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
顯宗元文大王(19년)
○十二月,契丹,王遂,來投。○戊戌,契丹駙馬蕭遜寧,帥兵來侵,號十萬,王以平章事姜邯贊,爲上元帥,大將軍姜民瞻,副之,帥兵二十萬八千三百,屯寧州,至興化鎭,選騎兵一萬二千,伏山谷中,又以大繩貫牛皮,塞城東大川,以待之,賊至,決塞發伏,大敗之,遜寧,引兵,直趍京城,民瞻,追及於慈州來口山,大敗之,侍郞趙元,又擊於馬灘,斬獲萬餘級.
○ 무술일에 거란의 부마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략하면서 군사 10만 명이라고 소리쳤다. 왕은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흥화진에 이르러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산골 속에 매복시키고 또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아두고 적을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막은 물을 터 놓고 복병을 내어서 적을 크게 패퇴시켰다. 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서울로 들어오자 민첨이 자주(慈州) 내구산(來口山)까지 뒤쫓아 와서 적을 크게 패퇴시키고, 시랑 조원(趙元)이 또 마탄(馬灘)에서 적을 쳐 머리 1만여 급을 베었다.
春正月庚申,姜邯贊以丹兵逼京,遣兵馬判官金宗鉉,領兵一萬,倍道入衛京城,東北面兵馬使,亦遣兵三千三百,入援。○辛酉,蕭遜寧至新恩縣,去京城百里,王,命收城外民戶入內,淸野以待,遜寧,遣耶律好德,賫書,至通德門,告以回軍,潛遣候騎三百餘,至金郊驛,我,遣兵一百,乘夜掩殺之。○辛巳,契丹,回兵,至漣渭州,邯贊等,掩擊,斬五百餘級。○二月己丑朔,丹兵過龜州,邯贊等,邀戰於東郊,兩軍相持,勝敗未決,金宗鉉引兵赴之,忽風雨南來,旌旗北指,我軍,乘勢奮擊,勇氣自倍,丹兵,奔北,我軍,追擊之,涉石川,至于盤嶺,僵尸蔽野,俘獲人口,馬駞,甲冑,兵仗,不可勝數,生還者,僅數千人,丹兵之敗,未有如此時之甚,丹主,聞之大怒,遣使責遜寧曰,汝,輕敵深入,以至於此,何面目見我乎,朕,當皮面,然後戮之○甲午,三軍,凱還,獻俘獲,王,親迎于迎波驛,結綵棚,備音樂,宴賜將士,以金花八枝,親揷邯贊頭,右執金觴,左執邯贊手,慰嘆不已,邯贊拜謝不敢當,遂改迎波爲興義,賜驛吏冠帶,與州縣吏同
기미 10년(1019), 송 천희 3년ㆍ거란 개태 8년
○ 봄 정월 경신일에 강감찬이, 거란 군사가 서울에 가까이 오므로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걸음을 배로 늘려 서울에 들어와 방위하고, 동북면 병마사 역시 군사 3천 3백 명을 보내 들어와 구원하였다. 신유일에 소손녕이 신은현(新恩縣 황해 신계(新溪))에 이르니 서울과의 거리가 백 리였다. 왕은 성밖의 민호를 전부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철거하여[淸野] 적군을 기다리도록 명하였다. 손녕이 야율호덕(耶律好德)을 보내어 서신을 가지고 통덕문(通德門)에 이르러 군사를 돌이킨다고 알리고는, 몰래 척후 기병 3백여 명을 보내어 금교역(金郊驛 황해 김천(金川))에 이르니 우리 편에서 군사 1백 명을 보내어 밤을 타서 습격하여 죽였다.
○ 신사일에 거란이 군사를 돌려 연위주(漣渭州 연주(漣州)는 평남 개천군(价川郡) 위주(渭州)는 평북 영변군(寧邊郡))에 이르니 감찬 등이 습격하여 머리 5백여 급을 베었다. 2월 초하루 기축일에 거란 군사가 귀주를 지나니 감찬 등이 동쪽 들에서 맞아 크게 싸웠는데 양편의 군사가 서로 버티어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다. 김종현이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왔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고 깃발이 북쪽을 가리키자 우리 군사가 형세를 타서 분발하여 치니 저절로 배로 용기가 났다. 거란 군사가 패하여 북쪽으로 도망하니 우리 군사가 뒤쫓아 쳐서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렀다.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판을 덮고, 사로잡은 군사와 말ㆍ낙타ㆍ갑옷ㆍ투구ㆍ병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었으며,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뿐이었으니, 거란 군사의 패전함이 이때와 같이 심한 적은 없었다. 거란주가 소식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손녕에게 꾸짖기를, “네가 적을 깔보고 깊이 들어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볼 것이냐. 짐이 마땅히 네 낯가죽을 벗긴 후에 죽일 것이다." 하였다
○ 갑오일에 삼군(三軍)이 개선하여 돌아와 포로와 전리품을 바쳤다. 왕이 영파역(迎波驛)에서 친히 맞이하여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음악을 갖추어 잔치를 베풀고 장사들에게 물품을 내려주었다. 왕이 금화(金花) 여덟 가지[枝]를 친히 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고, 오른손으로 금술잔을 들고 왼손으로 감찬의 손을 잡고는 위로하고 감탄하기를 마지않으니 감찬이 배사(拜謝)하면서 감히 받지 못하였다. 마침내 영파역(迎波驛)을 흥의역(興義驛)이라 고치고, 역리(驛吏)에게 관대(冠帶)를 내려주어 주ㆍ현의 이(吏)와 같게 하였다.
고려사
#高麗史4卷-世家4-顯宗1-09-65-1018
戊戌契丹蕭遜寧以兵十萬來侵王以平章事姜邯贊爲上元帥大將軍姜民瞻副之. 帥兵至興化鎭大敗之遜寧引兵直趨京城. 民瞻追及於慈州又大敗之.
무술일 거란 소손녕이 장졸10만명을 이끌고 처들어오니 현종이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대장군으로하고 부장군을 강민첨으로 하였다.거란의 장수와 병졸이 흥화진에 이르러 대패하였다.
소손녕이 병사를 이끌고 경성까지 처들어오자 강민첨이 자주까지 추격하여 크게 이겼다.
#高麗史4卷-世家4-顯宗1-09-67-1018
甲寅京城戒嚴.
경성에 방비를 엄하게 하였다.
요사 개태7~8년
거란 성종이 소손녕의 대패 상황은 표현되지않고 소손녕을 문책하여 유배한듯하고 오히려 고려와의 전쟁에서 피해입은 군졸들의 노고에대해 상을 나누어줌.
결과적으로 고려 또한 거란에게 많은 영토 할양이 있었음이 遼史에 보인다.
운영자 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