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다 / 전성훈
겨울바다에 다녀왔다. 겨울바다의 유혹에 빠져 속초로 가는 여정은 설렘으로 가득 찼다. 금요일 늦은 오후의 서울/양양 고속도로는 한가하여 자동차도 무심한 듯 힘들지 않게 달렸다. 길이 막히지 않고 동해안에 간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어두움에 휩싸인 속초에 도착하여 순두부 전문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감자전, 두부전, 오징어순대, 얼큰 순두부와 심심한 순두부까지 한 상 가득히 나왔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에 들떠 웃고 떠들며 음식을 먹고 동동주 한 잔 걸쳤다. 동동주는 내가 맛 본 술중에 가장 맛있다고 느꼈던 메밀로 빚었다.
‘떠난 사람보다 남아 있는 사람이 허전하고 쓸쓸하다.’는 말은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세밑 겨울 바다에 어울린다. 세찬 바람이 불고 성난 파도가 넘실거리는 겨울 바닷가 해변을 머리카락 휘날리며 홀로 서성이는 사람에게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짙게 묻어난다. 여름바다는 젊음과 환희, 광기와 낭만 그리고 풋사랑이 들불처럼 피어오르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때문에 나이든 사람보다는 젊은이들이 많다. 시끄럽고 왁자지껄하여 정신을 차릴 수 없어 미쳐버릴 것처럼 젊음을 밤새도록 발산하는 게 벌거벗은 여름바다이다. 겨울바다는 쓸쓸하고 황량하여 여름처럼 활기찬 모습을 찾을 수 없고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 마음마저 움츠려 들기도 한다. 지난 여름의 즐겁고 아름다웠던 추억을 곱씹어 보거나 지나간 세월에 대한 원망과 회한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기에 겨울바다엔 연령이나 남녀노소 구별 없이 누구나 찾아가고 싶어 한다. 마치 그곳에 가면 로망이 끓어오를 것 같아서다.
한겨울의 바다가 손짓을 한다. 어서 빨리 와 간절히 외치는 내 목소리를 들어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하얀 거품이 넘실거리는 거친 바다를 바라보며 옷깃을 여미고 인적이 드문 모래밭을 걷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겨울바다, 겨울바다에 가서 이런 사색에 젖으며 술 한 잔 했다. 술 한 잔 하고나니 저절로 시인이 되고 싶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가 어찌 없으랴. 지나간 내 삶을 생각하며 시 한 수 읊는다.
< 메밀 동동주를 마시며 >
메밀꽃이 눈처럼 빛나는 날
보름달이 휘영청 온 세상을 밝히는 밤,
짝 잃은 허생원의 마음은 어디로 달려갔을까
허생원도 동이도 어디로 가고
힘든 시절을 함께한 발정한
노새는 어디에 있는가?
메밀로 빚은 동동주 한 잔 걸치니
옛사람의 고단한 삶이 떠오르고
저 멀리 우뚝 솟은 설악산 산등성이는
하이얀 눈을 뒤집어쓰고
잎새가 떨어진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온몸으로 힘겹게 지탱하고 있구나.
가을이 겨울로 바뀐 계절의 들녘에서
내 몸은 잔인한 시간의 흐름에 빠지고
희미한 정신은 흘러간 과거를 그리워하며
목이 멘 듯한 몸짓으로 손짓을 하네
세월아, 그만 멈춰줄 수는 없겠니.
둘째 날 아침, 웬일인지 새벽 두시 반에 잠이 깨어 한 시간 가량 글을 쓰다가 책을 읽다가 다시 잠을 청했다. 아침녘 햇볕이 따사로워 속초 영랑호수 주변을 거니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호수 건너편 저 멀리 설악산은 언제 내렸는지 모르는 눈을 하얗게 뒤집어썼고, 영랑호수에는 청둥오리 가족이 한가롭게 동장군을 즐기고 있었다. 영랑호수를 벗어나 속초 수산시장을 찾아 좋아하는 가자미식혜와 낙지젓갈을 사고 나서 아바이 마을로 향했다. 갯배를 타며 주위를 둘러보니 토요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관광객이 많았다. 아바이 마을 어느 식당에서 모듬 생선구이를 주문했는데 도루묵구이가 가장 맛있었다. 아싹아싹하게 구워진 도루묵 알을 씹으며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 아바이 마을에서 >
손을 뻗으면 닿을 듯 한 그 마을
파도가 거칠게 출렁거려 얇은 바닷길을
건널 수 없어 갯배를 타고 다녔던 사람들
차가운 겨울 바닷가 모래밭엔 인적도 드물고
지난 가을 황토색을 띠던 바다는
차갑도록 청명한 모습으로 한가로이 춤춘다
실향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바이 마을 갯배는 물 위를 왔다 갔다 하네
너와 나 손을 마주 잡고 걸으며
웃음을 나누던 고향이 바로 저긴데
언제나 북녘 땅 아바이 묘소에 절을 올릴 수 있을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하면서 여행기 초안을 작성하다가 거친 파도가 일렁이고 사나운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바다의 진수를 찾아서 하조대 전망대로 향했다. 계단을 지나 전망대로 올라서자 바람이 미친 듯이 몰아친다.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바람을 맞으며 겨울 동해바다의 정취를 만끽한다. 전망대 옆에 돌출된 방파제로 걸어가니 몸이 옆으로 휘청거린다. 사진을 찍으려고 핸드폰을 꺼내니 바람의 용틀임에 손이 저절로 흔들린다. 진정한 겨울바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 “성훈아, 너,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고 힘들었지, 수고했어.”라고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겨울바람의 위용에 쫓기여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하려고 속초의 명물 ‘척산온천’을 찾았다. 결혼한 후 수 없이 동해안을 찾았지만 온천에 들려 여독을 풀었던 적은 없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한증탕에 들어가 땀을 내고 나니 몸과 마음이 개운하였다. 느긋하게 온천욕을 즐기고 나서 대게 찜으로 소문난 바닷가 식당을 찾았다. 빨강뚜껑 소주 한 병을 거의 다 비우고 기분 좋게 펄펄 끊는 게라면 국물 한 모금 떠 맛보았다.
마지막 날 아침, 그냥 곧바로 집으로 올라가기에는 못내 서운하여 인제 자작나무숲을 찾았다. 지난 가을에 들렸을 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제법 많은 싸락눈이 내려서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등산객들 틈에 끼어 폼을 잡으며 바람결에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감나무 높은 가지에 덩그러니 달린 감 한 개, 누군가는 까치밥을 남긴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생각하고 어떤 이는 하나 남은 감을 보며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낀다.
“ 가버린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 중 누가 더 쓸쓸하고 고독하니 ” 하고 겨울바다에 물으니, 바다는 말이 없다. 대답 없는 바다에는 끝없이 하얀 포말의 파도만 넘실거린다. 끝없는 수평선을 향해 바람도 덩달아 미친 듯이 분다. 떠남과 남음 그리고 다가옴은 인간의 삶의 영속성의 한 지점이 아닐까? 어느 지점에 있든 그 순간순간마다 느끼는 감정도 마음에 따라 기쁨과 허전함, 즐거움과 쓸쓸함, 평온함과 무심함이 솟아오게 마련이다.
다시 집으로 가야할 때다.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겨울바다의 유혹에 빠져 동해를 찾았듯이 내 영혼의 원초적 고향으로 가야할 시간이 다가온다. 떠남을 아쉬워하지 말고, 남겨진 사람과 세월을 마음 아파하지 말고, 가야할 내 길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겠다. 지금, 여기, 세밑의 자리에 존재하는 나의 삶에 감사하고 기뻐하자. (2019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