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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소통과 힐링의 시낭송대회 시정시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길입니다.”
1. 늙어 가는 길 / 석당 윤석구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입니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었지만
늙어 가는 이 길은 몸과 마음도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 가는 이 길은 너무 어렵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두리번 찾아 봅니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 발 한 발 더디게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하면서
황혼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단풍처럼
해돋이 못지않은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게 아름답게 걸어가고 싶습니다
2. 빈 의자 / 석당 윤석구
아름다운 빈 의자이고 싶습니다
누구라도 편하게 앉아
명상도 하고 잠시 삶을 내려놓고
쉬어갈 수 있는
편안한 빈 의자이고 싶습니다
바람도 좋고 지나가는
한 줄기 소나기도 좋습니다
살아보니
의자만큼 반가운 게 없더이다
힘들면 제일 먼저 찾는 것이
모든 걸 내어주는 그루터기 같은 빈 의자입니다
낙엽 지는 공원의 빈 의자는
외롭고 쓸쓸해 보이지만
잠시 앉아보면 비움의 아름다움이며
더할 나위 없는 인생 여백의 자리입니다
호숫가 물결이 출렁이는 공원의 빈 의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리움이고
예쁜 커플이 행복의 웃음을 풍기는 향기입니다
노인에게는 지난한 삶의 쉼터이고
남아 있는 삶의 오아시스 같은 희망입니다
아름다운 빈 의자이고 싶습니다
봄 한철 열정을 피우고 살며시 내려앉는 꽃잎이라도
하늘 끝에서 춤추며 내려오느라 지쳤을 한겨울
함박눈 송이송이라도 오롯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누구에게나 안락한 빈 의자이고 싶습니다
3. 노인의 가을 / 석당 윤석구
노인에게 가을은
황홀하면서도 슬프다
단풍이 그렇고 낙엽이 그렇다
그런데도 노인은
가을이 오면 단풍보다도
먼저 물들어 버린다
봄을 기다리듯 가을도 기다린다
고운 단풍을 연인이나 되듯 기다리는 노인은
평생을 때론 조급함으로
때론 설렘으로 기다려 왔다
그 기다림은 나뭇잎이 낙엽이 되듯
삶도 그럴 텐데 말이다
여름이 뜨거우면 가을도 뜨거운지
온 산들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다
삶의 임종 시도 반짝 한다는데
나뭇잎도 설마 그러는 걸까
참 아름답다
노인과 낙엽이 만나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듯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그냥 피는 꽃이 어디 있고
그냥 존경받는 삶이 어디 있느냐고
오색 약수터 절벽에 매달린
단풍이 예술이더이다
4. 노인은 난로 앞에서도 춥다 / 석당 윤석구
노인은 들켜도 상처 받지 않는
짝사랑을 좋아 한다
그래서 자연을 사랑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봄을 그리워하는 노인의 가슴은
노을보다 진하고
이별보다 서럽고 실연처럼 눈물 겨웁다
죽은 듯했던 나뭇가지에도
새싹이 돋아나고
얼어붙었던 대지에도
새로운 생명이 솟아오르는 봄
마른 풀잎 같이 되어 가던
노인의 심장에도
새로운 사랑이 새로운 꿈으로
봄을 사랑하고 싶어
봄을 기다리며 그리워한다
아직은 숨소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며
누군가를 지독히 사랑하고 싶은
노인의 길고 긴 겨울밤의 고백이다
몇 번이나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도 있지만
그보다 몸이 먼저 여기저기
구석구석에서 불어 대는
외로운 찬바람에
견디기 어렵고 힘들어
더욱 애절하고 간절하다
5. 노인도 꿈은 늙지 않는다 / 석당 윤석구
노인은 두 개의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는 지난 날 아름다웠던
기억의 나라를 간직하는 꿈이고
또 하나는 비록 시간은 부족할지라도
나이를 잊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가슴 설레는 희망의 꿈을 안고 살아간다
어린시절 짝꿍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던 모습이 떠올라
씁쓸할 것 같지만 금방 아련한
그리움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천진난만한 꿈도 있고
사춘기에 짝사랑하던 이의 교복 옷자락만 보여도
가슴이 쿵쾅거렸던
기억들은 노인의 꿈에서도 힘차게 뛴다
노인은 지혜로움을 안다
여행을 계획하고 꿈꾸고
사랑을 꿈꿔도 시비할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 가슴 설레는 꿈으로
노인의 삶을 즐길 줄 안다
그렇다
노인도 꿈은 외롭지 않다
노인은 두 개의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노인도 꿈은 아름답다
노인도 꿈은 영원히 늙지 않는다
6. 노인의 하루 / 석당 윤석구
노인이 느끼는 시간은 가을비만큼 오락가락이다
때로는 하루가 일 년 같고 일 년이 하루 같고
더러는 낮보다 저녁이 더 길고
계절보다 일 년이 더 짧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짧은데도
왜 그토록 날마다
하루의 시간과 힘겨운 다툼을 하는지 모르겠다
노인은 사람보다 당장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과
친구가 되려고 노력해야 외롭지 않다는데
갈수록 눈앞에 보이는 것마저 희미해져 가니
순간순간 당황할 때가 많다
그대들 늙어 보았는가 젊은이들이여
외로이 늙어 하루를 오락가락하지 않으려면
노인들과 어울리는 연습 좀 해 주구려
깊은 밤일수록 별이 아름다운 것은
외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청춘의 선물로 생각하구려
귀뚜라미가 밤에만 울어 주는 것도
오락가락 하루를 위로하는 자연의 선물로 여겨주구려
노인의 하루하루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시간이 아니라
순간순간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노을 같은 시간이라 생각하구려
그대들 노을에 물들어 보았는가 젊은이들이여
외로이 늙어 하루를 오락가락하지 않으려면
황혼에 물든 노인들과 어울리는 연습 좀 해주구려
7. 노인도 사랑은 노인이 아니다 / 석당 윤석구
누가 노인의 사랑을 늙었다 할 수 있는가
사랑은 나이가 아니라 그 영혼일진데
노인도 사랑의 열정은 여름 태양처럼 뜨겁다오
손자 손녀를 처음 만나게 되는 노인들을 보시라요
첫사랑이 다시 돌아온 듯
흠뻑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사랑의 열병을 앓는 것을 보면
겉으로 풍기는 짙은 향기의 봄꽃보다
안으로 향기 머금은 가을 단풍이
더 뜨거운 것처럼
노인의 사랑도 그렇게
진한 향기 머금은 단풍을 닮아 간다오
사랑 때문에 슬퍼하고 절망도 하지만
사랑은 어느 사랑이든 살아갈 이유와 희망을 줍니다
꽃의 향기는 지니고 태어나는 거지만
사랑의 향기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의 예술이더이다
누가 노인의 사랑을 늙었다 할 수 있는가
누가 안으로 향기 진하게 머금은
노인의 사랑을 늙었다 할 수 있겠는가
8. 노인의 발자국 / 석당 윤석구
오늘도 거리는 발자국으로 분주합니다
낮이나 밤이나 신호등도 쉴 새가 없습니다
세월의 나이도 함께 섞여 열심히 걷고 있습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흔들리는 노인의 발자국을
앞서 걸어간 노인의 발자국에
외로움이 쌓이는 것을
슬픔이 흐르는 것을 왜 몰랐을까요?
눈이 밝아져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귀가 맑아져 들리는 것도 아닌데
지금은 웬일인지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바람 앞에 흔들리는 낙엽 같은 소리가
파동을 일으키며 가슴을 두드립니다
어릴 때 발자국은 방울 같은 소리였고
젊어서 발자국은 말굽 같은 소리였는데
지금은 아무리 귀를 열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소리는 들리는데
무엇을 닮은 소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 별도 사라진 칠흑 같은 이 밤에
나도 어느 새 그 발자국을 밟고 있습니다
아슬아슬 조마조마 알 수 없이
흔들리는 그 발자국을 새기고 있습니다
오늘도 거리는 발자국으로 분주합니다
낮이나 밤이나 신호등도 쉴 새가 없습니다
세월의 나이도 함께 섞여 열심히 걷고 있습니다
9. 노인의 추억 / 석당 윤석구
노인의 추억은 절절하고 간절한 그리움에 물들어 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늙어왔고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새기면서도
노년의 추억은 저절로 물들 날이 많기에 더욱 그렇다
노인의 추억은 오래 묵은 유년의 추억일수록 더욱 빛이 난다
초등학교 시절 교실 뒤편에 펼쳐진 보리밭의 보리가 익어갈 때
선생님이 들려주던 풍금 소리
계곡에서 가재 잡고 개울가에서 물놀이하던 친구들
생각만 해도 단숨에 달려가고픈 그리움이기에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과 첫눈을 맞았을 때의 설레임이
노년에도 기억 속에서는 가슴을 뛰게 하고
별빛이 쏟아지는 여름밤에 닿을 듯 닿을 듯하던
그의 손길이 늙어서도 마음만은 사랑으로 불타게 한다
가을 바람에 단풍이 물들면 노인의 추억은 노을이 되어
가슴을 여리게 물들여 준다
행복을 누리는 노년은 좋은 추억을 가진 노인이다
추억은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좋은 삶을 살아야 좋은 추억이 더욱 많이 만들어지기에
좋은 추억을 가진 노인은 행복을 누리는 노년이다
살아온 삶 중에서 좋은 것만 골라 반추할 수 있다면
더욱 빛나는 보석으로 다져질 수 있기에
추억도 노후자금처럼 아름다움을 자꾸만 저축해야 한다
아름다운 추억을 저축하지 못하면
늙어서 몸과 마음이 가난한 추억의 노숙자가 된다
노인의 추억은 절절하고 간절한 그리움에 물들어 있다
결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노년의 행복은 추억으로 물들 수밖에 없기에 더욱 그렇다
10. 노인이 특권은 아니다 / 석당 윤석구
노인이여 갈대의 노년을 잠시라도 보시라
갈대꽃의 아름답게 보이는 꽃만 보지 말고
바람에 순응하는 자연의 섭리와 순리를 보시라
노인이 되는 것은
삶의 한 과정이며 순서이지
특권의 자리가 아니더이다
노년을 훈장처럼 생각하고 특권을 누리려는 이들이 있어
주위를 힘들게 하고 젊은이들을 어렵게 하더이다
그래서인지 노인이 지켜야 할 수칙을
여러 문구로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것을 보면
매우 씁쓸하고 서글퍼지더이다
노인은 노인다워야 대우를 받더이다
권위를 찾으려고 할수록 사람들이 떠나더이다
지난 날 전성기를 생각하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하지 말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동심으로 돌아가시라
그곳이 바로 동화나라이고 낙원이더이다
노인이여 단풍 중에서 가장 예쁜 색을 닮고 싶고
노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이 되고 싶으면
삶도 자연이니 노욕을 버리고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시라
노인이여 갈대의 노년을 잠시라도 보시라
갈대꽃이 아름답게 보이는 꽃만 보지 말고
바람에 순응하는 자연의 섭리와 순리를 보시라
노년의 행복은 특권이 아니라 인품이더이다
11. 봄은 황혼도 설레게 한다 / 윤석구
세상에 나온 말 중에서
가장 예쁜 말만 골라
꽃밭에 꽃씨처럼 심고 싶은 봄이다
봄은 고목에도 아름다운
매화꽃을 피우게 하는
신비한 생명과 사랑을 탄생시킨다
봄은 노인에게도
벚꽃길에 쏟아지는 꽃비를 봄비처럼 맞으며
손잡고 걷고 싶게 하는 낭만적 바람을
슬며시 옷깃에 불어넣는다
봄은 꽃길도 좋지만
봄밤 스며드는 분홍빛 연정이
더 설레게 한다
손 끝에 스치는 봄바람 한 점에도
잊고 살았던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행복한 즐거움이 있고
하나하나 지워져 가던 사랑의 흔적들을
다시금 봄꽃으로 장식을 하는
희망의 꿈을 꾸게 해준다
봄은 기다린 만큼 길지는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허니문 기간처럼 정말 참 좋다
이 계절이 가기 전에 설레는 가슴 안고
다시 또 사랑의 예쁜 꽃을 피우고 싶다
12. 낙엽 / 석당 윤석구
가을이 만들어 주고 떠난 낙엽
그 이름만 들어도 아픈데
보고 있자니 더 아프다 노인은
가을아, 어쩌면 이렇게 버리듯 놓고 가느냐
이럴 거면 단풍으로 뜨겁게나 하지 말 거지
엄마 잃은 새끼 같아
아리도록 시리기만 하구나
누구에게 부탁은 해놓고 간 거냐
이리저리 구석으로 몰리는 낙엽을 보니
마지막 길이 한없이 두려운가 보다
오늘 아침은 애기 은행잎이
바람 앞에 노랗게 질려만 있더라
아무리 고왔던 잎들도
마지막 길은 바람 앞에 속절없구나
노인도 젊은 척해 봐도
노인을 벗어 날 수 없어 두렵다
의사 앞에만 서면
바람 앞에 선 낙엽처럼
마지막 길을 알리는 것만 같아 무섭단다
바람이 또 분다
가을이 아무리 쓸쓸하게
외롭게 아프게 하더라도
낙엽아, 우리 잊지는 말자
바람이 무슨 죄겠냐 가을 앞에 선 죄밖에
그래도 우리 또 그리워 하자
13. 노인은 그림자도 흐리다 / 석당 윤석구
노인은 그림자도 흐리다
계절을 지나온 햇살이 겨울 뜰에 머문 것처럼
찬 바람 불수록 더욱 담백한 향기 풍기는
노인은 그림자도 흐리다
노인은 참 먼 거리를 걸어 왔다
그래서인지
노인들은 쉬고 싶어 그늘을 찾고 의자를 찾는다
그림자도 앉으면 일어나려 하지 않는다
노인은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픈데
노인의 그림자도 노인을 닮아 똑같이 아픈가 보다
등 굽은 허리 모양도 꼭 노인을 닮아 버렸다
지팡이 든 그림자도 꼭 노인을 닮아 버렸다
말에도 지문이 남는다지만
노인의 그림자에는 지문도 남지 않는다
어쩌다 해외여행 한번 하려면
지문 확인하는 공항에서 애를 먹는다
대신 노인의 그림자에는 담백한 향기가 난다
젊은이들이여 미래의 노인들이여
화려한 사진보다
담백한 수채화의 향기가 진한 이유를 아는가
노인의 그림자는 수채화를 닮아서
지나온 긴 여정의 한 모퉁이에서 쉬고 있는
노인의 그림자는 야리고 애잔해 보이지만
그 담백한 향기만큼은 더욱 진하다
젊은이들이여 미래의 노인들이여
노인의 그림자를 함부로 밟지 말아 주오
노인은 그림자도 흐리다오
14. 노인의 불면증 / 석당 윤석구
노인의 불면증은
어쩌면
그간 못다한 여가를
즐기라고 준 선물일지도 모른다
살아서 잔 잠보다
언젠가는
영원히 잠만
자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는데
왜 하루하루 밤마다
불면증과
겨루기를 하고 있을까
한 개의 흰 알약에
의지해
잠시 이겨본들
겨우 하루뿐인데도
반복할 이유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차라리
사랑하기로 했다
무드 있는 음악도 찾고
안기고 싶은
그림도 찾아보고
첫사랑과
짝사랑까지 초대하고 싶어
연시를 찾아 읽는다
15. 나이가 들어가도 / 석당 윤석구
가을엔 떠나고 싶어요
누구라도 만나 떠나고 싶어요
단풍잎 곱게 물드는 모습
함께 바라 볼 수 있는
그런 사람과 같이 떠나고 싶어요
가을에 떠나고 싶어요
그대로 멀리 멀리 떠나고 싶어요
갈대꽃 흩날리어
강물에 흐르듯
멀리 멀리 흐르고 싶어요
가을엔 떠나고 싶어요
쓸쓸함이 싫어서 떠나고 싶어요
누군가 기다릴 듯한
아름다움을 만날 것 같아 떠나고 싶어요
16. 얼마나 뜨거워야 / 석당 윤석구
얼마만큼 내가 더 뜨거워야
그대 그 고운 마음 열 수 있을까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짧은 한마디 고백을 안고
펄펄 끓기만 했다
소리친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 그랬다
얼마나 뜨거워야 그대 문이 열릴까
폭풍에 날려 간
나뭇가지 줍듯 아픈 사랑아
태워도 태워도 끝이 없는 사랑아
얼마나 내가 더 뜨거워야
그대 그 고운 창문이 열릴까
이대로 세상이 끝난다 해도
떠날 수 없는 사랑아
얼마나 내가 더 뜨거워야
그대 창문이 열릴까
17. 잃어버린 고백 / 석당 윤석구
사랑하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너지고 싶다고
외치고 싶은
순간 순간이 있었습니다
노을이 황홀하게
서해를 품고 있듯
그대 눈빛 속에 취하고 싶어
마냥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충동이 아닌
그대를 향한 열정이었습니다
그냥
그대와 가까이 있고만 싶어
그랬습니다
노을은 서산을 넘어
어둠 속에 사라졌지만
가슴은
더 붉게 붉게
타오르기만 하였습니다
연기도 없이
솟아오르는 열기에
화석이 된 언어를
그대 창가에
샛별처럼 걸어 놓았습니다
그대를 향한 무너짐은
무너짐이 아니라
행복임을 알았습니다
오,
그대여 그대여!
18. 두 사람은 사랑으로 / 석당 윤석구
이제 두 사람은
가을 향기 아름다운 하늘 아래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손을 마주잡고
평생 서로를 위해 살자고
부모님과 일가 친지들 앞에
오늘 언약을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행복한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 모습이 먼 훗날 노년의 모습으로까지
부부의 사랑이 얼마나 숭고하고 행복한지를
겸손히 보여주는 그런 삶으로
변함없는 다정한 부부가 되소서
두 손 마주잡고 별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이던 그때처럼
사랑한단 말 잊지 말고
영원히 행복하소서
때론 어렵고 힘들지라도
주고받는 사랑의 향기로 극복하소서
사랑으로 이루지 못할 것이 있으리
사랑으로 견디지 못할 것이 있으리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동반자로
하나가 되는 사랑이 되소서
두 사람의 마주잡은 손 놓지 말고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소서
19. 지우지 못하는 편지 / 석당 윤석구
아주아주 오래 전에 써둔 편지입니다
언젠가는 만날 것 같은
그리운 사람 생기는 날
그때 보내려고 써둔 편지입니다
아직도 보내지 못한 편지는
책갈피 속에 예쁜 단풍잎처럼
지금도 곱게 빛이 납니다
그때가 꽃 피는 시절이었나 봅니다
첫사랑도 짝사랑도 아닌 감정이
세월이 하도 많이 흘러
버려진 줄 알았더니
지금도 잊히지 않고 수시로 고개를 내밉니다
먼 고향집 시골 뒷동산에 봄밤이 오면
소쩍새 울음소리에 베갯잇을 적시고
별이 쏟아지는 여름밤에는 어딘가에 있을 그리움을 찾아
별을 헤아리다 잠이 들곤 했습니다
가을에는 단풍잎과 함께 물들어 가는 속삭임의 언어들
겨울에는 장독대에 내리는 함박눈으로 순박함을 소복소복
쌓아 두려 했던 정성들이 연심으로 끓어올라
썼다 지우고 지웠다 또다시 써내려 갔던 사연들이
지금도 마음 한 켠에 홍시처럼 주렁주렁
받아줄 사람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아직도 아직도 안개속처럼 희미하기만 한데
보내고 싶은 마음은
왜 멈출 줄을 모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저녁 노을은 유난히도 붉게 서산을 태웁니다
서산 너머 아직도 보낼 곳 정하지 못한 사연
붉게 붉게 태우고 있습니다
20. 시인들에게 고함 / 석당 윤석구
당나라 시인 백낙천은 시를 지으면
자기 집에서 심부름하는
노파에게 읽어주고
어려워서 모르겠다고 하면
쉽고 재미있다고 할 때까지
고치고 다듬고
퇴고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문인이라는 이름으로 격 있는 체하는 사람을 만나면
길을 가다가 딱 인분을 밟은 기분이다
문학이 도대체 뭔가
사람 사는 이야기 아닌가
시구 한두 군데쯤 뜻을 숨겨 놓고
독자가 금방 알아보지 못해야
우수한 작품인가
보물찾기 게임은 아닐 텐데
병원에 가면 환자가 차고 넘치듯
시동인회에 들어보면 시인이 차고 넘쳐
서점 한편으로 밀려난 시집코너에
시들이 애처롭기만 하더라
노인이 되어 보시라
시인이 되기 전에 심성 공부가 먼저였구나
깨닫게 되더라
기교보다는 진심이 우선인 걸 알겠더라
21. 젊어 가는 길 / 석당 윤석구
지금도 눈 감으면
내 고향 산촌 골짜기 숲속에서는
밤에는 반디불이 별밤을 이루고
실개천 물소리는 갓 따온 오이 속처럼
싱싱한 향기를 전해 줍니다
나무에 꽃은 떨어져도 신록을 만들어 주듯이
세월이 떨어져 나가도
동심을 잃지 않고 유지하고 있으면
생각에 빛나는 마음을 주어 축복의 길이었으며
그 길이 바로 젊어가는 길이었습니다
젊어가는 길은 가까운 곳에 있는 데도
사람들은 먼 곳에서 찾아 헤매는 것 같았습니다
나이 상관없이 구멍 난 청바지 입고
나 지금 젊어가는 길을 걷고 있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정작 동심을 겪었으면서도 그 동심을
유지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번 가면 오지 못한다고
외길만 있는 것처럼 보며
욕심을 부리는 것이 바로 늙음의 길이요
동심의 길을 보며
사는 것이 바로 젊게 사는 길이었습니다
아, 젊게 산다는 것은
동안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동심을 잃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대신 걸어가 줄 길이 아니기에
오늘도 동심을 품고 그대 곁으로 갑니다
오롯이 젊어가는 동심의 길로 걸어갑니다
깊은 산속 옹달샘의 물방울처럼
새벽 공기에 가슴이 마구 뛰듯
그렇게 걸어갑니다
22. 황혼의 빛 / 석당 윤석구
자연은 섭리대로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고
인생은 세월 따라 저물어가는
시기라 하지만
나는 다르다
저녁노을의 황홀함을 정열적으로 보았는가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들을 보며
아련한 추억을 얼마나 뜨겁게
되새김 하여 보았는가
만월을 준비하는 달빛을 보아라
꿈을 키우는 삶이 그러하리라
누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함부로 말을 할 수 있으랴
삶의 황혼은 성찰의 시기요
사랑의 베풂과 배려가
깊고 넉넉해지는 시기이리라
사랑의 온도가 조절이 되어
태워 버리지 않는다
아, 그런 황혼에 나는 설렌다
23. 노인의 가슴에는 계절이 없습니다 / 석당 윤석구
노인의 가슴에 찬바람이 분다고 겨울이 아닙니다
노인의 가슴에는 꽃피는 봄날에도
단풍 고운 가을에도 찬바람이 자주 붑니다
방안 온도가 펄펄 끓어도 창밖에서
찬바람이 불면 어느새 몸은 그와 함께 동행을 합니다
노인은 문밖에서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려도
가슴에서는 산산이 부서지는 싸락눈이 내립니다
어릴 때 노인들이 하시던 말씀들을
어느새 지금은 제가 하고 있습니다
노인에게 좋은 선물은
보약도 아니고 여행도 아닙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잠깐이라도 만나주는 시간입니다
노인은 같이 있으면서도
혼자인 것처럼 외로워할 때가 많습니다
첫눈 오는 날이라도 되면
특별히 기다릴 사람도 없고 만나줄 사람이 없어도
설레는 마음이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루지 못할 꿈이라도 꿈꾸며
살아갈 이유를 찾고 싶어 그럽니다
꽃씨 같은 예쁜 언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더듬거리는 언어 끝에
고드름만 열리어 얼음 바람이 붑니다
노인의 가슴에 찬바람은
겨울에만 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계절이 아닌 자연을 가슴에 품고
햇살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섭리대로
바람과 구름과 별빛 따라 천천히
천천히 걸어가려고 합니다
24. 사랑, 사랑은 아픈 만큼 깊어지더라 / 석당 윤석구
사랑을 만나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젖과 꿀이 흐르는
에덴의 푸른 숲이 펼쳐질 줄만 알았다
그러나 즐거운 만큼 아픔도 많더라
푸른 숲에도 가시밭길이 있더라
떨어져 있으면 그리움이 아프고
소식이 없으면 기다림이 아프더라
사랑, 사랑이라는 말은
기쁨만의 언어가 아니라 아픔도 함께 하는 언어이더라
아파도 아파도 또 사랑하고 사랑하게 하더라
사랑이 아프도록 괴로운 건 이별만이 아니더라
사랑을 알아 달라고 고백을 준비할 때도 아프고
뜨거움을 몰라 줄 때도 아프고
사랑을 기다리는 시간의 애태움도 아프더라
사랑, 사랑은 아픈 만큼 깊어지고
깊어진 만큼 아름다운 관계이더라
사랑,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영역이더라
오감이 소리 없이 움직이는 느낌의 언어이더라
잠시 머물다 알 만하면 가는 것이 인생이라
예술과 철학 모든 학문을 동원해서 설명하려 해도
머리로는 아무리 알았다 하더라도
얻을 수 없고 누릴 수 없는 것이 사랑이더라
사랑, 사랑은
그냥 사랑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더라
25. 봄이 오는 소리 / 석당 윤석구
산 너머 남촌 저 멀리서
들리는 듯 들리는 듯하지만
가장 가까이서
가장 먼저 듣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대와 나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는 설명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소리이며
청각이며 촉각이며 후각입니다
바로 그대와 나 사이 오고 가는
사랑의 소리입니다
봄이 오는 소리는 바로
그대가 오는 소리입니다
봄이 오는 소리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그대와 나의 사랑 온도가
가장 뜨거울 때 알람이 자동으로 울려 주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입니다
그대가 오는 소리는 언제나 꽃입니다
시각이며 촉각이며 후각입니다
바로 그대와 나 사이를 휘감고 도는
사랑의 소리입니다
그대가 오는 소리는 언제나 봄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계절을 잊은 채
오로지 봄이 오는 소리만 듣는
청각과 촉각과 후각으로 길들여져 있습니다
봄이 오는 소리는
오로지 그대가 오는 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