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왕성폭포를 거쳐 돌아오며>
쌍천 다리를 건너자, 오른쪽으로 명상길이 나타났다. 또한 그 옆에는 “비룡폭포 탐방로”가 용의 모습으로 등산객을 반기고 있었다. 거기에는 기원 전 59년 부여의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에 처음으로 용이 등장한다. 용은 우리민족의 신앙, 종교, 사상, 풍속, 미술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물의 제왕인 용이 비룡폭포에서 하늘로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신비한 비룡의 숲으로 함께 가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쌍천을 따라 올라가는 "명상길" 안내판>
<비룡폭포 탐방로 안내판>
그 옆에는 설악동 0.3Km, 토왕성폭포 2.5Km 이정표가 있었다. 명상길부터는 쌍천을 따라 평탄한 길을 쭉 걸어가는 코스였다. 걸어가는 길옆에는 금강소나무가 있는 풍경이 연분홍치맛자락을 휘날리는 아가씨의 미끈한 다리처럼 무척 아름다웠다. 폭포로 가는 길에는 화장실이 2곳이나 있었다. 두 번째 화장실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커브를 틀며 완만한 경사 길로 이어졌다.
<설악동 0.3Km, 토왕성폭포 2.5Km 이정표>
<토왕성폭포로 가는 길의 풍경 1>
<토왕성폭포로 가는 길의 풍경 2>
처음에는 완만한 경사였으나, 계곡으로 올라갈수록 경사가 심해졌다. 그러나 폭포로 오르는 길은 전에 비해서 무척 넓고 튼튼한 돌계단이 주를 이루었다. 드문드문 철 계단도 나타났다. 비룡폭포로 오르는 길에는 뿌리 부분에 물이 고였는데도 나무는 잘 자라고 있었다. 비룡폭포로 가기 전에 출렁다리가 있고, 그 앞에는 이름 없는 폭포가 있었다. 상당히 큰 폭포로 만약 이곳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면, 멋진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또한 이 폭포를 보러오는 관광객도 적지 않을 성 싶었다.
<나무뿌리에 물이 고였음에도 잘 자라는 나무>
<비룡폭포를 가기 전에 있는 출렁다리와 폭포의 조화>
<출렁다리 위에 있는 이름 모를 폭포가 있는 풍경>
출렁다리에서 얼마가지 않아서 비룡폭포였다. 16m 높이의 “비룡폭포(飛龍瀑布)”는 쌍천(雙川)의 지류가 화채봉(華彩峰) 북쪽 기슭에 만들어 놓은 폭포이다. 전설에 의하면 폭포수 속에 사는 용에게 처녀를 바쳐 하늘로 올려 보냄으로써, 심한 가뭄을 면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용이 등천한 폭포라 하여 비룡폭포로 불렸다고 한다.
일행보다 좀 먼저 올라온 나는 비룡폭포를 카메라에 담았다. 지금이 장마철이라 수량이 많기 때문인지, 위에서부터 쏟아지는 폭포는 가히 천둥소리를 내면서 힘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폭포가 떨어지는 소(沼)는 얼마나 깊은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별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지는 않았으나, 폭포수가 떨어지는 힘에 흙과 돌이 파였기 때문인지 물은 그저 검푸른 빛만 감돌았다.
<비룡폭포의 멋진 모습>
토왕성폭포전망대는 비룡폭포에서 400m 올라가 있었다. 여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 계단이었다. 혼자 걸어 올라가면서 계단을 세어 보았다. 계단은 950개가 넘었고, 편편한 곳을 합치면 1,000보정도 될 것 같았다. 이곳을 갔다 내려오는 사람들은 쉽게 잘 내려왔으나, 올라가는 사람들은 무척 힘든 것 같았다. 곳곳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숨을 고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망대에 거의 올라갔을 때,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전망대에서 안개로 한 치 앞을 보지 못했으나, 30분 정도 기다리자 안개가 걷히며 토왕성폭포의 전모를 보았다고 은근히 자랑했다. 올라가는 사람들에게도 그냥 내려오지 말고, 기다리면 안개가 걷힐 것이라며 희망을 주기도 했다.
전망대에 다다르자, 대부분 내려가고 방금 도착한 5명 정도만 있었다. 그러나 안개가 자우룩하게 끼어 어디에 폭포가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더구나 울산바위 정상에서처럼 이곳전망대에서 쉬고 있는데, 비가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배낭 덮개를 하고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다.
<안개가 잔뜩 낀 토왕성폭포전망대 풍경>
잠시 기다리자 일행 7명이 올라왔다. 2명은 토왕성폭포는 올 봄에 와 본 곳이라며, 비룡폭포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가랑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으나, 안개가 걷히며 토왕성폭포가 있는 화채봉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망대 뒤에 있는 노적봉도 모습을 드러났다. 드디어 광풍이 불어 안개가 싹 걷히듯, 토왕성폭포가 전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작은 사진기에 담기는 무리가 있었다. 이렇게 모습을 보여주고, 5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전망대에서 본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화채봉 풍경>
<안개가 걷히자 전망대에서 본 노적봉 풍경>
“토왕성폭포(土旺城瀑布)”는 외설악 노적봉 남쪽 토왕골에 있다. 화채봉에서 흘러 칠성봉을 끼고 돌아 총 높이 320m 3단(상단150m, 중단80m, 하단 90m)연폭(連瀑)으로 비룡폭포 및 육담폭포와 합류해 쌍천으로 흐른다. 여지도서인 “양강도호부”와 “양양부읍지”에는 토왕성부 북쪽 50리 설악산 동쪽에 있으며, 옛날에 “토성왕”이 성을 돌로 쌓았다고 한다. 성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폭포는 석벽사이로 천 길이나 날아 떨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은 “기관동산수(記關東山水)”에서 기이하고 웅장한 토왕성폭포의 모습을 묘사했고,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설악기(雪嶽記)”에는 토왕성폭포가 중국 “여산”보다 낫다고 표현하고 있다. 선녀의 비단옷을 펼쳐놓은 것 같은 토왕성폭포의 비경은 2011년 전국 국립공원 100경 중 하나로 선정되었고, 2013년에는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96호로 지정되었다.
<안개가 걷힌후의 토왕성폭포 (중앙 골짜기의 물줄기) 1>
<안개가 걷힌후의 토왕성폭포 (중앙 골짜기의 물줄기) 2>
<안개가 걷힌후의 토왕성폭포 (중앙 골짜기의 물줄기) 3>
우리는 다시 안개가 폭포를 삼켜버린 곳을 배경으로 개인 및 단체사진을 찍었다. 이제 우리의 몰골은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으나,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운이 좋아 가랑비가 내리고 안개가 잔뜩 끼어있음에도 토왕성폭포의 전모를 눈으로 확인했다고 자위하면서.
<전망대에서 토왕성폭포를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고 1>
<전망대에서 토왕성폭포를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고 2>
<전망대에서 토왕성폭포를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일행과 함께 내려오면서 비룡폭포를 배경으로 개인별 인증사진을 찍고 설악동으로 내려왔다. 우리는 설악동 매표소 부근에 앉아서 일행들이 모구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모두 도착해서 승용차를 타고 주차장을 출발(15:00)했다.
<내려오다 비룡폭포에서 추억을 남기고 1>
<내려오다 비룡폭포에서 추억을 남기고 2>
설악산을 나와 양양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북강릉에서 내렸다. 일행은 모처럼 바닷가에 온 김에 회를 먹으려고 사천 항을 찾았다. 여기까지는 내가 안내했으나, 음식점은 집행부에서 정하도록 했다. 일행은 수진횟집에서 가자미회와 오징어 회를 시키고, 물회를 1인당 한 그릇씩 시켰다. 물론 안주가 좋은데, 술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모두 적당히 마시고, 회를 맛있게 먹은 다음 술을 먹지 않은 여자 분들이 운전을 했다.
차 2대는 서로 조금 떨어져 왔는데, 1대는 평창휴게소부터 차가 막힌다는 안내에 따라 진부에서 모릿재를 거쳐 왔고, 1대는 장평까지 고속도로로 와서 사초거리에 오니 고속도로로 온 우리가 먼저 도착했다. 우리는 여자총무가 운영하는 “슬기네 양년통닭”에 들어가 뒤차를 기다리며, 커피와 생맥주를 마시고 평창으로 돌아왔다.
첫댓글 설악산의 비경을 안개의 효과와 함께 구경 잘 하신것 같습니다. 얼마 후에 좋은 추억 거리가 될 것입니다.
토왕성폭포가 잘 보였는데, 사진은 줌을 이용하지 못해서 아쉬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