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 2장 1-10절
설교제목 : 별의 길
이끌리는 길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거룩한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성탄절은 가까이 다가오고 있지만, 확산되는 코로나 상황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습니다. 이 겨울을 건강하게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에 읽었던 《앙리 마티스, 신의 집을 짓다》에서 인상 깊었던 그림이 있었습니다. 앙리 마티스는 프랑스에 있는 방스 경당을 직접 설계하고 모든 내부와 외부 장식 등을 제작하였습니다. 경당 내부에 있는 그림 중에서 ‘십자가의 길’이라는 벽화가 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심문받으시는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의 시신을 매장하는 모습까지 14개의 독립된 장면이 하나의 큰 드라마처럼 하나의 장면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경당 내부에서 들어서서 돌아설 때만이 볼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은 가던 길을 돌아서는 방향전환metanoia, 회심이 있을 때만이 다가오는 장면입니다. 14개의 장면은 4m의 폭과 2m의 높이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검은색의 아주 단순한 터치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을 감상한 몇몇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이들도 이것보다는 잘 그리겠다.” 이런 감상은 그림을 단순히 외형적 형태를 보면서 마티스를 비난하는 공통된 반응입니다. 그러나 마티스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많은 시간 동안 습작을 하였습니다. 하얀 타일의 벽에 작업을 할 때, 마티스가 눈을 감고 드로잉을 한 작품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마티스는 말합니다.
“나는 꿰뚫어야만 한다. 그래서 내 주제로 스며들어야 한다. 그러면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다... 나는 눈을 감고 ‘십자가의 길’을 그려야 한다.”
마티스 연구자들은 마티스의 그리기 방식을 ‘원형적 드로잉(그리기)’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것은 군더더기를 모두 비워낸 순수하고 직접적인 상태에서 감정을 덩어리째 쏟아 붓는 작업입니다. 마티스는 이런 작업을 한마디로 말합니다.
“이끌리는 것이지, 이끄는 것이 아니다On est conduit, on ne conduit pas.”
[가비노 김(2020) : 《앙리 마티스, 신의 집을 짓다》, 미진사, 서울, pp176-178, 341.]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습작들을 통하여 이끄는 작업을 하고, 최종적 작품에서는 자신의 맡기고 이끌리는 작업으로 작품을 완성하였습니다. 마티스는 이끌리는 것을 표현하고 이끌리는 것을 따라 살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고유한 과제인 듯합니다. 이끄는 삶과 이끌리는 삶입니다. 이 두 원리는 종교와 예술의 경계를 넘어서고, 물질과 정신의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구성물을 드러나게 합니다. 이것은 나와 하나님의 문제이고, 자아와 자기Self의 관계입니다.
오늘 코로나의 국면은 강제적으로 문명을 이끌어가는 원형적 힘의 발현일 것입니다. 이끌리는 것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를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끌리는 것의 본성을 이해하고, 이끌리는 것을 따라갈 때 우리 삶은 창조적이 되고, 영혼의 자유를 지니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끄는 길
오늘 본문은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헤롯왕 때에 예루살렘에 마고스(단순형, magi)라는 불리는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옵니다. 헤롯왕에게 와서 그들은 말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2)
이 동방의 박사들은 별을 연구하던 점성가들이었습니다. 별을 관찰하던 어느 날 박사들은 별의 출현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그 별을 보고 새로 태어날 왕을 경배하러 왔습니다. 이 점성가들은 일생 별의 움직임과 별의 출현을 연구하고 관찰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이끄는 길을 따라 산 자라 할 수 있습니다. 매일 밤하늘의 별을 연구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최선을 다하여 이끌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의 별을 발견하고 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자아가 이끄는 주체적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삶에서 어떤 것도 결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연금술사들은 ‘불사의 약’, ‘현자의 아들’, ‘현자의 돌’을 추출하기 위해 자신들이 모토로 삼았던 구절들이 있습니다. “읽고, 읽고, 또 읽으라.”, “실행하고, 실행하고 또 실행하라.” 그들이 찾는 가장 고귀한 가치를 얻을 때까지 반복되는 작업을 감행한 것입니다. 이런 작업은 대단히 지루하고 힘겹고 고통스럽습니다. 이런 작업 동안에 수많은 실패와 실수가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금술사의 모토 안에는 실험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며 작업을 실행해야 함이 암묵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지금 내가 이끄는 삶의 길을 따라 내 삶이 실험되고 있다면, 실패와 실수, 지루하고 힘겨운 반복되는 작업을 곡진하게 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반짝이는 구세주의 별이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끄는 길의 한계
그런데 박사들은 별을 보았지만, 별의 탄생 장소를 왕궁으로 설정하고 헤롯왕에게 갑니다. 이들이 왕궁으로 찾아간 것은 메시아가 왕궁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끄는 삶의 한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아가 이끄는 삶은 집단이 규정한 인습과 태도를 따라 살게 합니다. 외부세계의 집단적 방식을 따라가려 합니다. 박사들은 자신들이 인식하는 범위와 한계 안에서 메시아의 별을 찾아 왕궁으로 찾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찾아갈 때, 자신이 구축한 체계 안에서 답을 찾아가려 합니다. 이것이 땅의 길의 한계 상황입니다. 물론 헤롯의 입장에서 낯선 곳에서 방문한 박사들의 방문은 집단적 의식의 지배체제를 흔들며 소동을 일으키고 움직임을 촉발하는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이끄는 길의 한계 상황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늘 가던 길로, 기존의 방식과 습성을 따라 행하려는 자아의 태도입니다. 이때 자아의 일방적 길을 고수한다면 진정한 별을 찾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설정할 수 있는 자만이 겸손하게 별의 길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끄는 길의 한계를 잘 알고 있으신가요? 그 한계가 나를 좌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계에 대한 온전한 인식이 나보다 더 큰 위대한 힘과 접속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별의 길
박사들이 왕궁에서 벗어나자 그들 앞에 별이 나타나고, 별이 그들을 인도합니다. 왕궁에서 나오는 것은 집단적 의식의 지배 구조에서 벗어남을 의미합니다. 그 틀에서 나와 다시 하늘의 별을 주목할 때 별이 그들의 길을 인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이 별의 길을 따라간 것입니다. 박사들은 그 별의 길을 갔고, 그 별이 멈춘 곳에서 아기 예수, 구세주를 만났습니다. 박사들은 이끄는 길을 가면서 궁극적으로 이끌리는 길을 성실하게 갔음을 보여줍니다.
연금술사들은 이끄는 외향적 태도로 작업을 반복적으로 실행하는 것을 한 축으로 두었다면, 다른 한 축에서는 내향적 태도로 명상과 기도로 신성한 영감을 통하여 전체 작업을 완성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내면의 무의식과의 접속을 시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한 젊은 분과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분과 모래놀이 작업을 하였는데, 모래놀이에 펼쳐놓은 그림에는 북두칠성을 모래 위에 만들었습니다. 모래그림을 보면서 당신이 찾고 가야할 것은 별의 길인 듯하다고 했습니다. 북두칠성은 한국에서 칠성신으로 모시는 비와 풍요와 연결되고, 서양에서는 큰곰자리로 헤라인 주노와 연결되는 별자리로 여성, 또는 모성과 연결됩니다. 오디세이아에서는 일종의 북쪽의 좌표가 되었던 별자리이기도 합니다. 땅의 길에서 길을 잃어버린 자에게 하늘의 별이 내면에서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래놀이 작업에서 분명히 그가 다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별의 길이 그에게 제시되었고, 그 별이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그림이었습니다.
별의 안내자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별의 길은 어둠이 드리울 때만이 그 정체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정채찬 교수는 노래합니다. “어둠이 와야 어둠조차 가릴 수 없던 / 참 빛이 드러나리, / 별이 빛나는 그 날 밤 / 나는 가장 위대한 우주의 서사시, / 신의 시를 보았던 것이다./
인생의 어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참 빛을 드러나고 그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세계에 드리운 어둠에서 별의 빛, 참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별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어둠은 또 다른 희망의 조건일 수 있습니다.
별의 길을 주목하기 시작하면 별의 길이 우리를 이끌기 시작할 것입니다. 별의 길이 나를 이끌도록 나를 던져 맡길 수 있는 힘이 자아에게 있다면, 운명이 나를 이끌어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누군가에 별의 길의 안내자가 될 것입니다.
대림절의 시간은 땅의 길을 넘어서 별의 길을 다시 지향하는 때입니다. 자아가 이끄는 것을 잠시 내려놓고, 별의 길이 무엇인지, 나는 무엇에 이끌리는 다시 확인하고, 구세주의 별을 따라가기로 되새김질하는 시간입니다. 더 나아가 이성선 시인의 시 구절처럼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 우러러 쳐다보면 /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 길을 비추어주는 ...” 별의 안내자로서 우리의 삶을 다시 세우는 시간일 것입니다. 내가 이끄는 삶을 넘어 그분에게 이끌리는 삶으로 별의 길을 가고 별의 길의 안내자가 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