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시작하여 이탈리아 국경에 이르는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올망졸망 장난감 소품처럼 생긴 건물들이 벼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파스텔 톤으로 벽을 칠하고 빨간 지붕을 한 예쁜 고급주택들이다. 바람은 싱그럽고 기후는 쾌청하고 따사로우며 아름다운 해변을 가진 작은 도시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하지만 모나코나 니스를 제외하면 그다지 도시랄 것도 없는 고만고만한 마을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정겹고 오붓한 느낌이 든다. 물론 태양의 계절인 여름이 되면 전혀 다른 모습이겠지만 말이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이 고만고만한 마을과 도시들을 살펴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하나 드러나고 만다.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마을들 사이에 만들어져 있는 자갈이 빼곡히 깔린 골목길에서 시작하여 바위벼랑 사이로 위태롭게 만들어져 있는 비탈길이 끝도 없이 모두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마을과 도시는 이런 샛길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야말로 양떼나 다닐 수 있는 그런 길이다. 하지만 먼 옛날에는 이런 길이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을 것이다. 이 길로 모든 생활 물자와 이웃들의 소식이 오고갔을 것이다. 바다를 통한 뱃길이 있기는 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멀리 나가는 교역선이나 고기잡이 어선뿐이었을 것이다. 암초덩어리의 거친 해안선과 성난 파도 때문에 옆 마을과 교류나 소통에는 뱃길보다 오히려 좁고 비탈진 샛길이 훨씬 유용했을 것이다.
이 비탈진 샛길들을 따라간다면 충분히 스페인에서 이탈리아까지 갈 수는 있겠는데....... 이 판국에서 느닷없이 한니발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하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피레네 산맥의 국경을 지나 프랑스 랑그 독 지방에 이르는 해안지방에는 유독 한니발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은 코끼리를 앞세우고 대군을 이끌며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영토에 들어섰다. 그의 목적지는 오로지 로마였다. 마르세유까지는 해안선을 끼고 왔는데....... 날카로운 바위벼랑이 수도 없이 널려진 해안선이 아주 복잡한 프랑스 남부에 이르러서는 그만 길이 막히고 만 것이다. 해안선을 따라 목동들이 지나다니는 협소하고 가파른 샛길은 뚫려있었지만, 그길로 칼이나 창을 든 군인들이 일렬로 길게 서서 나간다고 해서 군대가 진군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코끼리와 말이 지나고 보급품과 식량을 실은 마차가 지나갈 수 있어야 군대가 진군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해안선을 따라 수십 명의 특공대는 보낼 수 있겠지만 역사상 최강의 군대인 로마군을 상대할 군인과 장비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한니발의 군대는 내륙으로 발길을 돌렸고 마침내 알프스산맥을 넘어갔던 것이다. 남프랑스의 거친 해안길보다 차라리 눈 덮인 험준한 알프스가 수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지금에야 여기 해안선을 따라 산허리를 자르고 터널을 뚫어 해안 전망이 아주 빼어난 일급 드라이브 코스가 생겨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굴곡이 심하고 경사가 가파른 결코 만만치만은 안은 해안도로 사정을 여실히 실감할 수가 있다.
니스에서 동쪽으로 이십 리쯤을 조금 더 가면 에즈(Eze)라는 마을이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에즈로 인해서 코트다쥐르 여행이 더욱 풍성해 졌다’라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는 곳이다. 그리고 에즈에서 십리를 더 가면 유명한 모나코가 나온다.
어쨌든 오늘은 니스 근교여행으로 에즈를 다녀오기로 한 날이다.
니스전망대에서 해안선을 따라 먼 과거의 옛길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지금도 꼬박 하루 코스로 목동들이 다니던 벼랑의 샛길을 통해 에즈 여행을 하는 트래킹 프로그램이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한참 비수기인 겨울이라 휴업중이란다.
결국 우리는 가라발디 광장(Place Giuseppe Garibaldi)으로 향했다. 니스에서 근교 여행은 인근에 붙어있는 마세나 광장(Place Masséna) 아니면 가라발디 광장(Place Giuseppe Garibaldi)을 반듯이 통과하는 대중교통을 쉽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모든 여행안내 책자와 팜플렛에 나와 있는 니스의 대중교통 안내는 어디까지나 2022년 까지만 유효했다는 사실을 그곳에서 깨달았다. 에즈와 모나코를 가는 버스는 예전에 사용하던 정류장 사용이 그대로였지만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바꿔가는 과정 중이었다.
그동안 니스 시내버스 정류장은 가라발디 광장에서 여섯 블럭 정도 떨어진 비교적 인근의 바우반 버스터미널(Gare routière Vauban)을 중심으로 여러 곳으로 갈라져 나갔는데, 협소한 니스 시내에 시내버스가 다님으로 해서 생기는 번잡함과 도시 매연을 줄이기 위해서 버스 정류장을 하나 더 만들었다.
바로 서쪽 외곽의 니스 공항 바로 건너편에 서부 터미널이 생긴 것이다. 니스의 북쪽과 서쪽으로 진출하는 버스들은 모두 이곳 서부 정류장에서 출발하고 도착한다. 터미널과 트램 1호선이 같은 장소에 설치되어 있어서 전혀 불편이 없다. 그러니까 과거 바우반 터미널에서 승차하여 가라발디 광장이나 마세나 광장을 경유하여 서쪽으로 나가던 버스들이 이제는 시내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쪽인 에즈. 모나코. 망통 등으로 향하는 버스들만이 예전처럼 마세나와 가라발디 광장 인근의 정류소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거기다 운행중인 버스의 고유 번호들이 바뀌었거나 한동안 병립해서 혼용해 사용하는 과정이었다. 예를 들어서 그동안엔 100번 버스였다면 지금은 113번으로 바뀌었거나, 아직은 100번과 113번을 한동안 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혹, 앞으로 니스 여행을 계획하고 계시다면....... 2022년까지의 대중교통 안내는 모두 지워버리고, 다양한 웹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고 재차 확인해 두시라 반듯이 권장해 드리고 싶다.
우리 또한 다음날 엄청난 시련을 겪은 후에야 이런 내막을 속속들이 알 수가 있었다. 영어로 소통이 그나마 시원치 않은 프랑스 여행은 고된 시련의 연속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고된 시련의 연속이라 해도 나는 결코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왜? 즐겁잖아. 또 어찌되었던 극복을 했으니까 집에 무사히 돌아온 것이잖아.
하여 우리는 아직 대중교통 환승 시간이 남아있는 것을 이용해 인근의 멋진 영화관 건물 뒷편에 있는 바우반 터미널로 서둘러 이동했다. 인근의 다른 여행을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하필......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에즈로 가는 버스가 들어왔다. 무턱대고 올라 탔다. 정보수집은 뒤로 미룬 채....... 곧바로 다음날 혹독하게 댓가를 치루고 말았다. 내일은 내일......
우리는 지금 에즈(Eze)로 간다.
니스에서 버스로 약 30분 남짓 걸리는 에즈 빌리지. 여기에선 빌리지가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길이 장난이 아니다.
그야말로 먼 옛날의 목동 길을 조금 다듬어 펼쳐놓은 정도에 불과하지 않은가. 경사가 가파르고 굴곡이 엄청 심하고 일단 비좁다 못해 거의 아슬아슬할 정도의 협소한 도로를 버스는 무심하게 쌩쌩 잘도 내달린다.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서로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면서 말이다. 거기다가 오가는 차량은 또 왜 그리 많은지?
저만치 까마득한 바위벼랑 아래로 검푸른 코발트빛 지중해가 넘실대고, 유난히 눈이 부신 코트다쥐르의 따가운 햇살 알갱이들이 하염없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동안 살아온 일상의 햇살을 가시광선이었는데 지중해의 햇살은 강렬하면서도 미세한 가시광선으로 만 느껴진다.
그렇게 한참 정신을 내려놓고 사경을 헤매고 있을 즈음에 저만치 차창 밖으로 바위투성이 암벽봉우리 위로 무너진 성채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디선가 눈에 썩 익은 그런 풍경이다.
드디어 에즈(Eze Village)에 도착한 것이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류는 그의 <요리 소설집>에서 무스 쇼콜라를 소개하면서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라고 적었다. 바로 여기 에즈 빌리지의 한 레스토랑에서 말이다.
에즈가....... ‘뻔뻔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에즈가 지금 내 눈 가득 몰려들어왔다.’
'인생 뭐 있어?'
'북망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언제고 훗날 저승사자가 아무리 길을 재촉해도 허기지면 못따라 나선다'고 개길판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카페 길가 자리를 겨우 확보하고는 생맥주에 피자를 한 판 때린다.
국가와 시간과 장소를 가지지 않고...... 우린 정말로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다닌다.
한참 식도락에 빠져있던 중에 눈이 마주친 이 심상찮은 분위기의 사내들을 보고 놀라서 가무라칠뻔 했다. 어딘가 모르게 락이나 메탈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지 않는가?
'혹시 내가 시방 폴 데이빗 휴이슨(Paul David Hewson)을 만나고 있는 것 아니야?'
'어쩌자고 이런 환장할 씨츄에이션이 시방 나에게?'
한 번 물어 볼까? 안경 좀 벗어달라고 해 볼까? 진짜면? 싸인 받아야지 당연히....... 인증샷도 꼭 해야하고...... 헐. 또 헐.
<with or without you>는 내가 끔찍할 정도로 좋아하는, 그야말로 내 인생곡 중에 하나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락 그룹 U2의 노래로 리더이자 보컬인 보노(Bono)의 거칠면서도 우수에 젖은 목소리가 일품인 곡이다. 그 보노의 본명이 바로 폴 데이빗인 것이다. 더더욱 내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락 스타이자 억만장자인 보노가 여기 에즈를 너무도 사랑하여 실제로 이 언덕에 집을 구입하였고, 휴식이 필요할때면 정말로 자주 찾아서 한동안씩 머문다는 기사를 읽은적이 있기 때문이다. 에즈에 안거하면서 쉬고있는 보노는 적어도 이곳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현지인일 뿐더러, 그라고 배고프면 동네 피자집에 피자 먹으러 나오지 말란 법이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아쉽게도 아니었다. 이 범상치않은 사나이...... 아무래도 여기 피자님 사장님 같아 보인다.
그리고 에즈 빌리지 입구 한쪽에 서 있는 기마동상....... 에즈와 연관이 깊은 영웅 몇몇이 떠오르긴 하는데....... 아 글씨 동상의 폼이 꼭....... 영락없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운동장에 놓여있는 강감찬 장군 동상과 흡사하지 않은가? 헐!!!!!
요즘처럼 해외여행이 완전 개방 내지는 대중화되기 훨씬 이전의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크고 유명한 출판사에서 프랑스 여행에 관한 책을 발간하였는데, 그 내용에 에즈(eze)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서 사뭇 흥미롭기도 하여 전문 그대로를 옮겨보기로 한다.
“에즈는 지중해 위로 높이 솟은 바위 첨탑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다. 매년 여름만 되면 수천 명의 관광객들이 14세기의 요새화된 문과 좁은 도로들이 밀집되어있는 곳을 지나 이곳으로 찾아든다. 조심스럽게 복구된 꽃장식의 건물들에는 각종 상점들과 갤러리, 공예품 작업소 등이 들어서 있다. 마을의 꼭대기에는 폐허가 된 성이 푸른 아열대 식물을 심은 이국정원(Jardin Exotique)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의 전망은 매우 아름답다. 코르니슈의 위쪽을 따라가면 롬 시대의 전승 기념비 라 튀르비(La Turbie)가 세워져 있다.”
너무나도 짧은 에즈 여행에 관한 내용이다. 이게 전부다.
시선을 잡아끄는 대목은 해마다 여름이면 수천 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온다는 대목이다.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지금은 겨울에만도 수만 명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에즈는 지금 프랑스 남부 여행에서 손에 꼽히는 핫 플레이스다. 수십만을 넘어 해마다 백만 명 이상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 남부 해안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코트다쥐르의 중심이 니스(Nice)인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젊은 여행자들이나 신혼부부들이 니스를 찾아가는 이유 중에는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에즈 때문에 일부러 찾아갈 정도라 하겠다. 니스 여행을 하다가 덤으로 에즈를 얻는 것이 아니라, 에즈를 방문하기 위하여 니스를 찾아 갈 정도라는 말이다. 젊은이들이, 그리고 유독 여성들이 좋아하는 장소가 바로 에즈다.
그런데, 그렇게 세월이 흘렀음에도....... 요즘의 여행 안내서들을 찾아보면 앞에 소개한 여행자유화 이전에 발간된 안내서의 내용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다들 거거서 거기일 정도로 짧은 내용으로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대신 빼어난 절경의 사진들로 여러 지면을 채우고 있다. 이 말인 즉은 에즈 여행의 속 내용은 아주 간단하고 별로 특별한 다른 이야기가 없다는 뜻이다. 그냥 와서 보고 감동을 먹고 사진이나 열심히 찍으면 그게 에즈 여행의 전부라는 의미라 하겠다.
도대체 요즘 사람들...... 젊은이들과 여성들은 왜 유독 에즈를 좋아하는 것일까?
십년 전이나, 아니 수십 년 전이랑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 작고 가파르고 협소한 마을에 지나지 않는 산골마을을 왜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열광하는 것일까?
그런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은 어디에서 우러나오고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나는 정말로 잘 모르겠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남프랑스 프로방스와 코트다쥐르 여행에서 에즈가 가장 아름다운 것도 가장 사랑스러운 것도 가장 즐거운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에즈 보다 더 아름답고 행복한 장소들을 알고 있고 실제 경험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에즈(eze)에 관해 이야기를 좀 더 해보기로 하자. 이글을 읽고 또는 장차 에즈 여행에 관심을 갖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요즘의 여행안내서나 SNS에 등장하는 이야기에도 에즈 여행에 관한 내용은 빈약하기가 그지없지만....... 내가 누구인가? 나는 여기서 그칠 수가 없다.
내가 알고 체험한 에즈 여행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니스에서 출발하는 에즈(Eze) 여행>
니스에서 당일치기로 에즈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가장 저렴하고 편리한 교통수단은 당연히 시내버스다. 기차도 있지만 적어도 에즈 여행에서만은 기차를 권하지 않겠다.
니스 시내의 바우반 버스터미널(Vauban) 이나 가리발디 광장(Place Garibaldi) 근처의 버스정류장에서 82번 버스나 112번 버스를 타면 에즈 빌리지까지 이십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여기에 100번 버스를 타도 에즈에 가기는 가겠지만 모든 여행자들이 학수고대하는 에즈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도착 즉시 깨닫게 될 것이며, 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택시를 타야하는 경제적 비용을 부담하던가 아니면 한 사오십 분을 땀 흘리며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는 노동을 감안해야만 한다. 이제부터 그것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겠지만....... 그보다 앞서서 방금 앞에서 이야기했던 가리발디 광장의 즈음에서....... 그냥 ‘니스에 있는 가리발디 광장’ 쯤으로 무심코 지나가는 대다수의 여행자와 ‘왜 프랑스 땅에서 엉뚱하게 가리발디가 나와’ 라고 의문의 가지는 아주 특별한 여행자 사이에는..... 여행에 대하여 얼마까지 공부를 했는가 하는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 니스는 분명 프랑스의 영토이다. 그런데 가리발디(Giuseppe Maria Garibald) 이탈리아 사람이다. 그것도 우리나라 김구나 안창호 선생님 같은 이탈리아 독립운동의 영웅이다. 그런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이 니스의 중심에 있고 거대한 동상까지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니스를 여행하면서 그런 궁금증들은 안 생기셨단 말인가? 아님 아예 가리발디라는 인물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가 말이다. 니스 여행의 말미에 다시 이야기를 해 보겠다.
암튼, 82번 버스나 112번 버스를 타면 에즈 빌리지(Eze Village)에 도착한다.
아래 사진을 보면 프랑스 전역에서 사용되는 시내버스 시간표로 니스의 82번 시내버스 시간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를 이해사고 활용할 수 있다면 프랑스는 물론 유럽 대부분의 소도시 여행은 이제부터 아무런 걱정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82번 버스는 니스 시내의 바우반 버스터미널(Vauban)에서 종점인 쁠레테 라 저스틱스(Plateau de la Justice)사이를 왕복 운행하는 노선의 버스인 것이다. 중간에 에즈 빌리지를 경유하는데 시간표를 잘 살피면 갈 때와 올 때의 경유지 도착 시간까지 아주 상세하게 나와 있다. 에즈 빌리지 버스 정류장이 삼거리에 위치해 있는데 82번은 이곳에서 산자락을 향해 가파른 길로 좌회전을 해서 가고, 100번은 우측은 산 언덕길을 내려간다. 그럼 다음으로 112번 버스는 무엇이냐?
코트다쥐르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에즈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을 따라 그림처럼 예쁜 집들이 올망졸망 해안가 벼랑에 매달려 있는 프랜치 리비에라의 약 120개가 넘는 마을중의 하나이다.
그런 에즈의 가장 높고 멋진 전망대에서 지중해를 내려다보면서 가장 먼저 내게 떠오는 느낌은 ‘에즈는 타오르미나를 쏙 빼닮았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에즈는 정말로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를 자구만 연상시켜 떠올리게 만들어 주었다. 크기로 본다면 에즈는 타오르미나의 약 1/5 정도 크기로 밖에 여겨지지 않지만, 보면 볼수록, 그리고 속을 들여다 보면 볼수록 에즈와 타오르미나는 닮아도 너무나 닮았다. 마을의 생성과 발전과 현대사 속에서의 위치와 한참 각광받고 있는 핫 블레이스 여행지로서의 위치까지 너무나 닮아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만의 주관적인 생각과 느낌이겠지만 말이다.
에즈는 두 개의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산자락 높은 곳에 매달리다시피 형성되어 ‘독수리 요새’라고 까지 불리는 수많은 여행자들의 목적지이자 오늘 우리가 찾아가고 있는 에즈 빌리지(Eze Village)가 하나이고, 그곳에서 한참 아래 내려다보이는 해안가에 들어선 작은 어촌마을인 에즈 보르 드 메르(Èze Bord de Mer)가 다른 하나이다.
이렇게 해안가와 산꼭대기에 들어선 두 마을의 사이를 연결해주는 약 5km의 가파른 오솔길을 통해서 두 마을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사람과 물자가 오르내렸다. 가장 중요한 생활통로였던 셈이다.
그런 이곳에 19세기 중후반 독일에서 한 사내가 찾아왔다. 요양을 겸해서 이곳 에즈에 장기체류하던 사내는 작은 어촌 에즈 메르에 머물면서 오솔길을 통해 수시로 에즈 빌리지의 전망대까지 산책을 겸한 트래킹을 즐겼다. 그리고 그는 걸으면서 머릿속에 수많은 상념을 떠올렸고 곧바로 이를 자신이 집필중인 책에 옮겼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3부가 바로 이곳 에즈에서 쓰여 졌고 그 사내가 바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다. 하여 오늘날에는 그가 거닐던 산책로를 니체 패스라 부르며 트래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 붐비는 인기 명소가 되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여기는 분명 트레일 코스다. 산책쯤으로 쉽게 여기다가는 다음날 여행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니스에서 기차를 타거나 100번 버스를 타면 여기 어촌마을의 에즈 슈메르(Eze Sur Mer)역이나 정류장에 도착한다. 모나코를 경유하여 망통까지 운행하는 100번 버스가 이곳을 지나는 것이다. 기차나 100번 버스에서 내리면 감격스러울만한 니체의 산책로가 여행자를 반겨준다.
에즈 빌리지는 해발 429m의 산자락 바위벼랑 위에 매달려 있다.
혹 해발 400m 정도의 높이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이렇게 부연 설명을 드리겠다. 목포 유달산이 해발 228m이며 강화도에 있는 마니산의 높이가 해발 472. 1 m 라고 말이다. 니체의 산책로는 강화도 마니산 높이랑 비슷하다.
에즈 빌리지는 ‘독수리 둥지’로 묘사되듯이 함부로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랜드 마크라 할 수 있다. 좁고 가파른 골목길이 사방으로 빼곡하게 거미줄처럼 엉겨있는 것이 아름다운 매력으로 느껴지는 곳이다.
에즈의 모토는 (Isis Moriendo Renascor)로 이는 “우리는 죽음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로 상징은 뼈를 움켜쥐고 서있는 불사조이다.
여기에서 보여 지듯이 에즈의 탄생과 지명에는 이집트 문명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 여신 이시스에 대한 믿음과 열망은 로마 공화정 말기에 상당한 저변을 확보한 이시스교로 확장되기도 했다. 신화속의 여신 이시스는 처녀인 채 아들 호루스를 낳았다고 여겨져 초기 기독교에서는 이를 성모 마리아에 연결시키기도 했었으며, 이시스가 ‘천상의 성모’의 시초였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여러 여행안내서나 가이드들의 설명에 따르자면 에즈의 지명은 안토닌(Antonin)이 지은 해양 생물도감 <St. Laurent of Èze>에서 처음 거명되었다고 하지만, 나는 다른 일부 학자의 주장처럼 이곳에 살던 고대인들에게 신앙의 대상이었던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에서 파생되어 지금의 에즈(Eze)가 되었다고 본다.
에즈의 고대 역사에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프랑스 남부해안 코트다쥐르와 고대 이집트 왕국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다만 둘 사이엔 하나의 중간 매개체로 페니키아인이 등장하는 것 뿐이다.
페니키아(Phœnicia)는 인류 문명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의 일부분이다. 아주 광활하고 위대한 역사 문화유산을 수없이 많이 남겨놓았지만, 기실은 아직도 그들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 별로 없는 아주 신기하고 묘한 문명사라고 해야 하겠다.
흔히 알려지기는 페니키아인 하면 레바논 지역을 근거로 하여 전 지중해의 해상을 지배한 고대 세력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페니키아가 국가인가?’ ‘페니키아가 단일민족을 가리키는 것인가?’ ‘어디서 어디까지가 그들의 문명이자 문화인가?’ 라는 질문에 명확하게 답을 내어놓기는 솔직히 좀 난감한 문제라는 것이 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서양의 문명사나 그리스 역사를 이야기하자면 가장 먼저, 혹은 가장 중요하게 처음에 등장하는 것이 페니키아다. 페니키아가 고대에 이룩한 지중해 연안지역과 바다를 통한 지배권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해상왕국으로 발전한 것이 고대 그리스 문명이다. 그런가하면 카르타고 왕국과 문명의 기반이 바로 페니키아다. 셈족의 일원으로 해상무역을 통해 지중해 전역을 지배했고, 오늘날 만국공통어로 통용되는 영어의 기원이 바로 페니키아어에서 나왔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페니키아가 그렇게 막연하게 별반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역사 변방의 의문투성이들뿐일까?
아니다. 적어도 내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기독교 사상을 기반으로 깔고 시작된 유럽 문화의 성향이 다분히 의도적, 아니면 오랜 선조들 때부터 외면 내지는 의도적 무관심으로 인하여....... 페니키아의 위대한 역사가 제대로 밝혀지고 인정될수록, 무한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유럽인들의 백인 우월주의 사관이 침해 받거나 깎아내려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적어도 나는 생각한다.
페니키아의 시대에 앞선 위대한 문명과 역사는 어디까지나 동방(오리엔탈리즘)의 역사이다. 백인 우월주의 사관에 차있는 유럽인들의 역사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 문명과 역사가 펼쳐진 현장이 대부분 유럽의 영역이자 중심인 지중해 유역이다. 그들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비슷한 표현으로........ 예수는 결코 유럽의 백인이 아니다. 소아시아 가나안 지역의 사람이다. 아랍인 모습의 예수를 유럽인들은 성형수술과 포토샵을 통해 게르만인이나 라틴인으로 재창조해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이천년 전에 벌써 예수의 호적을 유럽으로 파 옮겨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천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의 고향으로 내려와 잠시 머물다가 다시 돌아간다고 하면......... 유럽인들이 먼저 나서서 예루살렘을 지워버리고 바티칸을 대신 들이밀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페니키아가 왜 유럽인들의 정서에서 외면 받아야 했는지를 나는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오늘날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의 해안 지역을 흔히 레반트 지역이라고 부른다. 이 지역을 근거로 살아가던 고대민족들 중에 페니키아(Phœnicia), 블레셋(Philistines), 그리고 어디선가 몰려 온 이방인 유대민족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의 블레셋 사람이 바로 이곳의 원주민이랄 수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을 가리킨다.
구약 성경은 이 지역을 바로 가나안(Canaan) 이라고 기록했다. 하여 너른 의미로 흔히 부르는 가나안 사람 하면 페니키아인, 블레셋인, 유대인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사막을 유랑하다가 느닷없이 이 지역으로 쳐들어 온 유대인들은 이 땅이 ‘신께서 허락하신 이스라엘의 성스런 땅’ 이라며 다짜고짜 빼앗아 차지해 버리고 말았다. 또한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성서의 여호수아기에 기록된 것처럼, 가나안 사람들은 모두 이 땅에서 제거되고 사라져야 하는 민족으로 낙인찍고 실제로 절멸시켜 버렸다. 구약성경의 시대엔 어디가지나 유대인들이 막강한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유대인들의 역사는 패악(悖惡)의 역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기독교의 역사가 패악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로 신이 그런 패악을 부추기고 합리화 시켜주었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거짓으로 신의 섭리를 내세워 패악을 저질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나는 후자이길 바라는 사람이다. 전지전능하시며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구원을 약속하시는 신께서...... 저런 패악을 시작으로 인류에게 스스로의 역사를 허락하셨을 리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유대인 선조 중에 누군가가 신을 팔아가면서 패악을 저질렀음이요....... 지금 성서의 기록이 진실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데....... 헐!!!!! 천당 가긴 포기해야겠군!
어찌되었던 가나안 토착민들이 유대인들에 의해 배제되고 죽임을 당하고 도망치는 시기까지 한동안은 하나의 무리처럼 섞여 살았다.
덕분에 오늘날의 민속학자들은 이스라엘 문화와 풍습 거의 대부분이 곧 가나안 인들의 문화와 생활에서 유래된 것이라 인정한다. 당연히 유대인들은 강하게 부정하지만 말이다.
유대인들의 가나안 땅 강제 점령과 원주민의 핍박과 절멸정책에 부랴부랴 페니키아인들과 블레셋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가나안에서 도망쳤다. 블레셋 사람들은 가나안을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척박한 산악지역과 사막으로 숨어들어가 유목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페니키아인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소아시아 지역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유랑생활을 했다. 떠돌이 생활을 하다 보니 살아남기 위하여 그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장사였다.
당시 페르시아 지역에는 이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전성기를 이루고 있던 시절이었다. 페니키아인들은 이런 선진 문화와 문물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았다. 제대로 장사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페니키아인들은 부지런히 메소포타미아의 선진문물을 나일강 지역으로 퍼다 날랐다. 이집트 문명이 더욱 찬란하게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장사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페니키아인들은 새로운 시장과 자신들이 정착할 새로운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레바논 지역에 둥지를 틀고 해양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페니키아인들이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이 모여서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한 것이라는 학설이 등장한다. 사막을 오가며 장사를 하던 페니키아인들이 아무 어려움 없이 짧은 시간에 지중해를 석권해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누구보다 월등한 선박건조 기술과 항해술을 페니키아인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차 그들은 키프로스, 몰타, 시칠리아, 크레타 지역을 지나 이베리아반도(스페인. 포루투갈 지역)는 물론 모로코와 튀니지 해안까지 모두........ 그러니까 지중해 연안 거의 대부분을 근거지로 도시를 세워 장사를 위한 전진기지 내지는 식민지로 개발하였다.
그러면서 이번엔 이집트의 선진문물을 지중해의 전역으로 내다 팔았는데, 그 와중에 이 새로운 시대사조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빠르게 받아들여 재창조한 것이 바로 그리스문명인 것이다. 청동기 문화권이었던 그리스에 페니키아인들이 이집트의 철기문화를 전수해 준 것이다.
그런 페니키아인들에겐 훗날 역사로 평가해 본다면 참으로 신기하게도 묘한 약점이 있었다. 지중해 전역을 개발하고 식민지로 삼았으면서도 정작 페니키아인들의 중심 거점이나 국가나 왕국이나 제국 같은 통치체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로지 장사뿐이었다. ‘세상에서 장사가 제일 쉬웠어요’ 하는 꼴이다. 국가를 세우고 체제를 정비하고 군대를 만들어 외세의 침략에 방비를 해야 하고 하는 일들을 매우 성가시게 생각하고 기피했다는 약점이었다. 하여 페니키아라는 단어의 뒤에는 바빌론이나 페르시아 제국, 로마제국, 무굴제국 같은 국가 개념이나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나 문명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 이런 경우가 역사에서 페니키아인들을 제외하곤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지중해 연안의 수많은 식민지는 그저 장사만을 목적으로 하는 체인점이었을 뿐이다. 지역 안배를 위한 물류창고였을 뿐이다.
페니키아인들의 무역을 통한 부가 커지자 이를 빼앗으려는 부족을 넘어 민족과 국가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력 침공을 막기 위한 군대가 페니키아에는 없었다. 결국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설 용병을 모집했다. 처음엔 쉽게 위기를 넘겼지만..... 빼앗으려는 침략자는 늘어가고 용병을 관리하는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커져갔다. 뒤에는 벌어들이는 돈 보다 용병 관리비용이 더 들어가게 되었고, 불러들인 용병이 삽시간에 등을 돌리고 식민지 서넛을 차지해 빼앗고는 부족국가로 선언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졌을 정도였다.
페니키아는 결국 용병 문제로 몰락했다.
튀니지 지역에서 페니키아 상당의 용병으로 맹활약하던 집단이 바로 용맹한 카르타고인 이었다. 페니키아 주인이 짐을 바리바리 챙겨서 어디론가 떠나가 버리고 거대한 식민지가 무주공산으로 남게 되자, 카르타고가 공짜로 이를 넘겨받았다. 그들은 어깨너머로 페니키아인들의 장사술을 이미 습득한 상태였다. 거기가다 왜 페니키아가 몰락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막강한 해상 군사력과 미리 학습해 둔 상술로 삽시간에 페니키아가 차지하고 있던 지중해의 제해권과 상권을 마구 섭렵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제해권의 무한 확장의 말미에 운명처럼 로마(Rome)와 마주치게 되고 결국 포에니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여기 에즈에 처음 도착하였고 해상 거점마을을 건설한 것 역시 페니키아인들이었다. 그들은 이 언덕에 이시스 여신을 모시는 신전을 지었다. 그리고 여신의 이름에서 따다가 이곳의 이름을 지었고, 그것이 오랜 세월동안 변형되어 지금의 에즈(Eze)가 되었다. 이시스 여신을 모시던 신전이 헐리고 그 자리에 다시 세워진 것이 중앙광장에 있는 성모 마리아 승천교회(Notre Dame de l'Assomption) 이다. 교회에는 여전히 이시스 여신의 흔적인 이집트 십자가가 남아있다. 마을 곳곳에 놓여있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상은 바로 이시스 여신을 형상화한 것이다.
페니키아 몰락 후에는 그리스인들이 들어왔다. 지금 에즈 마을은 그리스 시기에 지금처럼 형성되었다.
이런 역사적 수순이나 도시(마을)을 형성에서 발전하는 상황이 영락없이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와 판박이처럼 똑같게 느껴지는 것이다.
좁고 가파른 에즈의 메인 스트리트 라고 할 수 있는 루 프란시팔레(Rue Principale)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그 좁은 골목들이 수많은 상점과 갤러리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물론 가장 비수기인 겨울이라 대부분 문을 닫고 있었지만 말이다. 골목 어귀나 계단 주위에는 카페와 고급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고, 유명하면서도 비싸기로 소문이 자자한 멋진 호텔도 그 속에 숨겨져 있다. 상점과 갤러리로 이용되고 있는 1층은 주로 영소. 양. 노새와 같은 가축을 기르는 헛간이거나 생활물자를 보관하는 창고로 쓰여 졌다. 주민들은 대부분 2층의 빈티지한 멋이 가득한 공간에서 생활했다.
그렇게 죄다 어디서 본 듯하거나, 또는 전혀 새로운 느낌의 가파른 골목길을 끝도 없이 오르다보면 마침내 정상부분에 온통 무너져 그 흔적만 남아있는 성터를 만나게 된다. 그 성터의 주변으로 이국적인 선인장으로 가득한 에즈 정원(Jardin Exotique d’Eze)가 빼어난 자태를 한껏 뽐내며 지중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곳에서는 정말로 주변 경관을 파노라마처럼 한 눈에 둘러볼 수가 있다.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태양이 빚어내는 은빛 노을을 볼 수 있고, 알록달록한 에즈 마을의 지붕 모습이 시야 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니스에서 에즈로 향해 달려오는 좁고 꾸불꾸불한 산악도로인 모옌 코르니쉬(Moyenne Corniche)가 산자락에 길게 실타래처럼 그어져 있다. 그리고 예즈의 입구라 할 수 있는 거대한 다리가 놓여있는데 깜직한 전설(?)이 서려있는 악마의 다리가 발아래 보인다.
어느 그믐날 밤, 한 농부가 신에게 간절하게 소원을 빌고 있었다. 그러자 이곳을 지나던 악마가 신을 가장해 농부 앞에 나타났다.
‘무엇을 그리도 간절하게 기원하는 것이더냐?’
‘건너 마을을 다니는 것이 하도 힘들어서 신께 다리를 놓아주십사 기도했습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내가 하룻밤 안에 튼튼하게 다리를 만들어주면 너는 무엇으로 보답을 하겠느냐?’
‘날이 새면서 다리를 지나가는 첫 번째 생명체의 영혼을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날이 다 새도록 지나가는 생명체가 없거나, 그 생명체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때는 제 영혼을 대신 바치겠습니다.’
악마는 그것도 참 재미있는 제안이라고 생각하여 밤을 새워 다리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농부는 묘안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다리를 열심히 건설하고 있는 악마의 정체를 이미 눈치 챘던 것이다.
다리는 완성되었고 날이 새었지만 그때까지 지나가는 어떤 생명체도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면서 농부의 영혼을 취하려 악마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농부가 휘파람을 불었다. 어디선가 강아지 한 마리가 달려왔다. 농부는 가지고 있던 지팡이의 끝에 먹이를 달아 다리 아래로 던졌다. 그러자....... 강아지가 다리 아래로 뛰어 내렸다.
악마가 농부의 기지에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여 지금도 현지인들은 이 다리를 ‘어리석은 악마의 다리’라고 부른다.
우리가 내렸던 에즈 빌리지 버스 정류장이 한 눈에 들어오고, 생맥주와 피자를 먹었던 작고 멋진 카페(Saines Saveurs)도 내려다 보인다. 건너편으로 간판처럼 길게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늘어놓았던 식료품점까지도 선명하게 내려다보인다.
광장 주차장 안쪽으로 프라고나르 향수 공장(Fragonard) 건물과 조형물이 보이고, 반대편으로 보이는 노랗고 가장 높은 건물이 바로 성모 승천교회이다.
로마가 분열되어 서로마가 멸망하자 비잔틴에 의한 옛 영토회복 전쟁까지 에즈는 그야말로 주인없는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코트다쥐르 지역 대부분이 같은 처지였다.
이 틈을 노려 쳐들어 온 것이 북아프리카 튀니지 지역에 근거지를 둔 해적들이었다. 지중해 전역이 이들 해적들로 들끓었다. 지중해 해적왕 바르바로사(붉은 수염)로 유명해진 튀니지 해적은 스페인의 ‘가톨릭에 의한 국토회복 운동(레콩키스타)’에 의해 리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난 이슬람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스페인에서 쫓겨난 이슬람 왕조는 지중해를 건너 모로코로 밀려나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하지만 이에 동참하지 않은 이주민들이 튀니지 지역으로 몰려갔는데 먹고 살 길이 막히자 해적으로 변신을 꾀한 것이다. 흔히 이들...... 아프리카 계통의 회교도들을 무어인 이라고 부른다. 이들 무어인 해적들이 약탈을 넘어 유럽 지역의 해안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훗날 프로방스의 영주 윌리엄이 이끄는 군대에게 쫓겨날 때까지 약 80년 가까이 지중해 연안을 무어인 해적들이 점령하고 다스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80년은 대단히 긴 시간이었으며 그 기간 동안에 이질적인 동서양의 문화가 뒤섞이는 진귀한 현상이 실제로 벌어졌던 것이다. 인근의 번성하는 도시 니스를 방어하고 제어하는 전진기지로 무어인들은 에즈를 점점 요새화 시켜 나갔다.
프로방스의 윌리엄에 의하여 유럽 본토를 차지했던 해적들을 일단 모두 바다로 쫓아냈지만, 수시로 쳐들어오는 그들의 피해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고 끝날 줄을 몰랐다.
그럼 튀니지 지역의 바르바로사로 대표되는 무어인 해적들이 언제 어떻게 사라졌느냐?
바로 요한 기사단(몰타 기사단)의 등장으로 해적들은 일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예루살렘에서 밀려난 몰타 기사단은 처음 로도스 섬에 진을 치고 유럽을 향해 치고 올라오는 메메트 2세기 지휘하는 오스만 터키의 대군과 맞섰다. 실로 골리앗과 다윗을 싸움이었다. 기적과도 같은 전투 끝에 겨우 소수만이 살아남은 요한 기사단은 막강한 오스만과의 전투에서 끝까지 대등한 전세를 유지했다. 유럽 본토의 기독교를 지켜낸 위대한 승리였으나 수많은 목숨을 바쳐야 했던 불사항전이었다. 요한 기사단은 로도스 섬을 내주는 조건으로 협정을 맺었다. 소수만이 겨우 살아남은 그들은 십 수척의 전함에 몸을 싣고 유럽으로 귀환했다. 교황을 비롯하여 전 유럽의 모든 국왕과 영주들이 앞 다투어 그들의 노고를 찬양하고 환영해 마지않았다. 유럽 본토의 기독교 왕국과 봉건제도가 요한 기사단의 헌신과 희생으로 인해 겨우 살아남았던 것이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문제가 남았다.
온 유럽이 그들을 칭송하고 찬양했지만....... 정작 그 누구도 그들을 나서서 맞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사단의 숫자는 비록 소수이지만 용맹하기로 워낙 유명했던 탓으로 교황을 비롯한 모든 군왕과 영주들이 두려워했던 것이다. 기사단을 가까이 두었다가 분쟁이 생기서나 이권다툼이 생기면 언제든 삽시간에 용맹한 기사단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아주 쉽게 한 봉건 국가나 심지어 교황까지도 도모할 수 있다고 두려움에 떨게 된 것이다.
환영은 하지만 그 누구도 요한 기사단을 맞이하고 쉴 장소를 제공하지 않았다. 기사단은 다시 지중해를 마냥 떠돌다가 절대 오지라 할 수 있는 지금의 몰타 섬에 정착하게 되었다. 몰타 섬에 있는 것이라고는 물과 토끼와 선인장과 거친 바다가 전부다. 지금에 까지도..... 나무 그늘도 없고 올리브 나무나 포도나무도 없다. 밀과 보리가 자라지 않는다.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인 것이다.
절해고도에 버려진 기사단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물고기만 잡아 먹고서 살아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결국 요한 기사단은 비장한 결심으로 새로운 사업에 나섰다. 바로 해적질이었다. 육지에서든 바다에서든 싸움 하나는 언제든 자신 있는 기사들이 아니었던가.
막다른 골목에서 그들은 다시 바다로 나갔다. 그리고 지나가는 배를 쫓아가 나포했다. 마침 그 배가 유럽의 기독교 선적이면 음식물을 얻는 대신 다른 해적들로 호위를 해주고 험난한 뱃길을 안내해 주었다. 이슬람 상선을 나포하면 모든 물자를 압류하고 귀한 신분의 사람은 몸값을 받고 풀어주고, 나머지는 뱃전 아래 구멍을 뚫어 모두를 바다에 수장시켜 버렸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온 세상에 퍼졌고 온 이슬람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기사단의 최고 목표물은 바로 튀니지 지역의 해적들이었다. 해적들은 땅 끝까지 쫓아가서 끝장을 내어 버렸다. 물건은 싹쓸이해서 빼앗고 튼튼한 배는 기사단 전투함으로 개조했고, 해적들을 포로로 잡지는 않았다. 배에 가두고 불을 지르거나 묶어서 붙들어 맨 후에 배를 통째로 수장시켜 버렸다.
한 순간에 지중해에서 튀니지 해적들이 싹 사라져 버렸다. 저승사자보다도 훨씬 무서운 요한 기사단이 지중해 전역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오스만 터키의 지중해 무역도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아무도 더 이상은 지중해로 나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오스만 터키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 술래이만 대제 술탄은 요한 기사단과의 전쟁을 선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스만 터키의 전 해군력과 발칸반도로 진출했던 육군까지 불러 들여서 요한 기사단 소탕 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요한 기사단의 몰타 전쟁’ 이다.
시간을 훌쩍 타 넘어서........ 1338년 에즈를 포함한 니스 인근지역 모두가 사보이 가문에 떨어졌다. 사보이 가문은 엄연한 이탈리아의 봉건영주라 할 수 있다. 이제 코트다쥐르 지역의 대부분이 프랑스가 아닌 이탈리아의 영토에 편입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후 역사는 차차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얼씨구!!!
오늘이 이번 여행에서 모처럼 이자 처음으로 아주 쾌청하고 온화한 날씨라고 온종일 칭찬을 늘어놓았더니만....... 저녁 무렵이 가까워오자 느닷없이 짙은 먹구름이 몰려들고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던 코트다쥐르의 성난 세찬 바람이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에즈 빌리지를 빠져나와 정류장에 도착했을 즈음엔 싸늘하게 추위가 엄습할 정도였다. 거기에다가 안타깝게도 니스 시내로 향하는 버스가 방금 전에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어쩐지.......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이게 다 이오공감 때문이 아닐까?
때는 바야흐로 가장 비수기인 겨울의 중간이라 거의 한 시간마다 한 대씩 있는 꼴이라는데...... 떠난 82번은 붙잡을 수가 없고, 옆 노선인 112번이라도 빨리 오기를 기대할 수밖에........ 그런 엄청난 기대로 40분 정도를 더 기다려서 어쨌거나 112번 버스에 탔다.
니스에 들어서면서 니스 전망대 아래쪽의 외곽 지역에서 버스를 내렸다. 아! 글씨...... 춥다고 하면서도 이 할망구께서 시방 여기에서 내려 숙소까지 해변 길을 좀 걷고 십대나 어쨌대나?
나에게 무슨 선택권이 있나? 든든한 빽이 있나? 쫄쫄 다라서 내릴밖에.......
우.이.씨........ 징말 추워지잖아?
해변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니스 랜드마크가 설치된 핫 플레이스에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모여 있다. 대부분 깃발을 하나씩 들거나 흔들고 있는데 ‘가만, 저게 어느 나라 국기더라?’하면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겨우 알아냈다. 이 뿌듯한 감격스런 나의 기억력.
그것은 바로 이란 국기였다.
이런 상황을 그냥 몰라라 지나칠 우리가 결코 아니다.
언어 차이로 그들의 외침을 다 알아듣거나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기꺼이 다가가 그들이 왜?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관심을 가져보기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가 아닌가?
그들 속으로 들어가 잠시 지켜보면서 나는 이 상황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근자에 간간히 뉴스를 통해 알려졌던 내용을 지금 니스에서 대중 집회를 통해 더 널리 알리려는 일종의 저항운동 내지는 인권운동의 일환인 것이다.
들고 있는 여러 개의 피켓에 ‘사라 카뎀’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녀가 이란으로 강제 연행되어 여성 인권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이란 법률에 의해 처벌받지 않도록 국제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격려를 해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이란 출신의 천재 체스 선수인 25세의 사라 카뎀은 2022년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세계 래피드&블리즈 체스 챔패언십’에 출전하면서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모습으로 경기에 임했고, 이 모습이 전 세계에 고스란히 방송매체를 통해 중계되었다. 이슬람 중에서도 정통을 자부하는 시아파 회교국가 이란의 여성이 히잡 착용을 거부한 것이다.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그녀는 ‘이란의 반정부 시위를 응원하기 위해서 였다’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녀에 앞서서 22세의 쿠르드족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교 경찰에 붙잡혀 갔고, 구류 중에 의문사 했던 사실로 이란 내에서 여성들의 히잡 착용을 거부하는 반정부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강력한 회교 율법국가인 이란은 여성들의 히잡 착용 거부운동을 이슬람 율법을 거부하는 엄중한 범법행위로 무차별 탄압을 가혹하게 시행하고 있던 차에, 차마 감추고 싶었던 국가적 치부가 사라 카뎀에 의해서 전 세계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이란 정부는 서둘러 사라 카뎀을 체포하기 위하여 경찰력을 급파했다. 그러자 대회 주체측과 국제 인권단체들은 서둘러 사라 카뎀과 일가족을 어디론가 피난 시켰다. 며칠이 지나 사라 카뎀이 스페인으로 갔으며 정식으로 스페인 정부에게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는 뉴스가 전해 졌었다.
이들 집회는 사라 카뎀의 안전을 국제 사회가 보장해 주고, 스페인 정부가 망명을 허락해 주며, 나아가 이란 여성들의 히잡 착용 거부와 인권 탄압이 중지됨과 동시에 남성과 동등한 인권적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집회였다.
우리는 짧지 않은 시간을 이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숨 쉬고 마음을 나누며 박수를 치고 성원을 보냈다. ‘저들의 바램과 열망이 모두 이루어지게 허락하소서. 아멘.’
이 글을 쓰고 있는 2023년 7월 28일....... 어제 저녁에 나는 SNS를 통해서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스페인 정부가 2023년 7월 26일 날짜로 사라 카뎀과 그녀의 일가족에 대해서 스페인 망명을 허락했다는 소식이었다.
할.렐.루.야.아.멘.
--- 다음 여행기에서 ‘코트다쥐르 소도시 여행’을 계속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