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건, 메르스 사태, 그리고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 이 셋을 관통하는 키 워드는? 정답은 ‘정부의 부재’입니다. 정부가 있어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 정부 역할의 제1조를 망각했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아노미 상태’나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문제의 옥시 가습기 살균제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판매됐고 수백명의 목숨을 빼앗아갔다는 사실 자체가 정부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 아닐까요. 문제가 된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은 다른 나라에서도 여러 제품에 쓰이고 있지만 우리처럼 인체에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해를 입힐 수 있는 가습기에 사용된 나라는 한군데도 없습니다. 그 치명적 독성 때문에 농약 혹은 유독물질로 관리해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독물질이 어떻게 한국에선 버젓이 가습기 살균제로 시판될 수 있었던 걸까요. PHMG이란 물질이 국내에 처음 들어온 건 1996년입니다.SK케미컬(당시 유공)이 카펫 항균 청소제로 쓰겠다며 PHMG 제조신고서를 냈습니다. 그런데 환경부는 이때 추가 독성실험 자료를 요구하지도,유독물로 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카펫 항균제라니까 좀 소홀히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4년 뒤인 2000년 국립환경과학원은 PHMG-인산염을 ‘유독물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고시합니다. 정부기관이 나서 ‘독성이 아니다’고 판정을 내려준 건데,바로 여기서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겁니다.이 물질에 대해 미국은 이미 94년 농약으로 분류했고,유럽연합(EU)은 98년 살생물제 관리지침을 만들어 관리해올 정도로 다른 나라들은 특별관리를 해오던 터였습니다. 카펫 항균제로 들여온 PHMG가 가습기 살균제로 둔갑한 건 2001년입니다. 옥시는 그 때까지 가습기 살균제로 사용했던 프리벤톨R80에서 부유물질이 생긴다는 소비자의 불만을 접수하고 살균제를 PHMG로 바꾸면서도 흡입 독성 실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유독물질이 호흡기를 통해 인체로 들어가고 있었는데도 제조·유통업체도,정부도 나몰라라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실제 피해정도가 얼마인지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망에 이르진 않았더라도 폐나 다른 장기에 해를 입은 간접 피해자들은 또 얼마겠습니까. 이렇게 국민들이 시름시름 병들고 죽어가고 있는데도 정부 차원의 역학 조사는 10년뒤인 2011년에서야 시작됩니다. 서울아산병원 의료진이 원인미상 폐질환 환자 7명을 발견해 질병관리본부에 신고하면서 비로소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이란 걸 찾아낸 겁니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이르는 세월동안 허가·관리 감독 기관인 환경부·산업통상자원부·보건복지부는 도대체 뭘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그들은 이렇게 항변합니다. “당시엔 가습기 살균제가 공산품 안전검사 대상이 아니었다” “법제화가 안돼 있어 소관사항이 아니었다” “국가가 기업과 개인간의 일에 개입할순 없다”고 말입니다. 정말이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지긋지긋하게 들어온 얘기 아닙니까. 관청을 상대할 때마다 듣게되는 스테레오 타입의 데자뷔 말입니다. 메르스 때도,세월호 때도 똑같이 경험했던 우리네 관료들의 책임 떠넘기기,미꾸라지식 발뺌하기는 정말이지 ‘세계급’입니다.
더 한심한 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사실이 확인된 뒤에도 피해자들에게 개별적으로 재판을 통해 피해보상을 받으라고 떠민,무책임의 극치입니다. 전문지식이나 정보가 없는 개인이 거대 기업이나 기관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믿는건지 묻고 싶습니다. 법원(1심) 역시 피해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국가가 관련 법령에 따라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을 확인해 판매를 중지시킬 의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국가가 관리를 허술하게 해 독성물질 시판을 허가해놓고 그걸 사 쓴 피해자에게는 스스로 알아서 구제를 받으라니요…. 제품을 사 쓴게 잘못이고 죽은 사람만 억울하게 된 꼴인데 그렇다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지 못하는 정부와 국가는 왜 존재하는 겁니까. 만시지탄(晩時之歎) 이나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고 있고 국회 청문회의 시동이 걸리고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진상이 밝혀지고 피해자 구제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더해 이번 사건이 우리 모두 ‘똑똑한 소비자’로 거듭나는, 새로운 소비자 운동의 출발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치 권력이나 기업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소비자만을 위한 참 소비자 운동말입니다. 『Consumer Report』를 내는 미국의 비영리 소비자 단체 ‘Consumer Union’같은 소비자 운동단체가 롤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분노하고 고함치고 끝내기엔 영문도 모르고 스러져간 어린 생명들이 너무 가엾다지 않습니까. 이번주 중앙SUNDAY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불러온 당국의 무책임과 부주의를 집중 취재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재앙 막을 기회 다섯번이나 있었다’는 제목의 5월1일자 단독 기사에 이은 속보입니다. [관련기사]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 늑장대응의 전말…가습기 살균제 재앙 막을 기회 다섯번이나 있었다 http://sunday.joins.com/archives/127166 편집국 중앙SUN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