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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만큼 희극의 본령을 명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표현해낸 희극인이 또 있을까. 자기만의 개성을 마음껏 펼쳐보인 희극인은 무수할지언정 채플린에 비견될 만큼 위대한 희극인은 달리 찾아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희극에는 신랄하고 응축된 풍자가 있고, 삶의 페이소스가 농후하며, 인간과 인생에 대한 깊고 따뜻한 성찰이 담겨 있다. 어쩌면 그는 희극이 근본적으로 비극에 속하는(둘러싸인) 장르임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인식했던 예술가였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희극은 결코 가볍지 않고 깊이가 있다. <라임 라이트>는 희극 그 자체라기보다는 희극에 대한 성찰을 담은 영화, 말하자면 자전적인 요소가 농후한 서사를 통해 희극이 무엇이고 희극인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며, 예술은 얼마나 고독한가, 반대로 인생이란 결코 거부할 수 없고 또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인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다.
때는 1914년. 아직 영화라는 매체보다는 무대 공연이 더 대중적인 사랑을 받던 시기다. 한때 잘 나가던 희극배우였던 칼베로는 이제는 늙어 한물 간 배우의 처지이다. 찾아주는 기획자도 별로 없고 있다 해도 단역, 설상가상으로 관객들의 호응도는 암담할 정도이다. 그는 자신의 부진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인생을 진지하게 대하게 되고 슬픈 인생의 무게가 쌓이지. 그건 희극에는 치명적이거든. " 희극은 근본적으로는 비극에 해당하는 인생을 그나마 살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에너지와도 같은 것이어서, 언제나 비극을 뚫고 나오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결국 누구나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삶은 죽음이나 한 가지로 인간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그 무엇이기에 여기서 희극의 필요성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노인이 되어버린 칼베로는 슬픔이 쌓인 비극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져 그의 희극이 그것을 뚫고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그는 무대 뒤에서 술을 마셔야만 간신히 무대 위에 설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우연히 젊은 발레리나 테리자를 알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다리가 마비되었고 그로 인해 더 이상 무대에 설 수가 없으므로 생의 의미가 사라져버렸다며 자살을 기도한다. 칼베로는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고 그녀에게 생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생은 의미가 아니라 욕망이며, 죽음과 같이 거부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젊다는 건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그렇게 해서 테리자는 칼베로의 따뜻한 충고와 조언을 통해 점차 정신적 육체적인 건강을 회복해간다. 이제 그녀는 다시 용기를 가지고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단 삶에 대한 용기를 깨닫고 나자 테리자는 발레리나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되나, 칼베로는 여전히 '이제는 잊혀진 왕년의 희극왕'이라는 존재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테리자가 사랑을 고백하고, 역시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앞날을 생각하여 칼베로는 어느 날 홀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칼베로는 이제 옛 동료 몇 명과 함께 거리의 악사로 살아가며 사람들에게 직접 적선을 구한다. 자존심 따위는 던져버렸지만 그러고 나니 오히려 자유로워진 듯도 하여 나름대로 마음 평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에게 어느 날 테리자가 찾아온다. 그녀는 그를 찾기 위해 런던을 모두 뒤졌다고 말한다. 칼베로는 그녀의 변함없는 사랑 고백을 재차 물리치지만 '칼베로를 위한 자선 흥행'이 기획되고 있다는 그녀의 말에 자신의 마지막 열정을 쏟아붓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 자선 흥행은 그를 동정하는 기획자와 그를 사랑하는 테리자가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함께 꾸민 일종의 몰래카메라에 지나지 않았다. 돈을 주고 고용된 관객은 지정해준 순간에 한바탕 웃음을 터뜨릴 것을 지시받은 것이다. 칼베로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자신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 이상함을 느끼지만 자신이 가진 야심찬 레퍼토리를 무대 위에서 마음껏 펼쳐보인다. 자신의 공연이 끝나고 나자 그는 심장마비로 운명을 달리 하고, 그의 죽음을 미처 알지 못하는 테리자는 다음 프로그램을 맡아 무대 위에서 열심히 춤을 추면서 그렇게 영화는 끝맺음 된다.
이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칼베로의 죽음을 통해 채플린은 자기 시대의 예술에 종언을 고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두 가지 인식을 포함한다. 첫째, 그는 인생에 있어서 모든 게 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한 시대는 영원할 수 없고, 다음 시대에게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는 시간의 권능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이다. "시간은 위대한 작가야. 항상 완벽한 결말을 쓰거든. " 그렇기 때문에 그는 테리자가 자신의 곁에 머무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며 그녀의 열정에 찬 무대를 바라보는 자리에서 숨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가 입장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예술이나 문화형태가 모두 이쁘고 바람직한 것으로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물러가는 입장에서 다가오는 것들을 바라볼 때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될 법한 안타까움이나 노파심 등이 두 번째 인식 내용이다. 영화 속에서 칼베로가 느꼈을 만한 안타까움의 구체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오늘 날 방송 스튜디오를 가득 메운 방청객을 연상시키는 박수부대의 출현이 그것이 아닐는지... 즉, 고용된 관객으로서 돈을 받고 웃음과 환호를 제공하는 저속한 예술(문화)향유자가 칼베로(채플린)의 눈에는 이어지는 문화 예술 형태의 씁쓸한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들은 이제 다시는 되올 수 없는 저 머나먼 명부의 세계로 떠나버린 것을... 그리고 그 다음 세대는 곧 앞서간 자들을 따라나설 것이다. |
첫댓글 참 아름다운 곡을 올려 주셨네요
영화도 못봤고
첨듣는 곡인데 좋으네요
명배우 채플린의 영화 이야기군요.
귀에 익은 선율인데 이영화의 주제곡이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