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단종 왕릉 장릉(莊陵:사적 196호)
이후 조선 19대 숙종(肅宗) 때인 1698년에 이르러서야 단종을 왕으로 복위(復位)하고 왕릉(王陵)으로 정비하면서 묘호(廟號)를 단종(端宗),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장릉 주위의 소나무들은 모두 능을 향하여 절을 하듯 굽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자아내게 한다.
매년 4월 마지막 주말에 단종문화제가 성대하게 거행되며, 특히 조선 시대 국장(國葬) 재현행사는 1천 명이 넘는 인원들이 참가하여 장엄하게 재현되는데 2009년에는 장릉을 포함한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世界遺産)으로 등재되었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청령포 광천리(廣川里) 수림지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는 노송(老松)이 있는데 유배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본 소나무라고 한다.
단종의 슬픈 종말을 보았다고 하여 ‘볼 관(觀)’, 때때로 구슬피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소리 음(音)’을 붙여 관음송(觀音松)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하송리(下松里)에 있는 수령(樹齡) 1.000년이 넘는 은행나무도 있는데 천연기념물(제7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릉 앞에 있는 영천(靈泉)은 우물인데 장릉에 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제정(祭井)으로, 평소에는 물이 잘 나오지 않다가 제례를 올리는 한식(寒食)이 되면 샘이 풍부하게 솟아 나온다고 하는 영험(靈驗)한 샘물이다.
근처에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을 비롯한 영령들에게 매년 제사를 올리는 제단인 배식단(配食壇), 제향을 올리는 정자각(丁字閣)도 있는데 한자의 고무래 정(丁)자처럼 지어진 건물이라 하여 정자각(丁字閣)이라 불리는데 흡사 영어의 티(T)자를 닮은 정자각의 모양이 이채롭다.
그리고 단종의 비석을 모신 단종비각(端宗碑閣),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도 모두 장릉 경내에 함께 있고 능(陵) 입구에는 홍살문(紅門)이 서 있다.
또, 엄흥도 정려각(嚴興道 旌閭閣)과 박충원(朴忠元)의 낙촌비각(駱村碑閣)도 함께 있는데 엄흥도 정려각은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둔 충신 엄흥도를 기리는 정려문(旌閭閣)이고 낙촌비각(駱村碑閣)은 산속에 암장(暗葬)되었던 단종의 시신(屍身)을 찾아 장릉(莊陵)에 모신 영월의 군수 박충원 비각(碑閣)이다.
(5) 단종(端宗) 죽음에 대한 야사(野史)
정사(正史)로는 세조실록(世祖實錄)에는 ‘노산군(魯山君: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고, 예절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훗날 기록된 숙종실록(肅宗實錄)에는 ‘사약(賜藥)을 가지고 온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은 차마 단종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자 하급 관원이 활 끈으로 단종의 목을 졸라 세상을 떠나보냈고 시신(屍身)은 강에 버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람들 입으로 전해지는 야사(野史)는 사뭇 다르다.
사약이 내려오기 전 유배지 청령포에서 기거하던 단종은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올 수 없었고 관원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 외부 사람들도 접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영월 호족(豪族)의 수장이며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嚴興道)는 강가에 나와 강의 흐름을 살폈는데 나뭇조각을 띄워보니 소용돌이에 휘말려 떠돌다가 얼마 후에 청령포 강가에 나뭇조각이 가서 닿아 멈추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단종을 모시는 시녀 한 명이 나와서 강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 나뭇조각을 줍는 것이 아닌가?
엄흥도는 그날 저녁 어스름 녘에 작은 뗏목을 만들어 그 위에 고기와 떡을 실어 보냈더니 시녀가 와서 냉큼 집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이따금 음식들을 실어 보내곤 한다.
사약(賜藥)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엄흥도는 너무 안타까워 밤에 몰래 배를 타고 건너가서 담장 구멍을 엿보다가 마침 담장 밖에 서성이는 시녀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