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식이 오히려 주를 바라보게 하는 신앙의 필요조건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하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으로 아직도 세상과 하나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나 아직도 두 가지 의식 속에 살고 있다. 우리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는 반면에 자기 의식, 세상 의식, 육신 의식(Flesh consciousness)을 갖고 있다.
자기를 의식하거나 세상을 의식하는 그 자체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고(세상에 속하지는 않고 - 요 17:13, 16), 육신에 거하고(그러나 육신의 것은 아니다 – 갈 5:24), 자기 속에 살고 있다(그러나 자기의 부속물은 아니다 – 갈 2:20). 우리는 깨어 있는 시간 중 큰 부분을 세상 일에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들이며, 그나마도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식의 앞뜰에 모시기보다는 뒤뜰에 모시고 지내기가 일쑤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슬프게 해드리는 일이나 태도 가운데로 의식적으로 끌려들어 갈 때 비로소 죄가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분단된 세상에 있는 동안은 오직 그리스도만 의식하는 것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자아도 의식해야 된다. 두말할 여지도 없이 이것은 자기의 거처를 잘 아는 새롭게 된 자아를 말한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자기를 의식하는 자아다. 그리고 그것은 주위로부터 오는 모든 자극에 대하여 예민하다. 그러므로 육신적으로 되면 시험을 받을 수 있고, 영적으로 되면 그리스도의 지배하심을 받을 수 있는 두 가지 면을 다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고 있다”와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있다”라고 말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기와 분리된 인간에게 준 이름은 ‘육신’(창 6:3)이다. 우리는 모두 육신이다. 구세주께서도 우리와 함께 거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을 때,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 우리가 몸으로 부활하여 최종적으로 승천하신 머리와 연합되기까지는 어떤 사람이라도 육신이 안 될 수가 없다.
육신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식하고 그리스도를 의식하지 않으면 자아의식을 갖는다. 그것은 반드시 악한 것이라고만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도 “육신으로 계실 때” 하나가 되었던 아버지께로부터 떨어진 자기 인성을 의식하셨던 것이다(요 5:19).
육체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욕심이 악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섬기는 입장에 들어가지 않고 주장하는 입장에 들어가게 될 때 비로소 악한 것이 된다. 자아의식이나 육체를 의식하는 것은 타락한 인류가 계속적인 믿음의 생활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필요조건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로 우리의 무능한 상태를 바라보지 않고 계속 예수님을 바라보게 강권(히 12:2)하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했을 때 육체는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실패하는 순간 육체는 악한 것들이 되어 “육신과 마음의 욕망”이 우리를 사로잡아버리고, 주관하며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욕심이 되며, 우리는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노만 그럽,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생명의말씀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