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
"그렇다면 선이
이루는 바가 무엇이오?"
"선의 본질은 포기이다.
그리고
선의 현실적인 모습은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수천 년 동안 세상을
비난해 온 도망자들이,
그대의
마음을 붕괴시키고,
그대의 존재를 독으로
오염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대는 엄청난 은총을 누릴 것이다.
도망자는
진정한 이해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다.
그의 도피 자체가
그의 몰이해와 두려움을
보여준다.
그대가
'이 시장 바닥에 앉아 있으면서
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침묵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면서 히말라야로 도망친다면,
그대는
침묵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시장바닥에는
대조(contrast)와 도전,
산만함(distraction)이
존재하기 떄문이다.
그대는
그 모든 산만함을
극복해야 한다.
히말라야로 도망친다면
정적을 느끼기는 하겠지만, 동시에
그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더 많은 침묵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히말라야의 침묵이지
그대의 침묵이 아니다.
그대가 다시 세상 속에 돌아올 떄
침묵은 히말라야에 남을 것이다.
그대는
침묵을 버려둔 채
혼자 와야 할 것이다.
그대는
더 강한 에고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 속에 돌아왔을 떄,
그대는 전보다
더 많은 혼란을 느낄 것이다.
전보다
더 민감해졌기 때문이다.
수도원으로 탈출한 사람들이
세상 속에 돌아오기를
두려워하는 까닭이 그것이다.
세상은 하나의 시험대이다.
그리고
세상 속에 존재하면서
서서히 침묵 속으로
성장하는 것이 더 쉽다.
그 때엔
히말라야의 침묵이
그대의 존재 안으로
스며들 것이다.
그대는 히말라야로 가지 않는다.
히말라야가 스스로 그대에게 온다.
그 때엔 그대가 히말라야의 주인이다.
나는 도피를 가르치지 않는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물든
늙은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묻는다.
"무슨 산야스가 이렇습니까?
산야스를 받은 사람들도 여전히
가족과 부인, 아이들과 함께 삽니다.
그들은 여전히 사무실과 공장,
가게로 일을 보러 나갑니다.
무슨 산야스가 이런 식입니까?"
그들은
산야스에 대해 오로지 하나의 개념,
일차원적인 개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도피'라는 개념이다.
그러나 나의 산야스는 다차원적이다.
나의 산야스는 모든 것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속에 사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변형시키면서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처럼
일상적인 세상에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산야스이다.
이 세상,
지금 여기에 남아라.
그리고
그대의 길을 가라.
내면 깊은 곳에
웃음을 간직하고
그대만의 길을 가라.
신으로 향하는
그대의 길을 가라!
춤추고 노래하며 가라!
웃으면서 그대의 길을 가라!
- 오쇼 -
[출처] 나는 도피를 가르치지 않는다
(오쇼코리아) |작성자 쁘리야
https://cafe.naver.com/yojan/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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