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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꽃, 다른 소리
작은 꽃, 다른 소리 <심 신부의 예산살이, 낡음에서 빛을 보다>
삶이 시이고 노래인 사람을 좋아한다. 예술가라면 더욱 그렇다. 삶과 노래가 평행할 때 노래는 힘을 가진다. 노래만 잘 하는 재주와는 다른 울림이다. 노래에 삶을 담는 가수를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어찌 가수뿐일까? 우리 삶도 그렇다. 평범한 범부인 우리는 노래와 삶의 불일치 속에 살아간다. 초월적 삶을 견지하는 종교인도 마찬가지. 그런 노래를 부르는 이가 있다면 그는 예술가를 넘어 성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오랜만에 예산시네마에서 영화를 봤다. <아치의 노래, 정태춘>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예산참여자치연대와 전교조가 공동주관한 영화행사였다. 정태춘은 1978년 <시인의 마을>로 데뷔하며 이듬해 1979년 MBC 신인가수상과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상을 차지했다. 특유의 구수한 음색과 함께 시적인 그의 노래들은 당시 젊은 층을 사로잡았다. 이후 박은옥과 결혼하여 합작 음반들을 여럿 발표했다.
‘주변의 모든 것에 눈뜨던 시절 진실을 알고자 난 헤매였네. 귀를 열고, 눈을 똑바로 뜨고 어설프게나마 나는 듣고 보았네’ 그의 음반 <얘기 2>에 나오는 가사다. 그는 히트 곡을 낸 대중 가수로서 순탄한 삶을 살지 않았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변혁기였던 1987년 6월항쟁을 거치면서 그는 음악활동과 더불어 사회운동과 문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특히 데뷔곡이었던 <시인의 마을>이 공연윤리심의위원회에 의해 수차례 개작된 경험 때문이었을까? 1990년 <아, 대한민국>, 1993년 <92년 장마, 종로에서> 등 비합법 음반을 내면서 사전심의 폐지운동을 전개하여 1996년 헌법재판소로부터 ‘가요 사전심의 위헌 결정’이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뮤지션들은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의 노래는 그가 바라본 세상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다. 불의와 핍박의 현장을 보면서 어찌 사랑 타령만 할 수 있을까? 참담한 현실 앞에 시선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낀 것을 노래로 불렀을 뿐이다. 포크는 본디 메시지 전달력이 큰 장르이다. 그 울분과 답답함을 포크라는 장르에도 다 담기 어려워 그의 노래는 유독 독백이 많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60년대 미국의 포크가수 ‘피트시거’는 노래 하나를 발표한다.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꽃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곡이다. 이 노래에는 꽃, 소녀, 젊은 남자, 군인, 무덤, 다시 꽃이 순차적으로 등장한다. 소녀는 꽃을 따고, 젊은이와 결혼하며, 젊은이는 전쟁에 나가고, 전사하여 묻힌다. 묻힌 땅에서는 다시 꽃이 피고 있다. 후에 존 바에즈, 포 브라더스, 피터폴앤마리 등에 의해 리메이크 되며 반전(反戰)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선거가 끝났다. 파란 꽃, 빨간 꽃, 그 외의 꽃들이 온 동네 피어났다. 종일 골목마다 유세차의 노래 서비스를 듣느라 혼났다. 전쟁 같은 선거를 치르고 받아든 성적표에 환호도 절망도 하지 않기를, 한 동네 부딪치며 살아가야 할 일이니 자만도 미움도 그날에 그칠 일이다.
그럼에도 드는 염려 하나, 꽃들이 하나의 색깔로만 피어날 때 누가 아름답다 하겠는가? 모두가 사랑 노래만 부른다면 약자를 위한 노래는 누가 불러주겠는가? 일방적인 포성과 총성속에 반전의 노래는 누가 부를 것인가? 자세히 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귀를 대야만 들리는 소리들도 있다.
6월은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낸 6월 민주항쟁이 있는 달이다. 국민들이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당연한 권리를 얻기 위해 스러져간 작은 꽃들과 호헌철폐를 외치던 다른 소리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 앞에 펼쳐질 고단한 여정을 예감이라도 했을까? <시인의 마을>의 마지막 가사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수도승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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