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에세이
자전거 타는 사람에게
남유정 (시인)
나무와 나무 사이의 행복한 거리
연두바람을 달린다고 했지
긴 강을 지나자
심장에 출렁이는 강물소리
어깨에 내려앉는 꽃들의 냄새를
조금씩 맡으며 가는 길이라고 했지
강물이 느려지는 곳에 잠시
누워있다고 했지
하얀 구름에 얼굴을 묻고
가난한 슬픔을 재우는 중이라고 했지
천 년 후의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중이라고 했지
지금 없는 사람을 편애하는 것이
오랜 습관이라고 했지
마음에 앉은 꽃잎은 고요를 듣는 귀를 가져
젖은 흙이 몸을 말리는 봄날
산벚나무 지나는 바람소리를 듣는 중이라고 했지
-졸시, 「자전거 타는 사람」전문
내가 드린 자전거를 지금도 타신다고요. 당신도 참, 요즘처럼 빨리 변하는 세상에 오래된 자전거를 고집하시다니요. 자전거를 버리지 않고 여태 타신다는 말에 적이 놀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 내게 당신의 사소한 이야기까지 들려주게 된 것도 다 자전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에게 자전거는 어디로든 함께 가는 친구였겠구나 하는 생각도요. 아무튼 그 말을 들은 후로 낡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당신의 모습을 종종 떠올리게 됩니다. 한적한 길에 자전거를 세우고 당신이 내게 전화를 걸어 풍경을 읽어줄 때마다 나도 함께 그 풍경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당신은 어제 내장산을 지나 김제평야와 채석강을 거쳐 변산반도 민박집에서 아침을 맞는 중이라고 했지요. 내장산에서 소복이 쌓인 숫눈길 위로 내려던 첫발자국을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 아쉬웠다는 당신에게 바다에 내리는 눈은 선물이었겠어요. 바닷바람이 차가운 줄도 모르고 마냥 눈 오는 게 즐거운 당신은 한참 동안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얼굴만 이불 밖으로 내놓고 있는 중이라고 했어요. 눈이 뭐라고 눈 좀 날린다고 그렇게 좋아하고, 눈이 뭐라고 첫발자국을 다른 이에게 빼앗겼다고 그리 서운해 하고……. 당신은 아직도 어린애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거라고 생각하자 웃음이 떠오르더군요. 젊을 때는 세상의 무게를 다 진 것처럼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거든요.
그래요. 세상에 좋은 것, 좋아하는 일이 꼭 거창해야 할 이유가 뭐 있겠어요. 그냥 좋으면 좋은 거지요. 눈이 와서 좋고, 꽃이 피어서 좋고, 사람을 만나서 좋고, 떠날 이유가 있어서 좋고, 돌아갈 자리가 있어서 좋고, 그렇게 당신은 처음으로 가진 자유와 자신을 위한 시간을 즐기도록 하세요. 한껏 멀리 가도 좋을 거예요. 나는 당신이 들려주는 풍경을 고요히 떠올리는 게 좋아요. 눈 덮인 백양사와 파도소리 들리는 방파제에서 바라보는 달과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에서 좀 지루하다 싶게 이어지는 황량한 겨울 벌판, 가끔은 그런 낯선 풍경 속에 우리가 함께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먼 산에 눈이 하얗게 쌓이고 당신은 또 사람 드문 곳을 찾아 훌쩍 다른 곳으로 떠났다가 겨울의 끝머리에 다다르면 섬진강에서 봄을 맞겠군요. 그 때쯤이면 자전거를 타고 봄을 달리겠지요.
지난 봄 당신이 강가에서 썼다는 편지, 그 편지의 수신인이 누구인지 당신은 말해주지 않았어요. 굳이 묻지 않을게요. 그러나 궁금하긴 해요. 천 년을 흘러가 닿는 말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천 년 후의 사람은 그 편지를 손에 쥐고 얼마나 어리둥절해 할까 하고요. 그렇게 오랜 세월을 느리게 흘러가는 것들은 때로 급히 가느라 놓친 것들을 찬찬이 돌아보게 해 주겠지요.
여행에서 돌아오면 연락 주세요. 에티오피아 모모라 워시드 커피를 내려 드릴게요. 예가체프를 좋아하는 당신 입맛에도 맞을 거예요. 부드러운 신맛과 농염한 꽃향기를 느낄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정말 내가 자전거를 드린 적이 있나요?
“네가 준 자전거를 아직도 타.”
당신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긴 했지만 도무지 기억나질 않아요.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자전거를 주었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요. 그래서 당신의 말을 믿기로 했어요. 당신이 힘껏 페달을 밟는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내 심장의 박동도 함께 뛰니까요.
어느 순간 당신이 참 낯설어 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이렇게 묻고 싶어지지요. 당신, 누구인가요? 천 년 전 산벚나무 아래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이 혹여 당신인가요. 아니면 그 알 수 없는 슬픔에 싸인 눈빛은 일찍이 내 것이기도 했을까요.
ㅡ『우리詩』2017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