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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미팅 페북에 실린 글입니다.
'구봉이의 정치일기'
불가사의 ④ 재산 -재산을 버리는 투자-
박원순의 재산이 얼마나 될까? 필자도 궁금하다. 아마 상상외로 적을 것이다. 그의 재산목록이 공개되면, 재산과 관련된 의혹의 대부분은 해소될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가지고 있던 재산마저 남과 공익을 위해 바쳤다. 그리고 최근까지 돈과 관련된 의혹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하고 재산을 늘리는 데 혈안이지만, 그는 가진 재산마저 거의 바쳤다. 소득이 적지 않았지만 1억 전세금과 상속받은 고향의 작은 땅만 남은 것 같다. 항상 마이너스통장이었으니 예금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재산의 대부분은 책일 것이다. 남들이 고가의 골동품과 보석을 모았지만 그는 자료를 수집했다. 그 자료들이 박원순에게 골동품이고 보석인 셈이지만 한편 애물단지다. 그 자료들을 어찌 세속적 돈으로 환산할 수 있으리오만, 1권당 1만원만 잡아도 2억원(1만원×2만권)이다. 물론 실제 비용은 이 액수를 훨씬 상회할 것이다. 그런데 책은 재산신고 등록대상에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니, 그의 재산은 의외로 적을 것이다.
박원순이 검사직을 일찍 버리지 않았다면 그의 유능함에 비추어 볼때 검찰총장에 오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유능하다고 검찰총장에 오를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천성관은 그의 사법연수원 동기이고, 김준규는 경기고 동기이다. 천성관은 스폰서도 있었고 30억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2009년 7월). 김준규의 재산은 26.7억이었다(2011년 3월). 검찰 요직을 지낸 이들은 퇴임 후에도 전관예우로서 법무법인에서 수(십)억의 돈을 받고, 전화 한 통에 수억을 챙기는 요지경 아니던가?
박원순에게도 재산이 제법 있었던 적이 있다. 30살 즈음에는 서울 한복판에 규모 있는 집이 두 채나 있었다. 한 달에 수백만 원의 단체 운영비를 전담했던 것을 고려할 때 고소득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집 한 채와 책들을 역사문제연구소에 쾌척했다.
참여연대 사무처장 이래 시민운동을 하면서 다수 상근자들의 월급(박봉이지만) 등 운영비를 마련하는 것도 거의 그의 몫이었다. 1996년부터 변호활동을 그만두었지만 그의 소득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사외이사, 강연, 상금, 인세 등을 합치면 여전히 고소득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득의 대부분을 자기가 활동하던 단체의 운영비로 충당했다.
참여연대 시절부터 재정을 공개하고 투명하게 했으니 증거들이 남아 있다. 그의 통장마저 상근활동가들이 관리했다고 하니 그들이 증언해주고, 또 통장이 입증해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탈세나 유용의 의혹이 제기될지도 모르겠다. 오래 전의 일이고 복잡한 돈의 오고감을 어찌 명쾌하게 해명할 수 있을까만?
그러나 적어도 돈 문제에 대해서는 박원순은 누구보다 결백할 것이다. 필자는 2002년 12월경에 발표한 그의 공개유언장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공개유언장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중에 뇌리에 아직 강렬하게 남아있는 부분이 있어서 번거롭지만 그대로 인용하겠다.
“오늘날의 나를 만든 많은 분이 계시지만 그 가운데 내 형제들을 잊을 수는 없겠습니다. 어린 시절 내 학비를 보태고 부모님을 돌보던 큰누님과 매형, 아들만 귀히 여기는 집안 분위기와 부모님의 인식 때문에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외지에서 무진 고생만 한 둘째누님, 셋째누님, 시골에서 부모님 농사일을 돕느라 시집갈 때까지 온몸을 바쳐 일한 넷째누님, 학문의 길을 걷느라 어려우신 걸 뻔히 알면서도 제대로 도와드리지 못한 형님, 그리고 오빠들 때문에 중학교까지밖에 못 다니고 내내 농사일만 하던 막내 여동생.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희생과 헌신에 대해 아무것도 갚지 못하고 떠나는 마음이 아리기만 합니다. 변호사 동생 또는 오빠를 두었으니 뭔가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아픈 가슴만 남았습니다. 다음 세상에서 혹시 그럴 위치가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동생 또는 오빠가 되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라 향가 ‘제망매가’에서는 ‘같은 가지에 태어나 가는 곳 모르겠소’라고 노래했지만, 우리는 다음 세상에서 다시 함께 ‘같은 가지’로 태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시골 넉넉치 못한 집안에서 박원순은 기대주였을 것이다. 그 기대주가 사법시험에 통과하여 검사, 변호사가 되었고, 또 유명해졌다. 한편 누님 넷은 초등학교, 여동생은 중학교만 졸업했다. 그런 집안에서 박원순에 대한 기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박원순은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재산이 제법 있었고, 변호사로서 소득도 많았다. 그때 자가용은 물론 운전기사도 있었다(그 후 자가용이 없는지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했다). 의미 있는 공적 단체와 활동을 위해서는 거액을 희사하는 ‘낭비벽’이 있으면서도, 자기를 위해 희생한 피붙이들은 돕지 않았다. 필자는 유언장을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그가 허언이나 거짓을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고, 더구나 의미심장한 유언장에 그렇게 썼으니 사실일 것이다. 박원순은 자기관리가 너무 철저한 ‘독종’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박원순이 무슨 상을 받았다. 상금도 제법 거액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원순에게 그 상금이 전해지면 또 어딘가에 희사할 것이니 그의 아내가 상금을 받도록 했다. 당시 그의 가정경제 형편이 곤란하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그렇게 꾸몄다. 그런데 그는 기어코 그 상금 전액을 아내로부터 탈취해서 내놓았다.
그는 상을 여러 번 받았다. 올해의 여성운동상(1998), 심산상(2002), 올해의 활동가상(시민의신문, 2003), 국민포장(보건복지부, 2003), 만해상(2006), 막사이사이상(2006), 단재상(2007), 불교인권상(2009) 등이다. 그 상금마저 어딘가에 기부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물론 모두 기부했는지 일일이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막사이사이상의 상금은 10만 달러였다. 이 상은 필리핀에서 주는 상으로 필리핀 사람들에게는 막대한 액수였다. 박원순은 그 돈을 필리핀 시민단체에 기부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필리핀의 시민사회단체는 한국보다 상황이 더 열악했기 때문이다.
박원순은 유언장에서 말한 대로 아내에게 ‘아내’ ‘당신’ ‘여보’라는 말을 내뱉지 못하는 전형적인 경상도 촌놈이었다. 독종 박원순에 비해 그의 아내는 결이 고운 경상도 여염집 규수인 것처럼 보였다. 둘은 박원순이 대구지검 시절 소개로 결혼했다. 그의 아내는 심야에 불청객들이 잔뜩 술에 취한 채 집으로 쳐들어가도 크게 불편한 내색하지 않고 반겼다. 예전에 그의 집은 아지트였다. 박원순은 유언장에서 ‘당신도 내 낭비벽의 공범’이라고 표현했다.
재산도 희사하고 자신이 사회활동으로 가정을 돌볼 수 없는 지경에서 아내에게 가정을 책임지도록 압박한 듯하다. 그의 아내는 가정경제를 꾸리기 위해 인테리어 사업을 했다. 유학 중에 그녀도 인테리어를 공부했던가 보다.최근에 인터넷을 살피니,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인테리어 사업체가 아름다운가게와 재벌기업의 인테리어 공사를 독점 수주했다 하여 공격의 소재가 되고 있다. 그 수주과정에 남편 박원순이 직접 개입하거나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 필자는 수주과정의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하고, 얼마나 수입을 올렸는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현재 전세금이 1억원에 불과한 것을 고려하면, 그 수익도 그리 큰 액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수익이 있었다면 생활비, 교육비로 충당되었을 것이고, 거액을 축재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박원순의 과거 행태로 미루어보면, 그 수입액마저 사회단체 운영에 소용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박원순에게 숨겨둔 재산이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다. 그동안 자기 재산과 수입들을 희사한 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간의 헌신적, 공익적, 이타적 삶은 더 큰 무엇인가를 노리기 위한 위선이었노라고? 어떤 이가 25년간을 위선했다는 자체로 나는 그를 높이 평가할 것이다. 그런 위선자가 우리 사회에 많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25년 세월은 참으로 길다. 그렇게 장기간 동안 위선을 행하기란 정말 어렵지 않겠는가. 또 많은 사람을 속이기도 어렵다.
(재산에 대해서는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재산 내역이 공개되면 보충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