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45. 구산선문의 형성
중국 남종선 계승해 독자적 한국선 꽃 피워
나말여초 왕위쟁탈전 심화…귀족사회는 부패 심각
화엄종계 스님들 唐서 禪 공부…귀국 후 산중 거처
신라의 불교계는 삼국통일 전에는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내려 준 원광법사와 황룡사 9층석탑을 건립하고 이어 통도사의 계단을 세운 자장율사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이후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원효와 의상에 의하여 신라불교는 찬란한 꽃을 피워 그 영향이 동아시아 전반에 미치게 된다.
<사진> 가지산문 개산조인 도의선사 부도탑
신라는 하대에 이르러 중앙귀족의 왕위쟁탈전과 귀족사회가 사치와 부패에 빠져들면서 통치력이 붕괴되고 지방분권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장보고에 의하여 청해진이 설치되었으며(828), 육두품과 지방의 호족세력이 새로운 신진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또 견훤과 궁예가 각각 후백제(892)와 후고구려(895, 태봉.마진)를 세워 후삼국의 시기가 도래하였다. 또한 북쪽에 발해가 있어 남북국시대라고 볼 수도 있다. 궁예의 밑에 있던 왕건은 918년 고려를 세운 후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여 신라와 후백제를 병합하고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이어 광종 대에 이르러 드디어 고려 왕권이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중국의 선(禪)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한 시기가 바로 이 때이다. 장보고의 해상세력에 힘입어 많은 스님들이 중국으로 들어가 유학하였다. 주로 화엄종 계열의 스님들이 중국에 들어가서는 당시 유행하던 선(禪)에 심취하여, 대표적인 선사들을 찾아 선법을 전해 받고 귀국하게 된다. 국제적인 안목과 철저한 선수행을 겸비한 이들이 귀국하여서는 중앙 귀족과 결탁되어 있던 교종 세력과 달리 지방의 깊은 산속에 자리 잡게 된다. 경주와 멀리 떨어진 호남의 지리산 자락, 강원도 태백산 등을 중심으로 호족세력의 지지를 얻으면서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구산선문의 형성 시기에 대하여 학계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상존하고 있다. 대체로 보조 지눌 이후부터 나말여초에 형성된 여러 산문 중 대표적인 9개의 산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구산선문은 고려 후기에 이르면 보각 일연에서 태고 보우로 이어지는 가지산문과 송광사 16국사로 이어지는 사굴산문 등 두 산문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희양산문의 약간의 활동 말고는 기타 산문의 활동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사진> 굴산산문인 굴산사의 당간지주
구산선문이 형성되기 이전에도 신라에 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라에 선법을 가장 먼저 전해온 이는 법랑(法郞)이라 한다. 언제 당에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 선종 4조인 도신(道信)에게 법을 배워 돌아왔으며, 진덕왕대(632~647)대에 귀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지 제자 신행(704~779)에게 법을 전했다는 것만 전해진다. 또 신행은 북종 신수(神秀)의 고제(高弟)인 보적(普寂)의 문인 지공(志空)에게서 법을 전해 왔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원효의 <금강삼매경론>과 <대승기신론소>에는 선(禪)에 대한 분명한 내용이 나타나 있어서, 중국의 선종 형성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는 주장도 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또한 신라의 왕자 출신으로 성덕왕 37년(728) 당나라에 건너가 사천 정중사에 머물며 선법을 크게 떨쳤던 정중 무상의 존재도 구산선문의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정중종이 그것이며, 마조 도일과 규봉 종밀이 무상에게서 법을 받았다고 전해져서 신라의 유학승들이 마조의 제자들을 찾아간 데는 무상과의 관련성을 무시할 수가 없다.
또 하나 중국으로부터 선종이 우리나라로 옮아오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회창법난이다. 당 무종의 재위기인 회창(會昌) 원년에서 5년 사이(841~845년)에 순차적으로 진행된 폐불 사건은 중국의 불교계가 대대적인 탄압으로 종단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으며, 외국의 유학승들도 모두 귀국하게 하는 조처가 내려진 것이다.
‘산문(山門)’의 형성에 대하여도 구분해야 할 문제가 있다. 흔히 가지산문의 개산조로 명적 도의(明寂道義)를 말하나, 실질적으로 가지산문을 형성하여 개당설법을 하고 제자를 받아 활동한 것은 3대 째인 보조 체징에 와서이다. 결국 가지산문의 실질적인 개산자는 체징이라 할 수 있다. 도의가 귀국한 연도가 821년이며, 체징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보림사를 세운 연도는 840년이니 이 사이에 19년의 차이가 있다.
<사진> 성주산문의 낭혜화상비
일반적으로 구산선문과 그 개산조(개조)가 분명히 알려진 것은 고려 후기의 것으로 보이는 <선문조사예참문(禪門祖師禮懺文)>에 근거한 것이다. 여기에는 ① 가지산문 도의국사 ② 사굴산문 범일국사 ③ 사자산문 철감(도윤)국사 ④ 성주산문 무염국사 ⑤ 봉림산문 현욱국사 ⑥ 희양산문 도헌국사 ⑦ 동리산문 혜철국사 ⑧ 수미산문 이엄국사 ⑨ 실상산문 홍척국사 등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산문의 이름에 맞게 실질적으로 개산한 순서와 개산조를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실상산문, (남원)실상사, 홍척, 828 ② 동리산문, (곡성)태안사, 혜철, 839 ③ 가지산문, (장흥)보림사, 체징, 840 ④ 성주산문, (보령)성주사, 무염, 845 ⑤ 사굴산문, (강릉)굴산사, 범일, 847 ⑥ 사자산문, (영월)흥녕사(현 법흥사), 절중, 885~886년 ⑦ 봉림산문, (창원)봉림사, 심희 900년경 ⑧ 수미산문, (해주)광조사, 이엄, 932 ⑨ 희양산문, (문경)봉암사, 긍양, 935.
개산조는 당대 최고 지식인 추앙 받아
선종사에서 구산선문 위상 재정립 필요
개조와 개산조가 불일치한 산문은 가지산문(도의, 체징)과 사자산문(도윤, 절중) 봉림산문(현욱, 심희), 희양산문(도헌, 긍양) 등 네 산문이나 된다. 이렇게 개조와 개산조가 불일치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게 보인다. 중국 당나라 유학 이후 귀국해 자신이 직접 선법을 펴기도 했고 제자 대에 이르러 서야 활동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구산선문을 일군 선사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당나라에 들어가 만당(晩唐)의 찬란한 문화와 사상을 흡수하였다. 이들의 평균 수명은 73.4세이며, 평균 체류기간은 약 20년이나 되며, 입당률이 74%나 된다. 달마와 혜능의 선법을 전한 조사들을 기록하고 있는 <경덕전등록>과 <조당집>에도 많은 이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화엄사상은 물론 유교와 도교에도 밝았던 이들은 당나라의 정세변화를 읽고 후삼국과 고려 건국기의 한국사회의 정국을 주도했던 외교관이자 종교지도자였으며, 최고의 지식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이들 개산조들은 주로 남종선의 마조선사의 제자들의 선사상을 들여왔지만, 그것이 각 산문별로 고수된 것은 아니었다. 9세기의 유학승들이 주로 마조계의 법을 이어 왔다면 10세기의 유학승들은 주로 석두계의 법을 받아오고 있어서, 중국 선종의 지부(支部)가 아닌 구산선문의 독자적인 선풍을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먼저 유학승들이 중국으로부터 법을 받아온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가지산문 도의(마조계 서당 지장, 귀국 년도 821), 가지산문 체징(마조계?, 840), 가지산문 형미(석두계 운거 도응, 925), 실상산문 홍척(마조계 서당 지장, 828 前), 사굴산문 범일(마조계 염관 제안, 847), 사굴산문 행적(석두계 석산 경저, 885), 동리산문 혜철(마조계 서당 지장, 839), 동리산문 경보(석두계 소산 광인, 921), 성주산문 무염(마조계 마곡 보철, 845), 성주산문 대통(마조계 앙산 혜적, 866), 성주산문 현휘(석두계 구봉 도건, 924), 성주산문 여염(석두계 운거 도응, 909), 사자산문 도윤(마조계 남전 보원, 847), 봉림산문 현욱(마조계 장경 회해, 837), 봉림산문 찬유(석두계 투자 대동, 921), 수미산문 이엄(석두계 운거 도응, 911), 희양산문 긍양(석두계 곡산 도연, 924).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구산선문이란 조계 혜능의 남종선 사상을 계승하여 나말여초의 시기에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을 보인 한국의 선종이라고 볼 수 있다. 혜능에게 있어 ‘선(禪)’이란 ‘무념(無念)’을 종(宗)으로 삼고, ‘무상(無相)을 본체(體)로 삼고, ‘무주(無住)’를 근본(本)으로 삼는 마음 수행이다. 그러기에 ‘자성삼학(自性三學)’을 말하는 것이다. 즉 진여자성을 간직하고 있는 부처와 같은 존재로서 인간을 새롭게 정의하고 ‘돈오’, ‘무념’, ‘무상’, ‘무주’, ‘자성삼학’ 등의 실천을 강조한 것이 혜능의 남종선이다.
이러한 조계 혜능의 조사선을 중국에 뿌리내린 것은 마조 도일과 석두 희천이다. 9세기 마조선이 풍미하였다면 10세기에는 석두선이 더 중국에서 활약하였다. 구산선문의 선사들은 이 같은 변화의 흐름에 동참하였으며, 누구의 선맥을 강조하지도 않았다. 다만 조계 혜능의 남종선 종지를 따라 중국에서 마조와 석두가 선풍을 드날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해동에서 독자적인 선풍을 드날렸던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 선종사에서 구산선문의 위상을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구산선문과 관련된 사찰에 남아있는 불상, 부도탑, 부도비 등은 모두 국보와 보물들로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강릉 굴산사지의 거대한 당간지주,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상, 성주사지의 낭혜화상(무염) 백월보광탑비, 쌍봉사 철감선사탑 등 당대의 구산선문의 위풍을 알 수 있는 유물들이 산재해 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최치원이 사산비명을 남기고 있으니, 한국선의 시원인 구산선문에 불자들의 남다른 관심이 요망된다고 하겠다.
김 방 룡 / 충남대 철학과 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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