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3827]姜賢珠아호-
학천(鶴川),上川(상천),학림(鶴林)
一川(일천) ,一舟(일주),花山(화산)
頭印= 龜
경산시 압량읍 金龜금구리 출생
金龜[금구]
금구리쇠金땅이름龜
홍수때 물위로 떠있는 마을의 모양세가
금색 모래로 만든 거북이 등과 같은 형상.
노봉(老鳳): 늙은 봉이 앉았다 날아갔다하여.
금구리에는 둘안들, 앞갱븐 등이 있었다.
압량리
누를押,대들보梁
만장(晩場)이라 불리다 압독국의 옛 땅으로
신라의 한 주가 되면 압량주의 지명을 땀
학천리(鶴川里)
1914년 학림(1里), 천상(2里), 강당(講堂)을 합하여 학천이라 하였다.
서편 절골의 천곡사 수원지는 1998년 예니호 내습으로 기능 상실되었다. 산남의진 의병장 최세윤 의사의 고향이다.
○ 학림(鶴林) 상천(上川)변 큰 바위 주위의 노송림에 학이 서식했다 하여
학림이라 불리었다. 정월 보름에 동제사를 지낸다.
○ 절골 학림동의 서쪽 천곡사수원지 어귀에 형성된 마을이다.
도음산(383m) 정상을 향해 오르면 천곡사(泉谷寺)가 있다.
9인의 대사 부도(浮屠)와 천곡사 사적비 및 남암(南庵)이 있다.
절 어귀에 배천희국 사사당(裵千熙國 師詞堂)이 있다.
○ 강당(講堂) 이 마을 앞에 1,024세대의 삼도 아파트가 건설 중에 있다.
조선 영조대의 선비 최천익(崔天翼) 진사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강당이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을 강당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 뒤쪽 1㎞ 지점 야산에 건립중인 농산물종합시장
정지 작업시에 여러 시대에 걸친 고분과 각종 유물이 발굴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 내맏이(川上) 학천의 윗등들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천상이라 하며,
학천 마을에서 가장 먼저 생겨난 마을이라 하여 내맏이라 부르기도 한다. 원래 마을은 현재의 마을에서 북쪽 100여 보 거리에 있었는데,
일제시대(1926년 3월)에 천곡사 수원지가 건설됨에 따라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정월 보름날 동제사를 지낸다.
一川風月詩中地。十里樓臺畫裏家。
한 시내의 바람과 달은 시 속의 바로 그것이요
십 리 너머 누대는 그림에 나오는 그 집일세
稼亭先生7율-寧海無價亭。
원문=가정집 제15권 / 율시(律詩)
稼亭先生文集卷之十五 / 律詩
寧海無價亭。次金簡齋詩韻。
此處登臨人縱多。築亭增損祗今誇。
一川風月詩中地。十里樓臺畫裏家。
桑海天晴看浴日。桃蹊春暖見蒸霞。
自從相國留新句。無價奇觀價更加。
영해(寧海)의 무가정(無價亭)에서
김간재(金簡齋)의 시에 차운하다
이곳에 올라 굽어본 사람 이미 많건마는 / 此處登臨人縱多
축정에 증손하려고 지금도 와서 뻐긴다오 / 築亭增損祗今誇
한 시내의 바람과 달은 시 속의 바로 그것이요 / 一川風月詩中地
십 리 너머 누대는 그림에 나오는 그 집일세 / 十里樓臺畫裏家
맑은 날엔 상해에서 욕일도 볼 수 있고 / 桑海天晴看浴日
따뜻한 봄엔 도계에 노을이 피어오르는 곳 / 桃蹊春暖見蒸霞
상국이 새 시구를 이곳에 남긴 뒤로부터 / 自從相國留新句
무가정의 승경(勝景)이 더욱 값을 더하누나 / 無價奇觀價更加
東國李相國全集卷第九 / 古律詩
渡赤城江
一葉輕舟載醉翁。夕陽行色畫屛中。
平生聞說 花山好。空望烟鬟點碧空。
花山最奇絶。予以日暮來到。
적성강(赤城江)을 건너다
술 취한 늙은이 일엽 편주에 실었으니 / 一葉輕舟載醉翁
석양에 돌아오는 행색 그림 속이로구나 / 夕陽行色畫屛中
평소에 화산 경치 좋다하기에 / 平生聞說花山好
부질없이 연환을 바라보며 푸른 하늘을 가리키네 / 空望煙鬟點碧空
화산이 가장 뛰어난 절경인데 내가 마침 저물게 도착했다.
압량읍은 삼한 시대에 변·진(弁辰)의 한 나라인 압독국(押督國) 또는 압량소국의 소재지로서 지금의 압량리에 도읍하였는데 임금의 성씨와 건국의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신라 파사왕(婆娑王)이 압독국을 취하여 군(郡)을 두었고
다시 선덕여왕 11년(642)에 김유신 장군이 군주(軍主)로 다스렸던 곳이다.
태종무열왕 2년(655)에 둘째 아들이었던 김인문(金仁問)이 총관으로 재임하던
시적 지금의 압량리에 장산성(獐山城)을 쌓아 군사훈련을 하였으니
임금이 그 공을 기리어 식읍(食邑) 300호(戶)를 주었다고 한다.
압독국을 대야성(大耶城) 아찬(阿 )으로 옮겼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경산군 동면으로 들게 된다.
1914년에 이르러 행정구역을 통합할 적에 압량면으로 개칭하게 되고
면 사무소를 조영동(造永洞)에 두었다가 1916년에 부적동(夫迪洞)으로 옮겼다.
또한 2018년 12월 13일 압량면 행정복지센터로 명칭 변경되었으며
2020년 1월 1일 압량읍으로 승격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 그림의 눈이랄까.
경산 고을의 가장 오래고 알맹이에 값하는 고장이 바로 압량이다.
압량은 본디 경산군의 본 고장이다.
일본의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전국의 마을 이름을 손질하게 된다
그 때가 1914년의 일이니 오래고 먼 우리들 고향의 정서를 해치기 시작한 것이다.
자인군 서면의 평산, 점촌, 여천, 유곡, 신천, 내동, 남방, 당리, 강서, 백안, 신월,
당음, 가일(駕日)의 13개 마을을 합하였고,
삼한 시절의 압량소국이 있었으므로 여기서 따다가 압량면이라 하여 경산군에 들게 한다. 동쪽은 진량읍과 자인면, 남쪽은 남산면과 남천면,
서쪽은 경산읍, 북쪽은 하양과 안심에 닿아
말 그대로 경산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다.
앞서 경산이란 이름의 말미암음이 갑제라고 하였다.
갑제는 감못이라고도 하는바, 감-거북(龜)신 혹은 물신과 땅신의 상징으로서
신본위사회에서 비롯하였고, 물과 땅을 정성을 가꾸어야 번영한다는
조상의 슬기가 담긴 이정표로 풀이 할 수 있다.
땅이름을 적는 방법의 차이일 뿐 같은 의미로 파악되는 마을 이름들이 있으니
그 보기에 값하는 것이 가일(駕日)의 경우라고 하겠다.
가일이 무슨 연유로 하여 감-가일의 걸림이 보이는가.
우리말을 한자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어다가
적는 방법 중의 하나로 이두(吏讀)를 들 수 있겠다.
가락(駕洛)의 가(駕)를, 우리말'가마' 혹은 '감'을 적는 한자의 짜맞추기로 보면
가(加)에 마(馬)를 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가락은 '가마라' 혹은 '감라'라는 말이 된다.
그럼 가일을 '가마일' 또는 '감일'로 읽을 경우 일(日)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일(日)의 옛 소리는 지(jih)였다. 그 때 그 시절 우리말에는
오늘날의 소리틀과는 달라'지'를 '시'로 읽어야한다.
하면 결국 가마일(감일)-가마실(감실)이란 대응이 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신라 시대에는 골(谷)을 실이라고 하였는데
실을 '시'롣 소리내는 것이니 가일(駕日)-가마실(감실)이란 동아리를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땅이름에 가마-계로 소리나는 보기들이 약 450여 개나 된다.
농경문화 시기에 섬기던 지모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가 '검(감)'으로 표기되는 거북신앙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옛적의 노래로는 김해지역의 구지가(龜旨歌)-왕거미노래를 들 수 있다.
가일 마을이나 감못밑들은 먹거리 생산의 요람인 점을 보더라도
압량은 주요한 삶의 터전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기원적으로 물이 없는 곳에서는 삶의 가능성이란
거의 의미가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 물의 중요성을 더 일러 무엇하리오.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훈련하던 압량의 두룩산과 아름드리 정자나무가
긴 역사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들리기 산이라고도 하거니와 산이라기에는 조그만 언덕이라 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하다. 여기 두룩 혹은 들리기에서 '둘(들)-'은 압량의 량(粱)이 바뀌어
이루어진 걸로 보면 좋을 것이다.
'량'에는 대들보란 뜻도 있는바 과연 압량은
옛부터 경산의 대들보였음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압량의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먼저 무문토기(無文土器)를 들 수 있다.
신대리, 부적리, 조영리의 것은 경산시 지역의의 대동의 것과 함께
금호 강변에 이루어진 나즈막한 구릉에 콩이나 항아리 모양의
무문토기 조각이 산발적으로 발견되었다.
1979년 영남대학교 발굴조사단에 따르자면 조영리(造永里) 구릉의 경우,
땅 위에서는 전혀 유적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무문토기 조각이 간혹 나와있다는
작은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발굴했다는 것이다.
땅 아래 이른바 문화층을 발견하였는바,
마제석기(磨製石器)와 대부완두(臺付 豆) 항아리 등 그릇의 모양이 복원되는
무문토기를 수습하였으며 주거지라고 생각되는 유구(遺構)도 나타났으나
특별한 유적으로서 의미를 부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