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 6
김 상 립
사람이 살다 보면 허공에 대고라도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어쨌던 그런 유의 고백이 적을수록 좋겠지만, 이 놈의 인생은 어찌되어 먹었는지 끝이 없는 것 같다. 년 전에 ‘고백 - 5’라는 글을 써놓고 이제는 내가 늙어 빠지기도 했으니, 더 이상은 쓸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여기 또 ‘고백 - 6’을 쓰려니 계면쩍고 민망하다.
나는 40년 넘게 수필을 써왔다. 또 20년 이상을 한국화에 심취했었고, 권법(拳法)과 검술(劍術)수련에도 동일한 세월을 바쳤다. 합창 단에 10년쯤 몸 담았고, 뒤늦게 시작한 산행도 그랬다. 내가 모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내 몸 치장에는 비교적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특히 외부행사가 있을 경우에는 정성껏 꾸며 입고, 등신대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는 일이 즐거움이었으니 취미수준은 되었지 싶다. 얼마 남지 않은 황혼 길, 취미생활 하나만 제대로 가져도 다행일 터인데, 나는 몇 가지를 함께하고 있으니 늘 감사 하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런데 2021년 7월, 갑작스럽게 닥친 혈액이상으로 급속히 체중이 빠졌고, 병원에서 진단받고 항암제를 먹기 시작하자 몸 무게가 확 줄면서, 힘도 빠지고 피로감도 빨리 찾아 왔다.
바깥출입을 하려면 만남의 성격에 따라 옷을 바꾸어 입어야 하는 데, 모양이나 색상은 고사하고 몸에 맞는 옷이 한 벌도 없다. 수선을 하려 해도 손댈 수 없을 만치 몸 피가 줄어버리고 말았으니 참 난감하다. 늙은 이가 새 옷을 사 입기도 부담 서러워 아무렇게나 적당히 걸치고 나가지만, 지난날을 떠올리면 자존심도 상하고 출타의 기쁨도 슬그머니 사라진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몸 상태는 더 좋지 않았다. 새벽 수련을 위해서는 주먹이나 검을 뻗고 휘두르기도 해야 하는데, 주먹을 내미는 기력과 검을 높이 들어 올릴 힘이 달린다. 체력이 돌아오기 전에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머리맡에 놓여 잠자는 검을 바라보거나, 내가 공연한 권법의 동 영상을 보게 되면 무척 허무하다.
그러다 보니 몸을 많이 써야 하는 산행 역시 불가였다. 답답한 것은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산을 멀리서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가을이 왔으니 단풍놀이라도 가자든지,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봄 꽃은 꼭 봐야 한다고 옆에서 대수롭지 않게 부추긴다. 마음은 간절해도 감히 따라 나서지를 못하는 내 심사를 아무도 깊이 헤아려주지 않는다. 또 내가 한국화를 그리려 암만 애를 써봐도 세밀한 터치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을 그대로 출품을 할 수가 없다. 무슨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싫어서 작품도 내지 않고 묵묵 부답으로 지낸다. 혹여 세월이 더 가면 훈련을 통해 무슨 좋은 방법이 나올지는 몰라도, 내 나이가 여유 있게 습작할 처지가 못되니 그만 손을 든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주 숨이 가빠져 호흡이 불안정하니 즐겨 부르던 노래마저 부르지 않는다. 나이 들어 시작한 노래공부는 나에게 밝은 에너지도 주었고, 기쁨과 행복도 주었는데 사정이 이러하니, 보유한 여러 권의 악보와 가사 집, 이론서 등을 구석으로 치워두고 잊으려 애쓰고 있다.
이처럼 오랫동안 내 분신처럼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하나씩 떠나 보냈으니 마음에 상처가 난다. 제가 좋아하는 어떤 일이라도 건강상 이유 등으로 갑자기 멈추게 되면, 충격이 더 크다는 사실을 절실 하게 깨닫는다. 돌아보면 나는 80세에 이르기까지 큰 병원 가서 치료받은 적이 없었다. 그만큼 건강했다는 얘기일 터이다. 그런데 81세에 들어서자 돌연 난치병이 나를 덮친 것이다. 여러 가지 검사를 거쳤지만 아직도 정확한 원인을 모른다. 건강할 때 건강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말은 귀가 아프도록 들었지만,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특별하게 신경을 쓰지 않은 잘 못도 있을 터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 건강 앞에서 지극히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뒤늦은 각성에 고개를 숙인다. 누구라도 건강을 잃으면 평소 좋아했던 일 마저 놓치게 되는 아픔을 맛보게 될 것이니, 특별히 유념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글 쓰는 것 하나뿐이다. 그런데 작년(2023) 여름에 혈액관계로 오른 팔의 혈관이 막혀 급히 수술을 하고 1달을 입원해 있었는데, 팔이 퉁퉁 부어 마치 나무 기둥 하나 붙여놓은 것 같았다. 팔을 못쓰니 씻는 것은 고사하고 밥 먹는 것, 화장실 가는 것도 어려워졌다. 평소 수필은 오랫동안 내 벗이요 즐거움이었는데, 이제 이마저 떠나 보내야 할 판이라 기가 막혔다. ‘이러다 모두를 잃겠다.’ 하는 절망감에 이를 악물고 병상위에 노트 북을 펴 놓고, 왼손 모지 하나로 자판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축 늘어져 있는 팔은 순간 순간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파오고, 허리조차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반복되는데, 왼손 하나만 사용하여 글을 쓴다는 게 결코 쉽지가 않았다. ‘에이, 그만두자. 내려놓으면 그뿐인데’ 싶어 몇 번이나 포기하려다가, ‘아니다. 여기서 지면 수필만이 아니고 내 삶도 끝난다’ 하는 각오로 이를 악물고 밀어붙였다.
다행히 진행 속도는 늦었지만 끈질기게 버틴 결과 보름 만에 짧은 작품 하나를 건졌다. 고통이 심해 글 쓰는 즐거움은 맛 볼 수 없어도, 숙달되면 이런 방식으로도 수필쓰기가 가능 하겠구나 싶으니 눈물 이 왈칵 쏟아 졌다. 다시 희망이 생긴 것이다. 지금은 오른 손을 이용해서 글도 조금씩 쓰지만, 팔이 자주 저리고 아파 잠시 쓰다가 주무르고, 또 쓰다가 쉬고 한다. 그래도 글 쓰기는 시시각각 내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느끼게 해주니 참 고맙다. 이제는 수필을 쓰고 있으면 단전 아래쪽으로부터 따뜻한 기운이 돌아 온 몸으로 퍼져나가니 정신이 한결 맑아지는 느낌이다. 나는 수필과 운명 적으로 만난 동행이라 믿고 끝까지 함께 가기로 굳게 약속한다. 순명(順命)하고 살 수 밖에 달리 방법이 없을성싶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랴? (2024. 2)
첫댓글 이 작품을 제가 고교 시절에 본 영화 "마이웨이"에 버금가는 수작으로 평합니다.
힘내라고 외치는 관중들 속에 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힘내세요!
힘내세요!
끝까지 힘 내세요!
회장님 용기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밤 늦은 시간에 카페에 들어와 남편선생님 글을 만나니 무척 반가웠습니다. 한 줄 한 줄 읽어 가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입니다. 한편으론 아직 세상 무서운 걸 모르는 생속인 제가 잠시 숙연해 집니다. 하루 빨리 건강 회복하시길 기도 올립니다. 그리고 힘 내십시오.
고맙습니다. 걱정주시니.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읽는 것이며,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합니다.
'고백'이라는 제목에서처럼 진솔한 자기 고백이 울림이 컸습니다.
김 선생님, 하루속히 병마를 훨훨 털고 일어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곽선생님.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모쪼록 강녕하십시요.
수필에 대한 사랑이 절절합니다. 선생님 글을 보면서 늘 반성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게 남은 거라곤 수필밖에 없으니 자연히 더 절실해 지는가 봅니다.
선생님, 대단한 정신력입니다. 수필가 협회에 남다른 애정으로 관심을 두셨는데 그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열심히 사신 흔적이 고백 6에 잘 나타나 있어서 수필이 참 좋은 공부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든든한 모습으로 속히 회복되시기를 기도 하겠습니다.
박선생님 고맙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죽게되지만 죽음으로 가까이 가는 도정에서는 생명을 가진 많은 것들로부터 상처를 받게됩니다. 그래서 가까운 산 사람에게 정떼기
환상이나 꿈도 주고요.
끝까지 함께할 기호품이
있으면 제일 좋다는 생각을 하는 요즈음 입니다.
취미생활은 제가 스스로
버리지 않는한 그가 떠나거나 배신하지는 않으니까요.
큰 선생님은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 힘이 됩니다. 후배들에게 롤모델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남평선생님께서 老와 病이란 친구와 힘겹게 함께 하신다는 소식에 가슴이 먹먹합니다.
위로와 존경의 말씀을 드립니다.
부디 건강을 회복하셔서 두 녀석을 뿌리치시기를 부활절 아침에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조이섭선생님 걱정끼쳐 미안합니다. 강녕하십시오.
상립 선생님의 글을 대하니 마음이 울적합니다. 저도 팔십을 넘긴 토끼로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문우를 만나는 걸 좋아해서 문학기행은 빠지지 않고 다녔는데, 이제는 마음뿐입니다. 며칠 뒤에 수필가 모임에 오라는데 못 갈 것 같습니다. 저는 어지럼증으로 운전을 못하고 있습니다. 정신이 맑을 때 나갔다가 어지럼증이 도져서 남에게 폐를 끼칠가 조심하게 됩니다. 밥은 잘 먹고 살이 쪄서 남 보기에는 멀쩡합니다. 그래서 정신이 맑을 때 책도 읽고 글적여봅니다. 내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상립 선생님 쾌차하시길 빕니다.
남평선생님, 병이 그리 깊은 줄 몰랐습니다. 고통을 견뎌내시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어떤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먹먹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참으로 잘 견뎌오신 모습이 제게는 큰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인생 수업>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다룬 책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즐겁게 살 것을';이었습니다. 더 열심히 살 것을 후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남평선생님께서는 수필에다 즐겁게 열정을 쏟으셨니 성공 인생입니다. 끝까지 수필을 즐기는 삶 되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