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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인권의 성지, 광주를 찾아서
-5․18 민주항쟁의 길을 따라 만나는 31년 전 광주 -
김 정 명
광주교육대학교에서 연수교육을 이수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내어 광주 민주화 성지를 둘러보기로 하였다. 2012년 1월 13일 금요일, 학교 정문을 빠져나와 우측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흰 눈은 내리지 않았으나, 매서운 겨울 찬바람으로 얼굴과 손이 몹시 시려웠다.
행인에게 길을 물어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회전을 하여 조금 걸어갔더니 농산물공판장 앞 버스정류장이었다. 상징적인 5·18버스를 타기 위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오후 1시 45분 움츠러든 몸을 실은 시내버스는 북쪽을 향해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도선사와 석곡치안센터를 지나서 어운 마을 다음 정류장에서 하차하였다.
시계는 오후 2시 2분이였다. 바로 눈앞에 ‘국립 5·18민주묘지’, ‘망월동 5·18국립 묘역’이라는 큰 표지판이 한 눈에 보였다. 정문을 통과하여 방문자 방명록에 기록을 하였다. 좌측 벽면에 한겨레의 꽃 무궁화 부조작품이 완성되어 있었으며, ‘국민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국립 5·18묘지’라고 전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대형 태극기가 겨울의 찬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펄럭이고 있었다. 민주의 문을 들어서자 추념문과 참배광장, 추모기념탑이 묘역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또 왼쪽에는 5·18 추모관과 역사의 문이 나란히 서 있고, 우측에는 유영본안소가 있다.
5월의 영령을 받드는 형상의 문이라는 추념문을 지나자 참배광장이 나타나고 그 앞에는 5·18민중 항쟁 추모탑이 나타났다. 잠시 높이 솟은 5·18 민주항쟁 추모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추모탑은 불이문이라고도 부르고 있는 데, 탑 중앙을 관통하는 문으로 과거와 현재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는 통로라는 뜻과 오월영령과 우리들이 만나는 일치의 문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화강암 석탑으로 대형의 기념비적인 조각품이다. 좌우 대칭형으로 그 가운데에는 추상의 돌 모양(난형환조로 손 모양 내부의 설치물 태양광에 반사되는 빛은 구천을 떠도는 혼백,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는 희망의 씨앗)이 끼워져 있었다. 이 추상의 돌 모양은 민주항쟁을 위해 피를 토하며 울분에 못 이겨 죽어간 영령들의 목숨을 내건 뼈아픈 광경이었다. 우측 자연석에는 ‘청년의 책임‧조국의 미래’ 라고 큰 문자로 전각되어 있었다.
묘역 둘레에는 짙은 청록의 늠름한 기상을 지닌 소나무가 숲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우측에는 탑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의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여러 개의 계단을 딛고 비탈진 묘역에 올라서니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489명의 희생자가 말없이 안장되어 있었다. 숙연한 마음으로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동하면서 묘역을 향하여 참배를 하였다.
이곳은 1988년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되신 분들과 당시 부상을 당했거나 구금되어 고문과 옥고를 치른 후, 사망하신 분들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다. 조그마한 석비에는 무명열사의 묘 그리고 성명의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때마침 한 마리의 까치가 날아와 키가 큰 소나무 가지에 앉아 기쁜 소리로 반겨주더니 이내 날아간다.
계단 부근의 화단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기념 식수가 보인다. 아담한 상록수의 자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세계 평화를 위해 투쟁하고 헌신했던 모습이 역력했다. 또한 자유와 민주의 투사였던 그의 정치 역사를 엿보는 듯 한 사념의 숲을 잠시 걷게 해 주었다.
이 망월동 묘역에는 여전히 ‘임을 위한 행진곡’이 영령들을 위로하고 있는 듯 했다.
이곳 가까운 어디에선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 들려오는 듯 속삭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 없이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산 자여 !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묘역은 10묘역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특히 10묘역은 행방불명자 묘역으로 사망한 사실은 확인이 되었으나, 시신을 찾지 못해 애처롭지만 봉분 없이 영(靈)만 모셔져 있었다. 비문을 읽으며 봉분을 쓰다듬던 손길은 발걸음을 옮겨 국립 5․18민주 묘지에 위치한 영상과 사진기록들이 보여주는 기념관에 들어서 발길을 옮기면서 전시물과 내용을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 묘지의 계단을 내려와 좌측으로 조금 걸었다. 또 다시 언덕길을 계속 걸어 기와지붕으로 건축된 역사의 문을 통과하였다. 바로 후문 앞이었는데, 그 옆에 꽃동산이 조성되어 있었다. 다시 돌아서서 우측 담장을 끼고 걸으니 석조 부조상이 눈에 보였다. 일제 치하에서 광주시민들이 항거하는 군상으로 한국인의 뜨거운 격동의 모습이 동세가 강한 운동감을 보여 주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기와지붕의 민주 문은 마침 구름을 비껴 보이는 태양이 고개를 내밀면서 구름 속에 가려져 있었다. 민주항쟁 투사들의 모습이 연상되는 순간 갑자기 겨울의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면서 이내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바로 왼쪽에 추모탑이 있었다.
이곳에서 광주항쟁이 진압된 뒤 얼마 되지 않은 일간신문에 실린 김준태시인의 ‘아! 아! 광주여!’ 라는 시를 감상하였다. 계엄 하에서 이런 시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은 시인의 생명이며 사명의 대가였다. 수많은 고통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겪었을 고초를 생각하는 순간 돌아서는 발길은 무거웠다.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불사조의 고향이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 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1980년 6월 2일 아침에 쓰다. 글씨 금초 정광주>
이곳에서 우측으로 돌아서니 추모탑의 좌・우측 5면에 일제의 총칼에 항거하는 청동 부조 군상이 새겨져 있었다. 밥솥에서 밥을 퍼주고 나르는 모습, 순서를 기다리는 행렬의 모습은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이었다.
5․18추모관의 현관문 앞에는 ‘연중무휴’라는 문자디자인의 조그만 표지판이 보였다. 이곳에 입실을 하였다. 우측 벽면에 역사의 고비마다 나라를 지킨 민중의 역사가 사진과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
1894년 : 동학농민운동⟶항일의병 투쟁 : 1895년 을미의병, 1905년 을사의병, 1907년 정미의병⟶1919년 : 3・1운동⟶1929년 : 광주학생독립운동⟶1960년 : 4・19혁명⟶1980년 : 5・18민주화운동⟶1987년 : 6월 항쟁⟶1995년 : 5・18특별법 제정⟶2002년 : 광주 민주 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제정과 국립묘지 승격
1980년 5월의 진실을 말하고 있는 유품을 보았다. 5・16민족민주화 성화 후, 횃불 시위 당시 사용했던 횃불의 모형은 사각의 긴 나무 막대 끝에 헝겊을 감고 맨 위에는 둥근 솜뭉치를 굵은 철사로 세 번 묶여 있었다. 수많은 남녀노소 광주 시민들이 불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어둠을 밝히며 항쟁의 역사를 후세에 남기게 되는 순간의 광경이 연상되었다. 계엄군이 무차별 사격에 사용했던 진압용 M16A 소총과 대검, 진압봉도 보였다. 진홍색 빛바랜 피 서린 옷, 핏자국이 선명하게 배어있는 돌, 보도블록 파편, 모형의 시체마네킹 등도 눈여겨 볼 수 있었다. 순간 “빼앗길 수 없었던 민주화의 봄은 또 다시 재현될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역사의 강물을 따라 민주의 샘의 벽면 가운데에는 인공의 짙은 암벽으로 담담하고 조용하게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민주화에 항거했던 시민들, 그들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국민의 피눈물이었다. 흘러내리는 눈물, 작은 폭포 줄기 아래에 사각의 통 안에는 수많은 피눈물들이 고여 있었다. 고여 있는 물 안에는 방문객이 던진 여러 개의 동전이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작고 큰 돌이 2개 보였다. 겨드랑이가 닿을 정도로 다소 깊었는데, 가운데 구멍에 놓인 작은 돌 하나를 들어 보았다. 차가운 물속에서 들어 올린 작은 돌에는 피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그날의 함성이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에도 억압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억압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힘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주먹밥과 김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나눠주는 시장아주머니들, 부상을 당한 사람들을 위한 피가 모자란다는 호소에 팔을 걷어 부치며 너도 나도 헌혈을 했던 시민들이 이 속에 있었다.
고 문익환 목사(1988. 6. 1〜1994. 1. 18 :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 통일운동가, 사회운동가, 참여시인)의 ‘그날이 오면’ 중 일부가 기록되어 있었다.
아! 광주여!
광주의 겨레의 빛고을이여!
우리의 아픔 새겨
새록새록 돋아날 꿈이여!
밝아오는 새 아침이여!
염원의 벽 앞 책상 위에는 탑 모양의 두꺼운 플라스틱의 사각기둥 4개가 고층의 아파트처럼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옆 책상에는 준비된 메모지에 볼펜으로 호국 영령들의 넋을 추모하는 내용의 글을 짧게 기록한 후, 투명 통 속에 넣었다. 바로 이곳 방문객의 방명록인 셈이었다.
이제 다음 목적지를 향해 오후 3시 20분 추모관을 빠져 나와 오후 3시 45분 시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동북쪽에 위치한 김대중 컨벤션센터(Kimdaejung Convention Center for your Successful Business)와 5・18자유공원, 상무대(옛 헌병대)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버스는 오랫동안 시내를 관통하여 문화의 전당에 내려놓았다. 다시 1호선 전철을 타고 가는 중에 전남대학교(5월 17일 전국에 내려진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왔던 전남대생들이 18일 오전 최초의 시위를 벌였던 북구 전남대정문 일대는 하천이 복개되고 정문을 현대식으로 개조해 옛 모습과는 달라 보였다.)와 광주고등학교 교문 앞을 스쳐 지나갔다. 두 학교 정문에는 4․19 발상지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잠시 후, 김대중 컨벤션 5번 출구의 계단에 올라서서 큰 도로를 건너게 되었다. 넓은 광장에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분수대가 있었고 그 가까이에 우뚝 서 있는 대형 건물이 보였다. 출입 현관 전면 중앙에는 ‘김대중 켄벤션센터’ 라고 기록된 문자 디자인을 볼 수 있었다. 입장료는 없었으므로 그대로 현관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섰다. 왼쪽 다소 비좁은 정도의 작은 실내공간을 최대한 유효 기념전시실로 마련해 놓았다.
여기에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金大中 : 1924~2009, 제 15대 대통령 : 1998. 2~2003. 2)의 소형의 흉상, 동영상, 각종 인쇄물, 서간문, 소장품, 그밖에 기념품들을 살펴 볼 수 있었다.
2005년 9월 6일 김대중 컨벤션센터 개관 당시 방문하시고 남긴 글도 눈에 띄었다. 그 친필 서체는 ‘事人如天’ (“사람 섬기기를 하늘 같이 하라!”)이었다. 그리고 2007년 10월 5일 광주비엔날레 개막식에서 쓰신 서체는 ‘平和를 위하여’ 였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남과 북, 모든 국민을 생각했던 고뇌에 찬 모습이 상기되었다.
김대중 컨벤션센터는 세계적 브랜드 가치가 높은 김대중 전 대통령(金大中 : 1924〜2009, 제 15대 대통령 : 1998. 2〜2003. 2)을 기리는 공간으로 김대중 홀, 콘코스 홀, 야외공연장 등이 광주광역시의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아무튼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이곳 방문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시 아쉬움을 뒤로 하고 기념 장소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자리를 옮겨 도로 길 건너 인도를 따라 걸었다. 조금 걸으니 상무대 건물이 보였다. 5․18 유공원은 1만평의 부지 내 4,000평에 옛 상무대 법정과 영창 등 7동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재현되어 있었다. 정문을 찾지 않아 닫힌 후문 앞에 서서 조금 기다리다 보니 담당 젊은이가 문단속을 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라고 고함을 질렀더니 다가온다. 이곳에 오게 된 사연 전했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후문이 열리면서 들어서자 바로 우측에는 트럭 위에서 총을 겨누고 경계하는 모형헌병이 있었으며, 차량 아래에서는 5명의 시민이 포승줄에 묶여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역시 계엄군이 총을 겨누고 경계를 하고 있었다. 광주 시내에 있던 상무대는 현재 장성군으로 옮겨가고 이 자리에 기념공원과 자유공원이 만들어졌다. 상무대 감옥 근처에 만들어진 자유공원에는 아담하게 기념관을 세웠는데 여기에는 광주항쟁의 전개과정이 잘 담겨져 있었다. ‘자유관’ 이라고 이름 지은 것처럼 우리는 자유의 의미를 다시 새겨 볼 필요가 있었다.
영창과 법정을 재현한 곳, 안내소, 헌병대, 자유관, 중대 내무반, 헌병대 식당, 헌병대본부 사무실, 창고, 식기세척장, 야외화장실, 주차장도 있었다. 법정은 직접 안으로 들어가서 둘러 볼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이제는 숙소로 귀가할 시간이 되었다. 곧 사무실에 들러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5․18 기념재단에서 제작한 5월의 노래 CD와 소책자를 방문 기념물로 받아 들고 아파트 도로 앞 정문을 빠져 나오니 오후 6시가 조금 넘었다. 부지런히 생활관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이곳 상무대 영창에서 온갖 고생을 당했을 시민들 모두가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한 목소리를 외쳤던 것을 기억하고 이제는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대동단결을 해야 할 것이다.
31년 전, 20대 혈기 가득한 민주 열사는 벌써 중년이 되어 후배들에게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아름다웠던 기억이자 아픔이기도 한 광주항쟁에 대해 산 증인으로 가슴 속 깊이 뭉클대는 감격이 솟구친다. 광주항쟁은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이라고 생각한다. 광주시민 전체가 항쟁에 참여하면서 민주주의를 외친 역사는 고귀하고 풀뿌리 민초들의 상징이다.
5.18민주화 운동은 우리 시대의 영원한 아픔이다. 이들은 아픔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희망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광주를 찾아 직접 당시의 현장을 느껴보는 것은 정말 의미 있는 일이었다. 5․18은 광주만이 간직한 세계적인 자산이다. 항쟁 사적지를 중심으로 5월을 재조성하여 광주를 창조적 민주인권도시로 알리는 기반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금남로 햇살이 따사로운 5월의 어느 날 오후
소년은 얼룩달룩한 군복차림에 빛나는 착검을 하고
보부도 당당하게 위협적으로 행진하는
낯선 방문객을 호기심과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육중한 군용트럭에서 뛰어내려 대오를 정렬하고
천천히 전진하는 대열을 옆에서 따라간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너는 신음소리도 내지 못한 채 낯익은 도로에 피를 흘려야 했다.
네 죽음을 보듬고 광주의 밤은 목 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단 며칠의 항쟁들을 끝으로 너를 겨눈 총부리 앞에
네 이웃 모두가 무릎을 꿇었던 그날!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내던진 네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으로 역(逆)으로 싹트는 것일까?
싹은 비정의 수목들에서 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
광주 항쟁과 5월의 광주를 기억하기 위해 홍성에서 광주까지 향한 발걸음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민주 인권의 성지 광주를 떠나게 되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의 날씨는 뿌연 안개가 차창의 시야를 가리더니 이내 밝아오면서 맑은 날씨로 변하였다.
언젠가 다시 광주를 찾게 되기를 바라면서 민주 인권의 성지 광주의 ‘5월의 항쟁’ 노래를 감상하였다.
봄 볕 내라는 날 뜨거운 바람 부는 날
붉은 꽃잎 져 흩어지고 꽃향기 머무는
묘비 없는 죽음에 커다란 이름 드리오!
여기 죽지 않은 목숨에 이 노래 드리오!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이렇듯 봄이 가고 꽃피고 지도록
멀리 오월의 하늘 끝에 꽃바람 다하도록
해 기우는 분수가에 스몄던 넋이 살아
양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이여!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부록]
1. 5․18 광주항쟁
시민운동에서의 희생은 1988년 제 6공화국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바에 의하면, 사망 191명, 부상 852명이었다. 그 희생은 6·25전쟁 이래 최대의 희생자를 낸 사건이었다. 그 후,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보상, 책임자 처리 등 사후처리에 대한 시민의 요구가 이어졌다.
2. 국회 광주특별위원회 구성(1988)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 제정(1995)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 - 5·18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1997) - 역사교과서에 정식 명칭 사용
이상의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그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중요한 것은 5·18광주 민주항쟁이 민주화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되어 5·18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었다는 데에 있다. 이에 따라 1997년부터 정부주관 기념행사를 가지게 되었으며 2011년 5월에는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3. 김대중 컨벤션센터(Gwangju Exhibition and Convention Center GEXCO)
국제적인 전시회 또는 컨벤션을 주관 개최하거나, 컨벤션을 유치하기 위한 마케팅활동의 파급력이 미약한 현실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국민의 정부 말기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배려로 사업예산의 일부를 확보하게 된 점과 이미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여 국제적으로 인지된 이 지역 출신인 김대중이란 인명을 활용하는 것이 유익한 것이란 판단 아래 김대중 대통령의 사전허락을 받고, 광주시민의 여론을 수렴절차를 거쳐 김대중 컨벤션센터로 개관 전(展) 개명하게 되었다. 이 센터는 2005년 9월 7일 개관한 바, 지상 4층, 지하 1층에 연면적 11,966평 규모와 당시 전시 컨벤션센터산업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광주 전남지역에 새로운 산업을 일구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4. 합토지(合土地) : 5·18묘역 입구
우리는 5·18영령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며 전국 각 지역의 흙을 한데 모아 합토제(合土祭)를 갖고 민족의 화합과 민주주의 발전의 밀알이 될 것임을 다짐하였다.
(2004. 5. 16 머슴골 모임)
5. 묘역안내
묘지는 총 3000평(1기당 3평 기준), 총 784분을 모실 수 있고, 안장순서는 사망일자 순으로 되어 있다. 1묘역과 2묘역 52번(1묘역 29번 제외)까지는 80년 당시 사망하신 분, 나머지 묘역은 80년 당시 부상 및 구속․구금되신 이후 사망하신 분들이 안장되어 있다.
6. 5·18민주화 운동 공인 사적지
(1) 전남대 정문 : 5·18 진원지
(2) 광주역 광장 : 520 계엄군과 격전
(3) 옛 대인동 공용터미널 일대 : 계엄군과 수차례 격전
(4) 전남 도청 : 시민군 본부 및 최후항전
(5) 옛 광주YMCA : 시민군 작전회의
(6) 옛 광주문화방송(MBC) : 왜곡보도 항의 방화
(7) 옛 장동 녹두서점 : 항쟁대책 논의 및 현수막 화염병 제작
(8) 조선대 : 계엄군 주둔 및 시민 연행
(9) 학동 배고픈 다리 : 시민군 지역방위 거점
(10) 주남마을 인근 양민학살지(진월, 송암동) : 계엄군이 저수지 목욕을 하는 어린이 조준 사살, 계엄군 간 오인사격으로 사망자 다수 발생
(11) 농성광장 :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 시민대표들의 죽음의 행진 장소
(12) 옛 상무대 : 계엄사령부 전남북부분소로 수습위원 간 협상 진행
(13) 양동시장 : 시민군들에게 주먹밥 등 물품 제공
(14) 광주공원 광장 : 시민군 편성 및 사격훈련
(15) 광주교도소 : 시민국과 계엄군의 격전지, 시민군 수용 고문
(16) 옛 화전동 국군광주병원 : 부상자 강제 치료 및 수용조사
(17) 옛 쌍촌동 505 보안부대 : 민주시민 연행 고문조사
6.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 http://altail. chonnam.ac.kr/〜518
7. 5․18기념재단 : http://www. 518. 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