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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브루타
(신6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방법)
1. 온전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로 또 어떤 사람은 교사로 삼으셨다.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온전해 질 수 있을까? 이렇게 은사들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그분이 정말 어떤 분인지 알게 되는 것이 온전한 성도가 되게 하는 것이고 모든 은사가 있는 이유이다. 이렇게 세워진 성도는 미혹이나 잘못된 가르침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완벽함이 아니라 온전함을 추구할 뿐이다. (엡4:11~14)
2.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라나는 방법
우리는 매사에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라야한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 결국 각 지체 즉,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목사, 교사가 자신의 기능을 다 할 때 서로 연결될 수 있고 서로 도울 수 있으며, 이것이 사랑안에서 스스로 세워지고 성장하는 방법이다. (엡4:15~!6) 우리의 머리는 예슈아시다. 모든 은사자들이 예슈아께 연결되고 서로에게 시냅스가 되어줄 때 자라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것이다. 모두 머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이성적인 사람이 되야한다.
3. 예언은 분별해야 한다.
우리 안에는 가르치는 말씀도 있고 계시도 있고 방언도 있고 통역도 있고 찬송시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덕(교회, 건물..)을 세우기 위함이다. 이때 예언하는 자는 예언하는 자들이 분별하라고 말하고 있다. (분별하다의 뜻은 철저하게 분리하다. 반대하다, 구별하다, 의심하다, 판단하다 등이다.) 예언이라고 다 믿지 말고 분명 의심하고 철저하게 하나님과 분리하여 판단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어떤 은사보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있기 때문이고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14:26~33)
4 나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다.
예언을 하다보면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누구보다 자신이 계시로 많이 알고 심지어 당사자보다 더 알고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의 소리는 들으려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나와는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있다. 어린 아이에게도 성령은 함께 하시는 데도 말이다. 성경은 결코 혼자서 온전해 진다고 말하지 않고있다. 이런 자들에게 바울은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마치 그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면 그들에게 바울은 품위있게 하고 질서있게 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즉, 예의 바르게 행하고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자들은 아무에게서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꼭 주의해야할 모습니다. (고전14:36~40)
5. 지능의 차이는 시냅스 수(연결)의 차이이다
아이는 태어날 때 1,000억 개의 신경세포와 50조 개가량의 시냅스를 가지고 태어난다. 시냅스의 경우 생후 초기 몇 달 동안 1,000조개 이상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태어난 후 뇌세포의 숫자는 오히려 줄어들지만, 시냅스는 20배로 늘어난다
우리의 지능과 마음은 이런 뇌세포끼리의 연결망의 결과이다. 즉 뇌 세포끼리 시냅스를 통해 주고 받는 신경전달의 결과가 우리의 지능이고 마음이다. 그런데 이런 시냅스는 태어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해 3세까지 급격하게 팽창한다. 이렇게 무게가 늘어나는 것은 뇌세포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뇌세포에 연결망을 만드는 시냅스가 무게를 늘리는 것이다 뇌세포수는 똑같다. 단지 얼마나 연결되어있느냐이다.
뇌가 자극을 받아 활성화되어 시냅스로 뇌세포들이 많이 연결될 수록 지능이 높다. 어렸을 때 환경과 자극에 의해 시냅스가 많이 연결되면서 지능이 개발된다. 그러나 뇌의 자극이 줄어들게 되면 시냅스의 연결이 끊어지고 지능도 떨어지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뇌를 자극시켜야 시냅스가 서로 연결될수 있을까?
6 신체를 사용하는 것은 지능 지수를 높인다
어려서부터 젓가락을 사용하는 한국인은 손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지능지수가 높다. 그러나 한국의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면서 입을 다물어야 한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조용히 하라”는 말이다. 손을 어려서부터 많이 사용하여 지능지수가 높지만, 자유롭게 말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기점으로 유대인에게 현격하게 뒤처지게 된다. 우리 아이들은 중, 고등학교 때 세계 올림피아드에 나가서 1,2등을 차지하고 국제 성취도 평가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만 이후부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
반면 유대인은 손을 많이 사용하지 않아 지능지수가 우리보다 낮지만(한국IQ106/유대인IQ94)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질문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입을 많이 사용하고 고등학생 때까지 거의 두각을 나타내지 않던 유대인들이 어느 순간 아이비리그 대학에 들어가고 노벨상을 수상한다. 그 비밀은 역시 토론을 통해 두뇌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바로 하브루타에 그 비밀이 있다.
지능이 발달하기 위해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은 첫째 손, 둘째 입, 셋째 발순이다. 유대인은 몸을 사용하기 보다 두뇌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지능이 한국인보다 낮지만 입을 이용해 뇌를 개발함으로 결과적으로는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지게 된다.
7 나는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정신과 의사인 나카이 히사오 교수는 언제 환자를 퇴원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정신 건강의 기준’을 만들었다.
# 싫은 일을 자연스럽게 나중으로 미룰 수 있다
# 혼자 있을 수도 있고 둘이 있을 수도 있다
#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만나도 적당히 넘어갈 수 있다
# 꼭 해야한다는 의무감을 거절할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을 갖지 못하면 편집증, 강박증, 자폐증, 주의력결핍, 공황장애등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싫은 일을 자연스럽게 나중으로 미루지 못하고 꼭 해야한다는 부담감을 버리지 못하면 강박증이나 완벽주의자가 된다. 오히려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받아들인다. 자신에게 불만이 없으면 타인에게도 불만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도피할 가능성도 낮다.
8 단점은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상처가 있는 부모는 자신의 상처로 인해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한다. 하지만 상처는 그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오히려 삶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 상처가 곪아서 터지느냐 치료되어 오히려 더 건강해지느냐는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사함으로 배우느냐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이 필요하다(롬8:28)
부정적 자아상은 열등적 자아상, 무능한 자아상으로 부모가 아이에게 “넌 못해, 할 수 있는 게 없어, 넌 못난이야"라는 부정적 인식을 심어줌으로 갖게 된다. 반면 긍정적 자아상은 부모가 사랑으로 격려와 칭찬을 해줄 때 갖게된다.
9 비현실적 자아상은 믿음이 아닌 무속신앙이다
허상적 자아로 비현실적 자아상이 있다. 이것은 부모가 무엇이든지 허용하고 받아줄 때 형성된다. 이들은 스스로 많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크게 부풀려진 자긍심으로 미래에 대해 비현실적 기대를 가진다. 이런 사람들은 직장에 취직해도 자신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고 다른 것들을 바라본다. 미래에 대해 터무니없는 낙관론으로 일관하고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이 희생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스스로 많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과대평가하며 터무니 없이 부풀려진 자긍심으로 미래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부모의 양육 태도에서도 오지만 하나님을 이런 부모로 잘못 인식할 때도 같은 결과가 올 수 있다. 하나님께서 조건없이 축복을 주신다고 오해하면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비현실적인 기대를 할 수있다.
하지만 철저하게 현실에 바탕을 두어야한다. 희망과 비전은 높이 가질지라도 그것을 이루기 위한 출발점은 지금의 내 실력과 경험과 위치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꿈과 비전은 영원히 잡지 못하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무조건적인 허용은 아이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은 언제든지 가질 수 있다는 전능한 자아의 환상에서 유능한 자아로 옮겨가지 못하게 한다.
10. 하브루타의 시작은 쉐마이다.
신명기 말씀에 여호와를 사랑하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자녀에게 말씀을 강론하고 말씀을 기록하여 붙이는 것이다. (신6:4~9)
유대인들이 테필린으로 말씀 기도를 하고 자녀들에게 말씀을 강론하는 것은 바로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11.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방법은 무엇인가?
유대인들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당연한 의무이다. 아버지는 경제와 사회 생활에 대해 가르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자녀를 교육한다. 성경은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하라"고 명령한다. 교육의 책임을 랍비나 학교, 사회에 떠넘기지 않는다. 자녀 교육의 책임은 말씀 그대로 부모에게 있다.
또한 “부지런히 가르치며”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샤난’이다. 샤난의 뜻은 뽀족하게 하다, 마음 속에 뿌리박게 하다, 날카롭게 하다. 꿰뚫다, 찌르다등이다. 즉,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이 바로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 그것이 바로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는 방법이고 마음에 할례를 하는 방법이다.
12 말로 서로를 가르치는 예시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교육 방법을 지키는 정통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학교를 ‘예시바’라고 부른다. ‘예시바’는 앉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야샤브’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곧 예시바는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아 말로 서로를 가르치는 전통적인 교육기관을 말한다.
‘말씀을 강론하라’에서 ‘강론하라’의 어원은 ‘디베르’이다. 주로 '말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디베르는 그 뜻이 정돈하다, 정복하다, 지명하다, 명령하다, 친하게 사귀다, 파괴하다, 약속하다 등이다. 하나님의 말은 곧 약속이다. 이 단어는 그냥 말하다로 번역하기에는 정복하다, 파괴하다의 뜻이있고 친하게 사귀다의 뜻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하브루타와 같이 가르치고 토론하다는 의미가 적절해 보인다.
13 하브루타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하브루타와 관련하여 탈무드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말이 제이콥 뉴스너의 “나에게 하브루타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이다. 이 말은 논쟁을 통해 탈무드 공부를 할 수 있는 파트너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많은 유대인 학자들은 하브루타 공부의 중요성을 설명할 때 이 말을 인용한다.
The Rule 의 저자 앤드류 셔터는 유대인을 특별하게 하는 비밀은 없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유대인의 비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 유대인에게는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하나의 문화일 뿐이다. 앤드류 셔터는 ‘혀끝에서 세계가 펼쳐진다’는 말을 들으며 성장했고 이 말은 하브루타를 통해 세계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브루타를 통해 뇌를 격동시키면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사고력 증진이 가능하다. 상대방의 말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설득하기 위해 분석적 사고력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 상대의 논리를 압도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논증의 개발이 필수적이다. 상대방 논리의 허점을 극복하고 더 나은 대안과 해결책을 아울러 제시할 수 있는 종합적 사고력이 필요하다.
14 하브루타 친구는 평생지기이다
하브루타는 히브리어로 친구를 의미하는 ‘하베르’가 어원이다.
하브루타는 친구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 주고 인간 네트워크 즉, 서로 연결하여 평생지기를 만들어 준다. 만일 우리에게 평생 동안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하브루타는 그런 친구를 여러 명도 만들어 준다. 하브루타 짝은 학교에서 회당에서 예시바에서 여러 명이 생기기 때문에 아주 친한 친구가 여러 명 생기게 된다. 그리고 회당 하브루타까지 연결되면 죽을 때까지 매일 만나는 평생지기도 생기게 된다. 유대인 인간관계 네트워크(시냅스의 연결)의 핵심에 하브루타가 있다.
15 여호와의 변론에 준비하자
“하나님께서 변론하자”라고 하시는 부분이 성경 여러 군데 나온다.
이사야에서는 함께 변론하자고 하시면서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하신다. (사43:26)만약 의롭다면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여호와께서 서로 변론하자라고 하시며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결과를 경고하고 계신다. (사1:18~20) 이것은 그러한 결과가 공의임을 변론하시는 것가 같다. 또한 여호와께서 미가 선지자에게 산을 향하여 변론하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이스라엘과 변론하시리라 예언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변론을 통해 찾으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미6:1~8)
이때 정의는 히브리어로 거룩한 율법, 법률적으로 선언된 판결등의 뜻이 있다. 결국 우린 여호와의 토라로 여호와와 그날에 변론하게 될 것이다.
16 짧고 명쾌한 답변을 하셨다
예슈아께서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 대제사장 등 대립하는 사람들과 쓸모없이 긴 논쟁에 휘말리지 않으셨다. 이들은 예슈아를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교묘한 함정 질문을 하곤 했지만 예슈아께서는 짧고 명쾌한 답변으로 그들을 제압했다. 대부분의 경우 논쟁을 피하지 않으셨고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에 휘말리지도 않으셨다. 예슈아의 반대자들은 자신들이 깨닫지 못한 진리를 찾기 위해 질문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경우 짧고 명쾌한 대답은 함정에도 빠지지 않고 질문자의 입도 다물게 할 수 있다. 설명이 장황해지면 질문자는 공격적인 연속 질문을 퍼부음으로 답변자가 논리의 오류에 빠지도록 유도한다.
성경은 이들이 예슈아의 짧고 명쾌한 답변에 이견을 달지 못하고 더 대응하지 못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7 시비를 거는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셨다
예슈아께서 그의 반대자들과 가진 논쟁에서 유일하게 먼저 시작한 논쟁이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마22:42)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반대자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답했고 예슈아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마22:45)고 반문하셨다. 마태는 이 논쟁이 있고 나서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슈아의 질문과 반문이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슈아는 이전에도 질문과 반문을 자주 사용하셨다. 그들은 예슈아의 질문을 통해 그들 스스로 자신의 오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질문이나 반문은 적극적인 답변을 이끌어 내고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고 확인할 수 있게 한다.
18 바울은 토론과 논쟁의 대가였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 고린도 등을 돌면서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과 논쟁을 했으며, 법정에서 자신을 변론하기도 했다.
성경에 ‘바울이 강론했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3달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하고 권면했다. 또한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했다. (행19:8,9)
여기서 '강론하다'의 뜻은 철저하게 말하다, 토론하다, 논쟁하다, 설교하다의 뜻이다. 또한 권면하다의 뜻은 논쟁으로 확신하다, (증거나 권위에) 동의하다 등이다. 즉, 모두 설득하고 논쟁하는 하브루타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사도바울은 제자들을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날마다 하브루타를 한 것이다.
19 복음을 변론하는 것이 성도의 사명이다
논쟁에 대해 바울은 성도가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는 논쟁이 있을 때, 복음에 대해 변론하는 것이 성도의 사명이라는 말이다. (빌1:7)
변명함의 히브리어 원어 뜻은 입증하는 것이고, 변호하는 것이며 변증하는 것이다. 변증은 직관이나 경험에 의하지 않고 개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변론으로써 증명하는 방법이다 모두 법적인 용어들이다.
또한 확정함의 뜻은 확고함, 확증이며 그 어원 또한 법적인 전문 용어로 쓰이는 단어이다. 즉, 말씀을 토론할 때에는 자신의 직관이나 자신만의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여 증명해야 한다.
20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바울은 말씀을 변론하는 것이 성도들의 사명이지만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고 충고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은 결코 다투지 말아야 하며 가르치기를 잘하고 인내하고 훈계할 줄아는 온화한 사람이다. 이들이 훈계하는 이유는 당장 그 사람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회개하게 되어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딤후2:23~25)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의 뜻은 둔하고 꽉 막힌 어리석음과 도덕적으로도 불합리하며 가르침을 받지 못한 무지한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어리석인 자들과는 변론을 피하고 또한 하브루타 하는 자신이 이런 꽉막힌 어리석음과 지식이 없는 상태라면 진정한 하브루타를 할 수 없을 것이다.
21 토론에 감정이 실리면 안된다
토론은 자신의 논리로 남을 설득하는 과정이다. 토론이나 논쟁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켜 말싸움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토론과 논쟁은 해야 하지만 언쟁은 피해야 한다. 논쟁이 진정한 논쟁이 되느냐, 언쟁으로 변질되느냐는 개인적인 감정이 실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아이를 훈계하거나 매를 들 때 그것이 아이에게 약이 되느냐 독이 되느냐도 부모의 개인적 감정이 실리느냐 아니냐로 결정된다. 부단한 훈련과 노력을 통해 개인적인 감정이 토론이나 논쟁에 실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22 답을 주지 않아도 된다
빵을 먹으면서 그린버그는 아이들에게 차례차례 성경에 대한 질문을 했다. 아이들은 성경을 평소에 공부했다가 아버지가 묻는 질문에 대답을 했다.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 틀린 대답을 하면 다른 질문으로 물었다. 아이와 아버지가 계속 질문과 답변을 이어 가고 중간중간 다른 아이들이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화는 주로 아버지와 자녀가 일대일로 진행했고 그 아이가 모르면 다른 아이들이 대답하면서 하브루타로 이어졌다.
열 살 가량의 큰딸 차례가 되었을 때 아이는 뭔가를 가득 적어 놓은 종이를 꺼내 하브루타에 임했다. 아버지는 질문하고 딸은 답변을 하면서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에 자유롭게 빵이나 과일을 먹었고 딸의 답변이 틀려도 아버지는 바른 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 이렇게 답을 잘 알려주지 않으므로 자녀로 하여금 늘 궁금증을 갖게 하는 것이 교육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이와 같이 질문을 통해 지식과 지혜가 더 날카로워져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도록 돕는다. 질문의 질이 하브루타의 질을 높인다.
23 기존 질서와 권위를 의심하라
탈무드는 “가르침을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권력과 자기 자신을 부패하게 만든다”고 한다. 유대인은 가르침, 통념, 권위, 관습등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사고의 범위를 무한대로 열어 놓고 따져 묻는다.
“다르게 볼 수는 없는가?” “더 좋은 방향은 없는가?” “다른 대안은 무엇인가?”
“다르게 생각할 수는 없는가?” “과연 옳은 생각인가?”
학생들은 탈무드에 실린 힐렐이나 샤마이 같은 저명한 학자들의 관점을 이해하려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논리에 허점이 없는지 따지기 위해 공부한다. 유대인 중에 개혁적인 사상가가 많이 나오는 이유도 기존 질서나 권위를 의심하고 따져 묻는 이들의 태도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믿는 것과는 다른,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는 엉뚱한 발상에서 혁신적인 개발이나 발명이 나온다. 사고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가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성공을 가져다 준 또 다른 이유이다. 이것은 무례함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24 하브루타 어떻게 하나?
하브루타는 서로 공격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진리를 찾아간다.
랍비 루자토는 논쟁의 일곱가지 원리를 설명했다.
진술: 말하는 사람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간략하게 설명한다.
질문: 진술한 사람의 정보를 듣고 상대방이 그것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한다.
대답: 진술한 사람이 질문에 대해 답변한다.
반박: 대답에 대해 반박하거나 반대 의견을 댄다. 반박은 싸우는 것이다 날카로운 반박일수록 좋다.
증거: 원래 말한 사람이 자신의 주장에 대해 논리적으로 증거를 대고 증명한다.
갈등: 다시 증거를 댄 것들에 대해 사실이나 진실이 아닌 것들을 현명하게 찾아내어 지적한다.
해결: 함께 갈등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면서 마무리 짓는다. 해결되기 까지 앞의 단계들이 반복된다.
25 하브루타와 소크라테스 질문법의 차이점
소크라테스 질문법은 교사와 학생, 스승과 제자 사이에 주로 이루어지지만, 하브루타는 학생과 학생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기본이다. 소크라테스 질문법은 선생님이 주로 질문을 던지고 학생이 대답하는 형식이다. 하지만 하브루타는 학생들끼리 질문하고 토론, 논쟁하는 것을 중시한다.
소크라테스 질문법은 한 학생에게만 집중하여 대화할 수 있지만, 하브루타는 모든 학생이 각자 집중하여 대화할 수 있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가장 잘된 소크라테스 토론도 한 학생만이 몰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하지만 하브루타는 학생들끼리 짝을 지어 토론하므로 모두가 참여할 수 있다.
3. 소크라테스 질문법은 교사가 해답을 알고 있고, 학생은 교사에 의해 제시된 해답을 얻게 된다. 초점이 해답을 얻는 것에 맞춰지면 학생들은 과정에 중점을 두지 않고 비판적인 사고와 판단을 개발하는데 중점을 두지 않게 된다. 학생들은 독자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교사에게 의존하여 제한된 진리를 탐구하게 된다. 반면 하브루타는 정답을 도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비판적인 사고력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하브루타는 어느 한 가지로 의견이 모아지는 것을 경계한다. 학생들 각자의 의견이 발전하고 확대되고 깊어지는 데 초점을 둔다.
하브루타는 토론을 통해 각 학생들이 보다 깊은 이해에 도달하고 아이디어를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방법과 서로의 아이디어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는 방법을 배우게 한다.
26 일상 하브루타로 항상 강론할 수 있다
일상 하브루타는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모든 소재가 주제가 된다. 길을 가다가 교통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보고 자녀와 하브루타를 할 수 있다. 공공장소에서 크게 떠드는 사람을 보고도 토론할 수 있다. 책을 읽고 그 내용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할 수 있다. 신문을 읽다가도 질문하고 대화하고 논쟁할 수 있다. 어디서든, 언제든, 어떤 주제든 하브루타할 수 있다. 수다의 수준을 조금만 높이면 하브루타가 된다. 주제를 가지고 수다를 떨면 공부가 된다. 모든 주제는 곧 하나님의 가치관인 말씀과 연결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함으로 자녀에게 언제든지 말씀을 강론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