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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30. 7
(서울 중앙 침례교회에서 인용)
성경(KJV)의 권위
- 오야먀 레이지-
제 1 부 증거
어떤 사물을 확인하는 데는 3가지 정도의 증거를 제시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역사적 증거(외적 증거)와 내적 증거 그리고 실험적 증거이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에 하나의 인(燐)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것이 인(燐)인가? 아닌가? 를 확인하는 데는 3가지 증거로써 따져보면 될 것이다. 먼저 믿을 수 있는 어는 화학 연구소에 가서 “인을 주십시오” 했을 때에 그 화학자가 인을 내주었다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이 그 역사적(외적) 증거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본다. 그것은 청백(淸白)하게 빛나고 있으며 인의 냄새가 난다. 이것이 그 내적 증거이다. 마지막으로 성냥을 그어서 가까이 가져가니 삽시간에 타오른다. 이것이 곧 실험적 증거인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 증거에 의해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가 있게 되는 셈이다. 우리는 성경 권위 문제에 대해서도 이 세 가지 증거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렇게 세 가지 방법으로 성경을 본다면 성경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 역사적 증거(외적 증거)
(1) 기원(起源)
성경은 66권으로 되어 있고 적어도 40명의 기자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그들 기자들은 실로 가지각색의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는 왕(다윗, 솔로몬), 어떤 이는 정치가(다니엘), 어떤 이는 법률가(바울), 어떤 이는 학자(에스라), 어떤 이는 의사(누가), 어떤 이는 세리(마태), 또 어떤 이는 목자 (아모스), 어떤 이는 어부(베드로, 요한)도 있었다. 그들은 그 직업이 이와 같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신분이나 학식, 성장, 인종 등도 다 달랐던 것이다. 그 중에는 불학무식의 어부도 있는가 하면 학식이 높은 모세나 바울 같은 이도 있었다. 목자도 있는가 하면 과학자(의사)도 있고, 유대인도 있었고 이방인(헬라인-누가)도 있었다. 이와 같이 모든 환경 조건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성경의 일부를 기록한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연대적으로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율법을 기록한 모세는 주전 약 1450년대의 사람이었고 시편을 쓴 다윗은 주전 약 1,000년대의 사람이었다. 다니엘서를 기록한 다니엘은 주전 약 550년대의 사람이었으며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은 주후 약 100년대의 사람이었다. 성경의 기록연대는 처음 사람에서 마지막 사람까지 약 1,600년의 시간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대적으로도 다른 기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장소적으로도 매우 달랐다. 그러나 그들이 각각의 시대에 기록한 성경을 보면 서로 모순이 없을 뿐만 아니라 놀라울 만큼 조화, 통일되어 있다. 이렇게 1,600여 년에 걸쳐 기록된 글이기 때문에 공모(共謀)같은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후세의 사람들이 먼저 시대 사람들의 책을 흉내 낸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성경 중에 하나라도 내용이 동일한 것이 있을까? 하나도 없다. 모두 엄청나게 다른 것이다. 그러나 내용은 다르지만 상호간에 놀라울 만큼 조화가 있다. 이것은 성경의 초인간적, 초자연적 기원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을 보도하고 있는 몇 개의 신문의 내용이 모두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다. 전체적으로 조화, 통일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의 참 저자가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는 무엇보다 굳은 증거이다. 이 설명 외에는 이 일을 충분히 납득시킬수 있는 설명은 없는 것이다.
(2) 보증(保證)
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의 권위를 증거하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보증하고 계신다는 것으로 벌써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에 대해서 의심하는 학자들이 있다. 여기서는 그런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보자. 먼저 마 5:18을 펴보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一點) 일획(一劃)이라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모두 성취되리라”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성경의 율법의 권위를 증거하고 계신다. 여기서는 문서로 기록된 율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심은 물론이다. 더욱이 그 일점일획이라고 강조하셔서 그 한자 한자에 까지도 권위를 인정하고 계신다. 다음으로 눅 24:44을 펴보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들과 시편에 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들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리라는 말씀들이 이것이라, 하시고” 여기서 우선 구약 성경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본래 히브리어 구약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듯이(구약성경)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서와 제서(諸書)라고 불리웠던 것이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은 3부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서는 가장 먼저 시편이 있었기 때문에 제서를 대신해서 시편이라 부를 때도 있었다. 여기서는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리고 제서도 시편도 생략하고“율법과 예언서”(마5:17)라고 할 때도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구약 성경 전체를 이르는 것이다. 또한 “율법”(마 5:18)이라고만 말하여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킬 때도 있었다. 요한 10:34에서는 시편을 인용해서 “율법”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 한 예이며 “구약성경”이라고 하는 뜻이다. 아무튼 눅 24:44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바는 “구약 성경에 있는 일들은 반드시 성취된다”라고 하신 뜻이다. 다시 우리는 요한 10:35을 펴 보기로 하자. “성경은 폐기될 수 없나니…” 이것은 참으로 강력한 말씀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확신에 충만하신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얼마나 구약성경의 권위를 확증하고 계신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말씀들은 조금도 애매한 점이 없다. 모두가 단언(斷言)인 것이다. 다시금 주님께서는 이러한 말씀뿐만 아니라 자신의 말씀에 대해서 마 24:35에서는 다음과 확증을 베푸셨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② 사도들의 증거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한 가지로 사도 바울도 성경의 권위성을 증거하고 있다. 가장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데를 하나들어 보기로 하자. 이 증거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것은 딤후 3:16이다. “모든 성경기록은 하나님의 영감(靈感)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訓育) 하기에 유익하니” 여기에서 바울은 성경이 하나의 예외도 없이, 또한 성경의 모두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명쾌(明快)하게 구약 성경의 권위를 증거하고 있는 바울의 증거를 우리는 확신한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사도 베드로도 또한 한가지로 구약 성경의 권위성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벧후 1:20, 21이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성경기록의 예언중에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으로 된 것이 없나니 이는 예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에 따라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으로부터 감동(感動)하심을 말하였기 때문이라” 주 예수 그리스도 및 그 사도들의 이와 같은 증거를 밝히고 있는 사실은 어느 것이나 다 구약의 성경의 권위인 것이다. 그러면 신약 성경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이 일에 대해서는 내적 증거에서 말하기로 하자. 결국 신약 성경의 권위도 구약성경의 권위와 동등하게 인정되는 것이다. 어쨌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주님께서 그 권위로 선택하신 사도들이 성경의 권위를 이처럼 증거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외적 증거로 볼 수 있다.
(3) 보존(保存)
① 순수성(純粹性)
성경의 원전(原典)은 수천년이나 긴 세월동안 베끼고 베껴져서 전해져 왔다. 만일 성경이 사본으로 전해오는 동안에 변해버리든지 그릇됨이 섞여서 본질적으로 틀린 것이 되어버렸다고 했다면 그야말로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순수하게 보존되어 왔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이다. 성경이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특별한 보호로써 기나긴 세월동안 성경을 순수하게 보존하신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② 내구성(오래 견디는 성질)
성경은 사람의 죄를 정죄하고 거짓을 폭로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왔다. 성경이 완성되고 나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성경 자체를 멸절시켜 버리려고 시도한 것은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들은 실패하고 말았다. 가장 먼저 제 2세기에 켈스쯔는 그의 비상한 머리로 성경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폴피어쓰는 그의 철학으로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루기아 누쓰가 그의 신랄한 풍자를 다해서 공격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드디어 로마 황제 디오그레디아누스는 성경을 박멸하기 위하여 로마 제국의 전력을 동원하여 이 일을 착수했다. 황제는 칙령(勅令)을 내려 성경을 모조리 불태우라고 명했다. 그러나 결국 마찬가지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밖에도 무수히 성경에 대한 공격은 각 시대마다 계속 되었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18세기의 일이다. 독일에는 계몽사상이 일어나고 영국에는 초월신론(하나님의 초월성만 강조하고 내재성은 부인하는 신학 이론-역자주)이 일어나고, 이것이 프랑스에 이르러서는 무신론화 되고 말았다. 어느 것이나 이성 우선주의(사람의 이성을 앞세우는 사상)를 표방했다. 당시에 프랑스에는 유명한 무신론자 볼테르가 있었다. 그는 호언장담하며 “나는 반드시 성경을 이 지상에서 말살해 보이겠다”라고 하였었다. 그래서 그는 전력을 다해서 성경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후(死後)에 그의 집은 그의 태도를 비꼬아 주듯 성서 공회의 창고가 되고 말았다. 대개 인간의 철학, 과학, 예술, 이성, 잔학성뿐만 아니라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노력이 성경을 파괴하기 위해서 사용되어 왔지만, 성경은 지금껏 미동(微動)치도 않고 굳게 서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라고 하는 놀라운 증거가 아닐까?
(4) 선포
가장 많은 방언으로 번역되고 출판되어 있는 책은 성경이다. 약 2,700가지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는 성경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유일한 책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매년 베스트셀러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어떤 책이라도 베스트셀러라면 넉넉잡아 일 년쯤 될 것이다. 혹은 수년간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보존해 왔다는 책이 있긴 하지만 수백 년간이나 긴 세월동안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는 책은 성경밖에는 없다. 성경이 베스트셀러인 것은 일본만이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매년 세계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또한 가장 많은 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람에게 읽혀지는 책이다.
(5) 종교개혁, 부흥, 외국 선교
종교개혁이 성경의 권위를 고양한 운동이었다고 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중세의 카톨릭 교회가 성경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교리를 만들어 내고 “대체 기독교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래서 그 기준된 성경에 의하면 현재의 카톨릭은 바른 것인가?”라고 하는 의문을 품게 된 선각자들이 일어나서 봉화를 들었던 것이 곧 종교개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의 권위를 명백하게 인정한 운동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 시대에는 성경 말씀이 높이 들려진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성경은 자기 백성들에게 읽히기 위해서 먼저 자기 나라 말로 번역되었고 성경이 해명되었으며 성경연구가 시작되었다. 모든 개혁은 성경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리바이블(부흥)운동은 어떠한가? 이것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쫓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의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자가 깨어진 결과로 일어나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이 리바이블 운동이든지, 종교개혁 운동이든지, 그 지도자 중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인 것을 믿지 않았던 이가 있었던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경건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마틴 루터, 존 칼빈, 존 낙쓰, 웨슬레, 요나단, 에드워드, 무디 등 그들은 모두가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이다. 또한 외국 선교 방면으로 생각을 돌려보자. 윌리암 케리를 비롯하여 아드니람 저드슨이나 데이빗 리빙스턴이나 허드슨 테일러 같은 이도 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성경의 권위있는 말씀을 쫓은 것이다. 이와 같이 세계의 위대한 운동은 모두가 성경의 권위를 쫓는 데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일은 새삼스럽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권위있는 성경의 말씀이 이와 같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이때에 우리들은 오직 성경의 권위에 경복(敬服)할 뿐인 것이다.
(6) 고고학적(考古學的) 발견
18, 19세기라는 시대는 무엇이든지 의심만 하면, 그것이 상당한 지식인 것 같이 여겨지고 또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시대였다. 그래서 의심할 필요조차 없는 일까지도 의심하게 되었으니 실로 미혹 천만의 시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희생의 과녁(target)처럼 된 것이 성경이었다. 그때까지는 거의 의심받아 본 일이 없었던 성경을 드러내놓고 의심하여 성경의 기록은 대부분이 “조작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비평이 나돌게 되었다. 지금까지 성경에서 고대사(古代史)를 재건하고 있었던 것이 다 취소되어 “고대사는 아마 역사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만큼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성경고고학(聖經考古學)이 고고학의 선구(先驅)가 되어 발굴(發掘)을 개시했다. 그런데 성경이 “조작한 이야기”였던가? 아니다. 성경의 확실성을 보증하듯 성벽, 도시, 가옥, 무덤, 비석 등이 속속 발굴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 기록의 진실성은 다시금 확인된 것이다. 그 예를 들어보자. 1927-1936년 사이에 영국 고고학 연구소의 가스당 박사는 여리고를 발굴했다. 그랬더니 성벽은 2중으로 둘러쌓여 있었고 외벽(外壁)은 바깥쪽으로 넘어져 있고 불에 탄 숯덩어리, 재, 질그릇 같은 것들이 나온 것이다. 질그릇 조각을 감정한 결과 그것은 주전 1,400여 년 경의 것들인 것으로 밝혀졌고, 그것은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침공했던 시대의 것이며, 따라서 성경의 기록은 실증되었다. 다른 한 예를 더 들기로 하자. 그것은 사해 근처에서 최근 발견된 이사야서의 사본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1947년 봄의 일이었다. 사해(死海)의 북서편 언덕에 있는 아인 푸에슈카 가까이에서 유목민 베드윈 인(人)의 어떤 사람이 길 읺은 염소를 찾고 있는 중에, 일부분이 무너진 한 동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동굴 안에는 항아리가 있었고, 그 안에는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나중에 예루살렘에 있는 미국 동양 연구소에 가지고 가서 감정한 결과 그 중의 하나는 이사야서의 사본이며,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주전 약 100년 쯤의 것임이 밝혀졌다. 그것은 구약 성경 사본으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2,000년이나 옛날 것이었다. 실로 세기적 대발견이었던 것이다. 이 발견이 놀라운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은 2,000년이나 오래된 사본과 지금까지의 사본을 비교한 결과 거의 똑 같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발견으로 말미암아 알게 된 일은 성경이 얼마나 순수하게 보존되어 왔는가 하는 사실과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얼마나 권위 있는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외적 증거는 많이 있었다. 다음에는 내적 증거를 살펴 보기로 하자.
2. 내적 증거
(1) 성경의 주장
① 구약 성경에 대하여
a. 구약 성경 자신의 주장
구약 성경 중에는 도처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증거가 있다. 성경 기자들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예언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 선지자가 내가 그에게 말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것을 내이름으로 주제넘게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을 말한다면 그 선지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느니라”(신 18:20). 또한 구약 성경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3,800번 이상이나 있어 평균적으로 어느 페이지에나 있다는 계산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에게 특별히 임하고…”(겔 1:3). 구약 성경의 기자들은 장래 확실히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컨대 모세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미리 말하고 있다(신 18:15-18). 또한 다윗(시 22장)이나 이사야(사 53장)는 구주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다. 또한 예레미야는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다(렘 25:11). 그리고 다니엘은 구주의 나타나심, 십자가상의 속죄의 죽으심을 예언하고 있다(단 9:24-27). 이와 같은 일들이 예언 된 대로 정확하게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말들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을 말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약 성경의 기자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명령받고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출 17;14),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기록 할지니라”(신 27:8). 또한 이사야(사 30:8), 예레미야(렘 30:2) 및 다른 예언자들에게도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바를 기록하라고 명령되었다(출 24:4, 34:27, 민 33:2, 신 31:24, 렘 36:1, 2, 4, 27:32, 하박국 2:2등).
b. 신약 성경의 주장
신약 성경 중에는 구약 성경으로부터의 인용구가 대단히 많이 있다. 그 구절들에 “…라고 기록되었느니라”, “…기록되었으되”라고 부언해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게시다”하는 것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인용하는데 있어서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계시지 않는 것을 인용할 때도 “하나님께서 …하시기를”(히 1:3-13)라고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히브리서 1:5-13에 주목하자. 여기서는 시편 2:7, 삼하 7:14, 또는 시편 97:7, 104:4, 110:1 등 일곱 곳에서의 인용이 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구약 성경의 삼대 구분(제 1장 2의 (1)을 참고)의 곳곳에서 인용되어 있는 것이다. 즉 신명기는 율법에서, 사무엘서는 예언에서, 시편은 제서(諸書)에서 각각 인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이 부분은 구약 성경의 삼대구분의 어느 것이나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 된다(70인역은 오리겐, 유세비우스의 작품). 다음으로 신약성경이 구약 성경에 대해서 주장하고 있는 말씀 중에서 가장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데를 보기로 하자. 그것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이다. “모든 성경기록은 하나님의 영감(靈感)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訓育)하기에 유익하니” 여기서 먼저 문맥에 유의하기를 바란다. 14, 15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와 그 어머니 그리고 외조모가 존경해 온 성경을 찬탄하고, 성경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 권면에 이어지는 말이 16절인 것이다. 그러므로 16절은 문맥상으로 보더라도 이 성경의 권위성, 신뢰성의 유래를 말하는 순서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성경”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전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란 무슨 뜻이겠는가? 원래 히브리어에서나 헬라어에서나 “감(영)”이라는 말은 “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으로서”하는 헬라어는(이 말은 헬라어로는 한 단어임) “하나님의 숨에 의한 것으로서”라는 의미도 되는 것이니 결국 “하나님의 숨(영)의 창조적 산물”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흔히 오해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기록한 것에다가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었다(inspiration of in breating)라는 의미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고 계시는’(breated out of God or Gkodbreathed) 하나님의 산물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숨결의 창조적 산물이며 이 신적 기원(神的起願)의 까닭에 모든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는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의 단정은 문맥상으로 보든지 문법상으로 보든지 벌써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음으로 베드로후서 1:20, 21의 주장을 보기로 하자. “먼저 이것을 알지니, 성경기록의 예언중에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으로 된 것이 없나니 이는 예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에 따라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으로부터 감동(感動)하심을 말하였기 때문이라” 여기에는 예언 즉 구약 성경이 인간의 착상이나 계획이나 판단이나 발의(發意)같은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 성경의 기원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성령기자들은 성령님에 사로잡혀 성령님의 능력에 의해서, 성령님의 택정하신 바 목표로 옮겨져 간 것이 밝혀져 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의 역사 아래서 그 기자들이 말했다고 하는 것은 성경 기자들이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이야말로 “예언의 말씀”이 확실한 이유인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서 특별한 배려로 어떤 지나친 사람들이 극단적인 말을 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부언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베드로의 말하려는 것은 인간의 발의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성경의 신적 기원이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 라고 했다. 여기서 “말했다”라고 한 말이 사상의 본질적인 것에 관하는 의미의 말로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여기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이것을 직역하면 ’하나님께로부터”라는 의미이다)라고 하고 있는 것은 예언의 기원을 나타내는 말이 되고 있다. 실제로 여기에 나타낸 베드로의 주장은 대담하게도 성경의 신적 기원을 단언하고 있는 것으로써 조금도 주저한 빛이란 찾아 볼 수 없다. 다음에는 마태복음 5장 17, 18장의 주장을 보기로 하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 말라 폐하려고 온 줄로 생각지 말라.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요, 오히려 성취하러 왔느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一點) 일획(一劃)이라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모두 성취되리라”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성경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의 말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구약 성경을 나누어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으나 구약 성경에는 권위가 없다고 운운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암시조차 아니하셨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기록된 사실 위에 그 권위를 인정하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는 틀림이 있으나 구약 성경과는 별개의 하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다고 하는 식의 가르침은 주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문서로써의 구약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시면서 그 구절구절에 이르기까지 권위를 인정하시고 계신다. 즉 주님께서는 사상과 말과의 밀접한 관계를 인정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대체로 사상이란 말을 떠나서는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확히 사상을 표현하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말의 선택이 적정(適正)해야 한다. 의미와 내용으로써의 사상은 표현 형식으로써의 말에 제약을 받는 것이며, 또한 반대로 말은 사상에 의해서 그 선택이 제약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과 사상은 어떤 일의 전달에 있어 표리일체(表裏一體)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구약 성경의 일점일획에까지 그 권위를 주장하신 것이다. 주님은 가장 충실한 언어 영감을 확신하신분이라는 것은 이 말씀으로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의미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구약 성경 전체를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하시고 복종과 공경을 보이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성경의 권위를 조금도 주저 없이 인정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성경의 내적 증거를 다 열거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만일 우리가 심심한 주의를 기울여 성경을 읽어간다면 성경 중에는 이와 같이 직접적인 언급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도 보이고 있는 증거가 가득차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확실히 성경은 그 자체로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는 전제 위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심정으로 읽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많은 의문점들이 쉽게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들은 성경 중에서 매우 적은 일부의 증거를 살펴왔다. 물론 시간과 지면이 충분하다면 모든 증거를 다 들어 배울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중의 몇 가지만을 특례로 들어본 것이다. 모든 문제를 대체로 해결하는데 필요한 것만을 거론한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성구 밖에 살펴보지 않았지만 중요한 증거와 의론을 위해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명백한 증거를 제시해도 납득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이상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이상의 군데군데를 성경을 통해 더 충분히 배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② 신약 성경에 대하여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연장선상(延長線上)에 있다고 하겠다. 곧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과 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이 권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응당 신약 성경도 그것과 같은 권위를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견지에서 본다면 신약 성경 시대는 구약 성경 시대보다도 훨씬 우월하게 빛나는 시대이다. “영광(구약시대의 율법적 경륜)되었던 것이라도 이점에서 영광(신약시대의 복음적 경륜 )되지 아니함은, 더욱 뛰어난 영광으로 인함이라” (고후 3:10). “이는 없어져 버린 것도 영광스러웠을진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훨씬 더 영광스럼기 때문이라”(고후 3:11). 이와 같이 신약시대의 경륜은 구약시대의 경륜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다. 구약적인 경륜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감이 있어 그것으로 말미암아 성경이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되었다고 하면, 신약 성경이 구약 성경 이하 일수는 없는 것이다. 곧 신약 성경도 구약 성경과 한 가지로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인 것이다. (주(註)): 여기서 좀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구약 성경보다 신약 성경이 우수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경륜보다도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경륜이 더 빛나는 것이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3:10, 11의 뜻인 것이다. 또한 신약 성경을 구약 성경과 동등한 권위로 인용하고 있는 데가 있다. 그것은 디모데전서 5:18이다. “이는 성경기록이 말슴하시기를, 너는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하였고, 일꾼이 자기 품삯을 받는 것은 마땅함이니라, 하셨기 때문이라”하고 있다. 이 두개의 인용 중에서 전자는 구약 성경의 신명기 25:4이고, 후자는 신약 성경의 마태복음 10:10이거나 혹은 누가복음 10:7인 것이다. 이 양자가 “또”라는 접속사에 의하여 결부되어 있어 그 처음에 “성경에”라고 하는 것은 후자도 또한 성경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또한 베드로후서 3:16을 보면 “그의(바울) 모든 편지들에서도 이런 것에 관하여 말하되, 그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배우지 목하여 흔들리는 자들이 다른 성경기록들과 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그들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베드로후서 3장에서의 말세의 마지막 날에 일어날 중대한 일들을 취급하고 있다. 그의 기록은 마지막 날에 이를 주님의 약속과 주님의 신실성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 문맥을 더듬어 올라가면 실은 바울의 편지의 권위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여기서 바울의 편지를 “다른 성경” 즉 구약 성경과 같은 수준에 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신약 성경 자신이 신약 성경을 구약 성경과 같은 권위 있는 책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성경의 통일성
구․신약 성경 66권이 통일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대로 오직 한 분 즉, 하나님의 구․신약 성경의 참 저자이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경의 권위를 나타내는 내적 증거의 한 가지가 된다. 확실히 성경은 약 40명의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것을 쓰고 있을 때에 그것이 성경의 일부이다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책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미리 그분 자신께서 사람에게 계시하실 바 내용을 정하고 계셨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필요하고 충분한 계시를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쓴 책들을 나중에 하나님께서 모으도록 하시어서 그것을 인정하신 것이 “성경이다”라고 하는 식의 생각은 그릇된 것이다. 그것은 성경 기자들이 쓰려고 하기 전에 앞서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성경 66권의 내용의 구상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증거로써 성경 기자들이 쓴 책이 모두다 성경 중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은 제 13편의 편지 이외에도 몇 편의 편지를 쓰고 있었다(고전 5:9). 그러나 그것은 계시에 대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 중에는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다. 이와 같이 비로소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책으로써 합당한 것이다. 만일 성경이 인간의 체험의 기록들로써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여 성경으로 삼았다고 한다면 실로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책일 것이다. 그러한 성경이라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사한 책들이 이후에도 나타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 2의 성경, 제 3의 성경, 20세기의 성경이라고 하는 식으로,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들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시려고 생각하신바 필요하고 또한 충분한 일만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둘도 없는 독점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통일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① 주제의 통일성
성경은 약 40명의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책인데도 그 66권의 내용은 모두 하나의 주제를 향하고 있다. “성경 기록들을 상고(상고)하라.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을 생각하기 때문이니, 이는 너희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라”(요 5:39).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중심이 무엇인고 하면, 십자가의 속죄이므로 성경의 주제는 곧 그리스도의 속죄이다. 구약 성경의 첫머리부터 신약 성경의 말미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다. 먼저 창세기 제 1장은 속죄의 장소를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곧 지구이다. 제 2장에는 속죄의 대상인 인간의 창조가 기록되어 있다. 제 3장에는 인간이 죄에 빠졌기 때문에 속죄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속죄의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속죄에 대한 최초의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창 3:15). 또한 가죽옷(창 3:21)은 속죄를 예표하고 있다. 제 4장에서는 죄의 희생이 기록되고, 노아의 방주는 속죄의 아름다운 그림을 나타낸다(창6:14의 덮어준다<카파르>라는 말은 “구속”이라는 말과 같은 히브리어임). 이와 같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유월절 어린양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고전 5:7). 레위기에서는 희생의 제물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모형으로 되어 있다. 룻기, 에스더에서도 이와 같이 사랑이 하나님의 섭리에 나타나 있고 섭리의 배경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죄를 가리우게 되는 것으로 예표하고 있다. 욥기에는 속죄의 계획이 “고난”을 통해서 보여지고 있으며, 시편에서는 너무도 분명하게 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잠언은 속죄가 없으면 이 책의 가르침은 없는 것이다. 전도서에서는 모든 일의 귀추는 12:13에 말씀되어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속죄의 은혜가 없으면 만사는 무의미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 아가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그림을 인간의 사랑으로써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언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명료하고, 최후의 말라기에 의한 “주가 갑자기 자기 성전으로 오리니”(말 3:1)라는 계약으로써 구약을 봉할 때까지 시종 속죄 주의 그 업적을 기록하는 것으로 가득차 있다. 신약 성경을 펼치면 먼저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을 밝히고(마 20:28, 막 10:45), 이어서 사도행전 및 서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이 되셨다고 하는 사실 위에서 기록되었고 또한 그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최후의 계시록에 이르면 구속의 완성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성경의 주제는 일관(一貫)되고 있다. 이것은 음미할수록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② 구상의 통일성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 중에 숨겨있고,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 중에 나타나고 있다” 즉 신약 성경의 배경은 구약 성경이며,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의 빛에 의해서 더욱 분명해지는 것이다. 신약 성경 중에는 구약 성경으로부터의 인용이 181회나 있다. 그 인용인즉 구약 성경의 모든 곳에서의 인용인 것이다. 이 사실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금 하나의 과제가 성경 가운데서는 각기 다른 견지에서 취급되고 있는 사실을 알고 보면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합한 한 권의 성경이 통일된 구상아래 기록되었다고 하는 것을 납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 예를 든다면 사랑에 대해서 기록된 중요한 곳은 아가서와 고린도전서 13장, 그리고 요한1서 등이다. 그런데 이런 곳을 살펴보면 각각 다른 견지에서 사랑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상호간에 보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좋은 주해서를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말은 자주 들을 때 그때마다 언제나 “성경의 좋은 주해서는 성경입니다”라고 대답하면 된다. 사람들은 이 대답을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의미는 이렇다. “예컨대 레위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히브리서를 읽어라, 바울의 서신들을 잘 모르는 사람이면 그 배경으로써 기록되어 있는 복음서 및 사도행전을 읽어라” 즉 성경 중에서 잘 모르는 부분은 보다 더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는 데의 빛을 통해 이해하라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유월절 양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고 물었다 하자. 나는 이에 대해서 자기 마음대로의 의미를 붙일 수 있게 허락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데를 성경 다른 데에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신약 성경 고린도전서 5:7에 “우리의 유월절(兪越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犧牲物)이 되셨기 때문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방금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들에게 “성경을 읽으시오”하면 마태복음 첫머리를 몇 번이나 펼쳐 본 다음에는 “정말 시시한데…”하고는 그만 두는 수가 많다. 그러나 만일 마태복음 처음에 있는 저 족보가 없었더라면 그야말로 불가해(不可解)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잡지나 신문의 연재소설 같은데 종종 있는 일인데 너무 길게 계속될 때는 「전호까지의 줄거리」라고 해서 지금까지의 요약을 싣는 때가 있다. 마태복음 처음에 있는 족보도 그와 같은 것이다. 「전호까지의 줄거리」인 것이다. 즉 구약 역사를 족보형식으로 기록하여서 이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사람들이 대망하고 있는 구주야말로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라는 식으로 신약 성경의 본문으로 계속되어 있는 것이다. “좀 더 세밀히 썼더라면…”라는 말을 흔히 듣거니와 좀 더 세밀히 쓴다면 저 39권의 구약 성경이 되고 말기 때문에 세밀한 것을 희망하는 이는 구약 성경 본문을 읽으면 되는 것이다. 만일 저 족보가 없으면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과의 다리가 없어져 버리니 계속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래도 저 족보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좀 더 말해두고 싶은 것은 성경의 구조가 ‘사실과 그 설명’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도 사실인 역사가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설명으로써의 예언이 뒤에 있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도 그와 같이 사실인 복음서가 먼저 기록되어 있고 그 설명으로써의 편지(서신)들이 뒤에 있는 것이다. 물론 사실 중에도 그 사실의 뜻을 설명하는 말씀이 있고, 설명 중에도 사실을 말한 데가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기자들이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로써는 놀라울 만큼 구조상의 통일이 있다. 배후에 이를 지도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뛰어나신 지혜가 계셨음을 살펴볼 때 우리는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③ 교리의 통일성
40인의 사람들이 기록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66권의 성경은 교리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것도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평 과학자들이 자주 말하는 것이거니와 구약 성경의 신관(神觀)과 신약 성경의 신관은 틀리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 것일까? 그들의 말에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의(義)의 하나님이시고, 또한 분노의 하나님이시며, 신약 성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또한 은혜의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구약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이나 신약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이나 함께 의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랑의 하나님 이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는 구약 성경 중에서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은혜로우신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데를 몇 군데만 지적하기로 한다. 이것은 두서너 개의 예(例)에 지나지 않지만, 신명기 32:8이하, 시 86, 89편 등, 또한 신약 성경 중에서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소멸하시는 진노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를 몇 군데 지적한다면 로마서 1:17, 2;5, 12:19, 히브리서 12:29 등이 있다. 물론 이것도 얼마의 예에 불과하다. 또한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은 바울의 교훈과 예수님의 교훈 사이에 상위(相違)가 있다고 한다. 오늘의 그리스도 교회의 교의(敎義)는 바울이 이교에서 빌어온 것으로 세운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교훈과는 다르다고 그들은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과연 예수님의 교훈과 바울의 교훈 사이에는 상위가 있는 것일까? 예컨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구원의 교훈과 바울이 가르친바 구원의 교훈 사이에 어떤 상위가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바울의 교훈은 피흘림으로 말미암는 대속이었다(롬 3:24, 25, 고전 8:11, 고후 5:21, 갈 3:13 등). 예수님의 교훈도 역시 대속이었다(마 29:28, 26:28, 막 10:45). 이렇게 비교해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이나 바울의 전도 내용은 전혀 다를 바 없는 동일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이들은 바울의 신학과 야고보의 신학이 모순되어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행위에 의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는데, 야고보는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위로 말미암아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 하는 것이다. 만일 이들 문자로써만 본다면 모순 이외의 아무것도 결론을 바랄 수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살펴본다면 여기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고 오히려 양자가 서로 보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믿음에 대립시켜서 말하고 있는 행위와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행위와는 같은 것이 아니다.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행위는 믿음에 대립되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 즉, 열매로써 나타나는 행위인 것이다. 야고보도 바울과 한 가지로 구원이 믿음으로만 된다고 하는 데는 이의가 없으나 그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반드시 그 경로로써 “좋은 행위”를 동반하는 “믿음” 즉, 산 믿음을 대립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좋은 행위를 동반하게 된다는 데는 이의가 없으며, 다만 믿음에서 나지 않는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하여 그런 것으로는 아무도 구원될 수 없는 것이며,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야고보가 상호 보충적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더욱 굳혀 놓은 의미에서 바울이 예증(例證)한 바 아브라함의 기사를 살펴본다면 그것은 창세기 15장의 “의인(義認)”의 곳인데(롬 4:3, 갈 3:60, 야고보가 예증으로 하고 있는 기사는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의 시험”의 곳이다(약 2;21-24). 이로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약 2:23)라고 말씀되고 있듯이 아브라함의 의인이 공증(公證)되었다고 하는 것이니 응당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의인”이며, 야고보의 말하고 있는 것은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자의 당연한 결과로써 따르게 되는 “선행”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종말(말세)에 대해 다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말씀은 모순되지 않고 조화되며 통일되어 있다.
(3) 예언의 성취
성경의 권위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내적 증거는 예언의 성취이다. 성취된 예언은 하나의 사실이다. 역사적인 사실이 성경의 권위를 말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우리에게 믿음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말하려면 넉넉히 한 권의 책이 되어버릴 것이다. 예언의 성취는 성경 권위에 대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서너 가지
의 예만 드는 것으로 그치겠다.
① 메시아 예언
구약 성경 중에 있는 메시아 예언(구주에 대한 예언, 히브리어로는 구주를 ‘메시아’로 하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한다)은 연구한 사람의 이야기에 의하면(칸논, 리드운이라는 학자에 의함) 구약 성경 중에 332회나 있다고 한다. 그런 것들이 모두 정확히 성취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일은 그 수가 아니라, 수학적인 확률이다. 수백 년 전에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낱낱이 성취되었다고 하니 적어도 구약 성경의 예언이 다른 어떠한 종류의 예언보다 훨씬 뛰어난바 구약 성경을 초인간적, 초자연적 기원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중의 몇 가지만 나타내는데 그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사 7:14, 마 1:20)- 주전 700년 전의 예언, 베들레헴에서의 그리스도 탄생(미 5:2, 마 2:1)- 주전 700년 전의 예언, 그리스도의 공생애(단 9:25, 26, 눅 3:23)- 주전 550년의 예언,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슥 9:9, 마 21:4, 5)- 주전 400년 전의 예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시 22:16, 요 20:25, 27)- 주전 1,000년 예언, 그리스도의 옷이 제비 뽑힘(시 22:18, 마 27:35)- 주전 1,000년의 예언, 그리스도의 승리의 부르짖음 “다 이루었다”(시 22:31, 요 19:30)- 주전 1,000년의 예언, 그리스도의 부활(시 16:10, 행 2:25-31)- 주전 1,000년의 예언, 그리스도의 승천(시 110:1, 행 2:34, 35)- 주전 1,000년의 예언. 여기에 예거한 것들은 가장 현저한 것들뿐이다. 이사야 7:14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고 예언되어 있다. 대체로 아들을 낳느냐? 딸을 낳느냐? 하는 일은 낳아보지 않고는 알지 못하는 일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기 700년 전이나 1,000년 전에 구주가 “아들”인 것을 예언했다는 것은 대담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리스도께서 공생애에 나타나실 때에대해서 예언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의 명령이 내린 때부터 일곱 이레(七週)와 62 이레(62週) 다음이라고 했다(단 9:25). 한 이레란 7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69의 7배 즉 483년이 되는 셈이다. 예루살렘 성전 중건의 명령은 3번 내렸으니 그것은 주전 536년과 457년과 444년이었다. 여기서는 457년의 일이니, 그것은 다니엘서가 기록된 시대로부터 그렇게 따질 수가 있다. 그 때부터 483년이면 곧 주후 27년의 일로써 그리스도의 탄생은 주전 4년경이니까 주후 27년은 그리스도께서 30세 쯤 되신 때다. 이 사실은 눅 3:23의 말씀과 꼭 들어맞는다. 이와 같이 특정한 개인에 대해서, 더욱이 특정한 일에 대한 예언이 이렇게 성취되고 있다는 것은 보통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현재의 상태에서 그 결과를 일반적으로 방법으로 예언했다는 것은 오늘날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메시아 예언처럼 특정한 개인에 대한 예언이 일일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이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세우는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없다.
② 그 밖의 예언(기타 예언)
메시아 예언을 제외한 그 밖의 예언이 성취된 예(例)도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기에서 다만 세 개의 예만 들기로 하자. 이것만으로도 성경의 신적기원을 나타내는 내적 증거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예증코자 하는 것은 유대인에 대한 예언이다. 유대인에 대한 예언은 많이 있지만 여기에 예를 드는 것은 그 많은 예언 중에 하나뿐이다. 그것은 신명기 28:36, 37에 있다. “주님께서는 너와 너를 다스리도록 네가 세울 왕을 너와 네 조상들도 알지 못했던 민족에게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나무와 돌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요” 이 28장은 유대인에 대한 대 예언의 장이다. 히브리 민족의 장래의 전 역사가 개설되어 있다. 포로 당함과 로마군에 의한 멸망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49절의 ‘독수리’는 로마군대의 표징이었다). 이 예언이 기록되어 있는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를 받아 애굽을 나와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에 기록된 것이다. 벌써 시내산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시대의 사람들은 죽고 다음 세대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두 번째로 율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그 두 번째의 율법이 곧 신명기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신명기가 기록되고 있을 때는 이스라엘은 그 세력이 힘차게 일어나고 있을 때였던 것이다 . 그런 때에 이 포로됨과 굴욕의 예언이 주어진 것이다. 만일 인간적 관측에서 성경이 기록되었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일은 결코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장래를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와 같은 예언을 이스라엘 민족의 흥왕 이전에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저 쇠잔해 질 것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예고가 아닌, 실로 구체적으로 기록된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확증이 아니고 무엇일까? 다음으로는 세계 제국들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이다. 이것도 또한 세계 역사를 전망하는 예언이다. 이것은 느부갓네살 왕이 본 큰 우상에 대한 다니엘의 설명(단 2장)과 그가 본 환상에 의해서 묘사되어 있다. 그들의 환상에 의하면 네 개의 세계 제국이 연이어서 일어난다. 제 1은 신바벨론 제국이다. 그것은 느부갓네살 왕이 본 상(像)에서는 정금머리(2:38)이며, 다니엘의 환상에서는 네 개의 짐승 중에 첫째 것 즉,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사자”(단7:4)에 해당한다. 그것은 여러 금속 중에 금이 차지하는 위치와 신체 중에서 머리의 위치가 땅의 짐승들 중에서 사자가 차지하는 위치이며 공중의 새들 중에서 독수리의 차지하는 위치와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머리란 역사적 순서로 선두를 의미하고 금이란 정치적 통일력의 크기를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상에 있어서 세계적 권력의 선두는 바벨론으로 나타내고 있음을 세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 환상대로 세계 역사는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다음에 느부갓네살 왕이 본 우상에서 은의 가슴과 두 팔은 무엇일까? 그것은 “또 왕 이후에 왕보다 못한 다른 왕국이 일어날 것이요, 놋으로 된 또 다른 셋째 왕국이 온 땅을 다스리게 되리이다”(단2:39)라고 다니엘이 왕에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바벨론 뒤에 일어난 제 2의 세계 제국, 즉 메대, 파사를 가리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것은 다니엘이 본 환상에 의하면 몸 한편을 든 “곰”이며(단7:5), 또한 두 뿔 중 한 뿔이 다른 뿔보다 긴 “숫양”이기도 했다(단8:3, 20). 메대인과 파사인은 원래 형제 관계의 민족이었다. 처음에는 메대인이 파사인의 지배 아래 있었으나 주전 559년에 파사왕 고레스가 메대 왕을 넘어뜨리고 메대 왕국은 파사 왕국이 되고 말았다. 즉 곰이 한편 몸을 든 것과 수양의 두개의 뿔 중에서 한편 것이 다른 것보다 길게 나타난 것은 같은 사건을 다르게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메대와 파사라고 하는 두 팔을 가지 제국이었던 것이다. 이 나라의 판도는 바벨론 제국보다도 광대했으나, 군주적 과두정치로써 나라의 통일력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바벨론의 금에 비해서 못한 은이었다. 다니엘의 예언은 메대, 파사 이후에도 계속 언급되어 있다. 다음으로 느부갓네살 왕이 본 이상 중에서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놋으로 된 또 다른 셋째 왕국이 온 땅을 다스리게 되리이다…”(단2:39)라고 다니엘이 왕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은 곧 헬라(그리스)나라인 것이다. 세계 제국의 제 3에 위치 하는 것은 그 통일력에 있어서 한층 더 약한 헬라 제국이다. 메대, 파사 제국 존속 200년에 갑자기 놀라운 강적이 헤레스폰드를 넘어서 밀물처럼 밀어 닥쳤다. 그것은 젊은 마게도니아의 알렉산더 왕이 이끄는 4만의 대군이었다. 다니엘이 본 환상에 의하면 4개의 날개와 4개의 머리가 있는 “표범”(단7:6)에 해당다. 또한 서쪽에서 맹렬히 달려들어 파사의 “숫양”을 넘어뜨리는 “숫염소”(단8:5-7, 21)였다. 파사의 왕들은 싸움에 나갈 때는 왕관 대신에 양의 머리를 썼다. 또한 헬라(마게도니아)의 군기의 표는 숫염소였으니 이 예언은 꼭 들어맞은 것이다. 사실로 알렉산더의 세찬 군에는 경쾌한 숫염소처럼, 그리고 4개의 날개가 있는 표범과 비슷했다. 그러나 젊은 헬라 제국의 왕 알렉산더는 급사하고, 그 예언대로 “뿔”이 꺽여지고 말았다(단8:8, 22). 그리고 그 나라는 4쪽으로 나누어지고 말았다(단8:22). 실로 예언은 세밀한 점까지 성취되었다. 다음에 느부갓네살 왕이 본 이상의 종아리는 쇠이고 발의 일부는 쇠, 일부는 진흙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넷째 왕국은 강하기가 철 같이 될 것이오니, 철은 모든 것들을 산산조각 내며 쳐부수는 것이라. 철이 모든 이것들을 부수는 것같이…”(단2:40).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시저(가이사 줄리어스)에 의해 기초를 놓고,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실현된 로마제국이다. 다니엘이 본 환상에서는 짐승이며, “두려우며 무섭고 몹시 강하고, 큰 철의 이빨들을 가졌더라. 또 그 짐승이 삼키고 산산이 부수며, 그 나머지를 짐승의 발로 짓밟더라…”(단7:7)라고 하는 것이다. 이 제국의 판도는 지중해, 영해협, 흑해의 대부분을 두르고 라인강, 다뉴브강, 코카서스 산맥과 아라비아 사막과 아프리카 사막, 대서양과 북해로까지 펼쳐진 엄청난 지역이었다. 그것은 “온 땅을 삼키고 온 땅을 밟아서 산산조각 낼 것이라”(단7:23)라고 예언되어 있는 바의 성취이다. 로마의 정치제도는 공화정치에서 난 것인데 바벨론의 금이나 메대, 파사의 은이나 헬라의 놋보다도 못한 철인 것이다. 그러나 품질에 있어 못하지만 그 굳센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강한 쇠인 것이다. 즉 로마는 문자 그대로 ‘제국주의’였다. 그 나라는 온 세계를 지배할 만큼 강한 나라였다. 마지막으로 다니엘의 해명한 바 발의 일부는 쇠, 일부는 진흙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다니엘의 해명과 같이 이들 부분은 종아리 부분인데 다른 나라가 아니라 그 연속이다. “일부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일부는 철로된 발들과 발가락들을 보신것같이...”(단2:41).그것은 분열된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그 형태에 있어서는 분열이지만 철과 진흙의 혼합은 통치력의 저하를 의미한다. 민주주의(진흙)와 낡은 제국주의(쇠)와는 결국 융합할 수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 이 예언에 의하면 이와 같은 일들은 로마제국 이후 오늘에 이르는 세계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건대 확실히 로마제국 이후의 역사는 모두 로마 문명의 계속이다.하나의 제국인 로마는 분열했으나 그 문명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국민 생활의 기초인 법률은 어떤가? 확실히 오늘날의 법은 로마의 법을 그 근거로 하고 있다. 언어에 있어서도 오늘날 세계의 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라틴어(학술용어)이며 또한 로마자, 로마숫자는 세계에 통용되고 있다. 또한 군사제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로마적인 것은 정치이다. 제국주의와 민주주의 모순, 그것이 로마 이후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오늘날 공산주의는 그 현실적인 모순성을 자본주의와 실용주의로 보완하고 미국은 세계 평화를 부르짖으면서 군비 지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현대문명은 진흙과 쇠와의 기이한 혼합이다. 그러면서 암흑은 그 극에 달하고 있다. 이런 일은 다니엘이 예언한 그대로가 아닌가? 실로 세계 역사를 전망하는 다니엘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다니엘이 이 예언을 받은 것은 누부갓네살 왕의 시대로 주전 약 600년 경의 일이었다. 그때에는 물론 메대, 파사 제국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헬라나 로마 들이 세계의 패권을 잡느니 하는 것은 상상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때였던 것이다. 이런 때에 다니엘은 세계 역사를 전망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상술한 대로 온전히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은 “경탄” 정도의 말로는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이래도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도 고무한, 그리고 너무도 편견된 인간이라고 불리워도 할 수 없는 노릇일 것이다. 하나만 더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두로에 대한 예언이다. 그것은 에스겔서 26-28장에 있다. 여기서는 두로의 운명이 예언되어 있다. 두로란 나사렛 북서 96km 지중해안에 있는 도시이다. 이 두로의 일부분은 섬에 있고, 타부분은 비옥하고 수리(水莉)에 편리한 평야로 된 본토(本土)에 있었다. 두로는 고대 세계에 있어서 상당히 강대한 해운국(도시국가)으로써 기원전 12-16세기기 경에는 아프리카의 북서 해안이나 스페인, 영국 등지에서 식민지를 가졌고 지중해 무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세계의 상품은 반드시 두로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그 부와 힘은 세계에 알려지고 있었다. 이 두로가 한창 번영할 때 이 예언이 주어졌다. 이 예언에 의하면 두로는 누부갓네살 왕에게 포위되어 영원히 황폐해져 버리고, 옛날의 번영의 그림자 조차도 찾을 수가 없게 되어서 “말간 반석”이 되며, 다시 재건될 수 없는 곳이 된다는 것이다. 이 예언이 주어진 후 얼마 못되어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로를 포위했다. 그러나 두로 시가를 정복하는 데는 13년이 걸렸다. 드디어, 두로는 무너졌고 그 후에 바사에 정복되고 이윽고 알렉산더 왕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두로는 예언대로 오늘날은 아무도 거기를 방문하는 자가 없으며, 다만 어부가 그물을 치고 있는데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실로 흥미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역사를 살피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와 같은 일은 정말 이상한 일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성경은 이상한 책이다. 그것은 심상한 책만은 결코 아니다. 모든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그 사실 만으로도 성경의 가치는 충분하다. 다른 어느 책이 이와 같을 것인가? 이와 같은 일들이 이제 성경의 권위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언의 성취는 무엇보다도 웅변으로써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역사 가운데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실험적 증거
우리는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 역사적 증거 및 내적 증거를 보아왔다. 그래서 성경 자신이 또 다른 많은 일들이 성경의 권위를 증거하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 이상은 관찰이다. 이 세상일들을 관찰한 후에는 실험할 때가 있는 것이다. 실험과 관찰은 과학적인 연구에서 뺄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방법을 채용하려고 생각한다.
(1) 국가(나라)
먼저 우리는 국가에 있어서 실험된 결과를 보려고 한다. 저 야만족이라고 불리웠던 게르만 민족을 보라, 그들의 만행은 차마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경을 손에 들게 되자 그들의 생활은 변했고, 오늘의 유럽 문명인으로 등장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문제를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특별히 성경을 받아들인 프로테스탄트 제국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16세기의 위대한 종교개혁 이래 성경을 받아들인 국가, 국민과 이를 거역한 국가, 국민과의 사이의 도덕적, 문화적 수준을 보라. 스코틀랜드에 있어서 죤 낙스가 성경에 의한 개혁을 끼칠 때까지 그 나라는 도덕적으로 저속하며 무지하고 타락했으며 미신적이었다. 그러나 한번 이 나라에 성경이 도입되자 스코틀랜드의 신용을 세계에 자랑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스코틀랜드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결과 성경을 받아들인 나라들은 다 그러하다. 그러나 일반 종교개혁을 이루지 않고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은 나라들은 어떠한가? 이태리, 스페인, 중남미 여러 나라에 있어서의 도덕적, 문화적 순주의 뒤떨어짐은 너무나도 도가 심하다. 그런 나라에서는 오늘날에도 사생아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인이 미명 아래 공공연히 감행되고 있다. 오늘날 중남미에 있어서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박멸의 봉화는 로마 카톨릭에 의해 들리워지고 상해, 살인이 백주에도 감행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기막히는 사실이 아닌가? 성경을 받아들인 나라들의 도덕적, 문화적 수준의 높이가 성경에 기초한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성(理性)의 여신을 숭상한 프랑스의 무신론자들이 그린 꿈은 저 불란서 혁명이 되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도 있었지만 살인, 유혈의 참사 등으로 성공이란 한낱 이름에 불과했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터이다. 너무나도 큰 희생 앞에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수확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국은 어떠했던가? 성경으로 말미암은 리바이블(부흥)이 죤 웨슬레를 중심으로 일어나서 거기에는 무혈혁명이 이루어졌다. 실로 성경의 위력은 위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사실 앞에는 함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도시(都市)
도시에 있어서도 사정은 국가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오직 하나의 예만 들기로 한다. 그것은 스위스의 제네바이다. 죤 칼빈의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던 제네바는 종교개혁 이전에는 정말 부패한 곳이었다. 그 시민은 향략적이며 음란했고, 주정뱅이들이 매우 많았던 곳이었다. 도박이 횡행하고 추잡한 일들은 공공연히 인정되었고, 백주에도 취객이 붐비었고무지몽매하고 매우 나태했다. 즉 모든 악덕들이 거기에 만연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한번 종교개혁의 횃불이 오르자 많은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네바의 시가는 성경에 의해서 개혁되어 악명을 버리고 질서와 정은(靜隱)으로 유명한 시로 변해버렸다.
(3) 개인
성경을 하나남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품성과 이를 거역한 사람의 품성과의 구분은 획연(劃然)한 것이다. 성경을 받아들이고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경건하고 겸손한가는 우리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 개인에 대해서 살펴보라. 성경을 믿기 이전과 믿고 난 다음의 생활이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 벗 중의 한 사람이 성경을 믿게 되었을 때에 그의 생활이 전연 새롭게 변하는 것을 우리는 보아왔다. 이런 일에는 거의 예외가 없는 것이다. 다음의 이야기는 이런 일의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어떤 청소년이 살인, 강도, 방화의 죄를 겹쳐 짓고 전과 18범이라는 몸으로서 무기형의 선고를 받고 공지의 형무소로 송치되었다. 그는 거기서도 반항, 탈옥 등 온갖 악한 일들을 범하고 있었기에 무기형 위에다가 18년의 형을 더 가할 정도였던 것이다. 악귀라고 악명이 붙은 그에게도 구 누군가에 의해서 성경이 주어졌다. 독방 신세에 고독했던 그는 그 성경을 손에 들고 이따금 한 줄씩 읽어보고는 던져두고 던졌다가는 다시 손에 쥐어보고 하기를 몇 날이나 계속하던 어느 날, 기록된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때부터의 그는 모범수로서 일하던 중 드디어 28년 후에 대사면의 혜택을 입고 출옥한 것이다. 그의 여생은 그리스도께 드려진 거룩한 생애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증거를 위해 바쳐졌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이다. 실로 성경만이 변화시킬 수 있는 생애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험적 증거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다른 사람이나, 도시나, 국가의 예를 보는 것보다는 자신의 몸을 실험해보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분의 뜻을 행하려면, 그는 그 교훈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되리라”(요 7:17). 자기 자신을 볼 때에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물을 관찰하는 데는 항상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깥으로 보는 일과 안으로 보는 일이다. 예컨대 어떤 가정을 알아보려고 하면 그 근처에 가서 그 가정의 소문을 듣는다든지 그 밖의 일들을 조사하면 된다. 이것이 외부에서 보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써는 아마 충분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 집 안에 들어가서 그 가정의 사람들과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가정의 내적 상태를 알 수가 있고, 바깥에서는 잘 알 수 없었던 일까지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역사적 증거니 내적 증거니 하면서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외부적으로 보아왔다. 소위 관찰해온 셈이다. 이제는 우리가 실험을 통해서 성경이 진실한가 어떤가를 확인하려고 한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기록된 말씀을 나 자신에게 적용해 보는 것이다. 성경에 있는 약속을 내가 믿고 성경이 그 약속대로 된다면 그야말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확신할 수가 있는 것이다. 벌써 우리 중 여러 사람이 이런 일에 대해서 실험을 마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그것을 확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들 안에 역사하셔서 성경의 권위를 증거 해 주신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기를 바라고 계신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친히 기록하신바 증인(証印)을 성경 중에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성경이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증거를 세 가지 방면으로 보아왔다. 이미 증거는 충분하게 증시되었다. 우리는 성경이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이 말씀을 통해 세상에서 빛 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무엇인가? 이것들을 “ 기록한 것은 너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요, 또 믿음으로써 너희가 그분의 이름을 통하여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20:31). 아무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해도 그 안에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지금까지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해서 성경의 권위를 내세운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얻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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