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2월 16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요단강 도하 준비
수1:10~18
<옛날 얘기>
저희가 어린 시절에는 옛날 얘기를 좋아했습니다. 선생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시는
옛날 얘기를 즐겨들었습니다.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옛날 얘기 해달라고 보챕니다. 그
러면 어르신들이 가끔, “옛날 얘기 너무 좋아하면 나중에 가난하게 산다.” 하십니다.
왜 옛날 얘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하셨을까?
나중에 커서 알게 됩니다.
들려 줄 이야기가 바닥이 났을 때, 그렇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옛날 얘기는, 사실 허황됩니다. 비현실적입니다.
흥부놀부가 그렇고, 장화홍련전, 심청전, 콩쥐팥쥐 얘기가 다 그렇습니다.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하는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비현실적이고, 허황된 얘기에 깊이 빠지다보면, 그 아이가 자라서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
지 못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됩니까? 쉽게 말해서 사기꾼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사기꾼은 결국 쇠고랑을 찹니다.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얘기
너무 밝히면 가난해진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왜 어린 시절에는 허풍스럽고, 비현실적인 결말에 귀가 솔깃합니까?
어린이만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은 일확천금을 기대합니다. 늘 대박을 꿈꿉니다. 허황된 꿈입니다.
왜 인간은 이런 비현실적인 꿈을 꿀까요?
“왜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 이렇게 허풍스런 기대감을 심어주셨을까?”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신앙 좋은 사람은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심어주었겠느냐? 인간이 타락해서 그런 것이지!”
물론, 수고는 하지 않고, 좋은 열매만 바라는 마음은 ‘타락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옛날얘기에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섭리입니다.
왜냐면,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경이 옛날이야기 아닙니까?
성경은 대단히 오래된 옛날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옛날이야기에 전혀 흥미를 못 느낀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듣
지 못하면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도 틀림없는 옛날얘깁니다. 여호수아는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사람입니다.
<본문 스토리 - 만나의 유효기간>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죽었습니다.
모세가 하던 일을 이제 여호수아가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용맹스러웠습니다.
여호수아는 자기가 지도자가 되어서, 뭐라고 합니까?
앞으로 사흘 안에 요단강을 건너겠다고 큰소리 쳤습니다.
이때 요단강은 물이 불어서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합니다. 그리고 강을 건널 배 한 척도 없습니다. 사
공도 없고, 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자는 물론, 자재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흘 안에 건너겠다.” 황당하
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무엇을 준비하라고 합니까?
『양식을 준비하라(11절)』 그럽니다.
이 말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먹고 있는 음식은 ‘만나’입니다. 이 만나는 매
일 아침 이슬 내리듯이 풀밭에 좁쌀처럼 널려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긁어모으면 됩니다. 그것이
양식입니다. 그런데 이 만나는 그날 하루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욕심을 내서 많이 모아봤자, 그 이튿
날이 되면 곰팡이가 슬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신선한 만나가 마당에 내리는 데, 뭐 하러 이틀 치를 모아요? 단지 안식일 전날만은
이틀 치를 모읍니다. 이때만은 이틀을 두고 먹어도 만나가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만나의 유
효기간은 하루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이틀입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사흘까
지 보관하고 먹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뭐라고 합니까?
“양식을 준비하라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간다.” 이렇게 말합니다.
사흘 치를 거두라는 것입니다. 황당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백성들이 누구하나 불평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
입니다. 대단히 재미있는 ‘옛날이야기’입니다.
모세 시절, ‘만나’의 유효기간은 최장 ‘이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만나의 유효기간을 ‘사흘’로 연장합니다. 대단하지요?
<본문 스토리 - 두 지파 반의 순종>
본문의 두 번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요단강 동편에 거처를 정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열 두 지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열 둘 중에서 유독 ‘요셉지파’가 둘로 늘
어납니다. 요셉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이 두 아들이 각각 지파를
구성합니다. ‘므낫세 지파’ ‘에브라임 지파’ 그러면 모두 몇 지파가 됩니까? ···13 지파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헷갈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몇 지파가 되었습니까? ··· 열 세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땅을 나
눌 때, 한 지파에게는 땅을 분배하지 않습니다. 어떤 지파입니까? 셋째 아들인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는 제사장 직임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전을 관리하고, 제사를 담당하는 거
룩한 임무를 맡는 대신,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기본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헷갈리게 하는 대목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12절)『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말하여 이르되』그랬습
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첫째 아들입니다. 갓은 일곱째 아들입니다. 각각 한 지파를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 반 지파 가 나옵니다. 므낫세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요셉의 첫째 아들입니다.
그의 동생은 ‘에브라임’입니다. 이들 두 형제가 각각 한 지파를 이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므낫세 반 지파 라니 무슨 말입니까? 므낫세 지파 중에서 절반이라는 뜻입니다.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 그러니까 두 지파 하고도 1/2지파입니다.
이들이 어쨌다는 말입니까?
이들은 모세가 죽기 전에, 그러니까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요단강 동쪽에 머물러 있을 때, 요단 동
편 땅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청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 요단강 건
너편 뿐 아니라, 이곳도 해당된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기업을 정하고 살고 싶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허락합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요단강을 동편 땅에 기업을 정해라” 그래서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강 동쪽에 터를 잡았습니다.
그러면 요단강 서편에 들어가서 땅을 차지해야 하는 지파는 모두 몇이 남았습니까?
수수께끼입니다.
모두 열 세 지파입니다. 그런데, 레위지파는 땅을 갖지 않습니다. 결국 열 두 지파가 땅을 분배받아
야 합니다. 그런데, 두 지파 반이 요단 동편(트랜스 요르단)에 터를 잡았습니다. 그러면 요단강을 건너
가서 터를 잡아야 할 지파는요? ‘아홉 지파 반’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도 자꾸 헷갈립니다.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모세가 그곳에 살던 ‘아모리 족속’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전
쟁에서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두 나라를 격파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두 지파와 반 지파가 일찌감
치 차지하고 들어앉았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전쟁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홉 지파 반은 요단강을 건너가서 전쟁을 해야 합니다. 거기에 살고 있는 토착민들을 물리
치고, 그 땅을 나눠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여호수아라면 어떻게 전략을 짜겠습니까?
요단강을 건너는데, 어떤 지파의 용사들을 선봉에 세우겠습니까?
여호수아는 이미 요단 동편에 자리 잡고 안정을 취한 두 지파 반에게 그 임무를 부여합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기에, 아직 땅이 없는 지파를 내세워야 용맹스럽게 선봉에 설 것 같은데, 여호수
아는 반대로 합니다.
(14절)『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되』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 가라고 합니다.
전쟁을 할 때 선봉에 서면 어떻게 됩니까? 가장 위험합니다. 총알받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섣불리 선봉에 서려고 하지 않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들을 선봉에 세
웁니다. 그러자 이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반발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순종합니다.
(16절)『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
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어때요? 옛날얘기. 별로 재미없습니까?
옛날 얘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이런 경우는 틀린 얘깁니다.
성경에 나오는 옛날얘기를 좋아해야 복을 받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옛날얘기를 즐겨 들어야 부자로 잘 삽니다. 할렐루야~
“옛날얘기를 즐겨 들읍시다. 옛날 얘기를 좋아합시다.”
“재밌잖아요?”
여호수아가 ‘만나’의 유효기간을 40년 만에 최대 이틀에서 사흘로 늘렸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선봉에 세울 용사를, 헝그리 정신에 입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안정을 얻은 지
파 사람들을 선발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을까요?
처음으로 만나는 사흘을 먹어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가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하나님의 지도력에 대한 순종>
덜 재미있다면, 이 이야기 속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옛날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백성인가?’ 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 옛날얘기 속에는 ‘하나님 백성들의 정체성’이 스며 있습니다.
본문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 백성들의 정체성,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도력에 대한 철저한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 그 어떤 이유도 달지 않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경륜을 펴시기 위해서 사람을 세워서 쓰십니다.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셔서 지난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지도력은, 모세를 이어서 여호수아에게로 넘겨집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성도들의 정체성입니다.
여호수아가 뜬금없이 “만나 사흘 분을 모아라” 했을 때,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순종합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데, 맨 앞 선봉대로 두 지파 반을 지명했을 때, 이들은 순종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입니다.
(예화) 지난 설 날, 저희 형제들이 부천에 사시는 큰 형님 댁으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둘째 형님 내외
가, 섬기는 교회 담임 목사님 자랑에 열을 올립니다. 형님이 한 가지를 자랑하니까, 형수님이 또 덩달
아 자랑거리를 추가합니다. 그 모습이 보기에 어떻습니까? ··· 참 좋았습니다.
전주에서도 전도를 하다보면, 신실한 성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어떻게 신실한지 압니까? 자
기 교회 자랑, 자기 교회 목사님 자랑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면 압니다.
여러분들은 온고을교회가 자랑스럽습니까?
‘목사는 자랑스럽지는 못하더라도, 교회는 자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도력이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옮겨졌습니다.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지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한 성도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오늘날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목회자들에게 이관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하는 임무를 띤 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꼭 저에게 순종하라고 말씀드리는 것 같아 쑥스럽습니다.”
어쨌든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백성은 그 지도자에게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갑니다.
<지도력의 근거>
그러면 지도자는 무조건 명령만 하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지도력이 어디로부터 자기에 왔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말할 때마다 모세를 이야기합니다.
(13절)『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14절)『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15절b)『~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해 돋는 곳으로 돌아와서~』
지도자는 철저하게 자기의 사견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자기 멋대로 만나 “사흘 치를 모아라” 그럽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권위를 세울 수 있습니다.
<신앙의 절정에서 건너는 요단강>
요단강을 건너는 일이 어디 보통일입니까?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을 오늘날 ‘구원을 받은 일’에 견주기도 합니다.
“저 사람이 예수 믿는다고는 하는데, 요단강을 건넌 사람이냐? 못 건넌 사람이냐?”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 신자도 많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요단강을 건넌 믿음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믿음이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가 언제냐?
바로 지금입니다. 여호수아의 지도력으로 요단강을 건넌 사건이 신앙의 정점입니다.
온 백성이 혼연일체가 되었습니다. 단 한 사람도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의 지도력에 대해 티끌만한 의심이 없습니다.
여호수아도 성령에 충만합니다. 백성들도 그렇습니다.
특히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의 고백을 보십시오.
(17~18절)『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
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누구든지 당
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
참 아름답습니다. 이 순종이 얼마나 귀합니까?
백성들의 여호수아를 위한 기도가 얼마나 신실합니까?
이렇게 순종하고 이렇게 기도하는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클라이막스에 이른 상태에서 요단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맺음>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어린 시절 옛날얘기를 즐겨 듣던 동심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듣고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섭리하시고,
지도자는 어떤 지도력으로 성도들을 인도하고,
성도들은 어떤 믿음으로, 어떻게 순종하는지 깨달으면서, 성경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