화에서 모든 것에 대한 미적 가치 추구가 결국 미적 가치의 소멸을 가져오게 될 것을 경계한다. 그것은 ’모든 대상이 미적 대상이 된다면, 결국 어떤 것도 미적 대상이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보드리야르는 ‘가치의 과도함이 오히려 평범함과 무가치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포르노그래피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
“실제로, 그 자체로 포르노그래피라고 할 만한 것들은 이제 더 이상 없다. 왜냐면 포르노그래피는 사실상 도처에 있고, 그것의 본질은 시청각과 시각에 관한 모든 기술들 속에서 이미 과거화되었기 때문이다.” 39)
따라서 오늘날 포르노그래피가 만연하게 된 이후에는 환영에 대한 성적 욕망이 가득한 외설스러움이 사라지고 무관심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미의 과도함으로 인해 초미적(transesthétique)으로 된 현대예술 또한 무의미(non-sens)와 무가치(nullité)에 이르게 한다. 미의 과도함으로 인해 미술의 미적 가치를 판단할 수 없게 되고 그것이 결국 무관심적이게 된 것이다. 그의 입장으로서는 현대예술에는 더 이상 가치의 법칙이 없으며, 불확실성(incertitude)와 ‘미적 가치판단의 불가능성’(l'impossibilité d'un jugement de valeur esthétique)만이 있을 따름이다. 40)
결국 그는 세계 전체가 미적인 것으로 된다는 사실이 예술과 미학의 종언을 어느 정도 의미한다고 바라보면서 예술의 이러한 ‘미적 포화상태가 미술의 종말의식을 일깨우는 것’으로 역설한다.41) 즉 그는 너무나 많은 예술이 있기 때문에 예술이 죽는다고 말하기까지 이른다. 42)
그렇다면,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받는 예술을 많은 사람들이 가치가 있다고 믿으면서 예술을 가까이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보르리야르는 ‘이미 무가치한데도 무가치를 지향하는 것’이 바로 ‘현대예술의 이중성’이라고 설파한다.43) 그 이중성의 원인을 그는 ‘예술의 음모(Le Complot de l'art)’로 정의한다. 그것은 예술이 무가치한데도 가치 있다고 설파하는 다름 아닌 전문가들의 범죄(délit d'initié)이자 그들의 공모인 것이다. 이처럼 보드리야르는 예술계와 일상계의 간극이 모호하게 된 오늘날 예술의 존재론적, 의미론적 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일상이 예술을 흉내내고 예술이 일상과 다를 바 없어지는 이러한 예술=일상이라는 융합의 결과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논의의 한계는 있지만, A. Danto가 예술종말을 통해서 다원주의미술이라는 긍정적인 지평을 열고 있다고 한다면, 보드리야르는 예술종말을 통해서 ‘art의 무가치’를 주장하면서 비주얼아트의 존재론에 대한 부정적이고 회의론적인 시각을 전개한다. 그럼에도 둘의 사유에는 예술계와 일상계 사이에 놓인 경계의 모호함을 인식하고 예술종말을 검토하는 관점이,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공통적으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J. Baudrillard
5. 테크놀로지가 오인하는 통섭(consilience)과 융합예술
‘예술=일상’이라는 융합은 단토의 역사철학적 비평이론과 보드리야르의 사회학적 비평으로부터 문제의식(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을 드러내고 있는데 반해, 테크놀로지는 주도하는 융합, 더 나아가 융합예술은 거의 낙관적인 미래로 우리를 인도한다.
하지만 이것은 최근 유비쿼터스 컴퓨팅(ubiquitous computing)의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시도하는 컨버전스라는 ‘융합(convergence 또는 amalgamation)’의 환상과는 다른 지점에 존재한다. 테크놀로지가 주축이 된 융합(convergence)은 영역 간 모든 통합이라는 융합(consilience)과 그 개념을 일정부분 공유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다르다. 오늘날 모바일과 같은 하나의 기기에 팩스, 전화, 카메라, 티브이, 계산기, 캘린더, 시계, 게임기, 네비게이션, 인터넷 등의 가능한 모든 테크놀로지를 담아내 융합시키는 ‘융합(convergence)’은 하나를 통해 모든 것(여러 가지 기능)을 해결해낼 수 있다는 환상을 드러낸다. 그런 탓인지 미디어공학이 주축이 된 상태에서 예술을 융합하는 일련의 움직임들을 혹자는 퓨전아트(fusion art), 컨버전스아트(convergence art)로 지칭하면서 예술과 기술의 합체적 실현의 무한한 가능성을 실험한다.
하지만,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주도하는 예술과의 융합(convergence)은 오늘날 맥락이 중심되는 상황 속에서 예술의 융합화가 형성되고 있는 다원주의 예술과는 다른 차원이다. 동시대 맥락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예술 유형과 융합한 것들은 대부분 미디어아트라는 협소한 영역으로 귀결되는 것이며 많은 부분 그것은 예술이라고 하기에 주저되는 것들이기 쉽다. 이것은 기술 본위의 환원주의적 융복합 경향이 만들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융합예술 논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환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데 있지 않다. 또한 상호간의 차이나 다양성을 배제하고 신기술로의 융합을 주도하는 데 있지도 않다. 진정한 의미의 융합예술이란 새로운 합체의 덩어리들을 만들어나가는 디지털 융합(convergence)의 위상과 달리 융합과 분리가 언제나 유기적으로 발생하는 만남이다. 상호간의 다양성과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상태에서 융합하는 융합(consilience)의 위상과 융합의 모든 요소들이 맥락마다 가치를 지니는 다원주의(pluralism)의 위상을 견지한다. 이런 까닭은 예술이란 본성 자체가 태생적으로 경계를 넘어서는 자유를 추구하는 지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자율적 예술의 진보적 역사가 종결한 오늘날에 이르러 이와 같은 예술의 다원주의적 본성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의 예술통합 양상은 테크놀로지가 주도하는 디지털 컨버전스의 테크놀로지 환원주의의 유형으로 종종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통합이란 '예술+예술, 예술+비예술, 예술+테크놀로지, 예술+컨텍스트' 등, 여러 속성들이 다차원적으로 통합하는 비환원적이고 수평적인 통합을 늘 열어둔다. 예술의 정체성이란 태생적으로 어느 곳에 귀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탓이다. (S.H)
융합예술이 야기하는 동시대 다원주의예술의 미학 역시 통섭을 지향한다. 그런데 오늘날 융합예술은 앞서도 지적했듯이 디지털 컨버전스 경향처럼 테크놀로지가 선도하는 가운데 창출되는 양상이 부쩍 늘면서 기술공학의 환원주의적 모양새를 띠고 있는 것이 다반사이다. ‘예술+예술’ 식의 예술의 탈장르적 모색은 이미 나올 것이 다 나왔다는 융합예술의 현상은 이제, ‘예술+비예술’ 식의 영역 확장이 기술공학적 차원에서 주도됨으로써 테크놀로지에 근간한 매체미학의 담론만이 무성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다원주의예술에 관한 테크놀로지 관련 논의 외에는 인문학적 성찰이 일정부분 정체된 채로 이전 담론의 재생산에 집중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국내의 통섭에 관한 논쟁들은 예술의 융합과 다원주의예술에 대한 테크놀로지 중심의 논의로부터 탈피해 또 다른 가능성 있는 담론을 재창출해낼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고 있다.
유념할 것은 통섭이란 모든 분야의 ‘대립과 다름’을 한곳에 모아 논쟁을 촉발시키고 만나게 하는 장(field)이자, 작용(action)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조화를 조화의 것으로 탈바꿈하는 개념이자 실천이다. 그것이 일반론이다.
그러나 통섭의 실천의 차원에서 검토해야만 할 사항이 존재한다. 거시적으로는 모든 것들의 대융합 즉 ‘사물에 널리 통함’과 ‘소통’의 위상에 공감하면서도 미시적으로는 통섭의 주체들이 관성처럼 양자의 ‘(가족) 유사성의 원리’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다름(부조화)을 같음(조화)에 담아내기 위해서 양자가 논쟁하고 힘겹게 싸우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질적 주체들(일테면 과학과 예술, 고고학과 정치학 그리고 수학과 철학)이 통섭을 시도함에 있어서, 상호간 빈번히 접하게 되는 소통의 불능을 이유로 ‘다름 속에서 모색하는 유사한 것들에 관한 관심’을 과도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미술의 시지각적 연구와 과학의 광학연구가 결합하고 고고학의 유물 연구가 정치학의 정치역사와 결합하는 식의 ‘유사성의 원리’에 집착하는 것이다.
더 심한 것은 아예 유사한 주체들이 유사성의 원리를 찾아나서는 안일한 통섭을 시도하는 경우이다. 일테면 과학의 인공지능과 의학의 뇌연구가 결합하고, 커뮤니케이션학의 미디어 소통과 정치학의 미디어 선거가 결합하는 식의 연구 같은 경우이다. 물론 통섭의 실천에 있어서는 이러한 유사성에 근간한 소소한 결과들이 모여 파생적 효과를 발생하고 그 통섭의 결과들이 또 다른 통섭의 결과들을 만나 확장된 담론과 실천을 만들어나간다는 점에서 그다지 비판거리만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융합예술을 논의하는 이 장에서 예술은 태생적으로 다름에 끊임없이 침투하고 금기의 영역을 거리낌 없는 질주하는 존재라는 점을 상기할 일이다. 예술이란 유사성의 원칙을 넘어서는 통섭을 지속적으로 도모하는 존재이다. 여기에 융합예술 혹은 예술통섭의 주요한 화두가 놓여 있다
6. 융합/통섭을 지향하는 예술의 고유 위상과 창발성(emergence)
문제는 예술의 입장에서 다른 영역들과 융합 혹은 통섭을 시도할 때 겪는 어려움이다. 통섭의 각 주체들이 대개 ‘소통의 어려움’이라는 번거로움으로 예술과의 통섭을 거리끼거나 아예 예술장르끼리 시도하는 융합예술의 통섭 원리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통섭의 다른 주체들이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예술의 영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예들이 다반사이다. 특히, 수학, 기술공학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예술은 대립되는 것으로부터 대립 자체의 통섭을 시도하길 즐겨한다. 전혀 닮아 있지 않음마저 선뜻 공유하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이론으로 이런 특징을 살핀다면, 예술은 태생적으로 ‘복잡계’를 지향한다.
상대성이론, 양자이론과 함께 현대 물리학의 3대 이론인 ‘복잡계(複雜系, complex systems)’ 이론은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구성성분 간의 다양하고 유기적 협동현상에서 비롯되는 복잡한 현상들의 집합체’ 이론으로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한 종래의 견해가 하나의 원인에 대응하는 하나의 결과라는 단순한 관계의 설정이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비롯된다. 복잡계는 ‘소소한 미시적 사건이 주변에 다양한 작용으로 영향을 미치고 융합되어 점차 거시적 영향력을 갖게 되는 시스템’에 다름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복잡계는 외형상으로 질서를 판별하기 어려운 혼돈과 무질서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복잡계의 실체는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경계면에서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균형을 이루고 보다 발전적인 새로운 질서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태생적인 예술의 정체성과 닮아 있다.
조직 경영과 관련해 설명되고 있는 한 복잡계 모델
이러한 예술들이 모여 융합을 시도한다면? 통섭을 추구한다면? 예술이라는 유사영역이지만 예술의 언어가 각기 다른 미술, 음악, 영상이 만난다면? 그들이 모여 상호간 간섭 없이 각자의 예술언어들만 실천한다면?
그것은 뮤지컬이 아니다. 그것은 퍼포먼스아트도 아니다. 얼추 퍼포밍아츠의 범주에 들어설 수 있지만, 그것도 아닌 예술의 움직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통섭을 바라보는 이들은 예술통섭의 상호 주체들이 무슨 해결책에 이르려고 하는지 주목할 것이다. 통섭의 다수가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것들마저 상호의 목표를 융합시켜 또 다른 것의 생성과 해결책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의 통섭은 그다지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 예술은 해결책을 내놓기보다는 끊임없이 미지의 영역을 넘나들며 질문만을 던지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금기의 영역마저 들어가 대책 없는 질문만을 던지는 속성 또한 없지 않다. 예술통섭에서 해결책에 관심 없는 예술이 서로 모여 여전히 해결책을 구하지 아니하니 다른 통섭의 주체들이 보기에는 답답할 것이다. 태생부터 복잡계인 예술인 또 다른 예술을 만나며 통섭을 시도하는 가운데서 그저 서로를 놔두기만 하니 어찌 답답하지 아니할까? 그래서 관자들은 예술통섭에서도 서로의 작용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통섭의 주체들이 등장하길 바란다. 그러나 예술통섭이란 ‘그저 섞어 놓아둠’이다. 그것은 융합예술 혹은 예술통섭이 애초 지향하는 바이다.
그런 차원에서 융합예술 혹은 예술통섭에 따른 주요한 논의는 창발성(emergence, 創發性)에 주어진다. 번역용어인 창발성은 국내에선 1990년도 전후부터 생태학과 인지과학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 사회학에 도입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불시에 솟아나는 특성(emergent property)’을 의미하는 창발성은 개별 요소에서는 특성이 별반 없던 것이 집단을 이루면서 폭발적으로 어떠한 현상을 발생시키는 것을 주로 지칭한다.
예를 들면, 물의 예처럼 원자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성질이 분자의 단계로 융합되면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개미나 꿀벌이 개체 수준에서 보이지 않던 역동성을 집단성으로 확장되면서 드러내는 현상도 이와 같은 창발성에 해당된다. 개미탑을 쌓거나 벽을 허물수도 있는 집단의 힘, 그것은 개체 단위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처럼 구성요소(또는 하위계층)에는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전체 구조(또는 상위계층)에서 돌연히 출현하는 현상이 창발성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분히 자발적이다. 통제나 조정을 통해 드러나는 현상이 아니라는데 우리의 논의가 있다. 생각해보자. 어떠한 사회조직의 역량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조직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조정체계는 오히려 비효율성을 유발시키고 역효과에 이른다는 사례적 분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직의 구성요원들로부터 통제나 감시를 거두어냈을 때 그들로부터 자발적인 집단의 힘은 가시화된다. 창발성은 교육되거나 통제되기보다는 자생적인 집단의 힘이기 때문이다. 통제 없는 조직은 피상적으로 무질서해 보이는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복잡계의 원리에 따르는 거시적이고도 자발적인 질서의 현상을 창출한다. 헐거운 듯 보이는 그들의 네트워크는 복잡계 이론처럼 창발성을 따라 어느덧 구성요소들 간의 순환이 활발히 작동하면서 통제 상태 없는 가운데서 집단적 현상을 극대화한다.
예술통섭의 주체들은 각 통섭의 주체(특정 예술이라는 구성요소) 자체도 예술의 특성상 복잡계 영역에 다름없어 자발적인데 이들이 통섭된 주체(융합예술의 전체구조)는 더더욱 자발적인 것이다. 창발성 자체가 융합예술 혹은 예술통섭에서는 더더욱 구현될 가능성이 큰 셈이다. 창발성이라는 것이 구성요소에서 부재하던 현상이 전체구조 속에서 발현된다는 현상을 가늠할 때, 즉 특정 장르의 예술이라는 구성요소에서도 부재하던 현상이 융합예술/예술통섭이라는 전체구조 속에서 발현될 양상은 그렇게 가늠하기 쉽지 않다. 예술 자체의 자발성이 융합예술/예술통섭에서는 어떠한 힘으로 집단화되고 어떠한 창발성으로 폭발할 것인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긍정적 불확실성이다. 구체적 양상에 대한 예측 불가능함에도 그것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그것은 긍정적 불확실성이다. 그런 차원에서 융합예술/예술통섭의 창발성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적 역동성과 늘 관계한다.
결론
융합예술과 관련한 우리의 논의에서, 장르별 예술의 융합, 예술과 비예술의 융합, 매체와 매체의 융합을 형식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검토하는 일52)은 필수적이지만, 여기서는 그 논의를 생략했다. 그보다 관건은, 융합예술의 동시대적 맥락(context)을 파악하는 일이다.
역사적 전개에 따른 예술의 확장과 융합에서 발견하게 되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현대예술의 영역 확장과 탈경계의 시도를 통한 발전적 전개가 어떤 면에서는 원시시대의 토털아트(total art)의 지대로 회귀한 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 대한 상기일 것이다. 즉 삶, 종교, 도덕, 정치, 예술이 한데 어우러진 원시시대의 토털아트는 오늘날 모든 예술 장르와 매체 그리고 비예술적 요소가 서로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는 융합적 예술 -퓨전아트(fusion art), 컨버전스아트(convergence art)로 곧잘 표현되는 -의 지향점과 닮아있다. 특히 일상과 예술의 융합이라는 차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하인리히 뵐플린의 양식사적 비평의 관점에서 언제나 예술은 ‘반복과 비가역성에 기반’한 채 역사 속에 살고 있다는 ‘양식의 이중근원’53)을 상기해볼 때, 오늘날의 컨버전스아트의 융합적 양상은 원시시대의 토털아트의 양상과는 명백히 다르다. 오늘날의 복잡다기한 예술의 장르별 영역확장, 예술과 비예술 간의 국소적 이종생성, 이종융합의 개념과 원시시대의 분화되지 않은 토탈아트의 차원은 분명 다르다.
모든 것이 뒤섞여 있던 원시시대의 토탈아트가 점차 일상과 차별화되는 예술의 유형으로 전개되면서 모더니즘 시대까지 지속되어 오다가 1960년대 일상과 다시 만나고, 컨템퍼러리 시대인 오늘날 어느덧 융합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놓기에 이르렀다. 최근, 이러한 흐름을 선도하려는 테크놀로지가 잰걸음으로 내달리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철학이 융합예술 사유의 단초를 마련하고 예술이 그것을 무한정 실험해오고 있었을 때도 가만있던 테크놀로지가 최근 생색을 내고 있는 중이다. 과학 혹은 기술이란 이름으로 테크놀로지는 최근 컨실리언스와 컨버전스를 선언하면서 문화와 예술도 그러하라고 보채고 있는 중이다. 인류를 염려하는 테크놀로지의 눈부신 활약과 더불어 예술 영역에 대한 융합 독려는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합리성, 예술적 창의성이 한데 만나 간섭 효과를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각자의 목표들이 지향하는 것 이상의 효율적 목표를 창출하려는 목표를 십분 달성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
들뢰즈는『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phie)』라는 저작에서 예술은 감각의 창조, 철학은 개념의 창조, 과학은 기능의 창조라는 상이한 목표를 지니고 있음을 설파한다. 예술의 장르별 융합과 마찬가지로 예술과 예술 아닌 것들의 융합은 결국 상이한 목표를 지니고 있는 것들의 목표를 함께 동시대의 맥락 속에서 공유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것들이 상호교차되고 얽힐 수 있음을 인정한다. 예술/감각의 창조, 철학/개념의 창조, 과학/기능의 창조는 두뇌 속에서 모두 경합하고 간섭한다. 이 때 예술과 철학은 감각과 개념의 창조를 통해 카오스/무한을 향해 가속하며, 반대로 과학은 기능의 창조를 통해 코스모스로 감속한다.54) 이 모두는 환원불가능한 방식으로 두뇌 속에서 서로 간섭한다. 이런 간섭 현상 속에서 예술은 비예술을, 철학은 비철학을, 과학은 비과학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런 간섭을 통해 각각의 새로운 생성과 발전이 촉진된다
예술이 융합예술이라는 화두 앞에서 고민해야 할 것이 있다면, 융합을 무한정 열어두되, 그 융합 대상자가 테크놀로지일 경우에는 특히 상호 간섭 현상의 주도권을 주지 말 일이다. 테크놀로지가 주도하는 융합에는 예술은 언제나 디자인을 위한 도구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생각할 일이 있다면, 우리는 ‘예술/비예술/일상/인문학/테크놀로지’라는 융합 현상 이전에, 우리는 시대적 구분과 그다지 상관없이 태생적으로 융합과 통섭의 자발적 의지와 창발성을 이미 감행해왔던 예술 본연의 정체성을 상기할 일이다. 그러한 예술이 ‘융합예술로 함께 달리기 대회’에 끌려 나가 테크놀로지와 다리를 함께 묶고 그들이 이끄는 목표지점으로 절뚝거리며 꼭 달려 나가야만 할까? 그들이 이끄는 목적지가 ‘뻔’한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합예술이 시대적 요청이라면, 예술가들은 테크놀로지와 함께 절뚝거리는 경험 정도는 할 필요가 있을 법하다. 아울러 ‘융합예술로 함께 달리기’ 대회에 나가지 않는 예술가들은, 예술이라는 정체성이 융합이라는 것을 언제나 자발적 의지로 실행해왔음을 상기하면서 안위할 일이다. 융합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테크놀로지가 지향하는 ‘뻔’한 목적지와 달리 언제나 예측 불허의 목적지, 정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무작정 걷는’ 예술 본연의 정체성을 거듭거듭 되새길 때 빛을 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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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생략
출전 /
김성호, “융합예술의 개념”, 특집_융복합예술의 현황과 전망,『계간 예술문화비평-A Quarterly Criticism of Art & Culture 』, Issn 2234-1323, 2012. 12. 1. 겨울호, 제 7호, 한국예술문화비평가협회, pp.1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