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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
-에드몽드 샤를 루의 <코코 샤넬>(디자인 이음, 2011)
진선규 광동고 2학년 5반 j39393@naver.com
처음 인물 자서전을 검색하던 도중, 모둠원 중에서 코코 샤넬 자서전이 어떻냐는 의견이 나왔고 코코 사넬에 개해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그녀의 일대기와 이야기를 감상하면서 그녀가 어렸을 적부터 겪었을 어려움과 시련을 알게 되어 명품 샤넬의 역사가 어떻게 되는지 알게 되었다. 전에는 단순히 명품 샤넬의 창시자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후기를 보고 나에게 교훈과 뜻깊은 말을 전해줄 것 같아서 선택하게 되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많은 브랜드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어떻게 오늘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사람들에게 하여보면 사람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단지 명품을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해, 멋을 부리기 위해 입고 사람들이 무엇을 입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아무도 그 브랜드의 역사나 인물에 대해 알고 있지 않다.
코코라는 별명을 가진 가브리엘 샤넬은 프랑스의 한 작은 가게에서부터 시작하여 전 세계로 많은 여성 패션계에 혁명을 가져다주어 당시 프랑스 여성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는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이다. 요즈음 20대 젊은 층들이 많이 사용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인 샤넬, 그 브랜드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그녀가 원한 패션은 과연 무엇이며, 그녀가 원한 사회는 무엇이었을까? 지금부터 그녀의 역사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다이아몬드가 되기 전의 진흙
"패션이란 마음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코코 샤넬 419쪽-
1983년 8월 19일 프랑스 소뮈르 한 가난한 마을에서아버지 알베르와 어머니 잔 사이에서 가브리엘 샤넬이 태어났다.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그녀의 어머니 잔은 아버지인 알베르의 뒤에서 고생을하다가 병에 걸려 결국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 알베르는 무책임하게도 자신의 두 딸 쥘리아와 가브리엘 샤넬을 수도원에 맡기고는 떠나고 말았다. 알베르는 아버지로써의 역할을 하지않았던 것이다. 가브리엘 샤넬의 유일한 가족이라고는 자매인 쥘리아와 앙투아네트밖에 없었으니 그녀는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해 일찍부터 철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브리엘 샤넬는 자신의 꿈과 진로를 찾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해왔다. 그녀는 어렸을 적 가수의 꿈을 키워왔다. 집에서 혼자 춤과 노래를 연습하곤 하였고 밤에는 카페나 술집에 가 가게 손님들에게 공연하기도 하였다. 그 때부터 사람들이 공연하는 가브리엘 샤넬을 보고 “코코! 코코!” 라고 부르기 시작하며 코코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의 노래와 춤을 심사 보고 난 뒤, 그녀는 자신의 얕은 목소리와 여린 몸이 가수의 꿈을 이루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듣고 속상했고 상심했다. 그래도 그녀는 절대 꿈을 이루는 것에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녀는 재봉틀 일을 시작하며 자신이 옷과 패션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점점 패션 디자이너에 대한 꿈을 키워왔다.
1900년대 프랑스 당시 사회는 남성 우월주의로 물들여져 있었다. 그로 인하여 여성의 복장과 패션은 그 당시 사회로부터 고정화 되어왔고 제한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사회에 불만을 가졌던 것인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그녀만의 패션을 만들겠다고 다짐했고 자신의 확고한 패션에 맞는 옷들을 직접 제작하고 잊어보면서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는 그녀의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있었다. 그녀의 젊은 시절에 그녀의 유일한 가족인 쥘리아와 앙투아네트가 세상을 떠나 많은 슬픔에 잠겼다. 더군다나 자금 부족과 가난으로 일을 하기에 더욱 고단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드리엔과 다른 지인들의 지지와 도움으로 그녀는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보이 카펠과의 만남도 있었다. 보이 카펠은 그 누구보다 욕망이 많은 사람이었다.그는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런 그의 성격이 가브리엘 샤넬과 보이카펠의 갈등과 이별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로써 또 한 번 시련을 겪은 그녀는 좌절하고 슬퍼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꿈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직업이자 일인 예술을 통해서 그녀의 시련을 극복하고자 했다.
열심히 노력한 덕에 자신의 자그마한 가게인 샤넬을 차린 후, 그녀는 자신의 확고한 패션으로 그 당시 여성의 복장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 허리 조이개를 조절하여 헐렁헐렁하게 만들었고 여성 복장을 코르켓에서 해방하게 하였으며,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멋을 부리게 만들기 위해 치마의 길이를 짧게 만들어 발목 위까지 오게 하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여성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그녀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크게 미친 사람인 미시아를 만나게 되었다. 가브리엘 샤넬은 처음 미시아를 만났을 때 그녀에게서 묘한 기분이 들었고 자신과 매우 잘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맞았다. 그녀와 미시아는 똑같이 그림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사람들을 경멸했고 예술의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이해했다. 그녀 덕분에 자신의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잘 헤쳐나올 수 있었고, 그녀의 모든 예술적인 삶 속에서 영향을 받았다.
가브리엘 샤넬은 나이가 들어서도 그녀의 패션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오히려 열정이 식기보다는 프랑스 사회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살았다. 그녀의 친구이자, 가족이자, 동업자인 미시아와 함께 예술을 하기 시작하며, 말 그대로 예술을 즐겼다. 그렇게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삶을 살다가 1971년 1월 10일 그녀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도 그녀의 열정은 계속 이어져갔다.
비록 그 당시 사회 사람들의 시선이 날카롭고 무관심하고 외면받을지라도 그녀의 시련과 어려움을 견뎌내며 자신의 친구들과 지인으로부터 도움과 지지를 받고 끈기 있게 노력하여 결국, 자신만의 패션을 만들고 프랑스 여성 패션계에서 크게 성공하며 지금의 명품 샤넬을 있게 할 수 있었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다.
시대를 초월한 패션
“1915년 봄에 열여덟 살이 된 우리는 남자들이 참호에서 그다지 빨리 빠져나올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한 세대이며,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길거리에서 여자들의 발목을 보게 되는 특별한 기회를 누린 세대였다.” -아라공-
나는 이 문장을 기억하고 싶다. 이 문장 속에는 그 당시 프랑스 전쟁에서의 참혹함과 그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그녀의 패션이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가브리엘은 젊은 시절부터 전쟁을 겪어왔다.
그녀가 가수의 꿈을 원하기 시작했을 때 카페에서 군인들에게 공연함으로써 전쟁으로부터 입은 피로와 상처를 위로해주기도 하였다. 또한, 공격으로부터 성당에서 사람들이 밖으로 대피해야 했을 때도, 급하게 입을 내복이 필요했던 상황에서도 가브리엘은 멋이 있으면서도 자유롭고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내복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가브리엘 샤넬은 시대를 앞서가는 대담성과 정확한 판단력으로 현대적 의미의 의복을 창조했으며 여성의 개성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관습을 타파하고 자유와 활동성을 추구하는 의복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 그녀의 패션이 그 당시 프랑스 여성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잘 보여준다. 그녀는 의복뿐만이 아니라 모자, 드레스, 향수 등등 여러 부분에서도 발전시켰다.
프랑스 소뮈르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가브리엘 샤넬은 모자상을 시작으로 패션계에 튀어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자는 독특하였다. 그 당시 다른 모자들에 비해서 크고 장신구만 많았으며 우아함을 잘 표현했다. 또한, 여성복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서 통이 넓은 바지를 제작하고 코르켓과 거추장스러운 패티코트를 없애고 허리를 조절할 수 있게끔 했으며 편하고도 멋을 낼 수 있게 치마를 짧게 만들어 발목 위까지 오도록 만들어 ‘샤넬 라인’을 만들었다. 특히, 이러한 치마의 혁신은 당시 남성 우월주의로부터 받은 강요와 강압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답답함을 풀어주었다. 게다가 여성의 손을 해방하기 위해 금 체인이 달린 핸드백을 개발하고 여성의 다리를 길어 보이게 하려고 베이지색의 신발을 개발했다.
그리고 샤넬 브랜드의 마크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녀의 별명인 COCO의 C 두 개를 따서 만들었다는 설이 있고 가브리엘 샤넬이 수녀원 생활 중 예배 시간마다 예배를 보는데 항상 예배를 드릴 때 눈을 뜨고 옆에 있는 촛대를 바라보면 영롱한 촛불에 초점이 흐릿해져 지금의 샤넬 형상이 나왔다는 설도 있고 자신의 두 남매인 쥘리아와 앙투아네트를 기리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특히, 그녀의 패션에 대한 재능이 가장 잘 발휘된 부분은 그 당시 자주 쓰이지 않았던 재질인 저지의 활용이었다. 당시에 남성 속옷으로만 사용되던 저지는 사용하기 매우 까다로웠다. 워낙 뻣뻣하기도 하였고, 불편하기도 하여 잘 쓰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형태를 단순화시켜서 사용하였다.
게다가, 현재까지도 유명하고 인기를 받는 샤넬 NO,1 향수는 그녀의 명작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기로 손꼽힌다. 이러한 그녀의 업적들을 봤을 때, 그녀가 패션에 대해서 얼마나 열정적이었고 그녀의 패션 감각이 지금 시대에서도 여전히 인기가 많은 것을 봤을 때, 그녀가 고난과 시련을 견뎌내고 끈기를 가지고 계속해서 노력함으로써 성공하여 20세기 모던 패션의 시작을 알리는 패션이었고 의복의 역사에서 혁명과도 같은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그녀의 일생은 그저 고진감래의 예시를 정확히 들어주는 것 같다.
당시 그녀의 젊은 나이에는 활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나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의 직업인 패션을 프랑스 사회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한 어린 나이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고집이고 반항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을 용기라고 부르고 그녀의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정말 대단하고 사람들이 왜 그렇게 찬사를 알게 만드는 그런 행동이었다,
실패는 곧 성공
“성공은 종종 실패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달성된다.”-가브리엘 샤넬-
고등학교 1학년 당시 영어 시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인 베라 왕을 공부했던 적이 있다. 그녀는 여러 부분에서 가브리엘 샤넬과 매우 닮았다.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스케이트의 꿈을 키워왔다, 자신이 재능이 있고 관심이 있어서 그 꿈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고 대회를 하다 보니, 자신이 스케이트 선수가 되기에는 힘들고 한계가 될 것 같아서 결국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에서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포기하기보다는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서 더욱 노력했다. 그녀는 언젠가부터 자신이 패션과 옷에 관해서 관심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패션 디자이너로 정하고 파리에서 조그마한 한 가게의 종업원에서부터 시작하여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그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열심히 일을 하면서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 당시엔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배우느라 그녀의 노력과 진심이 나에게 잘 다가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니 베라 왕이 생각나게 되었고 유튜브에서 베라 왕의 연대기와 이야기를
이러한 그녀의 가치관과 행동들을 봤을 때, 가브리엘 샤넬과 거의 비슷하다. 가브리엘 샤넬도 역시, 자신이 어렸을 때 가졌던 가수의 꿈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 기분이 마냥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혼자서 춤과 노래를 연습하기도 하였고 카페나 술집에 가 손님들에게 공연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혹평을 받고 자신의 옅은 목소리와 마른 몸매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포기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꿈을 찾기 위해서 재봉틀 관련된 일을 시작하며, 옷과 패션에 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그 꿈을 이루는 데에 많은 어려움과 시련이 동반했다. 자신의 남매인 쥘리아와 앙투아네트의 죽음, 자신의 옛 연인이었던 보이카펠의 죽음과 지인들의 죽음 등 많은 슬픔과 고단을 견뎌냈다. 하지만, 이러한 시련과 어려움을 겪었기에 지금의 샤넬이 있는 것이다. 만약, 도중에 포기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패션 디자이너의 샤넬이 아니라 가수의 샤넬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된다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옷과 패션에 대한 재능은 잊히게 되고 가수의 꿈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샤넬은 없고 프랑스의 여성 패션은 여전히 남성 우월주의에 잠식된 채로 몇십 년 동안 지속하여 여성복의 자유는 제한되고 강요를 받았을 것이다.
고집? 끈기?
우리 사촌 형은 매우 고집이 셌다.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자 싶으면 모든 것을 놓고 그것에 열중하였고 그것을 하는 데 방해를 하는 요소가 있다면 언제든지 그것을 제거했다, 한 번은 내가 어렸을 적에 사촌 형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망가뜨린 적이 있었다. 형은 그 장난감을 어떻게 할 것이냐며 나에게 꾸짖었고 나는 그 일 이후로 형에게 잘 다가가지 못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형이 입시를 할 나이가 되자, 사촌 형이 충분히 인 서울 대학교에 갈 수 있었음에도 형은 자신의 꿈인 의사를 이루기 위해서 의대를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가족과 친척 모두 형의 행동이 무리라며 지금에 만족하라며 형을 만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 형은 재수하게 되었고 1년을 재수한 끝에 가족들에게 의대 입학증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러한 형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무리고 고집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형은 당당하게 입학하였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한 발자국 내민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형의 노력과 행동이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형의 노력을 고집으로 보지 않았고, 그저 형의 꿈을 이루기 위한 끈기로 보았다.
그에 비해서 나는 항상 무언가가 잘 풀리지 않거나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많이 시도도 해보지 않고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곤 했다. 이러한 버릇이 현재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 같다. 그래서 형의 가치관을 배우고 싶었다.
나 역시 어렸을 적에는 잘하던 것이 딱히 없어 즐겨보던 야구를 좋아해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점점 공부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자 점점 야구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고 공부에만 열중하다 보니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지?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진짜로 좋아하고 자신 있는 것이 역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꿈을 역사 교사로 잡고 역사 교사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공부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 책의 가브리엘 샤넬도 마찬가지다. 가브리엘 샤넬의 노력은 나에게 노력을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고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나에게 말해주는 것 같아 많은 위로가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색상은 당신에게 어울리는 색상이다.”-가브리엘 샤넬-
이 책을 읽고 나서 나의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