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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대접하라(마 7:12)
본 구절은 참 유명한 성경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가리켜서 소위 '황금률'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중에서 가장 핵심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AD 20년경에 살았던 유명한 힐렐이라는 랍비에게 어느 이방인이 찾아와서 "내가 한쪽 다리로 서 있는 동안 율법 전체를 한마디로 가르쳐 주면 유대교인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힐렐이 "당신이 싫어하는 일을 당신도 남에게 하지 말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감동받아 이 사람이 유대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토비아스라는 사람은 네가 미워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고 말했고 에픽테토스라는 사람은 네가 원치 않는 고난을 남에게도 주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부정적인 면을 강조했지만 예수님은 적극적인 가르침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이 맨 앞에 있는 '그러므로'라는 부사입니다.
그 뜻은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너무 많으니 그러므로 너희도 이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대접받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기본적인 심성입니다. 대접을 받으면 좋아하고 소홀하면 욕하고 비난하고 무시한다고 화를 냅니다. 이것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얻으러 와서 천원,이천원주면 고맙다고 인사하고 가지만 5백원 주면 누굴 거지로 아느냐고 따집니다. 이처럼 누구나 대접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자기의 위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접의 문제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본적 관계입니다. 이제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좀더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 이웃을 대접의 대상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있는 중요한 뜻은 참된 신앙이란 이웃을 비판과 정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사랑과 섬김의 대상, 즉 대접하는 대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웃이라는 말속에는 남편도 있을 수 있고 아내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가까운 사람도, 먼 사람도, 나와 별 상관이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하튼 이웃을 만날 때는 모두가 섬김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는 계급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제가 목사라는 계급으로 여러분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집사라는 계급으로 여러분들이 서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한 형제, 한 자매로 만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적 호칭은 형제와 자매입니다. 교회에서 역할이 목사이고, 역할이 장로일 뿐이지 그것이 교회내의 계급은 아닙니다. 오히려 직분자들은 더 많이 섬겨야 합니다.
더 많이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대할 때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 만나야 합니다. 물론 제가 이 자리에서 말씀을 전할 때는 목사로서 여러분을 만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에게 주어진 역할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옆에 있는 분들이 여러분의 형제이며 자매이듯이 저도 여러분의 형제일 뿐입니다. 만약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서로에게 형제자매로 만나기를 거부하고 집사로 권사로만 만나려고 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급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원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장애인을 만날 때에도 형제자매로 만나야 합니다. 내가 비장애인으로서 조금이라도 우월한 위치에서 그들을 만나려 한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거스리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을 보면 바울과 아름다운 관계가 있었던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바브로 디도입니다.
바울은 그를 소개할 때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빌2:25)고 했습니다. 위대한 대 사도 바울이 한낮 교회의 헌금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에바브로 디도를 형제로,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로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웃을 어떻게 만나고 계십니까? 교회내에서 여러분의 옆에 앉아 있는 분을 어떻게 만나고 계십니까? 우리 한번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불러보십시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세 천사를 극진히 대접하여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건이 있습니다. 그가 정오쯤 졸다가 눈을 떠 보니 맞은 편에 알지 못하는 나그네 세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을 자기 집으로 모셔 놓고 아브라함은 떡, 버터, 우유, 고기 등 자기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극진하게 대접하고 발도 씻어 줍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사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8:1-10을 보아도 예수님은 비록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극진히 사랑하시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안아 주시면서 영접하신 일이 있고, 창녀나 세리나 죄인을 구별하지 않고 극진하게 대접해 주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세상은 사람을 둥급으로 나누어 물질로 취급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월급이 적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이 낮은 것이거나 월급이 많다고 해서 그 사람이 결코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또 지위가 높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남을 호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지위가 낮다고 해서 그의 인격이 무시당해도 좋은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마태복음 18:10에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장과, 가정에서 업신여김을 받지도 말고 또 업신여기지도 말아야겠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이 말씀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 사랑받기 위해서 이기적인 생각으로 다른 사람에게 먼저 대접하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말씀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가 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이기적인 동기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처럼 이해되기 쉬우나 원 뜻은 그렇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주기도문의 원 뜻이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함이 마땅하다"라는 뜻인 것처럼 오늘 본문 12절의 뜻도 "단순히 내가 대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내가 남을 대접하면 영적인 법칙에 의해 다른 사람도 나를 대접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곧 이 메시지의 핵심은, 이웃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 대접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초점이지 내가 대접을 받기위해서 남을 대접한다고 하는 그런 동기의 메시지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모든 계명은 사랑하라는 이 한마디에 다 포함되어 있으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곧 율법서와 선지서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들은 이웃에 대해 일반적으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섬김의 대상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나를 섬길 대상으로 보십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은 일찌기 마태복음 5:46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모습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마 5:46-47)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즉 참된 이웃이란 레위인이나 제사장처럼 사람을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조건 없이 행한 것같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미움의 대상이나 무관심의 대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을 열고 조건 없이 이웃을 사랑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2. 나 자신을 빚진 자로 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언제나 자신이 빚진 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 사고를 합니다. 즉 나는 빚진 자가 아니라 늘 빚받을 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구한테 뭐 맡겨 놓은 것도 아닌데 나는 언제나 마땅히 대접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요즘 자신을 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패 때문에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언제나 자신은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뜻과 다르면 상대방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막 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23 이하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를 들어 주셨습니다. 32절에 예수님께서 그 악한 종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18:32-33).
즉 예수님은 우리가 백 데나리온의 빚을 받을 수 있는 채권자의 입장이 아니라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입장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채권자는 언제나 당당하고 교만하고 지배자의 입장을 취합니다. 반대로 채무자는 고개도 들 수 없는 죄인이요 기가 꺾여 사는 비참한 처지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채무자입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겸손이 있고, 감사가 있고, 눈물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에게 악한 채권자의 모습으로 돌변하여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괴롭힌다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죄인의 두 얼굴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겸손한 채무자,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채무자임을 알고 겸손하게 이웃을 섬기고 대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앞에 빚진 자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대접하고 섬김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땅에 이루어 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가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9 이하에 보면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하였으며,
베드로전서 4:7 이하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너희는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서로 대접하기를 힘쓰라', "원망없이 대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행복한 삶은 대접을 받는 삶이 아니라 대접을 하는 삶입니다. 정말 기쁠 때는 무엇을 받을 때가 아니라 무엇을 줄 때입니다. 소유는 우리에게 순간적인 기쁨을 가져다 줄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자기의 것을 나누어 줄 때만이 천국의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던져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쁨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접이란 화려한 대접보다도 작은 것이라도 극진한 정성이 있는 대접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의 대접이 그것입니다.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진 대접이 아니라 사심 없는 사랑과 헌신에서 비롯된 대접 말입니다. 그러기에 가장 나쁜 대접은 원망과 짜증을 동반한 대접이요 억지로 하거나 목적을 가진 대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가 다른 사람을 극진히 대접하면 너도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섬김과 사랑이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요 적극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먼저 사랑을 받고 대접을 받으면 나도 사랑하고 대접하겠다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수동적인 뜻입니다.
성경은 그 반대로 "네가 먼저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대접하라 그리하면 다른 사람도 너를 사랑하고 대접하게 될 것이다"라는 논리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능동적인 행동, 적극적인 행동을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 해주기 때문도 아니요, 다른 사람의 대접을 받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내 안에 끓어오르는 사랑의 정열과 헌신 때문에 조건 없이 내가 먼저 사랑의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과 섬김을 몸으로 실천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우리 이웃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민주화된 후에 너무 흑백논리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투고 싸우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한번 잘못을 보이면 벌떼처럼 달려 들어 정죄하고 비판하고 돌을 던져 죽이는 이기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나의 문제는 뒤로 감추고 다른 사람만 정죄하는 이 사회가 점점 무섭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언젠가 나도 하나님 앞에 서서 결산할 날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며칠 전 아내와 두 딸을 목졸라 죽이고 자살하려던 남편이 붙잡혀 신문에 나왔습니다. 무섭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지옥가서 이 모든 고통을 다 받겠다고 유서를 써놓았습니다.
한번쯤 아내의 입장에서, 한 번쯤 딸의 입장에서 생각했다면, 그런 무모하고 잔인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먼저 이해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오늘 문제를 보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입장에서, 자식이 부모의 입장에서, 부모가 자식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 사회는 달라질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왜 그랬을까? 왜 저런 말을 할까 하고 자기입장에서 벗어나 남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강조하셨던 사랑의 관점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관점에서 이웃을 보는 눈이 바로 주님의 관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네가 먼저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잘못이 없으니까 네가 고치라는 것입니다. 노사문제, 학원문제, 정치문제 등 모든 분야에서 내가 너를 굴복시키고야 말겠다, 그것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네가 먼저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먼저 대접해 준다거나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존경과 사랑을 먼저 보낸다면 노사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또 정부는 국민의 입장에서 섬기고, 국민은 정부를 신뢰하고 믿고 함께 힘을 합한다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대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과 정반대 되는 개념이 인간의 이기심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기심은 자아 만족과 자기 방어와 자기 관심으로 모든 문제를 끌고 가게 됩니다. 한편에서는 나는 더 가질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는 네가 많이 가지면 자연히 나는 적게 가지게 된다고 하는 식의 싸움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요즘 노사문제는 정의라는 이름을 들고 이기심을 피차 만족시키려는 이기심에 대한 투쟁인 것입니다. 결국 자기 만족을 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적용해서 먼저 이해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서 생각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정죄하는 사회, 남을 비판하는데 모두가 혈안이 되서 그것이 마치 정의인 것처럼 큰 소리치고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안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가 서로를 감싸주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 우리의 사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네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우리 이웃을 대접의 대상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2)나 자신을 빚진 자로 보라는 것입니다. 3)우리가 먼저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4)우리 이웃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대접하고 먼저 사랑하고 먼저 섬기는 아름다운 공동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성도들과 교회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