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저우20 - 대운하가 있는 판먼을 보고 택시로 유서깊은 절, 한산사에 가다!
2023년 10월 26일 쑤저우 시내 북사탑 (北寺塔) 과 쑤저우 비단박물관인 소주사조
박물관에 줘정위안 (拙政园 졸정원) 과 스쯔린 (狮子林( 사자림) 에 외성하
와 동원을 보고는 버스를 2번 바꾸어 타고 창랑팅 (沧浪亭 창랑정) 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걸어서 공자를 모시는 문묘 (文庙)를 구경한 다음에 쑤저우 고운하 를 보기 위해 행인들에게
몇 번이나 물어가며 20여분을 걸어서 판먼(盘门) 에 도착했는데 큰 문이 있고 입장료
에다가 배를 타는데도 요금을 받는지라 입장을 하자니 멀리 한산사 입장시간이 염려되어 망설입니다.
여기 쑤저우 구윈허 ( 苏州 古運河 소주 고운하) 는 징항 운하 (京項 운하) 로 인해 많은
상인들이 모이는 곳으로.... 쑤저우는 지금까지도 절반 이상의 수화물이 수로를
통해 운반되고 있으며, 이는 쑤저우 구윈허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이유 중 하나 입니다.
이곳에서 운하를 따라 산책하며 돌아보거나 배를 타고 관광 할 수 있으니..... 아름다운
야경을 선상에서 감상할수도 있으며, 찬란한 불빛과 쑤저우
고성 건물들이 조화로우며 천년 고성의 감미로움과 정교함 을 충분히 느낄수 있습니다.
저녁에 배를 타면 평화와 탄사 공연 을 통해 쑤저우의 역사 해설과 노래를 감상할수 있으며
쑤저우 고성의 깊은 문화 를 느낄 수 있는데, 운하를 따라 걸으면서 고대 골목에서
길을 잃어도 좋고 운하 보트를 타면 동쪽의 베니스로 알려진 쑤저우 를 체험할수도 있습니다.
맛있는 향토요리를 맛보고 간식과 아름다운 장신구를 구입할수 있으며 보트 에서 설명을 들을수 있고 공연을
볼수 있으니 창가에 앉아 산탕구제(산당고가), 관첸제(관전가), 판먼, 왕스위안, 창랑정을 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한산사(寒山寺) 절의 입장시간 이 염려되는지라 포기
하고는 택시를 잡습니다. “따오 한산쓰!” 이윽고 도착해 입장권인 문표를 끊는데
20위안이지만 60세 이상과 20세 미만은 반액인 10위안이고 70세 이상과 초등학생은 무료입니다.
내가 여권과 함께 나이를 적은 종이 를 내 보이니 여기 여직원은 나에게는 왠일인지 면제를 해
주고 마눌은 반액인 10위안만 받는지라 의아하게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가니 정원이
나오고 좀 더 걸으니 종이 보이며 그러고는 건물을 통과하니... 이런? 일반 도로 가 나옵니다?
아니 뭐야? 이거 절에 들어온거야, 아님 아직 들어가지도 못한거야? 그때 바로 보이는 문에서
사람들이 나오는데 보니 여긴 나오는 문 이고 자세히 살펴보니 들어가는 문은 저 옆으로
돌아가라는 화살표가 보이기로 100미터를 걸어서 돌아가니 그제서야 정식 정문 이 나타납니다.
한산쓰 寒山寺(한산사) 에는 10여년 전에 한번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기억은 운하가 흐르고 거기에 다리가
있으며 그 앞에서 절로 바로 들어갔으니, 그럼 그후에 이 앞쪽 바깥에 다시 건물이 생기고 입장권 까지 판매
하는 걸로 절이 확장되었기 때문에 잠시 당황했던 것인데, 절에 들어가니 관광객들로 인해 인산인해 입니다?
오늘은 절 앞에 다른 건물들을 짓고 입구 를 내어 풍교 가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 여기 한산사에
처음 왔을 때는 절 앞의 운하에 걸려 있는 운치 있어 보이는 아치형의 석교 를 보고
가슴이 설레였으니 바로 그 유명한 장계의 시 "풍교야박(楓橋夜泊)" 에 등장하는 풍교(楓橋) 입니다!
그때도 입장시간이 다 되어 가는지라 풍교는 나중에 보기로 하고 20원 입장권을 끊어 한산사에
입장하니..... 마침 종루에서 그 유명한 한산쓰(한산사) 의 종이 울리니 정말 듣기에
청아한데 종소리는 긴 여운을 끌며 어두워지는 거리의 골목길을 빠져 나가는 듯 했었습니다.
*** 쑤저우시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한산사 옛날 사진입니다 ***
종루와 종각에서 흔히 루는 2층 을 뜻하고 각은 1층 을 말한다는데, 2층에 오르려면
따로 시주를 해야 한답니다? 그리고 본당에서 예불 이 시작되는 데,
염불소리가 우리네 산사의 것인양 듣기에 좋아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을 떠올립니다.
정말 가슴에 저려 오는 것은 잠시후 풍교 를 볼수 있다는 설레임과 어둠이 내리는 이국땅
이기 때문일까요? 절은 평지의 주택가에 노랑색 칠을한 담 으로 둘러졌는데,
경내가 비교적 넓으며 큰 탑이 당나라때 창건된 절 답게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해 줍니다.
고풍스러운 종루 는 생각보다는 높이가 낮으나 그런대로 사람의 발길에 닳은 듯하고.... 지붕 처마 또한
아름답기 그지 없으니 듣던대로 지붕에 손오공 일행의 서유기조각 이 앙증맞게 앉아 있습니다.
내 키보다 훨씬 큰 양초가 무수히 늘어선 가운데, 한산사 4계절을 찍은 칼라사진
들이 60여점이나 전시되어 있어..... 4계절 춘하추동 의 여러 모습
중에서도 눈에 덮인 한산사 를 볼수 있어서 의외의 수확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창건 1,500년제를 거행한 사진 의 화려한 모습과 참가한 군중과 중요 인물들에서 사회주의 국가 치고는
불교의 비중이 대단하다 해야 하나.... 아님 그런것 보다는 단순히 관광 수입 을 겨냥한 걸까요?
절은 5시가 되니 문을 닫는데 절 앞 아치모양의 다리에 올라서니 정말 다리 밑에 나룻배가 한척 메여있으니
울 마눌에게 여기가 그 풍교 楓橋 (단풍나무 다리) 가 맞다고 자못 감회를 나타냈던 일이 떠오릅니다.
月落烏啼霜滿天(월락오제상만천),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夜半鐘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
"달지고 까마귀우는 어두운밤, 찬서리 하늘에 가득한데
강가의 단풍, 고깃배의 불빛에 시름안고 잠드네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들려오는
야밤중 종소리 나그네 뱃전까지 들려오네"
장계 의 "풍교야박" 시 를 목청을 가다듬어 읊어 보는데, 고소성은 소주의 옛 이름 으로 운하는 대답이
없고 강물은 묵묵히 흘러갈 뿐이니.... 어둠속에서 가슴 가득 옛날의 일을 회상해 보자니
과거에 낙방 하고 돌아오는 사람의 심정이 오죽하겠나? 마치 내가 뱃전에 누워 물결에 일렁이는 양....
위 시에 나오는 종은 1,400년 전의 당나라 때 만들어 졌는데, 후대에 왜구가 약탈 해갔다고 하니 왜구가
이 내륙 깊숙한 쑤저우 까지 침입했다니 참으로 대단한 세력인데, 훗날 들으니 중국인 해적과 상인
들이 저 왜구에 편승해서 합세 하는 바람에 세력이 커져 이런 내륙 깊숙한 곳 까지 약탈한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훗날 이토 히로부미 가 옛날 왜구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사죄의 뜻으로 일본에서
새로 종을 만들어 보냈는데...... 여기 한산사 절에서는 그 종은 대웅보전
안에 보관하고, 1907년에 새로 종을 주조 하여 지금 보이는 저 종루에 달았다고 합니다.
뒤돌아서면서 새삼 문학의 힘 이 대단하다 는 생각을 하니..... 천수백년전 장계의 시 한수 가 오늘
에 이르러 얼마나 많은 세계인들을 끌어들이는 것 일까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시 한수가
있어 불국사나 통도사에 외국인을 구름처럼 모을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당나라 시절 일본의 스님들이 구도의 길 을 얻기위해 이역만리 찾아온 이 한산사에
수백년후 명나라 말기에는 왜구들의 떼를 지어 휩쓸며 약탈 을 하고... 그 수백년
후에는 카메라를 메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일본인 들을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오래된 절을 거닐다 보니 문득 서정보 논설위원이 동아일보 횡설수설란에 쓴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 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생사가 없다 하나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
조계종은지난달 입적한 자승 스님 이 생전에 일찌감치 남겼다는 열반송(임종게) 을 공개
했다. 원래 열반송은 고승들이 숨을 거두기 전 평생의 깨달음을 압축해 전하는 마지막 말 이나
글을 뜻한다. 생사에 연연하지 않는 초월의 경지와 폐부를 찌르는 성찰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열반송 중에선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이 남긴 것이 가장 세간의 화제가 됐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넘는다/ 산 채로
지옥에 떨어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둥근 수레바퀴가 붉음을 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마치 자기 죄를 고백하는 듯한 이 열반송은 구구한 해석을 낳았다. 성철 스님의 상좌(제자)
였던 원택 스님은 “생전 신도들에게 ‘내 말에 속지 마라’ 고 자주 말했던 것
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으라는 스님 특유의 반어법이 담긴 것” 이라고 풀이했다.
5언, 7언 절구의 한시(漢詩) 형태로 남겼지만 한자를 모르는 세대가 많아지면서 간결하게 한글로 남기는 경우
도 적지 않다. 국내 대표적 비구니인 광우 스님은 2019년 ‘떠나는 바람은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왔다가 갈
뿐이다’ 라는 열반송을 남겼다.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스님의 열반송은 2010년 임종한 지 8년 만에 미발표
원고 등을 책으로 낼 때 함께 공개됐다. 그는 “분별하지 말라. 내가 살아온 것이 그것이다. 간다. 봐라” 라고 했다.
열반송 조차 불필요한 겉치레 라고 본 스님들도 있었다. 8대 종정을 지낸 서암 스님은
제자가 열반송을 남겨 달라고 하자 “나에겐 그런 거 없다.
정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 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라고 했다.
2021년 입적한 월주 스님(전 총무원장) 역시 “내가 살아왔던 모든 생애가 바로 임종게 가 아닌가”
라고 했다. 그는 열반송이 마치 고승의 징표 처럼 여겨지는 세태에 대해
“임종게 없이 돌아가신 분의 상좌들이 임종게를 (만들어) 발표 하는 것은 부당하다” 고 꼬집기도 했다.
자승 스님은 2009년 부터 8년간 제 33, 34대 총무원장을 지낸 뒤에도 조계종의 막후 실세로
활동해 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주변 스님들과의 다툼과 비판 을 피할 수 없었다.
최근 대학생 전법을 위해 10년간 힘쓰겠다고 했던 그가 갑자기 분신과 흡사한 ‘소신공양’ 형태로 세상을
떠나자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분위기도 있다. 불교계에서 십수년 동안 권력의 정점 에 있었던 그는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었던 것일까. 사라지는 인연…. 그가 미리 남긴 열반송이 그의 마지막을 암시한 듯하다.
이어 내친김에 점차 어두워지는 운하 주변을 더 둘러보며 새삼스레 여행의 멋 을 가슴으로
느끼고는 밤도 늦었고 해서 큰거리를 걸어나와 대로를 조심스럽게 무단횡단(!)
하여 ‘하산교’ 에서 버스를 타니 퇴근시간인지라 복잡하기 그지 없던 기억이 되살아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