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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엔카의 아버지
고가 마사오(古賀政男)의 노래 3곡
1. 影を慕いて
가케오 시타이테
여인을 사모하여
2. 酒は涙か溜息か
사케와 나미다카 타메이키카
술은 눈물인가 탄식인가
3. 誰か故を想わざる
다레까 고꾜오 오모와자루
누가 고향을 잊을 수 있나
古賀政男(1904~1978)
1. 影を慕いて(가케오 시타이테,
여인을 사모하여) - 藤山一郞
作詞, 曲: 古賀政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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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카부산마을 | 影を慕いて (藤山一郎) - Daum 카페
影を慕いて
作詞,曲: 古賀政男
노래: 藤山一郎
1
酒は 涙か 溜息か
사케와 나미다카 타메이키카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心のうさの 捨てどころ
코코로노우사노 스테도코로
마음 시름을 버릴 장소이던가
遠い えにしの かの人に
토-이 에니시노 카노히토니
멀고 먼 인연의 그 사람에 대한
夜毎の夢の 切なさよ
요고토노유메노 세쯔나사요
매일 밤 꾸는 꿈의 애절함이여
2
酒は 涙か 溜息か
사케와 나미다카 타메이키카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かなしい 恋の 捨てどころ
카나시이 코이노 스테도코로
슬픈 사랑을 버릴 장소이던가
忘れた 筈の かの人に
와스레타 하즈노 카노히토니
당연히 잊었다 생각했던 그 사람에 대한
のこる 心を なんと しょう
노코루 코코로오 난토 쇼-
남은 미련의 마음은 어찌해야 하나
3
君故に
기미유에니
그대 때문에
永き人生を 霜枯れて
나가키 히토요오 시노가레테
긴 인생을 서리에 시들어
永遠に春見ぬ 我が運命
도와니 하루미누 와가 사다메
영원히 봄 못 보는 나의 운명
ながろうべきか 空蟬の
나가로우 베키카 우츠세미노
오래 살 것인가 매미 허물의
はかなき影よ 我が戀よ
하카나키 가게요 와가코이요
덧없는 모습의 나의 사랑이여
2. 酒は涙か溜息か
(사케와 나미다카 타메이키카,
술은 눈물인가 탄식인가) - 五木ひろし
作詞: 高橋掬太郎 作曲: 古賀政男
노래: 五木ひろし
(いつき ひろし, 이츠키 히로시,
본명은 마츠야마 카즈오
松山数夫, まつやま かずお)
1
酒は 涙か 溜息か
사케와 나미다카 타메이키카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心のうさの 捨てどころ
코코로노우사노 스테도코로
마음 시름을 버릴 장소이던가
遠い えにしの かの人に
토-이 에니시노 카노히토니
멀고 먼 인연의 그 사람에 대한
夜毎の夢の 切なさよ
요고토노유메노 세쯔나사요
매일 밤 꾸는 꿈의 애절함이여
2
酒は 涙か 溜息か
사케와 나미다카 타메이키카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かなしい 恋の 捨てどころ
카나시이 코이노 스테도코로
슬픈 사랑을 버릴 장소이던가
忘れた 筈の かの人に
와스레타 하즈노 카노히토니
당연히 잊었다 생각했던 그 사람에 대한
のこる 心を なんと しょう
노코루 코코로오 난토 쇼-
남은 미련의 마음은 어찌해야 하나
2010년에 발간된
『演歌名曲集』이란 책이 있다.
부제가 '일본의 마음'이다.
쇼와 헤이세이 시대를 비추는
주옥과 같은 엔카라는
부연 설명이 붙어있다.
가라오케에서 인기있는
120곡을 수록했다.
출판사는 긴엔샤(金園社)이다.
일본의 마음이라는 부제가
늘 뇌리에 감돌곤 했다.
이 책의 가장 첫머리에
등장하는 노래가 바로
이 노래이다.
본격적 일본 엔카의 시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酒は涙か溜息か)는
1931년(쇼와 6년) 9월에
일본 콜롬비아에서
후지야마 이치로(藤山一郎)의
가창에 의해서 발매된
쇼와 노래이다.
작곡가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작사가 다카하시 키쿠타로
(高橋掬太郎),
가수 후지야마 이치로
(藤山一郎)의
출세작이 된 대히트 곡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크루너 창법을 반영한
작품으로서도 알려진다.
당시 고가는 신진 작곡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다카하시는 홋카이도에서
지방 신문 기자,
후지야마 이치로는
도쿄음악학교
(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의 전신)에
재학 중인 장래가 촉망된
클래식 음악 학생이었다.
크루너 창법:
크루너 창법은
정식으로는 'crooning'이며
1920년대부터
대중 음악에서 시작된 듯
가라앉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중얼거리듯 말을 부른다는 창법이다.
마침 그때
세계 공황에 따른
불황에도 불구하고,
발매 직후부터 대히트하여
당시의 축음기의
일본 보급 대수의
4배의 세일즈를 기록했다고 한다.
판매고는 80만 장이었다.
노래의 히트로 후에
쇼치쿠(松竹) 영화
『想い出多き女』,
신흥 키네마(新興キネマ)
『酒は涙か溜息か』로
영화도 제작되었다.
1931년(쇼와 6년) 여름,
홋카이도 신문 기자
타카하시 키쿠타로가
일본 콜럼비아 문예부에
시를 투고한 것이 계기였다.
문예부에서 작곡을 의뢰 받은
고가 마사오는
속요(どどいつ, 都都逸)와 같은
칠오조의 짧은 시의 작곡에
당초는 고심하고
매일 기타로
사미센곡과 민요를 연주하며
작품 구상을 하고 있었다.
どどいつ(都都逸) :
속요(俗謠)의 하나
가사(歌詞)는 7·7·7·5 조(調),
내용은 주로 남녀간의
애정에 관한 것임.
호평을 받은 전작
『キャンプ小唄』에서
고가 마사오와 콤비를 이뤘던
후지야마 이치로는
완성된 악보를 보자,
음역이 너무 낮아
쉽게 부를 것 같지 않다고
느꼈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 머물던 누나로부터
마이크로 폰에
속삭이듯 부르는
크루너 창법의 존재를 들었던
후지야마는
일본에서는 아직 아무도 몰랐던
이 창법을 취입할 때에
채택해 보았다.
정통 성악 기술을
해석한 창법을 확립했다.
타카하시 키쿠타로가 쓴 시는
원래 다카하시의
단골 기생인 센나리(千成)가
어떤 사정으로 폐업하게 되었고,
그 송별회 석상에서
다카하시가 즉흥으로
부채에 쓰고,
그녀에게 전별 선물로서
보낸 것이었다.
후에 그녀는 카페의
고용 마담이 되어
『酒は涙か溜息か』의
모델이 됐다는 것도 있어서
가게는 크게 번창했었다.
그러나 쇼와 9년(1934년)의
하코다테 대화재로
기념 부채까지 모두 소실되었고
센나리도 곧 실의 속에
사망했다고 한다.
또한 『酒は涙か溜息か』의 B면은
역시 작곡: 고가 마사오,
작사: 다카하시 기쿠타로의
『私此頃憂鬱よ』로 부른 것은
당시 본격 유행 가수로서
활동을 막 시작한
아와야 노리코
(淡谷のり子)이었다.
3. 誰か故を想わざる
(다레까 고꾜오 오모와자루,
누가 고향을 잊을 수 있나) - 霧島昇
美空ひばり(미소라 히바리)-
誰か故郷を想わざる
作詞: 西條 八十(사이죠 야소)
作曲: 古賀 政男(코가 마사오)
原唱: 霧島 昇(키리시마 노보루)
1940年(昭和 15年)
誰か 故鄕を 想わざる
作詞: 西條八十、作曲: 古賀政男、歌: 霧島昇
一
花摘む野邊に 陽は落ちて
하나쯔므 노베니 히와오찌데
꽃따고 놀던 들판에 해가 지면
みんなで 肩を ぐみながら
민나데 카다오 구미나가라
모두들 어깨동무를 하면서
歌を うたった かえり道
우따오 우땃다 가에리미찌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는 길
幼馴 染みの あの友この友
오사나 나지미노 아노도모 고노도모
어린 시절 이 친구 저 친구
ああ 誰か 故鄕を 想わざる
아아 다레까 고꾜오 오모와자루
아아 그 누가 고향을 잊을 수가 있을까?
二
一人の 姉が 嫁ぐ夜に
히또리노 아네가 토쯔구요니
혼자뿐인 누님이 시집가는 밤에
小川の 岸で 淋しさに
오가와노 기시데 사미시사니
시냇가의 언덕에서 쓸쓸하게
泣いた 淚の なつかしさ
나이타 나미다노 나쯔까시사
울었던 눈물이 그리웁구나
幼馴 染みの あの山 この川
오사나 나지미노 아노야마 고노가와
어린 시절 이 산과 저 강
ああ 誰か 故鄕を 想わざる
아아 다레까 고꾜오 오모와자루
아아 그 누가 고향을 잊을 수가 있을까?
三
都に 雨の 降る夜は
미야꼬니 아메노 후루요루와
서울에 비가 내리는 밤은
淚に 胸も 濕(しめ)りがち
나미다니 무네모 시메리가치
눈물에 가슴도 우울해져
遠く 呼ぶのは 誰の聲
도오쿠 요부노와 다레노고에
멀리 부르는 건 누구의 목소리
幼馴 染みの あの夢 この夢
오사나 나지미노 아노유메 고노유메
어린 시절 이 꿈과 저 꿈
ああ 誰か 故鄕を 想わざる
아아 다레까 고꾜오 오모와자루
아아 그 누가 고향을 잊을 수가 있을까?
元唱 霧島 昇(기리시마 노보루)
일본인들의 고향산천 모습
작곡가: 古賀政男(Koga Masao)
1. Kage o sitaite
(여인을 사모하여)
2. Sake wa namidaka tameikika
(술은 눈물인지 한숨인지)
3. Dareka kokyo o wasurezaru
(고향을 누가 잊을 수 있나)
연속 3곡.
일본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다.
트롯과 일본 엔카의 원조시비
한국의 트롯(trot 속칭 '뽕짝')이
일본의 ‘요나누키(四七拔き)’
단음계로 만들어진 엔카(演歌)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인가?
아니면, 일본의 엔카가
한국적 정서를 표현한
트롯의 영향을 받아서 발전한 것인가?
소위 트롯과 엔카의 원조 시비는
아직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해묵은 논란거리다.
엔카(演歌)의 대부,
고가 마사오(古賀政男)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여덟 살 되던 해에
한국(조선)에 건너와
선린상고
(善隣商業高等學校)를 다녔고,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였다.
오늘날 일본 엔카가
소위 말하는 ‘고가멜로디’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그는 일본 대중가요에 있어서
'살아있는 전설이자 신화'이다.
그런데 고가 마사오(古賀政男)가
1931년에 최초의 엔카로 발표한
'사케와 나미다카 타메이키카
(酒は淚か溜息か)'가
전수린(全壽麟, 1907~1984)이
1926년에 작곡한
'조용한 장안'을 표절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
당시 일본 박문관(博文館)에서
출판한 잡지 '신청년(新靑年)'에서
고가 마사오의
'사케와 나미다카 타메이키카
(酒は淚か溜息か)'가
조선인 작곡가 전수린의
'고요한 장안'을 표절했다고
시비가 일어났다.
사실, 고가 마사오와 전수린은
절친한 사이이며,
두 사람은 조선과 일본에서
자주 만났다.
이애리수 노래 고요한 장안
이애리수-고요한 장안 /(영상출연 가수 이나윤)스타365 - YouTube
그리고 문제의
'사케와 나미다카 타메이키카
(酒は淚か溜息か)'는
전수린의 '고요한 장안'을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전수린은
왜 1926년에 작곡한 '고요한 장안'을
음반으로 제작해서 발표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당시의 음반제작은
오늘날로 말하면 하이테크분야였다.
다시 말해서 음반제작은
일본에 가지 않으면
조선에서는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1920년대 후반부터
조선에는
전수린을 중심으로 한
조선 작곡가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1926~1936년 사이에 데뷔한
유명한 작곡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7년에 홍난파와 함께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창설하고
'찔레꽃', '직녀성' 등의
대작을 만든 김교성이
1932년
일본 빅터레코드에 전속되었다.
국민가수 김정구의 친형으로서
배우, 가수, 작곡가를 겸한 천재 작곡가
김용환이 1932년에
폴리돌에 전속되었고,
일본 무사시노음악학교
(武藏野音樂學校)를 졸업한
조선의 서양음악 선구자이자
피아니스트로서
'홍도야 울지 마라',
'처녀총각' 등을 만든
'김준영'이 이 시기에 데뷔했다.
휘문고보(徽文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한 바이올린니스트 문호월은
'노들강변',
이난영의 '봄맞이',
남인수의 '천리타향'을 작곡했고,
일본음악학교(日本音樂學校)를
졸업한 손목인은
고복수의 '타향살이',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등
대작을 작곡했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신라의 달밤' 등
수 많은 명곡을 작곡한
한국 최고의 작곡가 박시춘도
이 시기에 데뷔하였다.
일본 동경음악학교를 졸업,
북한에 억류되어
평양음대 총장을 역임하고
북한의 가극 '피바다'를 작곡한
이면상도 역시 이 시기에
빅터레코드에 전속, 데뷔했다.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는
이재호는 일본의 고등음악학교를 졸업,
20세에 오케이레코드에 전속되어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등
명작을 작곡하였다.
홍난파도 이 시기에 데뷔했는데,
안옥경의 '여인의 호소',
이규남의 '유랑의 나그네' 등을
발표했지만,
가곡분야에서 더 두각을 나타내어
'성불사의 밤',
'봉선화' 등의 주옥 같은
명곡을 남겼다.
아무튼 일본 엔카의 대부
고가 마사오는
조선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조선인 작곡가와 교류하고
또 조선의 정취를 자연스럽게
익혔을 것이고,
또 전수린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 작곡가들은
일본을 통해서
서양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빅터레코드와 같은
일본 음반회사를 통해서
데뷔하여 활동하였다.
이상으로 한국의 트롯과 일본의 엔카는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나서
상호 영향을 주면서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화가 급속히 확산되는 오늘날,
엔카와 트롯의 해묵은 원조 시비론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대중음악은 국경을 초월해서
불러서 즐겁고 들어서 좋으면 된다.
일본의 대중가요, 엔카(演歌)가
초기에
'요나누키(四七拔き)' 단음계를
기본으로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요나누키'라는 말은
'4와 7이 빠진'이라는 뜻의 일본어,
즉 서양 7음계의 '파'와 '시'가 빠진
단음계를 말한다.
'요나누키(四七拔き)' 단음계는
일본밖에 없는 음계가 아니고,
음양오행(陰陽五行: 木火土金水)의
원리에 따른 것으로
중국, 한국, 일본에서
공통으로 사용되었다.
즉, '요나누키(四七拔き)'의
'도, 레, 미, 솔, 라'는
한국의 전통음계의
'중(仲), 임(林), 남(南), 황(黃), 태(太)
또는
'무(無), 황(黃), 태(太), 중(仲), 임(林)'에
해당한다.
한국 전통음악의 기본음계는
황종(黃鐘: C), 대려(大呂: C#), 태주(太簇: D),
협종(夾鐘: D#), 고선(姑洗: E), 중려(仲呂: F),
유빈( 賓: F#), 임종(林鐘: G), 이칙(夷則: G#),
남려(南呂: A), 무역(無射: A#), 응종(應鐘:B)의
12율(律)이다.
서양에서는 스코틀랜드가
전통적으로 일본의 '요나누키(四七拔き)'
또는 한국의 '중(仲), 임(林), 남(南),
황(黃), 태(太)'와 같은
단음계를 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민요(선율)가
한국인이나 일본인의 정서에
잘 맞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졸업식 때에 많이 부르는
'석별(올드 랭 사인,
Auld Lang Syne)'을 들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1900년대를 전후해서는
애국가를 이 곡조로 부를 정도로
우리 정서에 잘 맞다.
위 일본노래를
어렵게 정리하여 올리는 이유는
전에 나훈아 공연 때
그는 한국의 전통가요 트롯트곡이
일본가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이론을 전개했는데
이에 대해 어느 음악평론가가
나훈아의 말이 틀리며
트롯트 노래는
일본엔카에 그 뿌리가 있다고 했다.
이에 궁금증이 있던중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칼럼을 읽으니
그녀의 말도 모호하여 찾아 보니
위 노래와 기사들이 있어
올리는 것이다.
위 일본노래를 들어보니
우리 옛 노래와 흡사하여
가사만 다를 뿐
곡조는 똑 같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후 한국과 일본의 국민성과
문화환경의 영향으로
지금은 많이 달라진 느낌을 받는다.
지금의 일본의 엔카는
옛 가락을 많이 지녔지만
우리 한국 가요는
최초의 가락이 사라지고 많이 변형
발전되었다는 느낌이다.
(일본에도 엔카 외에
한국 트롯트가요 같은 노래가 있다)
요즈음은 현대의 물결을 타서
가락이 빨라지고 활기찬
현대 트롯트곡이 된 것 같다.
우리 트롯트 가요는
어느 시점에
일본과 한국의 가요가
서로 영향을 끼치며
동시에 발전해온 느낌을 받는다.
우리 전통가요에는
민요, 창가, 가곡
(현대 서양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의 가곡)이 있는데
창가는 牧丹之歌 같은 곡조이고
가곡은 연변가수 최화자의
고국땅이란 노래와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나라 트롯트는
우리 옛 가곡을 뿌리로 하여
현대적으로(그 당시로서는) 발전하여
일본의 엔카와 상호작용해서
트롯트곡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옮겨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